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의병 연합부대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천남전투지(충북 제천시 천남동)
박여성은 1907년 8월 평양진위대가 해산당한 후 청풍으로 내려왔다. 그는 조동교·황대성·방성필·박덕준 등과 함께 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제천에는 서울에서 파견된 일본군의 전면 공세를 피하여 의병들이 몰려들었다. 을미의병 이래 의병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었기에 후기의병에서도 전기의병의 전통을 잇기 위해 40여 개의 의진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이강년 의병장의 활동을 기록한 ··창의사실기(倡義事實記)·· 정미 7월 5일자에는 "전투 없이 제천은 다시 의병들의 천지가 되었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제천과 근접하고 있던 청풍도 마찬가지였다.
1907년 8월 15일 저녁 무렵 천남 뒷산, 서울고개(제천 동현동의 백배미 남쪽에 있는 고개), 조을치(제천 두학동에서 영월 남면 토교리 쪽으로 넘어가는 조리재)에 매복하였던 연합 의병부대와, 청풍 가는 길 쪽 마을에 숙영하던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박여성은 35명의 의병을 이끌고 이강년·민긍호의진 등과 연합하여 일군과 4시간이 넘는 접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날 밤 의병 부대가 다시 일군을 포위하자 일군은 견디다 못해 의병 포위망을 뚫고 충주로 퇴각하였다. 당시 제천 천남전투에서 의병부대는 일본군 5명을 사살하고, 13명을 부상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해산 군인과 포군 출신의 의병들이 연합하여 올린 최초의 승전이었다. 일제의 의병 탄압 기록인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에는 "박여성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당시 박여성의 뛰어난 활동을 설명하기에 충분한 기록이다.
1907년 일본군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제천(맥캔지 사진)
일제는 천남전투 이후 "주민들이 의병을 비호하는 경향이 있어 장래의 화근을 제거한다."는 이유로 제천 시가를 완전히 소각시켜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이른바 '황국정신'으로 무장된 제국주의 침략군의 야만적 성격을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그 부근을 취재했던 영국신문 ·데일리 메일(Daily Mail)·지의 동양 특파원 맥캔지(F.A.Mckenzie)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다.
'내가 제천에 도착한 것은 볕이 따가운 초가을이었다. 마을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서, 펄럭이는 일장기는 눈부신 햇빛으로 선명했고 보초의 총검도 햇빛에 반짝였다. 나는 말에서 내려 잿더미 위를 걸어 다녔다. 그처럼 철저하게 파괴된 것을 본 일이 없었다. 한 달 전만해도 분주하고 번창했던 도시가 지금은 새까만 먼지와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벽 하나 기둥 하나 장독 하나도 온전히 남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 일제의 총탄에 스러지다.
13도창의군 서울진격전 모형(독립기념관)
1907년 11월, 이인영·허위 등 의병 지도자들은 전국 각지 의병장들에게 의병부대를 통합해 연합 의병부대와 통합 사령부를 창설한 다음 서울로 진격하자는 격문을 발송했다. 이 격문에 호응하여 전국 각지로부터 1만 여명의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였다. 양주에 집결한 전국 의병장들은 12월에 회의를 열어 통합 의병부대로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설치하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허위를 군사장에 추대한 뒤 편제를 갖추었다. 1908년 1월 13도창의군은 1만여 병력으로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구식 무기로 무장한 의병은 기관총 등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서울 진공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의병이 정규 일본군과 대적하기에는 '당랑거철(螳螂拒轍: 사마귀가 수레바퀴에 저항한다는 의미)'과 같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의병항쟁을 국제법상 전쟁의 단계로 발전시켰고, 한민족의 항일투쟁을 국내외에 알렸다는데 큰 의의가 있었다.
1908년에 들어서면서 일본군은 의병을 진압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의병이 한국을 병탄하는 최후의 걸림돌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수비대를 대폭 증원하고 각지에 분대를 설치하여 끊임없이 수색활동을 벌였으며 6월부터는 헌병 분대 아래에 분견소를 두고 한국인으로 헌병 보조원을 두어 경찰과 합동작전을 벌였다. 일제는 제천 일원에도 여러 군데의 헌병 분견소를 설치하여 천안 헌병 분대에서 관할하도록 했고, 인근의 주천이나 문막·원주 등지에도 분견소를 설치하여 의병들을 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진회 회원들이 헌병 보조원이 되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고, 해산 군인을 회유하기 위하여 취업을 알선하는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박여성의 활약을 보도한 독립신문 기사(1920년 5월 11일)
일제의 의병 탄압의 결과 1908년 2월에 민긍호가 전사하고, 그해 여름에 이강년이 체포되며 이 일대의 의병은 급속히 쇠퇴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박여성은 원주진위대 참위 출신 양재원·손재규 등과 합세하여 인제군청과 주재소·우편소를 습격하고 일진회원을 응징하는 등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여 나갔다. 그러나 1908년 10월 13일 충주 달천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던 중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뒤바보가 '독립신문'에 연재한 「의병전(義兵傳)」에는 박여성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일본군이 그의 이름만 들어도 놀라고 낙담하였다"고 하여 후기의병사에서 그의 뛰어난 활약을 잘 알려준다. 박여성은 해산군인 출신이 후기의병과 연결된다는 한말의병사의 역사적 사실을 실증하는 가교적 인물이다.
박여성 묘소(충북 제천시 봉양면 공전리 장담마을)
그의 묘소는 자양영당이 있는 제천시 봉양면 공전리 장담마을 충주박씨 선산에 안장되었다. 제단에는 그의 이명인 성열(成烈)로 되어 있으며, 부인 파평윤씨와 합장되어 있고 묘소 앞에는 '의사박여성선생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강은구(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