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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부일의 수필로 찾아가는 문화유산 -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 '단종의 얼을 찾아'

어린 단종의 애달픈 하소연 잊지 못해…
장릉 향해 머리 숙인 '충절 솔숲'

  • 웹출고시간2010.03.04 21:07:34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16살 어린 소년 단종이 귀양지 청령 포에서 읊은 시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안타깝고 애절하다.

이 청령 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남한강 지류인 서강의 줄기로 둘려 쌓여진 서쪽 66봉 산 줄기가 절벽으로 막혀 있는 강원도 기념문화재 제 5 호이다.


강 나루터에서 이를 바라보니 산세와 강물이 조화되어 천혜의 귀양지임을 알 수 있다.

그 때 누가 귀양지 제일임지 알고 세조에게 천거 하였을 가 생각 하며 나룻배를 타니 흐르는 세월을 잊은 듯 강은 옛 강이지만 물은 새로운 물 되어 정처 없이 흘러간다.

강 건너 백사장에 내려 하늘을 보니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먹구름이 하늘을 가린다. 단종이 귀양 오던 날도 먹구름이 가렸겠지 하며 소나무로 꽉 찬 숲 길 따라 올랐다.

입구를 지나 한 구루의 소나무가 길게 누운 듯 서 있는데 단종이 슬플 때나 외로울 때 올라가 마음을 달랜 나무라고 한다.

그 앞에 조그마한 비각이 있고 그 안에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地)(단종이 여기 계실 때의 옛터)의 비문을 영조 39년 어명으로 세워 단종의 혼이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

이 비각은 전면 측면 각 한 칸이고 비의 높이 162Cm 화강암으로 비좌 위에 새 모양(조석) 새긴 비다.

근래에 복원한 어가 방안에 책을 보는 단종의 모습과 밖에서 이를 지키는 나졸들을 마네킹으로 만들어 옛 현상들을 재현 해 놓았다. 또한 어가에 현판 대신 시를 음각하여 달아 놓아 단종의 원망과 한이 서려 있는 듯하다.

어제시를 읽어보고 내려가면 황토로 다시 지은 초가집이 있는데 임금님을 모시던 궁녀들의 집터로 그들은 간곳없고 외롭게 집만 복원 되어 있다.

여기에서 오르면 나이가 600년이 넘은 관음송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서 있다.

처절했던 당시 단종의 생활을 지켜보았다 하여 관(觀)이요, 하염없는 울음소리를 들으니 음(音)이라는 뜻의 관음송으로 지상에서 1,2m 높이에 두 갈래로 나눠진 가지 사이에 걸터앉아 가슴 아픈 마음을 달랬던 나무란다.

1988년 찬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된 이 나무는 높이가 30m 가슴높이의 둘레가 5m이며 밑 둘레가 3,3m의 거대한 소나무이다.

이곳에서 서쪽 66봉 쪽으로 오르면 높이 80m의 낭떠러지로 "노산대"이다. 노산 대는 해질 무렵 단종이 봉우리에 올라 한양 궁궐을 향하여 시름에 잠겨 그의 아내 송 비를 부르던 곳으로 노산군으로 강등된 이름을 따서 노산 대라 부르고 있다.

노산 대에서 강 밑을 바라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의 아슬아슬한 절벽이다. 더 올라갈 수 없는 이곳까지 소년 단종이 매일 오르며 절규 했으리라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찌어지는 듯하였다.

노산대에서 반대로 내려가면 이끼 낀 비각이 서 있다.

앞면 비신에 "청령포 금표"(靑怜浦 禁票)라 쓰여 있는데 영조가 단종이 죽은 270년 뒤에 세운 비로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은 왕이 계시던 곳으로 무릇 사람들은 들어오지 말라"는 출입금지 푯말이다.

다시 말해서 단종의 행동반경이기도 하다. 창살 없는 감옥에 한 마리 외로운 새가 울며불며 금표 비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경고 문이다.

귀양 중 그 해 청령 포에 심한 홍수가 나 청령 포가 수몰되어 영월 한복판에 있는 관아 관풍 헌 으로 거처를 옮겼다.

