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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정책 구호만 봐도 현대사가 보인다"

정권 교체기에 본 '그땐 그랬지'

  • 웹출고시간2012.12.31 17:55:43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광복-50년대
'한번 뭉쳐 민국수립, 다시 뭉쳐 실지회복'(정부수립)
'못살겠다 갈아보자'에 '갈아봤자 더 못산다'(선거)

60년대
'엄마는 신고하고 아빠는 잡아내자'(반공)
전국민 11시 55분만 되면 모두 재건체조(보건)

70년대
'절미하는 우리엄마, 밝아오는 새마을'(물자절약)
'찬장과 밥상덮개 만들어 파리를 막자'(생활개선)

80년대 이후
'아빠가 담배를 끊었어요 하얀연기 검은생명' (건강)
'낳을수록 희망가득 기를수록 행복가득'(출산장려)

크리스마스를 맞아 6.25 전장의 국군에게 뿌려진 위문엽서.

역대 정권의 국정운영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다. 이중 당시 정부가 내건 각종 정책구호도 중요한 열쇠말이 될 수 있다.

곧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차기 정부의 정책 구호가 어디에 방점이 찍힐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물론 지난 시절과 정치와 사회의 다양화 면에서 커다란 차이가 나면서 비교 자체가 무리일 수는 있다. 자료는 국가기록원(원장 박경국·전 충북도 행정부지사)의 도움을 받았다.

■광복-1950년대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됐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이때 '한번 뭉쳐 민국수립, 다시 뭉쳐 실지회복','대한민국 주권하에 남북을 통일하자'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6.25 한국동란의 전장에도 크리스마스는 찾아왔다. 그러자 당시 정부는 '기쁘다 주오셨네!' 문구가 적힌 위문엽서를 전 국군에게 발송했다. 그 위문엽서 뒷면에는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등의 구호가 적혀 있었다. <사진참조>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이 '못갈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걸자 여당인 자유당은 '가러봤자 더못산다'로 맞불을 놨다.

1956년 5월 제 3대 대통령 선거가 치뤄졌다. 이때 야당인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보자', '갈지 못하면 살수 없다', '혁신 밖에 길이 없다' 등의 구호를 내세웠다.

이에 맞서 이승만 후보의 자유당은 '갈아봤자 별수없다', '갈아봤자 더 못산다', '구관이 명관이다' 등의 구호를 맞불을 놨다. 결과는 70%를 득표한 이승만 후보의 낙승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자만은 얼마안가 4.19를 불러왔다.<사진참조>

■1960년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반공정책을 강하게 추구했다. 60년대 상반기에 '간첩우편신고엽서'라는 것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 우표 붙이는 자리에는 '우표붙이지 마시고 그대로 넣어시면 경찰서에서 부담하겠음'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사진참조>

60년대 간첩신고 우편엽서로, 수신자 부담으로 돼 있다.

박정권의 반공정책은 잦은 공비침투와 청와대 습격사건 등으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경해졌다.

'빠른 판단 빠른 신고, 대남간첩 일망타진', '일하면서 길가면서 숨은 간첩 찾아내자', '엄마는 신고하고 아빠는 잡아내자' 구호를 전국 길가 전봇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박정권은 국가재건운동의 하나로 의복간소화 운동을 강력히 전개했다. 이때 내걸은 구호가 '사치한 옷차림에 집안살림 무너진다', '너도 나도 검소한 옷, 새나라 건설' 등이었다. 당시 여배우들은 이 운동의 홍보에 동원돼 시가행진을 벌이기도 했다.<사진참조>

60년대 박정희 정권은 사치한 옷차람을 낭비로 봤다. 당시 운동에 여배우들이 동원됐다.

재건운동의 하나로 재건체조도 보급됐다. 당시 모든 국민은 매일 오전 11시 55분부터 정오까지 5분간 방송되는 '재건체조'의 구령에 맞춰 체조를 했다. 라디오가 없는 집에는 일명 '삐삐선'으로 연결된 스피커가 설치돼 있어 체조가 가능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1962년 닻을 올렸다. 이때부터 '재건에 때가 없다 지금부터 시작하자', '우리 모두 함께 뭉쳐 조국의 근대화와 번영을 위하여 일하자' 등 각종 경제구호가 봇물을 이뤘다.<사진참조>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가난을 추방하기 위한 운동이 시작됐다. 60년대를 말해주듯 경운기 대신 소가 그려져 있다.(빨간 원)

당시 총무처는 표어를 대대적으로 모집했고, 채택된 구호들을 담배갑, '공책' 등 일상용품에 인쇄, 대국민 홍보를 했다.

