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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경 "출산 다음날 윗몸일으키기, 2주후엔 훈련"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실제모델 임오경 전 핸드볼 국가대표

  • 웹출고시간2008.01.28 17:28:4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핸드볼 대표팀의 감동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무서운 흥행 질주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계 최강 덴마크에 맞서서 연장에 재연장, 승부던지기까지 명승부를 펼쳤던 우리 대표팀의 투혼, 그 눈물에 온 국민들이 감동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영화 속 김정은의 실제 모델이자 당시 대표팀의 핵심이었던 임오경 선수. 임오경 선수가 누굽니까. 12년 동안 세 번의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던 한국 여자핸드볼의 간판스타. 그 이름 석자만으로도 유럽에서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월드스타잖습니까. 또 일본에서는 실업팀을 8년 연속 정상에 올려놓은 명장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그녀는 체육관 훈련까지 어린 딸을 데리고 다녀야 했던 억척스런 아줌마였고, 올림픽만 끝나면 관심의 사각지대로 밀려나곤 하는 후배들의 현실에 가슴 아파하는 한국 핸드볼의 맏언니였습니다.

영화 ‘우생순’을 보며 펑펑 울었다는 임오경 감독을 1월 25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우생순’ 주인공들의 열연…감동의 눈물을 흘렸죠

▶ 지난 주 일요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같이 영화 관람 하신 것도 그렇고, 제일 바쁘신 분이 임오경 감독 같은데요? 어떤 이야기 나누셨어요?

그런가요?(웃음) 스포츠를 참 좋아하신다면서 제가 일본에 산다고 하니까 그럼 오늘 아침 비행기로 왔냐고 물어봐 주시기도 하셨어요. 또 많이 힘들었겠다고 위로도 많이 해주셨어요. 그리고 바로 영화가 시작했는데요. 조금씩 시간이 흐를수록 눈물을 조금씩 훌쩍이고 계시더라고요.

▶ 지금 일본에서 활동 중이신데, 이번 달만 벌써 두 번 한국에 들어오셨다고요?

네.

▶ 사실은 자주 들어오기가 쉽지 않으신 거죠?

네. 잠을 줄이면서 이동하는 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 시사회 때는 같이 가셨던 분들이 많으시죠?

예. 훌륭한 분들이 참 많이 오셨어요.

▶ 그 날 김정은 씨도 처음 보신 건가요?

아뇨. 김정은 씨는 영화 찍기 전에 연습할 때 두 세 번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지도 방법도 가르쳐 드리고 조언도 해드리고 저도 얘기 많이 듣고 했어요.

▶ 김정은 씨 연기를 보고 어떠셨어요?

저도 영화를 보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너무나 실제적인 모습은 가냘픈데, 그렇게 가냘픈 몸으로 과격한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전문인 입장에서 볼 때는 저희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시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 저한테는 너무나 인상 깊었고, 한편 죄송했어요. 저 개인적으로 반성할 부분이 참 많았어요.

▶ 어떤 부분을 반성해야 한다는 거죠?

저는 전문인인데도 나이를 먹게 되니까 그 노력하는 부분이 조금씩 줄어들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연예인 분들은 대역 하나도 안 쓰고 자신들이 직접 했다는 부분에 있어서 정말 감동받았고 그 분들에게 박수를 보내드렸어요. 반면에 비판하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너무 부족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진짜 핸드볼이라는 운동이 힘든 것이거든요. 그 부분만 아신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실 거예요.

▶ 김정은 씨가 임오경 감독을 모델로 했다는 것 때문에 더 화제인데요. 영화 보고서는 어떤 말들을 나누셨나요?

제가 “아니, 제 모습을 어디서 어떻게 배웠어요? 내가 모든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했더니, 김정은 씨가 미리 그 영화를 찍기 전부터 저에 대해서 파악을 다 해두셨더라고요. 제가 TV에 나왔던 모든 것, ‘인간극장’에 출연했던 것부터 시작해서 “이서진 씨와 같이 보면서 분석했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저에 대해서 많이 파악을 하셨더라고요. 그래서 한 마디라도 더 저의 성격을 보고 들으시려고 자꾸 저에게 질문을 하더라고요. 정말 제 모습과 흡사한 면이 너무 많아서 놀랬어요.

▶ 임오경 감독에게도 ‘생애 최고의 순간’이 그 때 그 순간이 맞나요?

