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시간을 쇄신하는데

2017.04.09 16:05:14

박미선

용암중학교 교사

꽃의 시절이 돌아왔다. 해사한 분홍빛 웃음을 한껏 베어물고 있는 영산홍들이 도처에 가득하다.

'flower'

남자는 매일 아침 꽃다발을 문 앞에 놓은 후 이 말을 외치며 골목길로 사라져 간다. 그가 단순한 꽃배달원이었는지 전지현을 짝사랑하던 정우성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배우 '전지현'이란 소재를 소비하는 것만이 목표인 듯한 영화 '데이지'에서 유일하게 인상적인 것이 있었다면, 그 골목길에 청량한 여운을 감돌게 하던 'flower'란 발음이었다. 사랑의 탄성으로 울리던 'flower'! 이 애잔하고 맑은 식물성의 울림은 연모의 절실함을 참으로 드높게 전하는 것이었다. 언어란 모국어와 외국어를 초월하여 어감상 꼭 그 자리에 맞춤으로 쓰이는 어휘가 있음을 알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인간은 동물이지만 본질적으로 자연의 식물에 더 친연성을 가지는 것 같다. 특히 나이가 든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예외는 있겠지만 아이들일수록 작은 벌레나 곤충을 들여다보고, 어른들일수록 야생화나 나무에 관심을 가진다.

내가 나무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도 점차 나이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시외지역으로 통근하면서 겨울철 나목들을 많이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가지들의 생김새가 그렇게도 다양하고 유연하며 완벽한 구조를 갖고 있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특히 느티나무의 벗은 몸은 가지만으로도 지극히 풍만하고 섬세하며 아름다웠다. 화가 박수근이 왜 그리 겨울 나목을 즐겨 그렸는지 알 것 같았다.

봄의 나무들은 또 어떠한가. 매년 한 번씩 치러지는 이 거대한 우주적 인화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사람들이 그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무심히 제 갈 길만 간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가지를 삼킨 애벌레 같은 잎들이 토해내는 맑은 그늘이 여기저기 대지에 깔리기 시작하는 놀라움. 그 신생의 영토에 들어앉는 기쁨. 시간에 푸른 살점이 붙어가는 모습은 절로 걸음을 멈추고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사시사철 밋밋한 침엽수보다는 활엽수가 좋다. 계절에 따라 다양한 얼굴과 몸피로 변화하며 삶의 풍상을 겪어내는 모습은 어쩐지 나의 삶을 위무해주는 듯하다. 어느 시인이 '조물주가 지은 것 중 가장 완벽한 것이 나무'라고 했듯이, 나무야말로 가장 완벽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이제 이름 모를 꽃이나 이름 모를 나무 같은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사랑하게 되니 이름을 알고 싶고 그 이름을 불러 주고 싶다. 얼마 전에 나무도감을 하나 샀는데, 사실 나무의 인상만 가지고 책만 보아서는 그 이름을 알기 어려웠다. 직접 책을 들고 나가 잎새의 모양을 대조해 보아야 알 수 있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는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여 있지만 학교 바로 뒤쪽에 공원과 가로수가 있어 좋다. 후관 교실에서 바라보면 나무들의 모양이 아주 보기 좋게 조망된다. 아침 이내에 둘러싸여 있거나 화사한 햇빛을 받는 나무들을 바라보면, 끌리는 사람에게 절로 눈길이 가듯이 수업을 하다가도 자꾸 곁눈질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한 아이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나는 변명처럼 아이들에게 고백하고야 만다.

"얘들아. 고개 좀 돌려봐, 저 나무들 정말 대단하지 않니·"

열여섯, 그야말로 이팔청춘의 싱그러운 아이들은 심드렁한 얼굴로 밖을 내다본다. 그 중의 한 녀석이 히히 웃으며 말한다.

"선생님은 문학소녀 같아요."

순간, 근거 없는 추문인 듯 내 나이가 아프게 각인되어 온다. 열 살도 되기 전부터 학교에 남아 문예반의 낡은 책상에 엎드려 왔던 세월이 얼마인데 아직도 '문학소녀'라니. 작가 김훈의 표현대로 '자연은 인간을 위로하고 시간을 쇄신'시켜 왔던 것인데, 시절에 따라 나 자신을 '쇄신'시켜 오지 못하고, 누구도 위로치 못하며, 하릴없이 낡아온 내 사유의 흔적은 이렇듯 가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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