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 SNS서포터즈 - 백성을 사랑하고 시대를 걱정한 조선의 충신

'남한산성의 주인공' 청주의 위인 최명길

2018.02.21 18:37:34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 소재 최명길 묘역

[충북일보] 청주에는 다양한 위인들의 터가 많이 있다. 이들이 우리 역사 5천 년을 이어오게 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그런 인물 가운데 지난해 개봉했던 영화 '남한산성'의 주인공인 최명길(이병헌 역) 선생의 흔적도 청주에 있다.

최명길은 지난 1586(선조 19)년에 출생해 1647(인조 25)에 세상을 떠난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이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기까지 47일 동안 '주화(主和)'를 주장했다.

영화의 실제 주인공이자 국란 당시 조선의 신하로 백성만을 생각했던 최명길 선생의 묘역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조선의 명신 최명길 선생의 묘역은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에 위치하고 있다. 생각만큼 장대한 모습의 묘역은 아니었다.

아마도 당시 조선의 유교적 개념을 벗어나지 못한 상황으로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백성과 시대적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영의정 최명길은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었을까.

영화에서도 보았듯이 최명길은 병자호란 때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정말 암울한 상황으로 국제정세를 하나도 보지 못한 구태연한 대신들로 조선을 가장 치용으로 만들었던 시기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최명길은 여러 반대와 비난을 받으면서 조선이 살아야 하는 길을 택했던 인물이다.

나라와 백성이 없어지고 죽어가는데 그저 망해가는 중국의 명(明)만을 바라보며 쓸데없는 의리와 명분을 강조한 그들과는 대비를 이룬다.

또한 이런 모습은 대표적인 척화론(斥和論)자인 김상헌과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당시 김상헌은 조선의 대세가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자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었다고 전해진다.

최명길은 명문보다 오직 백성만을 생각했던 명신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조선은 어떤 운명으로 결론이 지었을까.

만약 척화론을 따랐다면 아마도 몽고의 집권이래 또 하나의 더 큰 수치가 다가오지 않았나 생각이다.
그래서일까. 최명길과 김상헌의 대조적인 길은 후세에도 나타나고 있다.

김상헌은 조선 후기 세도가인 안동 김씨를 떠오르게 하는 충신으로 그 영화를 누리지만 최명길은 배신자라는 오명으로 그의 문중 역시 많은 쇠락을 보여준 게 사실이다.

그가 인조에게 올린 병자 봉사(丙子奉事)를 보면 그가 어떤 마음으로 주화론을 펼쳐야 했는지를 이유와 대책을 알 수 있다.

"국력은 다 됐는데 오랑캐의 군사는 여전히 강하니, 우선 정묘년의 맹약을 지킴으로써 수년 동안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그동안에 인정(인정)을 베풀어 인심을 수습하고 성을 쌓고 양식을 저축하여 더욱 변방의 방비를 굳게 하고, 군사는 거두어들여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저들의 틈을 엿봐야 하나, 국가를 위한 계책으로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훗날 실학의 근본적인 정신이었던 애민과 실용정신은 현실주의자인 그의 면모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조선이란 나라와 왕 그리고 백성을 구한 조선의 명신 최명길이 우리 시대에 다시금 재조명 받길 기대해본다.

묘역 주변은 평이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의 묘역은 아직도 지금의 대한민국 형세를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이번 여행은 그분의 삶을 다시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 청주시SNS서포터즈 한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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