그렇죠. 그 많은 관중들이 가득한 코트에 서 있을 때가 저한테는 최고의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꼭 2004년 결승뿐만 아니라 모든 국제 대회 결승전 무대에서 정말 어마어마한 관중의 함성 가운데 제 몸이 움직이고 있을 때, 저는 그 때의 그 순간이 제게는 최고의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 문소리 씨가 맡은 역할도 물론 남의 얘기 같지 않았겠어요.

예, 저는 문소리 씨, 김정은 씨 두 분의 역할을 보면서 다 저를 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마음도 많이 아프고, 눈물도 더 많이 났던 것 같고요.

▶ 인터뷰 하신 것을 보고 시어머니께서 전화하셨다는 얘기는 뭔가요?

영화 속에서 이혼 얘기며, 사업을 말아먹고, 자살하는 장면이 있어서 어머니가 “우리 애가 왜 자살을 하느냐?” 하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것이 사실이 아니고, 영화예요. 그리고, 남편도 허락했거든요. 동의했으니까 너무 안 좋게 보지 말아주세요. 주변 분들 말씀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라고 했는데도 어머니는 너무 속상하셔서 막 우시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 그런 것이 아니라니까요. 제가 나중에 다 밝힐께요”라고 하면서 제가 어머님을 달래드렸는데, 나중에는 아무 말씀 안하시더라고요.(웃음)

▶ 배우들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을 것 같던데요. 슛 동작 하나도 쉬운 것이 아니잖아요? 카메라 기술로 좀 더 멋있게 연출한 것 같지는 않던가요?

전혀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얼마든지 카메라 기술로 더 멋있게 만들 수도 있는 건데, 전혀 그런 기술을 쓰지 않고, 있는 그 자체를 그대로 찍으셨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더더욱 칭찬의 말을 더 많이 하는 건데요. 저희 전문인들도 석 달 해서는 솔직히 흉내내기도 힘들어요.

초등학생을 가르치는데도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리거든요. 그런데 그 연예인들은 그 작은 몸으로, 정말 저희도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스카이 슛’은 상당히 어려운 것이거든요. 또 뒤로 백패스 하는 것은 감각적으로 타고 나지 않으면 힘든 것인데, 그 백패스를 이용해서 스카이 슛까지 하는 것은 정말 저희 프로들을 흉내 내시는 것이었거든요.

▶ 역시 배우들은 다르죠?

네. 그래서 정말 나만 전문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문직업을 하고 있는 분들은 다들 대단하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 다른 직업에 대한 존경심까지도 느끼게 되었군요?

네. 저는 항상 제 직업이 힘들고 너무 고달프다는 생각이었는데, 제가 힘든 것이 아니었더라고요.

▶ 2004년 당시에도 일본 실업팀 감독으로 가서 계셨던 건가요?

네.

▶ 그럼 아테네 올림픽 출전 티켓을 따기도 어려운데, 두 가지 일을 겸업하셨던 건가요?

네.

◇ 서른넷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투혼을 발휘했던 경기

▶ 선수가 그만큼 부족했던 겁니까? 아니면 임오경 감독의 존재가 그만큼 대단했던 겁니까?

제가 대단한 것은 아니고요. 2003년에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중국에게 출전 티켓을 뺐겼어요. 그래서 2004년 올림픽을 못나가게 되는 상황이었는데, 2003년 12월에 있는 세계선수권 대회를 참가하기 위해서 노장 선수인 오성옥 선수와 제가 감독님께 콜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제가 소속된 팀이 일본에서 시즌중이었고 많이 망설였는데, 정말 티켓이 없어서 올림픽을 못 나간다면 정말 저희로서도 절망적인 것이고, 제가 일본에서 핸드볼을 아무리 인정받고 한다고 해도 저희한테는 해야할 의욕을 상실하는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오성옥 선수와 제가 최종 결정한 것이 정말 우리 힘이 필요하다면 후배들과 한국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지금 인 것 같으니까 우리가 가서 해 보자.

정말 올림픽 티켓을 딸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가서 도움이 된다면 해보자는 마음을 먹고 2003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게 되었죠. 그 대회에서 5위까지가 올림픽 티켓이 주어지는 것인데, 저희가 그 당시 연습도 제대로 못하고 나갔는데, 3위를 했어요. 힘들게 힘들게 했고, 운도 많이 따랐어요. 정말 너무너무 좋은 운이 따라 주었어요.

▶ 그만큼 노력했으니까 운도 따라준 것 아닐까요?

네. 빈약한 예산 때문에 그 당시 세계선수권대회에 가서 고기 들어간 김치찌개 한 번 못 먹어 보고, 김치만 넣은 김치찌개만을 계속 먹어가면서 시합을 했거든요. 어려운 여건이었죠.

