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근대의 설 풍속도는?

'모던걸', 단발했다는 뜻에서 '毛斷걸'로 표현
좋게는 안 봐 '행동과 사상의 성격 파산자'로 묘사
설빔, 냇가서 빨으려다 방망이든 채 동사한 사건도
퍼머, 아이롱으로 호칭…"목욕때 단단히 싸매시요"

  • 웹출고시간2015.02.16 18:09:12
  • 최종수정2015.02.16 18:09:12
1백여년 전의 한국사회는 전근대(봉건)에서 근대사회로 전환되는 격동의 시기였다. 따라서 다른 어떤 시기보다 두 시대의 사회상이 두텁게 오버랩(중첩) 되면서 묘한 향수를 일으키고 있다.

올 설명절을 맞아 설빔, 목욕탕, 이발소, 모던걸 등의 풍속도를 당시 인쇄매체를 통해 살펴본다. 참고로 당시 고한글체는 독자 이해와 제작편의를 위해 현대어로 바꿨음을 밝혀둔다.

◇ 설빔

설에 입는 새옷을 설빔이라고 하나 뒷말 '빔'이 다소 어렵다. 지금도 우리지역 시골에 가면 '설빔'을 '설비슴'이라고 부르고 있다. 언어 진화의 흔적이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비슴'에 어원의 힌트가 남아 있다.

국어학자들에 따르면 중세에는 '아름답게 하다', '단장하다'의 명사를 '비슴'으로 불렀다. 여기서의 '슴'은 지금의 '시옷'이 아니라 중세어 반자음 시옷(△)이다. 바로 '설비슴'이 '설비음'을 거쳐 오늘날의 '설빔'으로 변했다.

따라서 설빔은 '설날에 입는 아름답게 단장한 옷' 정도가 된다. 1930년대는 설빔을 '슬옷'또는 '슬유'(신여성 8권 1호·1934년 1월)으로 불렀고 한자로는 세장(歲粧)이라고 기록했다.

여종 문안비가 쓰던 볼씨이다. 정수리에 끈을 맺다.

ⓒ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일제 강점기만 해도 문 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여성들은 '문안비'라는 여종에게 주인을 대신해서 문안을 다녀오게 했다.

1916년 2월 5일자 《매일신보》는 이때의 문안비의 옷차림새를 '간지면주 볼끼에 옥양목 치마를 입고 삼승바닥 세총 짚신을 신었다'라고 기록했다.

면주는 명주, 볼끼는 뺨과 턱·귀를 덮는 간단한 형태의 방한구로 끈을 턱밑이 아닌 정수리 부군에서 맸다.(사진) 옥양목은 명주, 세총은 가느다란 실을 말한다. 같은 날짜 《매일신보》는 화사하게 설빔을 입은 아이 모습을 '채송화 덩어리 같다'고 표현했다.

'푸릇 붉은 채송화 덩어리 꽃이 고운 옷을 입고 비단신 새 남바위에 한 것 화사한 도련님 작은 아씨들이 어른에게 손목을 붙들여 벙글벙글 하며 셋씩넷씩 가는 모양….’

일제는 1920년대가 되자 색깔있는 설빔입기 운동을 강력 전개했다. 겉으로는 때가 덜 타는 것을 내세웠지만 백의(白衣)의 말살 의도가 없지 않았다.

동아일보 1928년 1월 16일자.

'1. 헌옷감을 바꾸지 마시고 빛있는 옷감을 바꾸십시오.

2. 빨아서 다듬이질 아니하고 밟아서 다려 입을 수 있는 옷감을 바꾸어 해 입으십시오.'-<매일신보 1927년 1월 31일자>

일제 강점기의 《동아일보》는 어쩌면 설빔 풍속도와 관련해 가장 비극적인 내용을 기사화했다. 당시 설빔을 준비하던 곳은 모물전(毛物廛)이나 포목점이었다. 그러나 설빔을 장만하지 못해 헌옷을 빨아 입으려다 방망이 든 채 동사한 사건도 발생했다.

