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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와 통한의 땅 '대만 기륭'…마지막 피체현장을 가다

박걸순 교수, 언론인 신채호 선생의 발자취 조명

  • 웹출고시간2013.02.20 20:10:55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편집자

지난 1월 17일, 대만 기륭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륭항은 대만 5대 국제항으로 손꼽히는 명소로서 인근에 유명한 관광지도 있어 항상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궂은 날임에도 관광객이 많았는데, 대부분 한국인이거나 중국 본토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기륭항은 대만의 북부 관문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국제 여객과 물류항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국제노선이 운항되고 있고, 물동량(TEU)은 세계 59위로서 62위인 인천항을 앞서는 커다란 항만이다. 따라서 기륭항은 인천항이 북중국을 넘어 동남아와 미주, 유럽 항만간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는 경쟁과 협력의 대상인 것이다.

기륭우편국에서 바라본 기륭항이다. 선착장에서 지근거리에 있다.

충북인의 숨결이 어린 기륭

이곳 기륭이 충북 출신 독립운동가의 애환이 깃든 장소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대표적 인물은 청원 출신의 신채호와 충주 출신의 류자명(柳子明)이다. 신채호는 1928년 독립운동 자금 마련의 부푼 기대를 안고 이곳에 도착하여 우편국에서 돈을 찾기 직전 피체되어 그의 조국 독립의 꿈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신채호에게 기륭은 환희와 통한의 땅이다.

한편 광복 직후 곧 귀국하지 못하고 대만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 류자명이 그토록 소원하던 귀국을 위해 1950년 6월 처자를 데리고 부산을 향해 떠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홍콩에 도착하던 날 6·25가 발발하는 바람에 귀환의 꿈을 접어야만 하였다. 따라서 살아서는 조국 땅을 밟지 못한 류자명에게도 기륭은 환희와 통한의 땅이다.

생전의 신채호 선생.

단재가 대만에 온 것은 위조 위체를 찾기 위해서였다. 즉 북경우편국에서 이곳 우편국에 가명으로 보내온 외국환을 현금으로 찾기 위해 온 것이다. 이른바 돈세탁을 하고자 한 것이다. 단재가 외국환을 위조하고자 한 것은 아나키스트 단체의 투쟁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1928년 4월 천진에서 한인 아나키스트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는 전년 9월 북경에서 열린 '무정부주의자동방연맹' 회의의 결정사항을 실천하기 위해 개최된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는 단재가 기초한 ·선언·이 채택되었고, 연맹의 선전기관을 설치할 것과, 러시아와 독일의 폭탄 제조 기술자를 고빙하여 북경 교외에 폭탄 제조공장을 설치할 것을 결의하였다. 선전기관에서 인쇄한 선전물은 세계 각국에 발송할 계획이었고, 제조한 폭탄은 동방연맹 가맹 국가에 보내 의열투쟁에 사용하고자 하였다.

잘못 알려진 단재의 피체 현장

지금까지 단재의 피체 과정이나 피체 장소는 잘못 알려져 왔다. 기륭항에 상륙하려다가 직전에 피체되었다거나, 돈을 인출하여 기륭으로 도피하다가 피체된 것이라는 견해가 대표적인 오류이다. 이는 당시 그의 공판과정을 보도한 국내 언론의 오보로 인한 결과이다.

신채호가 연행되어 심문을 당한 기륭수상경찰서이다. 현재에도 기륭항무경찰국으로 사용되고 있다.

단재는 천생 기자였다. 그가 아무리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암살·폭동·파괴를 강령으로 하는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에게 신문과 잡지는 독립투쟁의 최고의 방법이요 수단이었다. 국내에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필봉을 날리던 단재는 연해주에서는 대양보와 권업신문의 주필이 되어 동포사회를 계몽하였고, 잇달아 중국에서 신대한·천고·대동 등의 잡지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꾸려 나갔다. 기자 정신과 언론인으로서 소명의식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조선혁명선언·(1923)에서 일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정도의 신문을 발행하는 이른바 문화운동을 '적'으로 규정한 바 있다. 또한 '억 천 장의 신문 잡지가 1회의 폭동만 못하다'고 단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폭력적 아나키즘을 실천하기 위한 동반자이자 선전수단으로서 잡지 발행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였다. 마침 아나키스트 동지였던 대만 사람 임병문(林炳文)이 북경우편국 위체계에 근무하고 있어, 이를 위조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단재는 임병문과 협의, 액면가 6만 4천원에 달하는 거액의 외국 위체 2백여 매를 위조하여 일본·대만·조선·관동주 등 32개 주요 우편국에 위체로 발송하였다. 단재는 동지들과 함께 지역을 분담하여 위체를 현금화하고자 하였는데, 자신이 대만 지역을 담당하기로 하고 일본 문사(門司)에서 배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기륭우체국으로, 신채호가 피체된 옛날 자리에 건물만 신축하여 사용하고 있다.