▶ 그 정도로 여건이 어렵습니까?

저희는 고기라도 들어간 국물이 먹고 싶었는데, 그것이 안되서 그렇게 먹었죠. 또 세탁물도 훈련가서 경기하고 마치고 와서 저희가 직접 손빨래를 해가면서 경기를 했는데, 그 때 운도 많이 따랐지만 저희 선수들은 너무나 힘든 여건 속에서 올림픽 티켓을 땄던 거예요.

▶ 핸드볼을 좀 더 인기 종목으로 만들고자 하는 오기도 있으셨나 보네요.

예. 그런 것도 있고요. 또 제 개인적인 소원은 제가 돈을 많이 벌어서 협회장이 되어서 선수들에게 투자를 많이 해줘야지 하는 생각도 정말 많이 해봤었어요.(웃음)

▶ ‘노장 선수’라는 표현을 하셨는데요. 몇 살이신데, 노장이라는 표현을 하나요?

서른넷이요.(웃음)

▶ 그럼 그 때 소위 ‘아줌마 선수’들이 모두 몇 분 정도 되었나요?

네 사람이었어요. 저하고 오성옥 선수, 오영란 선수, 허영숙 선수였죠.

▶ 출전 전에 6개월간 지옥 훈련을 했다면서요.

태릉선수촌에서 훈련을 했는데, 태릉선수촌에서 최근 시스템이 많이 바뀌어서 여러 가지 체력 테스트 부분이 있는데요. 웨이트 트레이닝 뿐만 아니라 지구력 훈련을 하는데, 정말 저희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선수가 정말 자기 한계를 넘기게 되면 구급차를 불러야 할 정도로 다운되는 상태예요. 그런데 그 당시 태릉선수촌에 구급차가 들어오고 하니까 주위에서 “뭐야, 뭐야?” 하면서 소곤거리잖아요. 그만큼 선수들이 열심히 했어요. 옛날 생각하니까 또 마음이 아파지네요.

▶ 어떤 부분이 마음 아프게 기억되시는 건가요?

한 선수가 자기 한계를 넘어가서 호흡 곤란이 오고 마비 상태가 왔을 때 갑작스럽게 달려가서 주물러 주고 하는데, 그 선수 얼굴을 때려가면서 정신 차리라고 하는데 그 순간 순간을 생각하니까 눈물이 날 것 같아요.

▶ 영광 뒤에는 그런 치열한 아픔이 있는 거로군요.

네. 그런 결과를 거쳤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꼭 노장 언니들이 들어가서 메달을 딴 것이 아니라 후배들이 그만큼 밑에서 잘 받쳐 주었기 때문에 금메달은 못 땄지만 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선수생활 하시면서 정말 선수들이 똘똘 뭉치면 못해낼 것이 없다는 것을 많이 느끼시죠?

그것은 저희 구기 단체 종목에서는 기본이예요. ‘똘똘 뭉쳐야 된다’가 아니라 그냥 생활이예요.

▶ 영화에서도 태릉선수촌 불암산이 나오는데요. 불암산 뛰는 것이 그렇게 공포인가요?

주말에 외박을 보내주면 일요일 오후에 들어오거든요. 들어오는 그 날 저녁부터 또 시작되는 거예요. “불암산을 어떻게 뛰니?” 하면서 말이죠. 불암산을 뛰려면 아직 5일이나 남았는데, 들어오는 날부터 불암산 걱정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말 지옥의 산이고, 누가 그 산 좀 깎았으면 좋겠고, 천둥 번개가 쳐서 그 산이 무너졌으면 할 정도였어요. 선수들은 정말 두 발 펴고 잘 수 없을 정도로 불암산은 선수들에게 있어서 혹독한 산이죠.

제가 그 산을 계속 뛰어 보면서 정말 힘들다는 생각을 할 겨를 조차도 없어요. 숨쉬기조차도 힘들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나중에는 정말 너무 불쌍해서 남자들이 와서 뒤에서 밀어주기도 해요. 그리고 나이 먹어서 들어갔을 때는 “야! 좀 밀어!”하면서 아는 남자 후배들에게 소리치기도 했죠. 등산은 정말 호흡하면서 기분 좋게 해야 하는데, 저희는 등산 이야기만 들어도 징글징글하죠.(웃음)

▶ 19번의 동점 상황, 연장, 재연장까지 갔던 덴마크와의 결승전이 지금까지 하셨던 그 많은 경기 중에서 가장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기였나요? 아니면 그 전에도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경기만큼 그렇게 다급한 경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1996년도에도 연장전까지 가서 결국은 패했는데, 연장의 재연장까지 가서 패널티 드로우까지 간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전 세계의 화제 뉴스가 되었으니까요.

