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1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양보다 친한 염소' 이유 있었다

건조기후의 넓은 초지없고, 풍토병 '요마비' 자주 앓아
연산군 "양이 어떻게 생겼나" 궁궐로 데려오게 하기도
일제 1939년 단양 대강면 죽령에 군수용 '목양장' 설치
염소, 염이 달린 소라는 뜻…12띠 개념 5세기 처음등장

  • 웹출고시간2015.01.01 09:43:29
  • 최종수정2015.01.01 09:43:29
2015년은 을미년(乙未年) 양띠해다. 십이지(十二支)의 동물띠 개념은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먼저 '십간십이지'가 생겨났고, 이후 '십이지'에 쥐, 소, 호랑이, 토끼 등 12개 동물이 짝을 이뤘다.

이처럼 고대 중국에서 십이지에 동물의 이름을 부여한 것은 '농민들에게 시간개념을 주입하기 위함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십이지 동물띠 개념은 나라마다 이름이 조금씩 차이가 나고 있다.

중국의 십이지 동물띠 개념이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전래된 후 풍토화 과정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두 번째 가축띠가 '축'(丑), 즉 '소'(牛)이나 베트남에서는 '물소'가 두 번째 자리에 위치한다.

또 우리나라는 네 번째 가축띠가 '묘'(卯), 즉 토끼이나 베트남과 태국은 '고양이'(猫)가 그 자리에 들어가 있다. 이 밖에 우리나라에서는 마지막 열두번째 띠가 '해'(亥), 즉 돼지이나 일본에서는 멧돼지, 태국에서는 코끼리가 그 자리에 들어가 있다.

문헌상 우리나라에 십이지 동물띠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5세기 후반이다. 승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 제1권 '사금갑'(射琴匣) 조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돼 있다.

'왕이 곧 궁에 들어가 금갑을 쏘니 거기에 내전에서 분수(焚修)하는 중이 궁주와 상간(相奸)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침내 복주됐다. 이로부터 국속에 매년 정월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일(上午日)에는 백사(百事)를 삼가 감히 동작을 아니하고, 15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으로 제사지내니 지금에도 행하고 있다.'

인용문의 분수는 수행, '상해'는 1달 중 첫째 돼지날, '상자'는 첫째 쥐날, '상오'는 첫째 말(馬)의 날을 의미하고 있다. 이때가 소지왕 즉위 10년인 서기 488년이었다.

가운데 사각형 안의 12개 돌기 사이에 양각된 것이 십이지 동물글자인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이다. 무령왕릉 청동신수경(국보 제 161호).

십이지 동물 조각상이 새겨진 청동거울이 처음 등장한 것은 '무령왕 청동신수경'(523년)이다. 이 청동거울에는 꼭지를 둘러싼 정방형의 공간 안에 12개의 작은 돌기가 솟아 있고, 돌기 사이에 십이지 동물의 문자가 전서체로 양각돼 있다.

경주 김유신묘 십이지신상 중 양조각상.

국보 제161호로 후한대 거울을 모방했다는 설이 있다. 묘지의 십이지 석물 조각상은 경주 성덕왕릉 둘레석이 가장 이른 편으로, 능은 서기 736년에 축조됐다. 김유신묘의 둘레석에도 십이지상이 조각돼 있으나 후대 것이라는 설이 강하다.

2015년을 양띠, 그중에도 '청양띠'라고 하는 것은 십간십이지와 오행의 조합에서 비롯된다. 먼저 을미년의 '미'(未)는 십이지 중 8번째로 여기서 양띠가 나왔다.

그리고 을미년의 '을'(乙)은 오행상 '木'에 해당하고 그 '木'의 색은 '靑'이기 때문에 2015년은 '청양띠'의 해가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양(羊)보다는 염소가 더 가까이 있고 때문에 친근하게 느껴지고 있다. 둘의 외형 구분은 말 자체에 힌트가 담겨져 있다. 염소는 소(牛)는 소인데 염(髥)이 난 소라는 뜻이다. 염소는 턱밑의 수염이 매우 인상적으로, 바로 이것이 '염'이다.

