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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기사·사진으로 본 한국현대사

"그땐 그랬지" 공감하며 서글픈 웃음만…
일제 강점기: 벼가 익기도 전해 입도차압 극성
50년대: 이미 벌초 대행업 등장 이용자는 적어
60년대: '추석전 봉급나온다'가 기사가 될 정도
70년대: '돌아올 때 친구도 데려와라' 구인난
80년대: '가나 오나' 짜증 속 사흘연휴 제도화
90년대: 억지휴가에 여행지 차례 富의 양극화

  • 웹출고시간2011.09.08 17:52:3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편집자 주

역사 속의 추석, 추석으로 본 역사. 두 표현은 비슷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
역사 속의 추석은 어느 정도 상식화됐다. 가령 우리나라 추석의 역사는 삼국시대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추석으로 본 역사는 관점이 다르게 때문에 색다른 느낌을 준다. "그때 그런 시절이 있었지"를 반추하게 된다.
신문(동아일보)에 보도된 추석 기사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되짚어 본다. 고한글체는 당시 표현을 그대로 살렸다.
◇일제 강점기
 
서양력을 채택한 일제는 한반도 백성들에게도 양력 1월 1일에 설을 쇨 것을 강요했다. 이른바 신정(新正)이다. 그러나 일제가 추석문화에도 간섭했는가 여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민족의 강점이 계속 되면서 이 땅 백성들의 삶은 훨씬 팍팍해졌고, 따라서 추석명절을 즐길 만큼 여유를 갖지 못했다. 1930년대 '추석 명절을 부흥하라' 제목의 사설이 등장했다.
 
'이십년래로 점점 쇠퇴하는 명절이 인제 와서는 거의 形骸만 남기고 말앗다. 새옷닙고 머리빗고 질겁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조차 점점 업어지고 니른바 명절기분이라는 것이 아조 업서지고 말앗다.(...)청풍명월에 新酒에 취하고 新餠에 飽하는 것이 엇더케나 큰 惡이랴.'-<1923년 9월 26일자>
 
농촌의 사정은 더욱 열악했다. 벼가 누렇게 익기 전에 논벼에 대한 차압이 들어왔다. 이른바 빚을 받아내기 위한 '입도차압'이다. 이는 자금 수요가 많은 추석을 전후해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아직도 나락은 청색 그대로이며 황색으로 변하기까지는 요원한대(...). 이때가 아니면 농촌에서 빗받기는 심히 곤란한지라 허둥지둥하여 수속을 하지만 개중에는 아주 악독하고도 고약한 채귀들의 발호도 여간아닌 모양인데 가장 공포와 우울을 갖는 요때의 빗진 농가들의 형편은 실로 딱하다.'-<1937년 9월 22일자>

◇1950년대
 
전쟁이 끝났으나 모든 것이 부족했다. 추석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가십란이 '제대로 추석을 셀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인가'라고 적었다.
 
이때 이미 벌초 대행업도 존재했다. 다만 종전직후 탓에 '낫들고 비를 맞을 만큼' 일감이 많지 않았다.
 
'○…어려운 살림살이에 송편이라도 비져서 제대로 추석을 셀 수 있었던 사람들이 서민층에는 과연 얼마나 될는지.'-<1956년 9월 20일자>
 
'○…이백환에서 오백환까지 주는대로 품삯을 받고 벌초를 하여 주려고 낫을 갈아들고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인근 부락민들도 대부분은 일꺼리가 없어 그대로 비만 맞고 서있을 뿐 어제 공동묘지는 근년에 드문 쓸쓸한 추석을 지냈다.'-<〃>

◇1960년대
 
전쟁의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다양한 의제들이 생산됐다. 그러나 나라 살림이 구멍가게 식으로 운영되던 시기였다. 공무원 월급날이 추석과 거의 겹치자 월급일을 앞당기자는 건의가 있었고, 그것이 긍정적으로 검토됐다. 당시 기사의 제목은 '추석 전에 봉급나온다'였다.
 
'어느 기자가 "공무원 봉급날이 25일인데 추석절이 24일이니 월급날을 이틀쯤 앞당기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말하자 김OO(김OO내각사무처장 지칭)은 "그것 참 좋은 착상이군요. 내일 예산 관손(關孫)을 좀 알아보야겠군" 하면서 몹시 기분이 좋다는 표정을 지었다.'-<1961년 9월 19일자>
 
당시 동아일보는 '주월장병에 추석선물 사과를 보냅시다' 운동을 펼쳤다. 이유는 '무더운 이국땅에서 밤낮없이 장글과 수렁을 누비며 수고하는 국군장병의 노고를 위무·격려하기 위해서'(1966년 9월 9일자)였다.
 