▶ ‘승부 던지기’를 할 때 정말 피가 마른다고 하던데요. 어떻습니까?

어릴 때는 그 무서움을 몰랐어요. 어릴 때는 그냥 선생님이 하라고 하면 하고, 던지라고 하면 던지는 그런 마음이 많았는데, 나이 먹고 나니까 제가 지도자를 했는데도 그 몸짓 하나하나에 승부가 걸려 있다고 하니까 정말 심장이 거꾸로 서는 것 같더라고요. 피가 거꾸로 솟아 오르는 것 같더라고요. 서있는 그 자체가 신기할 정도예요.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코트장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저희는 다리와 온 몸에 힘이 다 풀려서 떨리는 상태, 볼을 어떻게 쥐어서 던져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였죠. 저 같은 경우 베테랑이고 경험이 많다고 하지만 그 순간이 되었을 때는 정말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 그 순간 희열보다는 공포가 더 큰 건가요?

당연히 공포가 더 크죠. 연장의 연장까지 치르고 패널티 드로우를 간 것이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그런 경험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제가 운동 생활을 28년 했지만 아직까지도 그런 경험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 순간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너무너무 힘들었던 것 같아요.

▶ 임 감독님은 그 때 몇 번째로 나섰나요?

지금 기억도 안 나요. 두 번째였나, 세 번째였나 했을 겁니다. 그럴 정도로 정신이 희미했던 거죠.

▶ 영화속에서도 감독으로 나온 엄태웅 씨가 “지더라도 절대 울지 말자.”했던 것도 실제 장면인가요?

예. 감독 선생님이 울지 말라고 하셨어요. 저희는 패널티 드로우 가기 전부터 선수들이 벤치에서 막 울고 있었거든요. 심판 판정에 대해서도 속이 상했고, 너무나 계속되는 긴장속에서 경기가 흐르고 있었으니까요. 패널티 드로우까지 갔을 때 선생님이 “괜찮아. 울지마.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져도 괜찮으니까 잘 해봐.”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선생님도 목이 많이 메여서 제대로 말씀을 못하시는 상태였어요. 심판 판정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로 선생님도 많이 힘든 상태였고 체력적인 면에서도 많이 지쳐 있는 상태였죠. 그런데 마지막에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 우리가 흔히 ‘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요. 결과적으로는 어떠신 것 같으세요?

금메달을 땄다면 더 좋았겠죠. 그런데 정말 금메달을 땄다면 지금의 ‘우생순’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이렇게 다시 한 번 되돌리는 순간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해요. 그런데 그래도 금메달을 따보고 싶은 거죠.(웃음)

◇ 초등학교 4학년 때 선생님의 권유로 핸드볼 시작

▶ 임오경 감독은 언제부터 핸드볼을 하신 건가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30년째 핸드볼을 하고 있네요.

▶ 처음 시작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

체육선생님이 몇 번 권유하셨는데 제가 거부를 하다가 어느 날 문 앞에서 선생님이 저를 지키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를 강제로 끌고 가서 한 번 해보라고 하셔서 시작을 했는데, 제가 한 달 만에 6학년 선배언니들을 다 제치고 베스트 멤버에 들어가서 첫 대회에서 4골을 넣었거든요. 그렇게 첫 시합에서 4골을 넣고 베스트 멤버에도 들어가니까 제가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그래서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했고, 또 제가 잘하니까 재미가 있더라고요. 못했으면 아마 안했을 텐데 잘하니까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흥미를 갖게 되었어요.

▶ 권유하셨던 선생님은 아직 계시죠?

네.

▶ 어느 학교셨어요?

정읍에 있는 동신 초등학교였어요.

▶ 어떤 이유로 선생님이 권유하신 건가요?

키가 컸던 것 같은데요. 제가 체육시간에 핸드볼하는 선수들보다 체력테스트를 하면 더 좋은 결과가 나왔었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몇 번 저한테 시도하셨는데 제가 다른 쪽으로 흥미를 느꼈고 스포츠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 그럼 개인적으로는 무엇에 흥미가 있었나요?

저는 미술 쪽으로, 그림 그리는 쪽으로 관심이 많았거든요.

▶ ‘오경’이가 다섯째 딸이라서 그렇다고요? 언니는 ‘사경’인가요?

그런 건 아닌데, 저만 다섯째 딸이라고 이름이 그렇게 됐어요.

▶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셨나요?

제가 어렸을 때 상업을 하셨고, 지금도 하고 계세요.