관풍 헌 동쪽에 본래의 이름은 매죽 루이지만 자규 루라 부르는 누각이 있다. 단종이 관풍 헌 에서 지내며 이 누각에 올라 자규 시를 지고 읊어 자규 루라 부른단다.

달 밝은 밤 두견 새 울적에 / 시름 못 잊어 누 머리에 기대앉았어라 /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구나. (중략)

자규 시로 마음 달래며 관풍 헌에 있을 때 그의 다섯째 작은 아버지 금성 대군이 그를 다시 왕위에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세조에게 탄로가 났다.

이로 인하여 1457년 10월24일 저녁 세조가 보낸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차마 마시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공생 복득이란 자가 단종 뒤에서 활시로 목을 졸라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17세 꽃 같은 나이로 승하를 하니 하늘도 산도 울고 약사발을 들고 온 금부도사 왕방연도 울면서 서울로 돌아가다가 청령포를 감싸 흐르는 서강을 바라보며 절규의 시를 읊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안 같아야 울어 밤길에 놋다.

청령포 앞 길가 언덕 소나무 숲 시비 되어 오가는 이의 심금을 지금도 울려 주고 서 있다.

단종이 한을 안고 돌아가셨으나 그 누구도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이가 없었다.

이때 당시 영월 호장 엄홍도가 한 밤중에 시신을 거둬 산 속으로 도망가던 중 노루가 눈이 펄펄 내리는데 앉아 있어 그 곳에 땅을 파니 얼지 않아 단종의 시신을 쉽게 묻었다. 쫓기는 도중에 노루가 앉았던 자리에 엉겁결에 묻었지만 풍수가들에 의하면 명당이라 한다. 지금의 장릉이 그때 노루가 앉은 자리이다.

1517년 중종이 엄홍도의 후손에게 명하여 단종 무덤을 찾아내어 세상에 처음 알려진 단종의 묘 장릉 이다.

그 후 노산군으로 낮추어 부르던 이름을 숙종에 와서 단종임금으로 추서 하여 묘를 왕릉으로 만들어 "장릉" 이라 부르게 하고 숙종이 왕으로 복권시킨 시를 지어 읊었다.

어리실 때 임금 자리를 물려주시고/멀리 벽촌에 계실 때에 마치 비색한 운을 만나리/ 임금의 덕이 이지러지도다/ 지난 일을 생각하니/ 목이매고 눔물이 마르지 않는구나. (생략)

그 뒤에 숙종이 엄홍도의 충절을 높이 사 죽은 그에게 공조판서의 벼슬과 후손에게도 벼슬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비운에 간 단종을 위하여 해마다 한식날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 후 1967년부터 단종 제로 바꾸어 범 영월 군민 적으로 향토 문화재를 거행하고 그를 추모해 오고 있다.

장릉은 사적 제196호로 봉릉함에 있어 상설 추봉된 예에 따라 난간 석, 무인석을 설치하지 않고 사각옥형 장명등을 설치하여 장명등이 장릉에서 처음 보인다.

장릉의 배치는 울타리인 곡장 3면, 상석, 장명등 하나 망주 석, 문인 석, 석마, 석양, 석호, 각 한 쌍씩 배치하였다.

사적 내에는 제를 지내는 정자 각 수라청, 망료위, 표석, 홍살문, 재실등이 있다.

1791년 정조가 왕명으로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배향하는 배식단을 설치하였는데 다른 능에서는 볼 수 없는 배려이다.

그 밖에도 배식단사, 영천, 엄흥도정려 각, 배견정 등이 있고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죽은 사육신, 절개를 지킨 네 충신 등 10충신 위패를 모신 창절 사가 있다.

이릉 기슭은 소나무로 둘러 싸여져 있는데 나무들이 능을 향하여 절을 하듯 숙인 모습이다.

자연도 억울한 단종의 넋을 위로하는 모습이어서 장릉을 향해 머리 숙여 고운 님 단종의 명복을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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