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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NGO의 활동과 방향` - (2) 우리나라 NGO의 태동과 발자취

동학에서 발원…민주주의 쟁취

  • 웹출고시간2007.11.08 15:34:57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19C 부정부패 만연…새로운 심리적 탈출구 필요

#왕권사회에서 시민사회로

우리나라는 서양과 마찬가지로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왕이 지배하는 왕권중심주의의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다.
농경사회에서 왕의 존재는 신성불가침 그 자체였으며 왕의 명령이면 국민들의 목숨은 당연히 버리는 것으로 알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19세기말에 이르면서 조선은 재정적 결핍으로 인해 양반계층의 매관매직이 이뤄지는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그런가 하면 양반, 중인, 평민, 천민으로 구분됐던 조선시대의 신분계층은 양반이 10%내외, 평민은 약50%, 천민은 40% 정도로 적은 수의 양반계층이 평민과 천민을 지배하고 거느리면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아왔으나 처음으로 시장경제가 출현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평민과 천민의 수가 줄고 양반이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나 사회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실제로 대구지방의 호적문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7세기 말 양반은 8.3%에 불과했으나 18세기 말에는 37.7%, 19세기 중엽에는 65.5%로 급격히 늘어나면서 평민은 32.8%, 천민은 1.7%로 감소한 것을 알 수 있어 급격히 변동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양반계층이 당파싸움 등으로 인해 분열되면서 정치체제 전반에 걸친 위기가 도래했다. 이와 같이 수백년을 지켜온 왕조의 자존심은 국가 내부적 변화요인에 따라 왕조가 위협받을 정도로 흔들렸으며 서양인과 일본인들까지 서해안과 남해안에 출몰하는 등 외세에 의한 압력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국가 최고위층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나라전체가 흔들리는 가운데 새로운 심리적 탈출구를 갈망하던 주민들은 최제우가 주창한 동학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동학으로부터 시작된 시민의식의 변화는 결국 우리나라 NGO의 태동을 가져왔다는 것이 대부분 학자들의 주장이다.
체계적 투쟁… 민중 항쟁 발전 가져와

#만인평등주의 동학농민운동

하늘, 천주(天主), 한울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동학은 사람들 개개인이 한울림을 모시고 있다고 해 한울이 사람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있음은 물론 모두가 한울님 앞에서는 동등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결국 모든 백성이 평등함을 의미했다.
이러한 동학의 논리는 신분계급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는 조선사회에서 상대적 차별대우를 받고 있던 평민과 천민들에게는 신분상승을 의미함과 동시에 왕과 자신이 동일한 위치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어 획기적인 발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조선의 사회구조를 부정하는 결과로 보이게 됐다.
더욱이 동학이 제시하고 있는 사회는 양반과 평민, 남자와 여자를 모두 동등하게 봄으로써 당시 조선사회로서는 파라다이스와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존 사회구조를 무시하는 동학은 중앙정부를 비롯한 양반지배계층으로서는 기존 체제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중앙정부를 비롯한 지배계층과 동학의 주장은 서양과 일본 등 외세에 대한 입장은 같았지만 신분계급제도를 부정하는 인상을 주는 부분에서는 극명한 시각차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신분계급사회의 부정은 곧 사회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동학교도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왕조와 양반지배계층에 대항하는 집단행동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점차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결국 조선왕조는 1864년 봄 세상을 현혹하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목을 적용해 최제우를 잡아 대구 장대에서 처형하고 동학을 민심을 이간시키는 사교(邪敎)로 간주했다. 또 동학교도들을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은 1892년 10월부터 1893년 4월까지 일어났던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정부에 대한 체계적인 투쟁을 벌이게 됐으며 시민의식의 변화와 성장을 이뤄내는 도화선이 됐다.
이 운동은 동학농민혁명의 준비단계로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할 지도부가 형성됐고 일반 농민의 시대적 상황인식 고취와 조직화의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중세사회를 해체하고 근대사회를 여는 반봉건항쟁이며, 동시에 서구제국주의 열강에 맞서 국권을 지키기 위해 외세에 저항해 싸운 반침략항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조선후기에 빈발했던 민란 속에서 분출된 민중의 변혁의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함으로써 그동안 군이나 현단위로 한정됐던 항쟁이 전국적 차원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으며 일시적인 투쟁 형태를 벗어나 지속적인 항쟁의 형태를 띠게 돼 민중항쟁의 발전을 도모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러한 조직적이고 장기적으로 펼쳐진 동학농민혁명은 이후 벌어진 의병항쟁은 물론 일제강점기의 3.1운동과 항일무장투쟁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변혁운동으로 자리잡았다.
일제항거 국민 결집 / 8·15광복 모태 평가

#3.1운동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3월1일 우리나라 백성들이 보여준 전국적인 봉기인 3.1운동은 유관순열사뿐 아니라 전 국민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보여준 무저항 비폭력운동으로서 인도의 간디가 벌인 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만큼 결집된 힘을 보여줬다.
이 운동은 집회 횟수 1천542회, 참가인원 202만3천89명, 사망자 7천509명, 부상자 1만 5천961명, 피검자 5만2천770명에 이르렀으며 불탄 건물은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가 715채에 이르렀다.(일본측 발표).
이처럼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뜻을 확실히 전달한 시민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3.1운동으로 인해 모든 백성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마음이 더욱 강해졌고 이로 인해 국민적 결속을 다져 더욱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결국 1945년 8월15일 광복의 기쁨을 맛보게 됐다.
학생 운동서 시민 운동으로 현대사 민주주의 주춧돌 역할

#광주민주화운동
일제강점기에 전 국민적 단합을 유도하고 모두가 추구했던 동일한 목표인 조국광복을 위해 활동한 시민운동이 3.1운동이었다면 현대사의 대표적인 시민운동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18년간 집권해 온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시해당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최고위층에 대한 문제는 같은 해 12월12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신군부와의 일전을 벌인 12.12사태 등을 거치면서 전두환과 노태우 등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러나 신군부가 과거 유신정권 때와 마찬가지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통치를 시작하자 군부의 권력장악에 대해 비판하면서 광주·전남지역과 부산·마산 지역의 대학생과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광주민주화항쟁으로 불리워지는 1980년의 5.18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이 항쟁은 계엄군이 1980년 5월27일 도청에 진입해 진압작전을 마무리할 때까지 수많은 시민과 학생은 물론 어린이와 부녀자까지 살해당하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이 같은 많은 죽음은 이후 이미 예정돼 있던 노태우 대통령후보자의 지명을 뒤집는 6.29선언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민주주의를 향한 주춧돌이 됐다.

/ 기획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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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