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병사 전종대가 1950년 9월 충북 청원군 강서면 현암리 103호의 누이 이순옥 앞으로 보내려고 했던 편지다. 성이 다른 데는 가족사적인 사연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민군 간부 박룡각이 1950년9월 충청북도 충주시 인민위원회 서기장인 친구 이원상에게 부치려던 편지다. 이원상은 충주 진입후 장기 체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향 삼천(산천)을 떠나 어연간(어언간) 가을이 돌아왔구나. 모든 곡식들은 고개를 수구리고(수그리고) 주인에게 축복을 하고 이때을(를) 답하여 순옥아 그간 내가 떠난 후에 몸이나 근강함은(건강함은) X주어라. 그리고 보면 다 적석범은 집을 떠난 후에 아무연(아무런) 업시(없이) 군무에 봉무하고 있다. 이것은 순옥에긔도(에게도) X는 덕으로 무사히 조국통일 위하여 힘끝(힘껏) 싸우고 있다. 아무쪼록 순옥아 너는 어머니에 교훈을 잘 듣고 조국을 위하여 힘끝(힘껏) 수고를 하여라. 그리고 순옥아 너는 서로 형재(형제)끼리 동무끼리 서로 사랑으로 놀어라(놀아라). 내가 너희를 사랑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나는 무사하니~ 열심하여라. 할 말은 만으나(많으나) 이만 끝. 적석범. 1950. 9. 20
인민군 간부 박룡각이 1950년9월 충청북도 충주시 인민위원회 서기장인 친구 이원상에게 부치려던 편지다.(부분) 이원상은 충주 진입후 장기 체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원상 친우에게
동무의 편지를 읽고 즉시 나는 해답을 씁니다. 지금까지 3,4차에 걸쳐 편지를 받았지만 해방구에 편지가 곤란하다는 말에 해답을 하지 않었든(않았던) 것입니다. 충주군 인위의 서기장의 편지를 받으니 감상이 참 상쾨(상쾌)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북반구 후방의 형편을 말하겠습니다. 동무가 떠날 때는 한가한 시기였습니다. 물론 전시에 들어와서 정치 과업이 증대하는 것은 응당하지만 요사이는 좀 바쁩니다. 군중들의 동원된 테세도(태세도), 훈련된 행동으로서 더욱 적극적으로 동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수시 공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8월 20일에는 사인 상공에서 ‘구라당 전투기’(미 헬캣 전투기 지칭)가 야단을 첫습니다(쳤습니다). 그러나 아편의 손해는 조금도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경험과 단련이 되었을 따름입니다. 남조선 의용군들도 사인장에 많이 왕래합니다.
남반구, 즉 해방구 소식도 잘 압니다. 충주군위 서기장 동무의 환경도 잘 압니다. 었째든(어쨌든) 이미 연마된 정치적 수완을 남반부 해방구에서 멋있게 발휘하시는 일꾼의 맛을 보이시오. 우리들도 해방구에 갈 것을 열렬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4,5년간에 걸쳐 남반부 토지개혁을 운운하든 그것은 동무는 직접적으로 집행하였으니 영광입니다. 모든 힘을 승리와 전선에 바칩시다.
동무의 장손은 중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하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동무의 부인을 나는 각금(가끔) 맛나서(만나서) 동무의 이야기를 합니다. 안심하고 신변을 주의하여 충주의 사업을 혁신하십시요. 다음 편지에는 해방구의 소식을 (XXXX) 쟈미나는(재미나는) 것을 전하시오. 나는 동무의 내용을 군중강연 사업에 많은 실례로 인용합니다. 김장연(金長連) 동무의 소식은 경성서 충북으로 떠났다는 소식밖에 없으며, 그후 연락이 없습니다. 몸 건강하여 끛끛내(끝끝내) 승리를 위해, 맛날(만날) 때까지-.
9월 17일에 씀, 박룡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