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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천의 재발견 - 제방쌓기 역사

조선 초기에도 '국가적 관심사'
문헌 첫 기록 문종때 등장… 한명회도 하명
1906년 11일 동안 비 '청주판 노아의 방주'

  • 웹출고시간2010.07.15 19:02:02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1979년의 무심천 제방 모습이다. 당시 학생들은 3일간의 봉사작업을 해야 여름방학을 맞을 수 있었다.

청주 무심천의 제방쌓기 역사는 문헌상으로는 조선 문종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한명회도 세조로부터 관련 하명을 받는 등 조선 초기에도 국가 관심사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지금의 제방 모습은 일제 강점기인 1939년에 완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식 지명 작명법인 '양'(陽)과 '주'(州) 자의 쓰임은 그 사용법이 다르게 나타난다. 어떤 하천 북쪽에 도시가 발달해 있으면 '양' 자를 붙이게 된다. 한양(漢陽), 밀양(密陽)이 대표적인 경우가 된다.

반대로 어떤 하천 남쪽에 도시가 발달해 있으면 '주' 자를 붙이는 것이 상례였다. 청주(淸州), 충주(忠州), 공주(公州) 등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청주는 미호천, 충주는 남한강, 공주는 금강수계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보다 도시나 하천 규모가 작은 곳에는 '천'(川) 자를 붙였다. 제천, 옥천 등을 이런 사례로 분류할 수 있다.

하천을 끼고 있는 도시들은 큰물이 날 경우 부정기적으로 수해를 겪어 왔다. 그러나 청주는 도심을 관통하는 무심천이 이른바 천정천(天井川·ceiling river) 모습을 하고 있어 보다 극심한 범람 피해를 입어왔다.

천정천은 상류에서 토사의 운반이 활발히 일어나면서, 하천바닥이 부근의 지역보다 높아져 있는 하천을 말한다. 이를 예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제방쌓기다.

문헌상 무심천의 제방쌓기 첫 사례는 조선 문종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종 1년(1451) 정3품인 좌부승지 민건이라는 인물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그림참조)

'정사를 보았다. 좌부승지 민건(閔騫)이 아뢰기를, "충청도 감사가, 청주(淸州)가 물바닥은 높고 지면(地面)이 낮아서 누차 수재를 입었다는 이유로 제방을 쌓도록 청해 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물이 높아서 누차 넘쳤다면 백성들이 어찌 편히 거주하겠는가? 읍(邑)을 옮기는 것은 어렵고 앞서 제방을 쌓기를 청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이 고을이었던가" 하였다'.-<문종실록>

무심천 제방을 언급하고 있는 조선 세조실록에 한명회 이름(옅은 부분)이 보인다.

실록 원문은 '물바닥이 높고 지면이 낮은 것'을 '水高地卑'로 표현하고 있다. 세조도 총애하던 한명회에게 무심천 제방쌓기를 하명했던 것으로 나타난다.(그림참조)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를 청주에 보내어 제방을 쌓을 만한 곳을 살피게 하였다'.-<세조실록> 이는 빈발하는 청주 무심천 범람 피해가 단지 지역 문제만이 아닌, 중앙 조정의 관심사였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무심천 제방쌓기는 당시 경제 규모나 토목 기술상 물이 하안에 부딛히는 곳인 지금의 석교동 일대에 국한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무심천 최대의 수해로 1906년 대홍수를 꼽고 있다.

일본인 大熊春峰은 당시를 △그해 8월 26일부터 11일 동안 마치 노아의 홍수처럼 비가 퍼부었고 △이로 인해 시내 3백여 가구가 유실됐으며 △이후 침수로 집이 너무 많이 무너지면서 지붕과 지붕 사이를 건너다녔다고 적었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유난히 대홍수가 잦아 1917년 226가구, 1918년 170여가구 등이 유실 또는 파손되기도 했다.

일제는 대홍수에도 무심천 제방공사를 하지 않다가 1921년에 이르러서야 '청주 무심천 국부개수'라는 공사를 하는 것으로 당시 매일신보는 기사화하고 있다. 1932년에는 '청주 무심천 개수공사'가 있었다고 당시 동아일보가 적었다.

'청주지형도 및 청사진'이라는 자료를 보면 일제는 1918년 무심천 직강화 계획을 세운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무심천이 지금의 모습을 띄게 되는 것은 1939년에 작성된 '청주 시가지 계획구역 가로도'에서 였다. 따라서 지금의 무심천 제방 연한은 막 70년을 넘은 것으로 볼 수 있다.

1969~1971년 사이에도 무심천 제방공사가 있었으나 이때는 제방 돌붙임이 주된 공사였고, 유로변경은 구 자유극장 앞 등에서만 부분적으로 이뤄졌다.

한편 지금의 무심천 벚나무 가로수는 관선 나기정시장 시절에 조성됐다. 당시 버드나무를 둘러싸고 알레르기 유무해 논란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수종이 지금의 벚나무로 교체됐다.

/ 조혁연 대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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