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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본 설문화 변천

조선 궁궐에도 설연휴 존재…지금과 같은 3일
대신들 임금께 드린 인사는 '正朝에 문안드립니다'
조선시대도 지금 연하장과 비슷한 '세함' 풍습 존재
세뱃돈 강점기 때 대중화 …그전에는 과자 한 웅큼
조선남성 처가가기 싫자 "미나리 세배도 안늦는다"

  • 웹출고시간2013.02.07 19:16:17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편집자 주

설문화를 풍속 차원에서 접근하면 시간을 얼마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그러나 역사 차원에서 접근하면 '먼 과거'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또 보다 당양한 문화정보를 얻을 수 있다. 역사적인 시각으로 우리나라 설문화 변천에 접근해 본다.

청주출신 이서지 한국화가가 그린 '설빔'이다. 아이 표정에 만족감이 넘쳐나고 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른바 '묵은 새배'라는 것이 성행했다. 조선 순조 때 홍석모(洪錫謨·1781~1857)가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묵은세배를 하느라고 이날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초롱불을 든 세배꾼들이 골목길을 누비고 다녔다."

바로 묵은 세배는 설날 하루 전인 섣달그뭄에 올리는 세배로, 달리 구세배(舊歲拜) 또는 그믐세배라고 불렀다.

일제가 작성한 '구세배'(묵은세배)라는 그림으로, 당시까지도 묵은세배가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묵은 세배는 '한해를 무사히 보냈다'는 의미로 집안 어른이나 친지에게 감사의 절을 올리는 의미가 있다.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아무래도 여염집과는 다른 설날을 보냈다. 일양세시기(冽陽歲時記)라는 고서는 이렇게 썼다.

"대신 이하 모두 무릎을 꿇고 대신이 '정조(正朝)에 문안드립니다'라고 구두로 전하면(…) 중사(中使)가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나와 '지도(知道)'라고 구두로 전하면 대신 이하 모두 물러간다."

인용문 중 '정조'는 설날아침, '중사'는 왕의 명령을 전하는 내시, '지도'는 '알았다'는 뜻이다.

바로 신하들(종2품 이상 참석)이 워낙 많다보니 임금이 직접 대면하지 않고 내시가 중간에서 오고가며 설날 아침의 인사말을 전했다.

지금의 설날 법정 공휴일은 3일이다. 조선시대에도 설날 연휴가 있었다. 그것고 지금과 또 같은 3일 휴무였다. 일양세시기는 또 이렇게 적었다.

"설날부터 3일까지는 승정원(承政院) 각방(各房)에서는 공사(公社, 공무)를 보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관청에서도 출근을 하지 않는다. 또 시장도 문을 닫고…"

이처럼 휴무로 인해 궁궐과 관청이 문을 닫는 것을 조선시대에는 '파조'(罷朝)라고 불렀다. 철조(撤朝)도 비슷한 표현이나 이는 국상(國喪)을 당해 조정을 닫는 것을 주로 일컫었다.

연하장은 구한말 우리나라에 전래됐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세함'(歲銜)이라는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

ⓒ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지금은 연하장을 많이 보내지 않지만 과거에는 달랐다. 그러나 이 연하장은 우리 고유가 아닌, 외국에서 전래된 풍습이었다.

15세기 독일에서 아기 예수의 모습과 신년을 축복하는 글이 담긴 카드를 동판(銅版)으로 인쇄했다. 이것이 연하장의 시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후반부터 영국과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 받게 되면서 크리스마스 축하와 신년 인사를 함께 됐다.

이같은 풍습이 구한말 쯤 우리나라에 전래됐다. 그러나 꼭 같지는 않지만 조선시대에도 연하장과 유사한 세함(歲銜)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조선시대 관청의 아전과 군영(軍營)의 초급장교들도 새해가 되면 상관에게 문안 인사를 드렸다.

이때 자기 이름이 적힌 쪽지(명함)를 심부름 시키거나 자신이 직접 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상관들도 명절 때라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상관 집에서는 부재중에 세배온 사람이 명함을 두고 갈 수 있도록 상자를 마련해 놓았다. 또 방문객이 자기의 이름을 적어놓을 수 있도록 종이, 벼루, 붓 따위를 함께 갖춰놓았다. 이를 세함(歲銜)이라고 불렀다.

설날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세뱃돈 문화다. 특히 어린이들이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 세뱃돈 문화는 조선후기에 생겨난 것은 분명하지만, 처음에는 돈이 아닌 과자를 호주머니에 넣어줬다.

유만공(柳晩恭)이 헌종 9년(1843)에 지은 '세시풍요'(歲時風謠)에는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알록달록 색동저고리 아름답게 꾸미고 / 세배 가는 아이들 기뻐 어쩔 줄 모르네 / 돌아올 때 소매 가득 무엇을 얻었는지 / 꼬챙이에 꿴 곶감과 색색의 강당이네.'

강당은 강정을 말한다. 세뱃돈 문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대한제국기였다. 1097년 4월 14일자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을 독려하는 기사를 이렇게 썼다.

1907년 4월 14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 내용으로, 당시에 이미 세배 대가를 현금으로 줬음을 알 수 있다(선 부분).

ⓒ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9살 아이 이용봉도 세배하고 얻은 돈을 기탁하였거든 감동스럽도다. 감동스럽도다.'

이밖에 최영년(崔永年·1856~1935)이라는 인물이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지은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이런 내용의 한시가 등장한다.

'벌매듭 붉은 끈에 봉황 비단 주머니 / 새로 차고 집을 나서니 설 분위기 풍기네 / 어느새 허리에는 묵직해진 세뱃돈 / 십만 전도 넘든 듯 기뻐서 자랑하네.'

세뱃돈의 커지면서 어른들이 부담을 가지게 되자, 일제 강점기에는 이를 비판하는 신문기사가 많이 등장했다.

동아일보는 1926년 2월 13일자 한 기사의 제목을 '어린 아회에게 절갑을 주지마나'라고 뽑았다. 그리고 1935년 2월 7일자 기사는 대놓고 어린이를 비판했다.

'세배돈을 받어다가 집에서 얼마인지 세워가며 어디가서 또 세배를 하고 돈을 얻어올가하는 생각이 없지 아니하니 무심하게 귀엽다고 내버려두는 것이 어린이들을 몹시 추접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어린이 세뱃돈을 노리는 어른들을 비판하는 기사도 등장했다.

'아이들이 영문도 모르고 돈을 받아 나오면 독수리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돈을 뺏어 챙기는 부모, 아이가 꼬깃꼬깃 갖고 다니다가 떨어뜨리면 얼른 주워넣고 모르는 체 하다가 아아가 찾으면 '몰라. 너 일어버렸어' 하는 부모 등 (…) 다 열거하기 어렵다.'-<경향신문 1993년 1월 6일자>

지금도 남편들은 명절때 처갓집에 잘 안가려는 경향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당연히 더 그랬다. 유만공은 '세시풍요'에서 또 이런 시를 남겼다.

'초립 쓴 어린 신랑 어느새 장정되어 / 오건으로 바꿔 쓰니 그 모습 의젓하네 / 처갓집에 드리는 새해의 인사는 / 미나리 뜯을 때까지 기다려도 좋다네.'

지금도 그 문화적 잔상인, '처가집 세배는 앵두꽃을 꺾어 가지고 간다'는 속담이 구전되고 있다. 앵두나무는 일러야 4월 초순에 꽃을 피운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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