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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 작사자 정인보 '쓸쓸한 개천절'

6·25때 폭격으로 사망… 평양서 영면
후손들 대신 두루마기 넣고 몇년전 '초혼묘'
충주 위치하나 아는 사람 없고 안내판 망실

  • 웹출고시간2013.10.01 19:58:55
  • 최종수정2013.10.02 11:23:40

개천절 노래의 작사자인 위당 정인보의 초혼묘가 우리고장 충주 가금면에 위치하고 있으나 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정인보 작사·김성태 작곡>

개천절 노래의 작사자인 위당 정인보(鄭寅普·1893~1950·사진) 선생의 의관장(衣冠葬·초혼묘의 일종) 충주 가금면에 위치하고 있으나, 이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으면서 교훈의 공간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그나마 남아 있는 묘소안내 표지판도 도로확장 과정에서 사라져, 올 위당의 묘소는 쓸쓸한 개천절을 맞고 있다.

역사학자이자 교육자였던 위당은 6·25동란 중인 1950년 7월 20일 북으로 강제로 끌려가던 중 9월 7일 미군 폭격으로 황해도 서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의 육신은 독립운동가 현상윤, 송호성, 박열 등과 함께 평양 인근의 '재북인사묘'에 안장돼 있다.

이에 남한에 남아 있는 위당의 핏줄들은 그가 생전에 입었던 두루마기를 부인 조씨묘와 합장하는 방법으로 몇해전 충주 가금면 장천리 1081-1 선산에 의관장을 조성했다.

위당 초혼묘의 상석에 '경인(1950년) 6,25 동란중 7월 20일 납북. 호 위당'이라는 음각자가 보인다.

초혼묘 상석에는 음각자로 '담(치자나무 담)園公 太皇帝 三十년 癸巳 五月 六日生 庚寅 六·二五 動亂中 七月 二十日 拉北 號爲堂 延禧專門敎受 國學大學長'이라고 쓰여 있다.

'담園'은 위당의 또 다른 호이고 '太皇帝 三十년'은 고종 30년인 1893년, 그리고 연희전문은 지금의 연세대학교 전신이다.

그리고 위 명문 옆에는 위당이 첫번째 부인이 成씨와 두번째 부인인 趙씨의 생몰연대도 함께 음각돼 있다.

위당의 손자인 진양(서울 광원전자공고 전 교장) 옹은 이날 전화통화에서 "첫번째 부인이 성씨 할머니는 아이를 낳던 도중 사망, 이후 조씨 할머니와 6.25 직전까지 함께 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조씨 할머니는 위당이 살아 돌아올 것으로 생각, 생전에 입던 두루마기를 고히 간직해 왔다"며 "이 두루마기를 조씨묘를 조성할 때 초혼 형식으로 함께 합장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이날 정 옹은 "위당과 벽초 홍명희가 사돈관계였다"라는 사실도 함께 확인해 줬다.

정 옹은 "위당의 맏딸 경완이 벽초의 둘째아들 홍기무의 아내가 된다"며 "위당의 묘가 지금의 위치로 이장돼 오자 홍명희가 비석과 상석을 쓰다듬으며 슬퍼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위당의 초혼묘는 가족사 뿐만 아니라 납북, 피폭, 이산가족 등이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시각으로도 적지 않은 웅변성과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묘수 입구의 진입로가 확장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정인보 선생묘소' 안내 표지판이 사라지면서 위당은 묘소는 쓸쓸한 개천절을 맞고 있다.

정옹은 "묘소진입로 입구에 '동래정씨위당선생묘소입구'가 새겨진 한자 시멘트말뚝 푯말이 있으나, 운전자가 이를 알아보기는 매우 어렵다"라고 말했다.

/ 조혁연 대기자

위당 정인보는

젊은 시절 중국 땅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했고, 귀국 후에는 붓과 펜으로 일제와 싸웠다.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역사 연구에 몰두하며 국학(國學) 보급과 민족문화 앙양에 일생을 바쳤다.

일제의 날조 역사 대신 '얼사상'을 주창했다. 또 실학이라는 역사용어를 처음 사용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도내 진천에 은거하며 학문을 연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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