이에 비해 양은 단면이 삼각형이면서 둥그럽게 말리는 뿔을 지니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양을 전국적으로 보급시키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

'세종실록' 1년 8월27일자에는 '하사한 양이 새끼 두 마리를 낳으면 하나는 나라에 바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정조실록' 6년 8월19일자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제사에 사용하는 양을 매양 전생서가 청나라에서 사들이고 있어도 쓰는 족족 바닥이 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절사(節使)가 갈때에 암컷과 수컷을 사 가지고 와서 나눠주면 머지않아 (양이) 나라 안에 두루 가득 찰 것입니다."

조선 조정이 양을 전국적으로 보급하려고 계속 애쓰고 있으나 성과는 없는 모습이다. 양이 조선시대 개체수가 많지 않았음은 '연산군일기'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양 세 마리가 풀어져 인정전에 들어왔다. 정원에서 아뢰기를 "전정은 조정 백관이 우러러 보는 곳이요, 양을 기르는 곳은 따로 있는데 맡아 지키는 자가 조심하지 않아 놓여 나오게 하였으니 통절하게 징계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양을 알지 못하므로 보려고 한 것이다" 하고….'-<연산군일기 3년 5월17일자>

양은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잘 사육되지 않았는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양은 건조한 기후의 넓은 초지에 방목해야 잘 생육되나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농업국가로. 넓은 초지를 조성하기가 쉽지 않다. 기후적로도 잘 맞지 않는 편이다.

이에 비해 산양이 가축화한 것으로 여겨지는 염소는 '면직의 원료는 나오지 않지만 많은 양의 젖과 고기를 얻을 수 있다. 양의 풍토병인 '요마비'(腰痲痹)도 주요 원인이 됐다.

<동아일보> 1939. 11. 5일자

'요마비'는 모기가 중간 매개가 되어 양 따위의 허리 부분이 마비되는 병을 일컫는다, 동아일보 1939년 11월 5일자에는 이런 기사 내용이 적혀 있다.

'거 팔월경부터 병인을 알 수 없는 면양 요마비 병이 평지대각군에 발생하야 다수의 폐사수를 내이여 면양사육의 전도에 자못 크다란 우려를 주고 잇다.(…) 이에 당국에서는 만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야 전력을 다하고 있으나 조선과 만주에만 잇는 특수한 병인만큼 병인을 알 수 없어 방역이 곤란하다는데….'

'양'자와 관련된 충북의 지명은 羊(양)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볕 陽' 자(예: 충주시 소태면 양촌리)나 갈래는 의미하는 '두 兩'자(예: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가 들어간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가축 '羊(양)'과 관련된 지명이 충북에 딱 하나 남아 있다. 방금 전의 설명과 이어지는 내용으로 일제는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남면북양'(南棉北羊)이라는 군수정책을 실시했다.

남쪽에는 목화 재배, 북쪽에서는 양을 많이 사육해 군수용으로 공출하려 했다. 이때 충북에는 지금의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마을에 1939년 목양장(牧羊場)을 조성됐고, 그래서 생겨난 지명이 양을 길렀다고 해서 '양터'였다. 죽령 9부 능선쯤에 위치하고 있다.

양과 관련된 표현은 쉽게 접할 수 있다. 꼬불꼬불 험한 길이나 험한 세상을 뜻하는 '구절양장(九折羊腸)', 갈래길에서 양을 잃어버렸다는 '다기망양(多岐亡羊)', 양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양두구육(羊頭狗肉)' 등은 많이 들어본 표현이다.

'저양촉번(羝羊觸藩)은 빈도수가 높지 않지만 재미있는 표현이다. 들어받기를 좋아하는 양이 울타리를 받았다가 뿔이 그 울타리에 걸리면서 발버둥치는 모습이다.

/ 조혁연 대기자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