'그림자 독립운동가' 연병환, 이제 그림자 뗄 수 있게 됐다

충대 박걸순 교수
국내 행적…중국서 영문이름 바뀐 이유밝혀내
묘지 못찾아 그동안 국립현충원에 위패만 봉안

2014.12.17 18:46:35

생전의 연병환 모습.

그동안 행적이 잘 확인이 안 돼 '그림자 독립운동가'라고 불렸던 증평 도안면 출신의 연병환(延秉煥·1878-1926) 선생이 수식어 그림자를 뗄 수 있게 됐다.

연병환은 3대에 걸쳐 5명이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가문의 중심적인 인물로, 그의 아우 연병호, 딸 연미당, 사위 엄항섭, 외손녀 엄기선 등도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7일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에 따르면 연병환은 지난달 유골 형태로 88년만에 국내로 돌아와 국립 대전현충원에 영면하고 있다.

그러나 1919년 용정 만세시위운동을 후원하는 등 만주의 행적은 어느 정도 확인됐으나 중국으로 가기 전의 국내 행적은 잘 확인되지 않았다. 특히 중국의 묘지가 확인되지 않으면서 그 동안은 국립대전현충원에는 위패만이 봉안돼 있었다.

박 교수는 이에 대해 "광무양안을 확인한 결과, 연병환은 당시 청안지역에 1만2천2백68척(약 4천13평)의 전답을 소유한 중농이었으나 이를 처분하지 않고 중국으로 건너갔다"며 "때문에 국내에 남은 처자를 걱정하지 않고 만주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양안은 대한제국기 고종 정부가 정확한 부세(세금 징수)를 위해 근대적 측량을 바탕으로 작성한 토지대장을 일컫고 있다. 그는 또 이번에 연병환의 유해가 88년만에 귀환해야만 했던 경위도 밝혀냈다.

생전의 연병환과 영문이름이 바뀌어 혼란을 줬던 상해 송경령능원의 연병환묘 표지석.

연병환은 비교적 젊은 나이인 1926년 49살 나이로 사망해 중국 상해 정안사의 영국인 묘지 제 303호에 안장됐다. 이때의 영문이름 표기는 'YUN PIUNG HAN'이었다.

그후 연병환의 유해는 문화혁명 때 파헤쳐져 상해 송경령능원으로 이장됐다. 그러나 이때 영문이름 표기가 어떤 이유에서 인지 'YAN PUNG HAN'으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이 묘역을 답사하고도 연병환 묘는 확인하지 못했고, 따라서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후인 지난 2011년부터 국립대전현충원에 위패만 봉안됐다.

그러던 것을 보훈처와 후손들이 묘지명의 영문이름이 변한 것을 올 10월에 확인, 1달 후 유골함을 국내로 옮길 수 있었다. 그는 상해 송경령능원에서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朴殷植) 바로 옆에 영면하고 있었다.

연병환에 얽힌 이같은 내용은 19일 증평군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증평출신 곡산연씨의 독립운동조명' 학술회의에 발표될 예정이다.

정찬교 증평군 학예사는 "관내에 항일역사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이번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됐다"고 밝혔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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