▶ 체력이 어릴 때부터 뛰어나셨나보죠?

2남 6녀로 가족이 많았는데, 어릴 때부터 부모님 철칙이 ‘잘 먹어야 된다’여서 정말 어릴 때부터 먹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써주셨어요. 그리고 부모님이 불쌍하게 사는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셨는데, 제가 어릴 때부터 밥 세 끼를 꼬박꼬박 고깃국물에 먹게 하시고 항상 아버지가 그런 쪽으로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그래서 제 몸이 그렇게 건강해서 지금까지도 핸드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자식이 잘 되는 것은 부모님 덕이라고 하잖아요. 그것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고, 정말 부모님 덕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 그 당시 부모님들은 형편 때문에 먹는 것이라도 줄이려고 하셨는데, 오히려 잘 먹어야 한다고 하셨네요?

용돈은 안 주셔도 먹는 것은 잘 먹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또 옷은 좀 춥게 입어도 되지만 먹는 것은 잘 먹어야 된다, 끼니를 굶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말씀을 아버지가 항상 하시면서 저희에게 먹는 것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해주셨어요.

▶ 제일 좋은 유산을 주신 거네요.

몸이 건강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건강이 최고인 것 같아요.

▶ 선수생활 해보시니까 역시 ‘체력이 국력’이죠?

예. 오성옥 선수나 저 같은 경우는 정말 부상이 없어요. 성옥이도 정말 튼튼한 몸을 가졌는데, 우리 노장 아줌마들은 부상이 적어서 계속 지금도 선수로 활동하고 있죠.

▶ 그럼 국가대표로 선발된 것은 언제인가요?

상비군 주니어를 거쳐서 국가대표가 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끝나고 바로 세대교체하면서 됐으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 고 2때 국가대표 선수가 되었을 때 어땠나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상비군 주니어를 거치면서 제 꿈이 국가대표 선수였고, 국가대표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선수가 되는 것이 저의 목표였거든요. 그래서 국가대표가 되었을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가 있었죠.

▶ 중심이 되겠다는 그 다부진 성격이 지금 감독으로까지 만든 힘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

제가 어릴 때부터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는 참 특별한 아이였다.”라는 말씀들을 해주시더라고요. “너는 손을 댈 곳이 없었고, 너는 선생님 자체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아이였다.”는 말씀을 제게 많이 해주셨어요. 지금도 만나면 그런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저는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제가 그랬었대요.

▶ 어떤 면을 보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어린 마음에 너무 올바른 일만 하고, 선생님이 실수를 하나 하면 오히려 선생님의 그런 모습을 제가 채찍질하더래요.(웃음) 제자가 못된 거죠.

▶ 그만큼 자기가 하는 일에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이 있나보죠?

예. 그런 점이 많아요. 제가 해야 하는 것, 부족한 것은 다른 선수들이 한 번 할 때 저는 서너 번씩 뛰어다니면서 했어요.

◇ 아이 낳고 다음 날 윗몸일으키기, 2주 후엔 다시 훈련장으로...

▶ 1992년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땄죠?

네. 주위에서는 기대도 못하셨어요. 메달권에 들어가면 최고 잘한 것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그 당시 세대교체를 하고 최고 노장선수가 스물네 살 정도였거든요. 그 당시에는 스물네 살이 노장이었고, 제가 스물한 살 때였어요. 왕언니와의 나이 차이가 겨우 세 살 정도 밖에 안 났어요.

그래서 그 당시에는 정말 어린 선수들의 훈련량을 플러스해서 지옥훈련을 하고 운도 좋아서 금메달을 땄는데, 너무 어려서 금메달을 땄는데도 그 기쁨을 모르겠더라고요. 너무나 어려서 처음에는 ‘어머나, 나 연금타네.’하는 기분밖에 없더라고요. 또 너무 고생했기 때문에 ‘와, 시합 끝났다. 금메달 땄다.’하는 기분만 많이 들었어요.

▶ 금메달 따면 정말 연금은 얼마나 되나요?

그 당시 1992년도에는 금메달 따면 60만원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대표팀에 복귀하고 나이가 한 살 한 살 늘어가게 되는데, 나중에 다시 들어갔을 때는 띠동갑이 있더라고요. 지금은 열다섯 살, 열여섯 살 차이가 나요.

▶ 직접 선수로 생활해 보시니까 운동하기에 좋은 최적 연령대가 있는 것 같습니까? 나이가 들어도 정신력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체력적인 것은 좀 문제가 되지만 그만큼 젊은 선수보다 더 많이 노력을 해야하더라고요. 젊을 때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소화해냈는데 노장이 되면서 시키는 대로만 해서는 안되더라고요. 더 많이 노력해야 되더라고요.

