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성자(聖者)

2009.04.01 18:57:37

지난 2월에 지역 내 초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다. 졸업을 경축하는 현수막을 바라보고 아주 작은 나무의자에 않은 21명의 졸업생과 90여명의 재학생들이 보내고 떠나는 석별의 마음으로 들떠 있으면서도 조용하고 엄숙한 졸업식전은 옛날 나의 초등학교 시절을 회상하게 해주었다.

그때 학교에서 정확하게 조회시간, 공부시작과 종료를 구분하여 우리들에게 학교 종을 쳐 주기도 하고 학교의 허드렛일과 선생님들의 심부름을 하는 아주 작은 키의 양씨 아저씨가 있었다.

방과 후 운동장에서 공치기 하고 늦게 집에 갈 때면 그는 3백여 평 남직한 학교 채소전에 거름을 주기도하고 김을 맸다. 겨울이면 아침 일찍 교실마다 장작난로를 피워 따뜻하게 하는 등 쉼이 없이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어느 때인가 짓궂은 고학년 형들이 그가 무거운 두엄 지게를 지고 가는데 지게꼬리(끈)를 밟고 장난을 칠 때면 조금의 노여움도 없이 뒤돌아서서 싱긋이 웃으며 다시 갈 길만 가기도 했다. 내가 초등학교 4, 5학년 무렵의 일이다. 학교 창고에 두었던 구호품인 밀가루 두 부대가 없어진 도난사건이 일어났다. 지금이야 별 것 아닐지 모르지만 당시만 해도 밀가루 두 부대면 큰 재산이다.

학교가 발칵 뒤집히고 파출소에서 순경이 왔다. 순경은 몇몇 사람의 얘기를 대충 듣고 나서 꼬마 양씨 아저씨를 불렀다. 순경은 우선 와들와들 떨고 있는 꼬마 양씨의 뺨부터 냅다 후려쳤다. 그런 다음 멱살을 틀어잡고서는 날카롭게 째려보며 말했다.

"새끼, 너지" 꼬마 양씨는 캑캑거리며 잔뜩 겁을 먹고만 있었지, 아니라는 말을 못했다. 아이들은 운동장에 둘러서서 모두 숨을 죽여 가며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 때 서무주임이 어색하게 웃으며 걸어와 순경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설명했다. 밀가루 부대의 계산이 잘못됐다는 것 같았다. 꼬마 양씨가 범인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잘 좀 세지, 에이 ……" 순경이 침을 탁 뱉었다. 그러고서는 영문을 모르는 꼬마 양씨에게 "빨리 꺼지지 못해!··하고 손을 울러 매었다. 그제야 꼬마 양씨는 안도의 얼굴로 도망치 듯 그 곳을 빠져 나갔다.

다음 날 방과 후 꼬마 양씨가 의자에 못질을 하러 교실에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아저씨, 어제 밀가루 말이예요·· 하고 말을 붙였다. 왜 처음부터 가져가지 않았노라, 무례하게 사람을 때린 순경에게 항의 한 마디 못했느냐고 물어 볼 심산이었는데 그 분은 나를 바라보고 웃었다.

"찾았으니 참 다행이야, 참 잘 됐어"하고 부서진 의자에 못질 만 했다.

그 후 나는 양씨를 잊고 살아오다가 희년(禧年)되어오니 그가 성자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교회에서, 불전에서 '서로 사랑해라! 용서해라! 자비를 베풀어라!'라고 목청을 돋구는 성직자나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이기적이고 욕심꾸러기 종교인들 보다 그가 훨씬 커 보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범람한 비리, 유명한 종교인, 훌륭한 정치인, 유명한 누구, 훌륭한 누구, 유명한, 훌륭한 …… 이런 식으로 내가 살아오면서 허다한 유명하고 훌륭한 이들이 내 눈 앞을 어지럽히며 지나갔다. 그들의 높은 목청과 주의 주장들이 귓전을 때렸다.

결국 그 모든 언어들과 행동들의 결론들은 한결같이 '내가 옳다'는 것 들이었다.

변명과 자기 피해의 앙갚음과 보복의 자행을 서슴치 않음은 물론 그 도를 넘어 각종 수단을 동원하고 권모술수를 부려 왜곡을 정당화 하려는 것들로 보편화 된 사회가 될까 두렵다.

우린 이제 높은 목청과 번쩍이는 언어들을 소화하고 걸러서 들어야만 한다. 번질거리는 모습이나 인격들이 아닌 꼬마 양씨 같은 인간상이 많은 사회가 됐으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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