'지난 십일일 오후 세시경에 고성읍 앞으로 흐르는 불암내(불암천)에는 34세의 젊은 여자 한 명이 빨래를 하다가 방망이를 든 채로 얼어죽었는데 그 여자는 고성 남문 안에 사는 강계순의 아내 최순이로 생활이 극도로 빈한하여 조석도 변변히 먹지못하는터라 의복들이 있을리없는데 설에 새 것은 입고 싶은 맘에 자기가 입었던 헌옷을 빨려하나 단벌임으로 대신 입을 것이 없어서 여름 베옷을 입고 입었던 헌옷을 벗어 빨래를 갔다가 십수년래 처음되는 혹한으로 인하여 그만 얼어죽은 것이라고 한다.(…)그리하여 그의 집으로 운반하여 갔으나 그의 가장되는 이는 죽은 아내의 장례비가 없어 아직까지 매장을 못하고 있는 참혹한 정경에 있다더라.'-<동아일보 1928년 1월 16일자·사진>

◇ 목욕탕

대중목욕탕은 1900년대 부산에서 온천을 개발하면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당시 신문은 '온 일년 안 가던 사람도 목욕탕을 찾았다'고 기사화했다.

'여기도 해마다 섣달 그믐이면 한바탕 잘 버는 곳이라 묵은 해에 묵은 때를 떨고 깨끗한 몸으로 새해를 맞으려고 온 일년 안 가던 사람도 목욕탕 이삼일 전에 간 사람도 목욕탕 목간에를 드러가보면 벌거벗은 사람이 한 세상을 이룬듯 하며….'-<매일신보 1915년 2월 14일자>

이같은 명절대목으로 인해 목욕탕 주인은 상당한 수입을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 1916년 2월 2일자는 '모든 목욕탕에는 주야를 불구하고 목욕하는 사람이 어떻게 많은지 임시로 탕 하나 더 만들었더라면 좋왔을 것이라고 목욕탕 주인의 벙글벙글 하며 수입이 많음을 비상히 기뻐하는 것도 재미있게 보겠고….'라고 적었다.

◇이발소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남성들은 상투머리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명절이 되면 머리를 다듬어야 했고, 그러면서 당시 이발소는 무척 붐볐다. 《매일신보》 1916년 2월 2일자는 이렇게 기사화했다.

'또 이발소 같은 곳도 여느 사람을 물론이고 그믐 안에 머리를 깎으려고 어른 아해 여부없이 밀리는 곳이 이발소임으로 하나 둘씩이던 이발소도 이 기회에 돈 좀 모을 생각으로 고인을 삼사명씩 임시로 고용하고(…) 가위질 소리는 참으로 굉장하야 올해는다른 해보다 노상 웃어가며 돈지갑이 넘치도록 수입하는 것을 보겠더라.'

1930년대의 일제 강점기 중년 여성들 사이에는 명절이 되면 이른바 '파마머리'를 하는 것이 유행했다. 당시에는 이를 '아이롱'이라고 불렀다. 《매일신보》 1935년 2월 4일자는 당시 풍속도를 이렇게 적었다.

'아이롱을 한 머리를 오래 가게 할나면 목욕탕에 들어갈 때에는 수건으로 단단히 싸고 들어가시오. 목욕탕에서 나온 뒤에는 결단코 즉시 머리를 만지지 말고 물기가 다 걷히고 마른 뒤에 풀어야 합니다.'

◇ 모던걸

동아일보 1927년 8월 20일자. '毛斷걸'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당시 매체들은 신여성을 모던걸이라고 불렀고 한자로는 머리를 단발했다는 뜻에서 '毛斷'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했다. 그러나 당시 모던걸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1925년 잡지 《신여성》은 이렇게 적었다.

'이제 서울이나 평양같은데 공부갔던 여학생이 이런 설날을 이용하여 가정에 돌아간다. (…) 반듯이 분 바르고 향수뿌리고 반지끼고 구두신고 깜마치마입고 (…) 그러나 이 여학생은 이웃 사랍들의 욕하는 줄은 전혀 모른답니다. 비누냄새를 맡고 왜놈내 난다고 코를 막는 노파가 있는 줄로 모르고 트레머리한 것을 쇠똥머리했다고 수군거리는 사내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동아일보》 1927년 8월 23일자는 '모던걸'을 '행동과 사상의 성격 파산자'라고까지 했다.

'살림살이 부녀는 물론 아니고 그렇다고 여학생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기생인가 하면 역시 기생다운 곳이 없고 불량녀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도 아니하고 행동과 사상의 성격 파산자라고 할 것이 제일 적당할 듯하다.'

/ 조혁연 대기자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