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봄의 김성원 묘(청주시 화계동) 이장작업 모습이다.
그는 옥천 출신의 의병장인 스승 조헌을 수행, 1592년 충남 금산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함께 순절하였다.
지금까지 조헌과 기허당 영규대사 그리고 칠백의총만 많이 알려져 있을 뿐 김성원이라는 인물은 거의 주목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인물 평가와 당시 활약상은 ≪선조수정실록≫, ≪국조인물고≫, ≪연려실기술≫, ≪증보문헌비고≫, ≪송자대전≫ 등 조선시대 문헌에 다수 등장하고 있다. 다음은 관찬 ≪선조수정실록≫의 내용이다.
'함께 전사한 자로 드러난 자는 다음과 같다. (…) 사인(士人) 박사진(朴士振)·김선복(金善復)·복응길(卜應吉)·신경일(申慶一)·서응시(徐應時)·윤여익(尹汝翼)·김성원(金聲遠)·박혼(朴渾)·조경남(趙敬男)·고명원(高明遠)·강몽조(姜夢祖)는 모두 문인(門人)으로 종군하다가 전사하였다. 일이 알려지자 조헌에게 이조 참판이 추증되고 그의 아들 조완도(趙完堵)를 녹용(錄用)하였으며 그 집에 월름을 지급하였다.-<선조수정실록 25년 8월 1일자>
선조수종실록 25년 8월 1일자에 '金聲遠' 이름과 '조헌을 이조참판에 녹용한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연려실기술≫도 선조조 고사본말에도 '선비 박사진(朴士振)ㆍ김선복(金善復)ㆍ복응길(卜應吉)ㆍ신경일(辛慶一)ㆍ서응시(徐應時)ㆍ윤여익(尹汝翼)ㆍ김성원(金聲遠)ㆍ박혼(朴渾)ㆍ조경남(趙慶男)ㆍ고명원(高明遠)ㆍ강몽조(姜夢組)ㆍ김충남(金忠男)이 모두 헌의 문하에 출입하더니 함께 전사하였다.'라고 기술했다.
인용문에 등장한 이름이 모두 조헌의 제자(문인)인 것을 감안하면, 이들은 청주~보은~옥천 등의 지역에 거주했던 선비들로 추정되고 있다.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그의 문집인 ≪송자대전≫에서 '의사(義士) 김성원전(金聲遠傳)'이라고 해서 아예 별도 내용으로 다뤘다.
≪송자대전≫은 '김성원은 자가 경구(景久)인데 경주인으로 고 기묘명현 김정(金淨)의 3세손이다'(송자대전 제 214권)라고 기술, 그가 명문가의 직손임을 밝혔다.
나아가 '성원(聲遠)은 젊어서부터 독실한 행검(行檢)이 있어 중봉 선생 조헌이 대단히 사랑하여 학문을 가르쳤다'고 적었다.
다만 ≪송자대전≫은 '성원이 죽을 때에 나이 28세였는데, 끝내 성원의 시체는 찾지 못하고 의총 가운데 함께 묻혔다'라고 지금의 문중과는 다른 내용을 기록했다.
이에 대해 직손 김병철(청주시 금천동) 씨는 "우암 선생이 선조(김성원)의 죽음을 미화하기 위해 그렇게 썼는지는 모르지만 묘는 이장되기 전까지 흥덕구 화계동에 존재했고, 최근까지 문중에서 대대로 제사를 지내왔다"고 밝혔다.
이와함께 "문중에서 더이상 묘를 관리한 여력이 없어 선조의 유해를 화장해 목련공원 납골당에 안치했다"며 "역사문헌에 여러번 나오는 호국 영령이 왜 이런 대우를 받는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 조혁연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