▶ 1995년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MVP로 뽑혔을 때는 어땠나요?

그 당시 세계선수권 대회 때는 제가 좀 체구가 작았어요. 유럽선수에 비해서 작았기 때문에 유난히 많이 튀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그런 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그 때 해외에서 러브콜을 받기도 했겠는데요?

러브콜을 대학교 다닐 때부터 있었고, 1992년도 바르셀로나 올림픽 끝나고 나서부터 러브콜이 있었죠.

▶ 주로 어느 나라였나요?

유럽이라면 어느 나라든지 다 우리 한국선수들을 환영해주었어요. 서로 데려가려고 했었죠.그런데 저는 졸업하면서 일본에 가서 그 팀에 몸을 담고 3년만에 최연소 감독이 되었거든요. 그 때가 스물여섯이었는데, 그 책임감 때문에 러브콜을 받았어도 갈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게 중대한 책임이 맡겨졌는데 그걸 무시하고 갈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제의를 다 거절했어요.

▶ 유럽으로 진출하는 것이 더 좋은 조건 아니었나요?

실력은 세계 1인자인데 돈은 국내에서 최하위를 받고 있으니까 저희 선수들이 자꾸 외국진출을 시도하는 것이고, 국내 사정이 너무 안 좋다보니까 자꾸 해외로 나가는 것 같아요. 국내에서 자꾸 팀을 만들어서 경쟁도 부치고, 좋은 기업들이 많이 도와주시면 좋은 선수들이 해외로 나가지 않고도 국내에서 얼마든지 활성화를 시킬 수 있는데, 그런 여건이 안 되니까 자꾸 해외로 나가게 되는 것 같아요. 해외로 가면 그만큼 대우를 해주는데 굳이 국내에서 해야 하나 하고 자꾸 망설이게 되죠.

▶ 그렇게 바쁘게 운동하시면서 데이트는 언제 하셨어요? 지금 신랑과 만나신 때가 태릉선수촌 생활 하실 때였죠?

예. 저는 일 욕심이 너무 많고 이 핸드볼을 너무 좋아하고 사랑했어요. 그래서 결혼과 남자라는 자체는 생각도 안 하고, 일본 가기 전에 알고 있던 사람도 다 연락을 끊고 갔었어요.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사람들도 일본 가면서 일에 충실하려고 다 정리하고 떠났죠. 정말 핸드볼밖에 제 인생에는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그렇게 죽기 살기로 하던 도중에 다시 태릉의 러브콜을 받았을 때 남편이 저한테 관심을 가져서 프러포즈를 했는데, 한 눈에 반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로서는 황송한 거죠.(웃음) 만났을 때 결혼까지 이야기 하더라고요. 그래서 너무나 황당했어요. 제가 “참 맹랑한 사람이네요.”라는 말을 할 정도였어요.

▶ 굉장히 당황스러웠겠네요?

다른 사람들은 용기를 못내서 저한테 그런 말을 못했었거든요.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임오경은 너무 일욕심도 많고, 똑똑하고, 도도하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제 남편은 너무나 당당하게 저를 가로채더라고요. 그래서 반대로 쑥맥처럼 오는 사람은 다 짤리고 당당하게 나선 남편이 결국 저를 만나게 된 거죠.

▶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이었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는 참가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나요?

2000년도에도 러브콜을 받아서 제 기억으로는 5월 9일에 입촌하는 것으로 감독님과 이야기가 되었는데, 제가 5월초에 제 딸 세민이가 들어선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선생님께 너무나 죄송스러워서 이야기를 했는데, 선생님이 “하늘에서 주신 축복스러운 기쁜 일인데, 내가 뭐라고 하겠니. 축하한다.”라고 하시면서 한숨을 쉬시더라고요. 그래서 너무나 죄송했어요.

▶ 따님을 낳고 2주만에 다시 운동을 하러 갔다는 것이 맞습니까?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제가 그렇게 못했을 것 같은데요. 외국에서 감독을 하고 있고, 외국까지 나가서 월급을 받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책임감이 너무나 컸고, 회사측에 미리 얘기를 할 수 있는 계획적인 것이 아니고 갑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아이 낳고 바로 그 다음 날부터 윗몸 일으키기를 시작했고, 2주 뒤에는 아이를 바구니에 넣어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러가서 러닝머신을 했는데, 저는 그 당시에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 왜 그렇게까지 하셨던 건가요?

