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수필과 함께하는 겨울연가 - 사랑은 詩보다 아름다웠다

2015.01.29 16:23:22

밤새 드날려 왔나보다. 이미 대문을 들어서 현관 앞에 소복이 쌓여있다.

하얀 눈 덮인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설렘이고 그리움의 충동이다.

그를 만나러 집을 나섰다. 아무도 지나간 흔적 없는 순백의 길에 내 첫발자국을 내며 그에게 걸어가고 싶은 건 순전히 눈 때문이다.

굽이굽이 백곡호를 끼고 돌아 사정마을 쪽으로 접어들었다. 사정교 못미처 왼편으로 아늑한 오솔길이 열린다.

조붓한 산길로 들어섰다. 눈꽃이 하르르 머리위로 쏟아지며 반겨준다.

제 그림자 찍듯 바람결에 뭉싯 쏟아진 눈 자국만 엷게 깔렸을 뿐, 다행이 순백의 길 그대로다.
꼭꼭 발자국을 찍어 길 위에 길을 내려니 쪼르르 내 유년이 앞장을 선다.

하얀 솔꽃 사이로 얼굴을 내민 하늘빛도 덩달아 신선하다. 지난 가을, 낙엽 든 솔잎융단 길에서 은은히 풍겨오던 솔향을 가슴 설레며 밟던 기억이 흔흔하다.

혼자 걸어도, 마음을 나눌 누군가와 함께 걸어도 좋을 이 숲을 오늘은 문우와 함께 한다.

꼿꼿한 옛 선비를 찾아가는 정취가 은근하다. 한 이십 여분 걸었을까.

길 끝에 그가 서 있다. 식파정(息波亭)이다. 탁 트인 호수가 훤히 내다뵈는 물가에 등대인 듯 홀로 서 있다.

새물내 감도는 옥양목 도포를 입은 선비의 모습이다. 정갈해 뵌다.

흰 눈으로 맑힌 호수에 세수하고 바람결로 참빗질한 매무새, 나를 기다린 건 아닐까. 피식 열없는 생각을 하며 그 곁에 섰다.

식파정, 물결이 쉬어가는 곳이다. 조선시대 명리에 담백한 이득곤이 세운정자다.

사람의 마음은 본시 물결과 같아 바람이 일면 욕랑(慾浪)이 이니, 그 마음의 욕랑을 잠재우려 정자를 세웠다 한다.

삿된 마음을 뉘이고 쉬어가는 물결처럼 심성을 다독이며 유유하게 살아가고픈 마음이었으리.

넓게 폭을 펼친 호수를 바라보니 맑게 내리는 햇살에 이는 듯 마는 듯 조용히 잔결이 빛난다.

문득 그 해 겨울, 충무 남망산공원에 올라 바라보던 통영앞바다의 푸른 물결이 30여년 세월을 거슬러 여릿여릿 올라오고 있다.

'내가 청마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그가 가버린 오늘에야 알았다.'

1984년 11월 7일. '정운의 유치환에 대한 사랑' 이 17년 만에 책으로 나왔다는 신문기사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제2의 황진이라 불릴 만큼 지조 높고 절세가인인 이영도 시조시인과 청마 유치환의 세기적인 사랑이야기이다.

20년간 5,000여 통의 편지로써 지극한 사랑을 바친 유치환의 플라토닉러브는 당시 우리들의 로망이었다.

청마는 이미 아내가 있는 몸이었고, 정운 이영도는 사별하여 딸 하나를 키우는 여교사였다.

서정시인 유치환이 간지 17년, 그의 영원한 정인 이영도가 간지도 8년이 지나, 부산의 한 여류수필가에 의해 '사랑은 시보다 아름다웠다'라는 이영도 평전이 출간되면서 한국문단은 또 한 번 들썩였다.

당시 문학에 문외한이었던 내가 84년도 빛바랜 신문기사를 여태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전국적인 회오리바람이었지 싶다.

그해 겨울 나는 신문 기사 하나로 인해 친구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그때도 서울은 지금처럼 소담하게 눈이 내렸었고, 눈 때문에 무작정 통영(당시는 충무)으로 향할 용기기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사랑을 더듬어 남망산공원에 있는 유치환 시비(詩碑)를 찾아 나섰던 일을 떠 올리면 미소가 스민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은 분명 불륜이었던 것을. 그래도 사랑은 詩보다 아름다웠다.

30년이 지났어도 남망산공원에 우뚝 선 유치환의 시비 '깃발'과 통영앞바다의 시리도록 맑고 푸른 바다물빛이 어제인 듯 가슴 한켠 또렷이 남아 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유치환의 詩 '깃발'의 일부이다

오늘 백곡호반에서 겨울바다, 예의 그 물빛과 내 아름다운 청춘이 다시 만나 바람에 나부낀다.

식파정, 정갈한 선비의 곁에서 세속의 이물을 말끔히 헹구어 젊은 날의 순수를 지켜가고 싶은 게다.

◇김윤희 작가

-200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회원, 충북수필문학회 편집위원, 진천문협 회원

-생거진천신문 편집위원

-진천군의원

-저서 : 수필집 '순간이 둥지를 틀다'

-대표에세이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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