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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명절에 본 한국 복식문화 변천

웃음 뒤에 밀려오는 '그땐 그랬지'의 애잔함
'양복'이라는 표현 1876년 고종실록에 처음으로 등장
60년대: 박대통령 옷도 개조 시도…'표준간소복' 제정
70년대: 미니스커트 여성, 자든 경찰과 곳곳서 실랑이
80년대: 교복·두발 자율화 조치…남중생 '2푼형' 표준
최근: 하의실종 패션으로 허벅지 시술여성 크게 늘어

  • 웹출고시간2012.09.27 18:37:16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편집자

명절 분위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는 음식과 떡이 있다. 많이 변했지만 명절 무렵이 되면 떡방앗간이 붐비고 거리에는 한복이나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게 된다.

추석 명절을 맞아 근현대 한국복식 변천사를 살펴본다. 입가의 웃음 뒤로 밀려오는 '그땐 그랬지' 식의 애잔함을 느낄 수 있다.
◇ 양복의 등장

갑신정변 실패후 일본 망명시절의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왼쪽부터)

문헌상 '양복'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1876년(고종 13)이다. 척화파의 거두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일본과의 통상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리면서 '양복'(洋服)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했다.

'지금 기어든 왜인들은 양복을 입고 서양 포를 쏘며 서양 배를 타고 다니니, 이는 왜인이나 서양 사람이나 한 가지라는 것의 뚜렷한 증거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속겠습니까.(今倭之來者 服洋服 用洋砲 乘洋舶 此倭洋一體之明證也. 柰之何爲其所瞞哉)-<고종실록 13년 1월 23일자>

그러나 양복을 실제 착용한 인물은 보은출신 어윤중 등이 포함된 신사유람단이었다. 당시 조정은 1881년 일본에서 신식문화를 배우기 위해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으로 신사 유람단을 조직, 일본에 파견했다.

당시 양복은 문명 개화의 선두에 선 사람들이 착용한 것이라 해서 '개화복'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개혁을 시도했던 김옥균(金玉均·1851~1894)은 갑신정변(1884)이 3일 천하로 돌아가자 힘을 빌리고자 했던 일본으로 망명했다.(사진참조) 이때 양복을 입고 인천항에서 배를 탄 것으로 고종실록이 기록했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및 생도 10여 인은 모두 일본 공사관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고 몰래 인천항으로 가서 곧바로 일본으로 도망쳤다.'(金玉均 朴泳孝 徐光範 徐載弼及生徒十餘人 皆藏身於日本公使館 ·髮洋服 潛往仁川港 直逃日本)-<고종 21년 10월 20일자>

양복이 평상복의 반열에 오른 때는 1970년대였다. ○○라사 등 양복 맞춤 전문점이 들어선 시기가 이때였다. '라사'는 일본말 'ラシャ'의 수입말이나 포르투갈어 'raxa'에 어원을 두고 있다. 본래는 양털로 짠 두툼한 방모 직물을 의미했다.

1980년대는 삼성물산, 코오롱, 한일합섬, 제일모직 등 대기업이 기성복을 만들어 내면서 수제품 양복점들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90년대 이후 백화점과 대형 할인마트 등에서 양복을 취급하면서 관련 패션은 더욱 다양해졌다.

◇ 표준 간소복

1960년대 표준간소복 홍보에는 배우들도 동원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5.16후 국민정신 개조를 시도했다. 그는 정신은 옷에 따라 바뀔 수 있고 따라서 옷도 개조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박 대통령은 1961년 10월 전 국민들에게 '표준 간소복' 을 정하여 입도록 했다. 표준 간소복은 국가에서 일률적으로 지정했다는 의미에서 표준이고, 활동하기 편하다는 뜻에서 간소복이었다. 당시 정부는 표준 간소복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배우들을 동원, '신생활 간소복 패션쇼' 를 열기도 했다.(사진참조)

그에 앞서 정부는 국가가 먼저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는 뜻에서 '공무원 신생활복'을 공무원과 국영기업에 종사원들에게 착용토록 강요했다. 당시 남자 공무원들은 단추가 3개 혹은 4개 달린 윗옷을 입어야 했다. 또 여성 공무원은 원피스에 손목에는 소매 끝을 만들고, 치마는 무릎과 발목의 중간에 오는 옷을 입어야 했다.