기륭우편국에서 현금 인출 기다리다 피체

그러나 북경우편국에서 보낸 위조 위체가 4월 23일부터 대만 내 기륭·대북·신죽·대중·대남·고웅 등 각지의 우편국에 보내온 사실을 간파한 우편 당국과 일본 수상경찰서 형사들은 극비리에 수사에 착수하였다. 대만 각지에 보내온 위조 위체의 수취인은 중국인 유문상(劉文祥) 또는 유맹원(劉孟源)으로 되어 있었다.

사건이 발각된 줄 까맣게 모르던 단재는 5월 8일 기륭행 배에 오르며 무심코 선적부에 자신의 이름을 '유문상(호; 맹원)'이라고 기재하였다. 당시 그가 지니고 있었던 명함도 그렇게 되어 있었다. 여기서부터 불행이 잉태되었다. 수사에 혈안이 되어 있던 일제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급보를 받은 기륭수상경찰서 형사가 기륭항에 대기하다가 하선한 단재를 미행하였다.

선착장으로부터 기륭우편국은 도보로 5분 이내의 지근거리에 있었다. 미행이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한 단재는 우편국 위체계 창구에서 유문상 명의로 지급청구서에 서명 날인하고 현금 수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돈만 찾으면 의열투쟁의 꿈을 이룰 수 있었기에 단재에게는 무척이나 벅찬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확인한 수상파출소 형사가 그를 덮쳐왔다. 수상경찰서로 연행당한 그는 자신을 신문하는 형사들에게 자신은 중국인이고 북경어 외에 일본어나 조선어는 할 줄 모른다며 말을 하지 않고 버텼다.

그러나 일경이 곧 북경어를 사용하는 중국인을 불러 대담하게 하자, 단재는 이튿날 결국 일본어로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단재의 군자금 마련과 조국 독립의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당시의 상황은 중문과 일문으로 발행되던 ··대만일일신보·· 5월 12일자에 상세히 보도되었다.

기륭우편국와 일신교를 소재로 한 당시 엽서로, 이곳은 기륭의 랜드마크였다.

당시 기륭우편국은 기륭의 랜드 마크였다. 일제는 1912년 우정빌딩을 짓고 우편업무를 개시하였다. 건물 외벽의 테두리는 흰색 돌을 사용하였고, 붉은 벽돌을 쌓아 올렸다. 입구는 반원형의 계단으로 되어 있고 건물의 정상부는 돔의 형태를 하였다. 이 건물은 바로 앞에 있던 일신교와 함께 기륭의 상징적인 '지표 건축물'이 되어 엽서 사진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단재가 심문을 당하였던 수상경찰서는 바로 선착장 부근에 있으며 현재 기륭항무경찰국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채호의 피체와 심문과정을 상세히 보도한 대만일일신보 1928년 5월 12일자이다.

당당한 법정투쟁과 순국

당시 민족 언론은 이 사건을 '조선 아나키스트 비밀결사의 효시'로 평가하였다. 이 사건으로 단재와 임병문, 이필현 등 등 5명이 피체되었다. 단재는 대련으로 호송되어 혹독한 조사를 받고 공판에 회부되었다. 단재는 공판 과정에서 자신은 의심할 바 없는 아나키스트임을 자처하였다.

그리고 위조 위체는 동방연맹의 자금으로 쓰되 우선 아나키즘을 선전하는 잡지를 발간하여 동지를 규합하려 한 것이라고 밝혔다. 단재는 국제 위체 사기가 나쁜 일이 아니냐는 판사의 신문에 대해서 독립을 이루기 위해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전혀 양심에 부끄러움이나 거리낌이 없다고 답변하였다. 그의 답변은 조금도 기탄이 없고 당당하여 법정을 긴장케 하였다.

21일은 단재가 여순형무소의 차디찬 독방에서 쓸쓸히 순국한 지 꼭 77주기가 되는 날이다. 이 시대에 민족의 사표 단재가 더욱 그리운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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