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수필과 함께하는 봄의향연 - 바다에게 주는 시

함기석의 생각하는 시30

2017.04.27 18:19:51

신석정은 흔히 동양적 전원시인으로 불린다. 전원에 귀의하는 시세계를 지속적으로 추구했고 시의 소재들을 자연에서 가져와 목가적 사색과 성찰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목가풍의 낭만적 세계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다. 산, 꽃, 달, 나무, 강물, 호수 등 전원의 소재들을 많이 사용한 건 사실이지만 그것들을 통해 낭만적 관조의 세계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그의 여러 시편에는 절망적인 현실을 직시하는 시선, 혼탁한 사회를 고발하는 참여의식이 나타난다. 이는 그의 이상향(理想鄕) 추구가 시대의 어둠과 현실의 고통에서 발원한 것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신석정 초기 시의 핵심 키워드인 '임'과 '어머니'를 축소해석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임'은 사랑하는 연인이라는 인간 차원을 넘어서서 시인 자신이 숭배하는 자연이나 사회, 나아가 어떤 절대적 존재일 수 있다. 은행잎, 햇볕, 호수, 해, 달 등의 소재들은 자연과 시적 자아를 연결하는 매개물 역할을 하고, '어머니' 또한 이상세계로의 안내자내지 매개자 역할을 한다. 시적 자아는 계속 어머니를 부르며 전원의 이상향으로 가게 해달라고 열망한다. 신적정의 시에 신비하고 낭만적인 서정,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분리가 자주 나타나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바다에게 주는 시'는 세 번째 시집 '빙하(永河)'에 수록된 시다. 관찰대상을 이전의 시들과는 다소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다. 동심과 서정이 물씬 느껴지는 작품으로 시인의 천진하고 장난스런 동심의 상상력이 잘 드러나 있다. 1연에서는 바다와 바위의 관계가 재미있고 독특하게 설정된다. 바다는 파도소리, 물새소리, 뱃소리 등을 통해 날이면 날마다 바위에게 귀가 따가울 정도로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로, 바위는 바다의 그런 수다에 지쳐서 베토벤처럼 귀가 먹은 존재로 그려진다. 마치 오래된 부부나 토라진 연인처럼 정겨우면서도 우스꽝스런 사물들의 관계다.

바다에게 주는 시 - 신석정(辛夕汀, 1907~1974)

바다여

날이 날마다 속삭이는

너의 수다스런 이야기에 지쳐

해안선의 바위는

'베―토벤'처럼 귀가 먹었다.

지구도 나같이 네가 성가시면

참다못해

너를 벌써 엎질렀을 게다.

저 언덕에서

동백꽃은 네가 하 우스워

파란 이파리 속에 숨어서

너를 웃고 있지 않니·

동백꽃이

자꾸만 웃어 대는

고 빨간 입술이

예뻐 죽겠다.

2연에서는 지구가 등장한다. 지구도 수다스런 바다가 성가시고 싫었으면 벌써 엎질렀을 거라고 시인은 말한다. 이 역설적인 말 이면에는 지구 또한 언제나 바다를 품어 안는 따뜻한 존재라는 전언이 숨어 있다. 3연은 그런 바다를 보며 언덕에서 동백꽃이 웃는 장면이다. 그것도 파란 이파리 사이에 숨어서 아이처럼 웃는다. 그렇게 자꾸만 웃는 동백꽃을 바라보며 시인은 동백꽃 그 빨간 입술이 예뻐 죽겠다고 말한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마음이 따뜻해지고 입가에 환한 미소가 돋는다.

암울한 현실 인식, 비극적 시대상 반영 등이 여러 시편에서 나타나지만 신석정 시 전반에 걸쳐 도드라지는 가장 큰 주제는 이상향 세계에 대한 추구다. 초기에 나타나는 이상향이 절망적 현실의 도피적 세계였다면, 그 이후에 나타나는 이상향은 절망적 현실에 대한 직시와 사회 고발이 낳은 대안적 세계라 할 수 있다. 그가 추구했던 전원적 목가풍의 이상향 세계는 시인의 동경의식이 반영된 가상의 공간, 순수의 공간, 열망의 공간이다. 그만큼 시인은 고통스런 현실 저 너머의 평화로운 전원세계를 진심으로 그리워했다.

/함기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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