공무원들의 경직되고 획일적인 근무복은 1996년 복장 자율화 조치가 있고 나서야 사라졌다.

◇ 미니스커트

1970년대 경찰들은 자를 들고 다니며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을 단속했다.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번져나간 히피문화가 팝음악과 함께 유입되면서 팝음악의 소도구 역할을 했던 장발과 미니스커트가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다.

1967년 미국에서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귀국하면서 붐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이후 대학생을 중심으로 복장이라도 자유를 만끽하자는 일종의 저항의식이 발동, 장발과 1970년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은 자를 들고 단속에 나선 경찰들과 추격전을 벌이거나 실랑이를 벌이기 일쑤였다. 당시 경범죄처벌법에 따른 미니스커트 단속기준은 무릎 위 20cm였다.

젊은이들의 머리모양과 복장을 법으로 통제하려는 정부의 조치는 그리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정부는 새마을사업과 병행해 주기적인 단속을 했으나 장발과 미니스커트의 유행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정부는 1980년 단속이 무리였음을 시인하고 내무부 장관이 단속 중지를 지시하게 된다.

하의실종 패션의 유행이 계속되면서 허벅지 지방흡입 시술을 받는 여성이 급증하고 있다.

미니스커트 문화는 지금의 하의실종 패션을 낳았다. 걸그룹이 퍼트린 여성들의 하의실종 패션은 자신의 숨겨둔 각선비와 성적 매력을 한껏 노출하는 계기가 됐다. 유행이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으면서 최근에는 허벅지 지방흡입 시술을 받는 여성들이 크게 늘어났다.

◇ 교복 자율화 추진

1939년 일본이 남자들에게 국방색 국민복을 입히기 시작하면서 학업과 일상 훈련까지 겸할 수 있는 국민복이 등장하였고, 이러한 형태의 교복이 광복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후 1969년 중학교 평준화 시책이 시행되면서 시도별로 획일화·균일화된 교복이 등장하였고, 학교별 특성을 없애기 위해 삭발에 검은 양복과 양철 단추, 이름표, 학교 배지와 학년 마크를 단 일정한 교복 형태가 유지되었다.

1981년 교복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당시 정부는 이해 12월 중 · 고교학생 교복 및 두발 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다. 골자는 교복은 학교별로 지정하고 두발은 중학생과 고등학생 사이에 차이를 두도록 했다.

중학교은 남학생의 경우 이른바 '2푼형', 여학생은 단발로 통일하도록 했다. 반면 남고생은 스포츠형, 여고생은 단발이나 컷트를 하도록 했다.

이때 정부가 완전 자율화 조치를 하지 못한 것은 △피복비 부담 가중을 우려한 학부모 자율화 반대 △일부 학생 사치성 조장 우려 △복지(服地) 및 제복 생산업자 반발 등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의 유흥업소 출입을 크게 걱정하기도 했다. 따라서 당시 정부는 미성년자 출입금지구역에 대한 지도를 강화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는 1983년 또 한번의 자율화 조치를 발표, 중고등학생이 교복을 입지 않고 자유복을 입을 수 있도록 했다. 배재학당 학생들이 처음으로 교복을 입기 시작했던 1898년 이후 85년 만의 일이다.

그러나 1986년 2학기 때부터 다시 복장자율화 보완 조치를 채택해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교복을 입거나 자유복을 입도록 했다. 사실상 교복 자율화 조치의 후퇴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청소년들의 탈선이 우려됐는지 밤10시가 되면 대략 '청소년·학생 여러분 이제는 가정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라는 내용을 매일 라디오 방송으로 내보내기도 했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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