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일기장

2017.02.12 15:25:08

이정희

수필가

멀리서 동무가 찾아오던 날은 무척 추웠습니다. 해거름이면 땅거미가 기어 나오는 산속 레스토랑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죠. 얼굴만 마주봐도 깻송이처럼 다정한 동무. 타닥 타다닥 난롯불 튀는 소리까지 회포를 부추기듯 정겨웠는데, 지게문을 열어 보니 한겨울 때고도 남을 장작이 잔뜩 쌓였군요. 장작 중에서도 통나무 장작이라는 게 더 따스한 느낌이었고 문득 저만치서 몰려드는 어스름.

돌연 건너편 호숫가에 이제 막 어둠의 장막이 쳐지고 있습니다. 어둠을 뒤덮는 침묵이 사뭇 고즈넉한데 언덕의 가로등이 반짝 켜지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 웃었습니다. 잠시 전 동무가 산 그림자 깔린 밖을 보고 이맘때는 별나게 쓸쓸해진다고 혼잣말처럼 되뇌었고, 저는 또 해가 저기 서산에 걸린 지금은 지구가 어둠 속으로 끌려가는 때라고 말해 줬거든요.

다른 때 같으면 또 노을이 지고 별이 뜨곤 해서 덜할 텐데 겨울이라 노을도 볼 수 없고 눈발까지 날렸으니 별도 뜰 리 만무죠. 그래 오늘 따라 더 고즈넉한 거라고 했는데 가로등이 켜지면서 문득 실소한 것이지요. 눈보라 치는 겨울 밤 혼자 서 있는 것도 쓸쓸해 보였지만 어릴 적 쌩떽쥐베리 동화에서 본 어린 왕자의 가로등 지기가 스쳐갔습니다.

그는 어린 왕자가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으로, 1분마다 가로등을 켜는 게 일이었습니다. 첫 번째 별에는 누구든지 부하로 삼으려는 왕, 다음에는 허영으로 가득찬 독선자, 다음에는 부끄러운 것을 잊으려 술을 마시고 그게 부끄러워 또 마신다는 술꾼, 네 번째 만난 실업가는 하늘의 별까지도 자기 명의로 하겠다는 욕심꾸러기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별의 지리학자는 지식만 추구하는 부류였고 다섯 번째 별에서 가로등 지기를 만난 셈이죠.

해거름에는 당연히 켜야 되지만 반대쪽에서는 이제 막 해가 뜰 테니 거기 맞춰 다시 꺼야 된다면 무리가 아닐까요. 지구가 스스로 돌기 때문이지만 그래서 지구상의 수많은 나라가 연신 해거름이 되고 새벽이 된다면 부질없는 일이죠.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지만 순수한 감동이나 뭉클한 느낌도 없이 본연의 순수성을 잃고 말 거라는 게 어린 왕자의 걱정이었죠.

우리가 본 것처럼 땅거미가 내리는 풍경을 완상하면 될 텐데, 약간은 쓸쓸해도 어스름을 즐길 동안 차분해지련만 어둡다고 곧 바로 켜는 건 삭막한 일이죠. 가로등 역시 무의미한 게, 비가 오거나 흐린 날만 아니면 밤마다 별이 뜨고 새벽으로 사라질 테니 신경 쓸 필요 없는 전천후였지요. 밖에는 삭풍이 몰아쳐도 불붙는 난롯가는 무척이나 따스했던, 그 날 우리는 시간시간 가로등을 끄고 켜는 식의 삶은 안 될 거라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말은 열심히 사는 거지만 시계추마냥 습관적이어서는 무의미해질 테니까요.

불현듯 다가오는 미지의 적막감. 자연은 우리 무료해질까 봐 수많은 별을 새겨 어둠을 비추도록 한 걸까요. 오늘처럼 눈발이 날릴 때는 보이지도 않으나 여느 때 환히 빛나던 기억을 되살리는 격이죠. 밝음의 끝자락에 매달린 채 기울어져서 절벽 끝에 있는 듯 아뜩한 기분이어도 얼마 후 별빛 고운 밤이 되고 첫 새벽 눈부신 아침이 되는 것처럼.

집에 오니 어스름은 간 데 없이 한밤중입니다. 모처럼 친구와 보낸 시간이 딴때없이 푸근하군요. 저녁을 먹으면서 바라 본 호숫가의 정경과 가로등의 상징적 의미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해거름이면 늘 착잡한 기분이었으나, 어둠으로 치달으면서 동이 트고 새로운 하루가 되듯 어려움 또한 소망과 행복의 날실이 되고 씨줄로 엮어질 거라는 생각을 다져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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