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같이 TV 보자

2015.02.16 13:55:31

윤기윤

아내의 외할머님은 올해 아흔 셋 되시는데 주로 처가에 기거하신다.

8남매의 맏딸인 장모님이 주로 모시는 셈이다.

아들이 여섯이나 되는데도 딸의 집에 계시는 걸 보면 아들만 둘인 나의 불행한(?) 처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외할머님은 귀가 무척 어두우셔서 그렇지 총기도 좋으시고 연세에 비해 비교적 건강하신 편이다.

얼마 전 백내장 수술을 하셔서 처가에서 요양하고 계신 외할머님을 뵈러 갔다.

들어가니 수술한 눈은 안대를 하시고 한쪽 눈도 감으신 채로 침대에 누워 계셨다. 그런데 그렇게 눈을 감고 누운 채로 입에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때마침 텔레비전에 나오는 드라마를 듣고 계신 것 같았다. 거인의 목청처럼 떠드는 텔레비전 볼륨을 줄이고 소리소리 고함을 지르다시피 문안 인사를 드렸다.

무척 반가워하시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셨지만, 워낙 청력이 약하셔서 대화를 오랫동안 계속 이어가기는 힘들었다.

그러니 평소에 식구들과 편안한 대화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방을 나오며 우리나라에서는 텔레비전만한 효자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적으로 많은 노인들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때문이다.

일 년에 몇 번 얼굴 보기 어려운 자식들보다 오히려 텔레비전이 노인들과 더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어느 자식이 그토록 재미있는 말벗이 되어드릴 수 있을 것인가.

그동안 텔레비전은 바보상자라는 비아냥을 받아왔다. 그만큼 역기능이 많았다.

하지만 순기능 또한 많은 편이다. 자주 보지 않는 먼 친척이나 다소 서먹한 이웃과 우연히 집안 거실에 앉아 있게 될 상황에 TV는 자연스러운 구세주가 된다.

프로그램을 통해 자연스레 같이 이야기를 공유하며 어색한 순간을 모면시켜 주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의 50대 이상 세대들에게 TV는 추억의 상자이기도 하다.

형편이 어려웠던 시골에서의 어린 시절, 인기 드라마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마을의 TV가 있는 집으로 모여들곤 했다.

우리 집이 결코 부자여서가 아니라 단지 몇 개월 빨리 산 탓에 친구들 중에서 우리 집 TV를 관람할 수 있는 관객들을 선별하여 택하는 오만을 부려보기도 했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야외 스크린처럼 TV 앞은 동네 사람들의 온갖 품평을 들을 수 있는 무대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이국 땅에서 외치던 4전5기의 홍수환 선수나 독일 분데스리가 차범근의 활약상, 올림픽의 명장면 등을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었으니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의 TV는 전 국민의 효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등학교 때의 어느 여름날 심심하고도 따가운 날씨의 하교 길, 전파상 앞에 몰려 있던 사람들 틈으로 지켜보았던 프로레슬링 선수 김일의 박치기는 얼마나 시원했던가.

아이들이 어릴 때는 TV를 보고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떼어놓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요즘 대부분의 시간에 컴퓨터나 스마트 폰이라는 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볼 때면, 차라리 서로 대화하며 교감을 나눌 수 있는 텔레비전을 같이 보자고 권하는 편이다.

스물 안팎의 아들놈들과 깔깔거리며 대화할 일이 전무한 요즘, TV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함께 보며 아무 계산 없이 서로 마음껏 웃어대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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