그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이상 제가 해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고, 저희 선수들이 그만큼 저한테는 중요했어요. 계속 너무나 중요한 시합을 남겨두었기 때문에 빨리 제가 몸을 만들어서 저희 팀 선수들에게 기쁨을 안겨주고 싶었죠.

▶ 일본 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처음이나 지금이나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치지가 않아요. 처음에는 너무너무 힘들고 외롭고 일본말이 안 되어서 옥상에 가서 맨날 울었고요. 한국에 가고 싶은 생각 때문에 너무나 많이 울었어요. 그런데 제가 애국자인지, 제가 우리나라에 먹칠을 해가면서까지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안들더라고요. 어떻게든지 여기서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힘든 것을 참아내느라고 많이 울었고, 또 아이를 낳고 살면서 부모님 생각도 많이 나고 외로워서 가슴이 아파서 많이 울었고요. 지금도 임오경이 남부럽지 않게 살 것이라고 하지만, 외국생활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거든요.

정말 눈칫밥 먹으면서 외국생활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아요. 주위 사람들은 제게 최선을 다해주시는데 그래도 저는 고향이 그립고 제 나라가 그리운 마음에서 아직도 눈물을 많이 흘리고 있습니다.

▶ 하루에 한 두 시간 밖에 안자면서 일본어 공부를 하셨다는 것이 정말인가요?

창단팀이어서 커뮤니케이션이 너무나 안 된 상태였고, 훈련과정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너무나 많이 힘든 상태였어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길은 빨리 공부를 해서 어떻게든지 한 마디라도 더 하고, 제가 일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일단 언어를 터득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책을 잡고 시작했어요.

정말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계속 책을 보고 읽고 쓰고 있더라고요. 옆에 있는 룸메이트에게 수도 없이 질문을 해대고요. 정확한 발음을 얻기 위해서 계속 다시 물어보고 혼자서 해보기도 하고, 옥상에 올라가서 발음연습을 하면서 정말 딱 두 달을 그렇게 했어요.

◇ 이제는 한국에 와서 후배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어

▶ 딸 세민이는 지금 몇 살이예요?

아홉 살이예요.

▶ 엄마 닮아서 똑 떨어지죠?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그런데 조금 어른스러워 보여요.(웃음)

▶ 일본 메이플 레즈팀을 정규리그 8년 연속 정상에 올려 놓으셨어요. 정말 대단하네요.

그 전까지는 일본에서 7년 연속으로 우승한 팀이 있었는데, 8년 연속 우승 기록은 제가 세웠어요.

▶ 이것은 운이 아닌 것 같아요.

네. 제가 터득한 것은 우승한 팀일수록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선수들에게 그런 것을 심어주었죠. 우승을 하게 되면 더 이상 정상이 없잖아요. 그런데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우승자를 이기기 위해서 계속 따라오거든요. 그 따라오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지만 이길 수 있다는 마음에서 선수들에게 항상 그런 교육을 시키면서 열심히 한 것이 8년 연속 우승을 할 수 있는 힘이 된 것 같아요.

▶ 우승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목표가 없어져서 좀 헤이해지기도 한다던데요.

그런데 저는 그런 부분을 선수들에게 강조하면서 더 많은 훈련량을 추가했죠. 우승을 하면 할수록 편하다고 하는데 저희 팀은 우승하면 할수록 힘든 과정을 거쳤어요.

▶ 운동을 하다보면 슬럼프에 빠지거나 그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을 텐데요.

작은 부상을 당했을 때 슬럼프에 빠지게 되고,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제가 원하는 플레이가 안 될 때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황이거든요. 그럴 때마다 ‘정말 이번 대회 끝나면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작은 부상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추한 모습 보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그래도 그것을 이겨내고 또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면 그런 마음이 없어지곤 하는데, 그런 상황에 처할 때마다 운동선수에게는 부상이 참 큰 것이거든요. 그리고 자신이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자기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때 정말 많이 힘든 고통을 느끼는데, 그럴 때마다 ‘이것이 나의 한계인가보다.’하는 생각을 하면서 자포자기하게 되더라고요.

▶ 딸 세민이 때문에 엄마의 자리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안하셨나요?

체육관에서 제가 훈련하는 동안 제 딸이 놀고 있고, 정말 지쳐서 체육관 한 켠에서 자고 있고 하는 모습, 또 혼자 노는데 뭘 잘못 하면 이러면 안된다고 제가 혼내면 아이가 우는 모습을 볼 때, 딸을 위해서 뭔가 해줘야 하는데 못해주니까 너무 마음이 아파서 많이 안아주고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체력이 남는 한 다 해주려고 한가한 시간에는 딸과 같이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딸한테는 너무나 많이 미안하죠.