가족계획이 처음 실시됐다. 이때의 구호는 '덮어놓고 낳다보면 배고픔을 못 면한다', '적게 낳아 잘 기르면 부모 좋고 자식 좋다', '세살 터울로 세 자녀만 35세 이전에 낳자' 였다.

■1970년대

5천년만에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새마을운동이 말 그대로 요원처럼 타올랐다. 유신정원의 최대 의욕작인 만큼 각종 구호가 지붕개량, 취로사업, 길 넓히기 현장에 풍성하게 나붙었다.

'새마음 새슬기로 새마을을 건설하자', '유신으로 총화단결 새마을로 자조자립','협동으로 뭉친 마음 새마을로 달려가자' 등이 이때 접할 수 있었던 구호들이었다. 이들 구호는 담벼략 뿐만 아니라 약봉투에도 인쇄됐다.

1974년 강원도에서 열린 새마을지도자 대회에서는 '우리는 박대통령 각하의 조국의 안정 번영과 평화통일의 유신이념을 실천해 나가는 유신의 기수가 된다' 등의 내용이 담긴 '우리의 결의'가 채택되기도 했다.

새마을운동은 토지개량과 식량자급자족으로도 확대됐다. <사진참조> 특히 보리혼식에 심혈을 기울렸다.

당시 정권은 학생들의 도시락, 공공기관의 구내식당, 접객업소 등의 보리혼식 비율을 8:2로 의무화했다. 특히 접객업소가 이를 3회이상 위반하면 영업정지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70년대 절미저축운동은 주부들에 의해 부엌에서 시작됐다.

새마을 운동은 물자절약으로도 이어졌다. 이때 유행한 것이 이른바 '절미저축통장'이었다. 당시 주부들은 절미통에 매일 쌀 몇 숟가락 을 떼어넣었고, 나중에 이를 팔아 절미저축통장을 만들었다.<사진참조>

이때 유행한 구호가 '절미하는 웃음가족 늘어나는 우리살림', '절미하는 우리엄마 밝아오는 새마을', '너도나도 절미저축 부자되는 우리마을' 등이었다.

새마을운동은 생활환경 개선사업에서도 시도됐다. 당시 정부는 달력과 농가메모를 함께 인쇄한 것을 보급했다. 이때 '7월의 농가메모란'에는 이런 것도 쓰여 있었다.'찬장과 밥상덮개를 만들어 파리를 막자.'

70년대 농토배양 포스터이다. 60년대 소대신 트랙터가 등장했다.(빨간 원)

박정희 정권은 퇴폐풍조 정화사업도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와 관련, 충청북도는 1972년 1월 12일자 공문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각 시군에 시달했다.

'비밀요정, 무허가 유흥업소 및 부녀자 알바이트 행위에 대하여 식품위생법 제 25조 및 제 44조를 적용하여 가장 강력한 행정조치를 취하도록 하고 출입한 자에 대하여도 선도를 목적으로 그 사실을 보호자에게 통지한다.'

70년대에도 산아제한 정책이 계속됐다. 당시 '하루 앞선 가족계획 십년 앞선 생활 계획',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등의 구호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1980년대 이후

70년대까지의 정부정책 구호에는 '민주'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80년대 들어서 비로소 '민주'가 국가정책 용어로 나왔다. '꽃피우자 민주복지국가 온국민이 창조하는 새시대'는 이 시기를 웅변하는 구호의 하나였다.

이와 함께 사회생활과 건강에 관한 구호가 매우 구체적으로 등장했다. '질서는 편한 것, 자유로운 것, 아름다운 것', '아빠가 담배를 끊었어요 하얀연기 검은생명' 등이 구호가 이때 등장했다.<사진참조>

80년대 들어서 비로소 생활, 건강과 관련된 포스터와 구호가 등장한다.

자동차 문화가 대중화되면서 '아빠 오늘도 무사히 과속은 위험' 등의 포스터성 구호도 쉽게 눈에 띄었다.

80년대 가족계획 구호는 질적 변화를 보이게 된다. 이전까지는 산아제한이 목표였으나 80년대는 성비균형을 강조하는 '잘 키운 딸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로 바뀌었다.

90년대는 '아들바람 부모세대 짝꿍없는 우리세대', '선생님! 착한 일하면 여자짝꿍 시켜주나요'라는 표현이 이를 이어 받는다.

그러나 2천년대부터는 '산아제한'이 아닌 '산아증산'으로 돌아섰다. '낳을수록 희망가득 기를수록 행복가득', '자녀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형제입니다', '하나의 촛불보다는 여러 개의 촛불이 더 밝습니다'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 조혁연 대기자 자료도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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