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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추적 '미군노획 편지 주인공' 찾았다

83세 전종대옹 전남 여수 거주 확인
北에 강제징집 당한 후 6년만에야 귀향
평양 인민우체국 근무…편지 많이 써
편지 등장 소녀들은 강서 현암교회 꼬마
남과 북 오가며 사실상 3번이나 군복무

  • 웹출고시간2013.06.13 18:55:43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전종대 옹은 현재 거동이 불편한 편이다. 따라서 50대인 80년대 중반에 찍은 가족사진으로 대신한다. 원안이 전옹이다.

속보= 미군이 6.25때 평양에서 노획한 조선인민군의 편지 주인공 중 충북을 연고로 한 1명의 생사 여부와 소재지가 본보 추적을 통해 확인됐다.

특히 이 사람은 1950년 7월 청주에서 북한군에 강제징집을 당해 남북을 오가며 모두 3번(총 6년)의 군복무를 한 것으로 나타나, 전쟁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 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종대 옹, 6.25 강제징집에서 청원 강서로 귀향하기까지의 6년

본보는 6월 10일자 3면과 11일자 1면으로 보도했던 충북 연고자 12명 중 편지를 4통으로 가장 많이 썼으면서 '충청북도 청원군 강서면 현암리 100호'를 받는이 주소지로 하고 있는 '전종대'라는 인물을 지목, 인물 추적에 나섰다.

추적 방법은 현주소지인 강서1동 주민센터→현암동 통장→현암동 노인회장→현암동 경로당회장 수순을 밝았다.

그 결과, 강제징집 당시 마을인 현 강서1동에 동생 전종성(75) 옹이 생존해 있고 그를 통해 현재 전남 여수에 살고 있는 형 전종대(83) 옹과 통화를 하는 것이 가능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으로, 편의상 존칭은 생략했다.

-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북으로 가게 됐나.

"청주에 들어온 인민군들은 1950년 7월 청주, 청원지역 2천여명의 장정들을 시내 모 국민학교에 집결시킨 후 강제 징집을 했다."

- 그후 평양으로 갔을 터인데 어떻게 북으로 올라갔나.

"밤에만 걷고 에는 산속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청주-충주-서울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갔다. 미군 폭격이 심해 낮에는 걸을 수가 없었다."

- 이후 어떤 생활을 하게 되나.

"압록강 건너편 만주지방에 안동비행장이 있다. 그곳에서 한달간 무선통신병 교육을 받은 후 평양으로 돌아와 비행장에서 무선통신병으로 근무했다."

- 평양에서 근무할 때 편지를 가장 많이 쓴 것으로 나타나는데, 전쟁 와중에 한가하게 편지를 쓸 시간이 있었나.

"비행장에서 근무할 때 배탈이 크게 나 평양근교 조선인민군 우체국으로 전근을 가게 됐다. 당시 우편검열이 매우 심했으나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쓰고 검열없이 곧바로 우체함에 넣을 수 있었다. 때문에 그 3개월 동안 편지를 가장 많이 쓸 수 있었다."

- 현재 재미 언론인 이흥환씨가 미문서보관소(NARA)에서 발굴한 편지 중에는 전 선생의 것이 4통이나 된다. 이중 '이순옥', '이순섭'이라는 소녀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누구인가.

"나는 징집 전에 청주 성경고등학교(지금의 동산교회 앞 양관자리) 3학년에 다니면서 강서 현암교회에서 주일교회 교사를 하고 있었다. 이순옥, 이순섭은 그때 교회에 나오던 11살 아래의 소녀들이다. 꼬마들이라 이름을 착각했는데 본명은 이순교, 이은섭이다."

- 평양은 언제 탈출하게 되는가.

"1951년 1월이다. 중공군 무리에 끼여 낮에는 숨고 밤에만 이동하면서 무조건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 이때 중공군 강냉이도 얻어 먹었고, 빈집에 들어가 혼자 밥을 해먹기도 했다."

- 3.8선을 넘기가 쉽지 않았을터인데. 아무 탈없이 넘어왔나.

"그렇지 않았다. 임진강에서 헌병에게 생포됐는데, 그때 나를 '북한군 귀순용사'로 분류됐다. 강제 징집도 서러운데 북한군 귀순용사로 분류되니 기분이 묘했다."

- 그후 고향 청원군 강서로 곧바로 가게 되나.

"그렇지 않다. 헌병대는 과거를 묻지 않는 대신 나를 대구 공군비행장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1년간은 군번도 없이, 아무런 급여도 못받고 '군속'으로 근무했다.

- 그럼 언제쯤 고향 청원 강서로 돌아올 수 있었나.

"1년 후 공군에 정식 입대를 해 비로소 군번을 받았다. 그리고 4년 만기복무를 한 후 6년만에 고향에 갈 수 있었다."

전옹은 그후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목회활동을 계속하다 여수 항대교회에서 고령으로 은퇴했다. 그의 4통 편지에 기독교적 표현이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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