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휘둘려 자신이 한없이 낡아지고 너덜거리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태백은 흔들리며 술을 한잔 했다던가.
우리를 흔들리게 하는 야속한 것들을 묶어 운전석에 파묻고 달려보면 어떨까.
그리움 한 모금 깊이 물고 페달을 밟으면서 입 안 가득 신묘함을 느껴보는 거다. 그 말이 너무 추상적이면 다시 말해, 우리를 흔드는 것마저 이 또한 지나가리니, 향기를 느끼는 그리움이라 바꾸어 생각해보는 거다.
그래도 강물은 흐른다. 내 마음의 우리에 양떼가 달아나 울적하고, 귓불을 맞잡고 맹세한 사람이 돌아서버린 서러움….
물결 되지 못한 두 가닥 눈물이 도랑물로 스며든다 해도 강은 흐른다. 청류! 너무도 파랗게 달빛 따라 물빛 따라 덧없는 세월 따라, 그렇게 정처 없이 흘러간다. 삶의 의미와 사랑의 가치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이 버거워 격정의 시간을 나 홀로 견딜지라도 강은 여전히 흐른다.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에 자리한 화제(畵題) '그래도 강물은 흐른다-월류봉' 실경을 찾아 나섰다.
월류봉 전경.
월류봉은 동국여지승람에서 비롯되었다는 영동의 한천 8경중 하나다.
봉우리가 높고 수려하여 달도 떠서 서쪽으로 기울다 봉우리에 머무르며 쉬어 간다하여 월류봉이라 한다.
깎아 세운 듯 높은 절벽위에 정자가 날아갈 듯 앉아 있다. 그 아래로 층암절벽을 휘감아 돌면서 청류가 흐르는 풍경은 그자체가 산수화다.
월류봉이 거기 있으매 내가 왔노라. 한겨울 월류봉에게 배낭 끝에 얹혀 따라온 한숨 한 자락 내려놓으려 했더니 산은 나그네에게 침묵하고, 바람소리들이 어울려 음계를 이룬다.
물이랑 만들며 흘러가는 강물에게 묻는다.
외로운 내 마음 쉴 자리 어디서 찾으리. 강물이 말한다. 내가 흐름은 의지하렴이 아니요, 낮은 곳을 채우고 남아 흘러감이더라. 낮은 곳은 외면하고 높은 곳만 보며 보채는 건 사람이더라.
화제(畵題) '그래도 강물은 흐른다-월류봉' 작품은 지본수묵담채기법의 작품이다.
한국화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진채, 담채 중 권갑칠작가는 담채기법을 썼다.
종이로는 지본, 견본, 저본, 마본, 면본 등 다양한 종류 중 지본을 사용했다.
수묵담채란 먹으로 형태를 그린 후 엷게 채색하여 표현하는 기법이다.
그림 속 풍경에서 수묵의 간결함과 은은한 색채의 기운을 느낀다. 산을 안고 휘돌아 흐르는 강물은 실경인가 그림인가 분간이 안갈 정도로 무아지경으로 빠뜨린다.
진채기법처럼 색을 전면에 두텁게 사용하지 않아 여백을 인정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여백을 인정한다는 권작가의 말에 머문다.
계산기 두드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삶의 질을 돈으로 계산하고, 내 것은 피처럼 아끼면서 타인에겐 빽빽하다.
사람하나 들여놓을 공간이 없다고 떨고 있는 이를 문밖에 세워두고 도리질한다.
강은 깊은 바닥도 낮은 둔덕도 덮고 흐르건만, 사람들은 남의 허물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잠시 어렵다고 낙심하지 말 것은, 사람의 일도 강물과 같아 언제 낮은 바닥이 되고, 깊은 바닥이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며, 깊은 물이 낮은 물이 되고, 낮은 물이 다시 깊은 물이 될지 알 수 없음이라.
흘러가다보면 물고기가 노니는 깊은 물이 될 수 있는 좋은 시절이 오게 돼있다.
생각이 언어가 되고, 언어가 모여 글이 되고 시(詩)가되듯이, 사람마음도 모이면 좋겠다.
한 방울의 물로 내려와 돌을 만나 싸우기도 하며 강을 이루듯이, 사람도 둘이 만나 가정을 이루고 부락을 이루며 흘러간다.
외로운 날이면 자신이 만든 울타리를 걷어 내고 담장 밖으로 나가보자. 탈이 많은 세상이어도, 그래도 아름답다.
세상이 야박하게 굴어도, 그래도 강물은 흐른다.
/ 임미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