동참자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가 '장병들은 고국의 냄새가 싱싱한 사과 선물은 먹어버리기엔 너무 안타까운 귀중한 선물이라고 좋아했다'(1961년 9월 29일자)라고 후속기사를 다시 내보냈다.
 
60년대 기사를 보면 사과 홍옥 한 상자에 6백50원, 배 한 상자(30개) 6백30워, 복숭아 한 궤짝에 7백50원, 포도 5관들이 한짝에 7백원을 하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

1970년대 귀성객과 떡방앗간 모습이다. 당시는 귀향후 직장을 옮기는 것을 막기위해 전세버스로 귀성과 귀경을 도왔다.

개발독재가 성공을 거두면서 경제와 관련된 추석기사가 많이 생산됐다. 당시 제조업체들의 가장 큰 걱정은 구인난이었다.
 
값싼 노동력 덕택에 물건은 만드는 데로 해외로 팔려나갔지만, 속칭 '공돌이, 공순이'의 구인난이 찾아왔다. 특히 이들은 추석을 쇤 후 직장을 자주 옮겼다.
 
시골에서 친구에게 들은 얘기에 귀가 솔깃해졌기 때문이다. 1978년 9월 14일자 신문이 다음과 같은 제목을 뽑았다.
 
'공단마다 추석선심 만발'(큰 제목), '휴가·보너스 전에 없이 듬뿍', '버스 전세내 귀향 서비스', '돌아올 때 친구 데려오라 부탁도'(이상 작은 제목).
 
추석을 쇤 후의 후속기사도 이어졌다. 한 공단 관계자는 "귀사율이 95%에 이른 것은 노사협조가 잘 된 덕분"이라고 자화자찬했다.
 
'이처럼 수송작전의 성과가 효력을 보이자 최OO 공단관리 이사장은 예년 같으면 명절 뒤 종업원 귀사율이 낮아 보름 정도는 구인난 때문에 공장 가동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엇다면서 노사협조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것이 가장 쳡경이라고 한 마디'.-<1978년 10월 4일자>
 
구인난은 속칭 파출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한 시간에 200-250원주고 2-3일 전에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시간제 주부가 인기를 끌었다. 이유는 경제성과 편리함 때문이었다.
 
'가정에서는 일을 몰아 부탁할 수 있고 매일 와있는 것보다 신경이 덜 쓰여 좋고, 가정부로서는 빨리 빨리 일을 해치우고 다음 집으로 가는 등 시간이 절략되어 좋다.'-<1978년 9월 7일자>
 
개발독재의 동의어는 '관(官)의 통제'로 볼 수 있다. 당시 박정희 정권는 추석 송편을 만드는 것에까지 꼬치꼬치 간섭했다. 전통 송편은 멥쌀가루로 만들어야 제맛이 난다.
 
그러나 당시 정권은 혼분식 장려차원에서 송편에 밀가루를 일정 비율로 넣을 것을 강권했다.
 
'추석을 앞두고 송편에도 밀가루 30%를 섞도록 계몽활동을 펴는 한편 오는 13일부터 19일까지 지도단속반을 편성, 떡방앗간 제병업소 등을 대상으로 순회 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처벌 규정은 혼분식불이행업소 처별 규정에 따라 영업정지 등 행정조치를 취하기로 했다.'-<1975년 9월 8일자>

◇1980년대

물질 환경이 나아지면서 정부가 보다 여유로운 추석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984년 4월 정부는 구정을 공휴일로 하지 않는 대신 추석을 이틀 연휴로 하는 방안을 처음으로 검토했다.
 
그러나 이 안이 정식으로 시행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였다. 추석 연휴는 3년 후인 1989년 다시 사흘로 늘어났다. 극심한 교통체증이 주된 원인이었다. 1991년 9월 23일자 1면 제목이다.
 
'추석 대이동 가나 오나 짜증'(큰 제목), '귀성보다 붐빈 귀경 서울 새벽도착 많을듯', '승용차 이용 작년보다 26% 늘어'(이상 작은 제목)
 
◇1990년대
 
한국경제에는 거품이 숨어 있었다. IMF 이후의 90년대 추석에는 '우울한 추석', '차라리 추석이 없었으면' 등의 표현이 부쩍 많이 등장했다.
 
경제사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상여금, 귀향비, 떡값 등이 축소되거나 사라졌고, 재고가 넘치면서 추석을 전후해 2-3주 억지 장기휴가를 보내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또 다른 지면에는 '추석 연휴 여행지서 차례 지낸다'(1992년 9월 9일자) 기사가 등장했다. 부의 양극화 현상이 추석문화에도 극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 조혁연 대기자

자료 도움: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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