더 안정적으로 엄마가 옆에서 교육을 시켜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항상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죠. 그래서 제가 딸을 보는 눈높이를 정말 높았는데 제가 해 줄 수 있는 선이 딱 중간 정도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제 딸을 보는 눈높이를 중간으로 낮췄어요.

▶ 전문직으로서 책임을 맡고 일하는 엄마의 애환이 있는 거죠?

그렇죠. 저는 제 부모님께 그런 보호를 받았는데 제 딸 또한 제가 보호를 해주어야 되는데, 그런 보호를 못해줘서 마음이 많이 아프죠.

▶ 남편께서도 일본에서 활동하고 계신데, 떨어져 계시다고요?

네. 스포츠를 해서 항상 와일드하고 과격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항상 보호받고 싶은 성격을 갖고 있거든요. 그래서 항상 남편이 자주 와서 안아주고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웃음)

▶ 영화얘기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영화를 보고 팬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팬들께서 이번 영화를 보고 많은 격려를 해주셨어요. 열심히 사는 모습이 너무 좋다고 하시고, 이번 영화를 통해서 핸드볼을 다시 알게 되고, 스포츠인들의 마음을 다시 알게 되었다고 여러 가지 말씀들을 해주시는데, 제가 제일 듣기 좋은 말은 저와 저희 핸드볼을 통해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셨다는 말씀을 해주실 때, 저는 ‘아, 내가 사람한테 기쁨의 대상이 되는구나. 그 사람이 힘든 상황에서 다시 웃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 영화 초반에 보면, 팀이 해체 되어서 문소리 씨가 마트에서 야채 파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이야기 인가요?

진짜 비슷한 거죠. 팀이 해체 되어서 선수들이 갈 곳이 없어서 아르바이트로 이런저런 곳을 찾아다니게 되고 그렇게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실제로 현실에서 있는 사실이예요.일류 선수 또한 상황이 안 좋아서 그만 두게 되고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요.

▶ 영화 끝부분에 나온 임영철 감독의 경기 직후 당시 인터뷰가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하는데요. 그 때의 환경에 비해서 지금 많이 변한 것이 있나요?

아니요. 그렇게 썩 많이 변한 것은 없어요. 너무나 선생님이 마음 아프고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많이 변한 것은 없어요. 하지만 현재 영화를 통해서 많은 변화가 생기려고 하는 기미는 보이는 것 같아요.

▶ 한국 핸드볼을 위해서 한국에 돌아와서 활동할 계획은 없으신가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섭외를 받은 곳이 있어요. 창단을 앞두고 있는 팀에서 감독 섭외를 받았는데, 모든 것을 제 욕심으로 따진다면 대우문제부터 시작해서 모든 면에서 한국을 포기해야 하는데, 정말 이번에 노장선수로서 대표선수를 하면서 저희 핸드볼 후배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좀 양보하고, 제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빨리 한국에 나와서 한국 핸드볼을 위해서 제 힘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제 개인 욕심을 다 버리고 제가 지금 그 사업의 진행 상태에 있습니다.

▶ 언제쯤 들어오시게 되는 건가요?

올해 안으로 꼭 되도록 하려고요. 올해 중반까지 넘어가지 않도록 하려고 진행상태에 있습니다.

▶ 일본 소속팀에서 들으면 야단나겠는데요?

소속팀 회장님께서 “누가 너를 한국에서 가만 놔두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지.”하시면서 한국분들의 마음을 아신다고 하세요. 그런데도 자꾸만 있어달라고 부탁을 하시는데, 그래도 이제는 한국에 나와서 후배들을 위해서 제가 해 줄 수 있는 해야될 때가 된 것 같아서 마음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 임오경 감독이 지금도 필요한 존재로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한 길 우물만 파서 그 한 길을 최선을 다해서 걸어왔거든요. 앞으로도 그 옆으로 벗어나지 않고 그 한 길만 계속 올바르게 걸어갈 생각이고,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보다 저는 항상 긍정적으로 보려고 생각해요.

▶ 그러면 세민이 동생은 언제쯤 볼까요?

기분같아서는 쌍둥이로 당장에 낳고 싶은데요.(웃음) 저는 나라의 부름으로 일을 하라고 태어난 사람같아요. 그래서 세민이는 “엄마. 동생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여자니까 아빠를 위해서 남동생 하나만 낳아주세요.” 라는 말을 자꾸 하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죠.


기사제공:노컷뉴스(http://www.cbs.co.kr/no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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