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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범

시인

며칠간 내린 비의 마술일까. 오월 푸른 빛이 한층 짙어졌다. 빗물을 받아놓은 물통 안의 물빛이 유난히 맑다. 하늘에서 떨어진 한 방울 한 방울의 빗물은 어디론가 흘러 한곳에 모이고, 모인 물은 다시 줄기를 만들어 시내로 강으로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높은 데에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게 물의 일반적인 특질이지만 사실 물은 여러 가지 다른 성질을 갖는다. 그 특질에 의해 지구상에 빛나는 자연의 풍경을 만든다. 빙하와 안개 그리고 구름은 물의 색다른 성질이 만든 신비한 물질들이다.

어둠에 잠긴 청계호수

저녁 한 권을 다 읽은

촉촉한 물의 알갱이들이 호수를 빠져나온다

소리 없이 주변을 다 암기한 물안개

호수를 딛고 일어나 허공 한 귀퉁이를 펼친다

주변을 감싸는 자욱한 물의 필체들

무지개로 날고 싶은 꿈

뼈가 없어 흐느적거리며

산자락을 휘감고 계곡을 오르지만

하루도 살지 못하는 헐렁한 물방울들

수없이 날개짓을 하여도 하늘에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가만히 걸어오는 아침

어둠을 살펴 조심조심 걷지만

햇살에 녹아내리는 물의 손가락

풀잎의 겉장이 다 젖었다

호수를 빠져나와 날마다 주변을 복습하는

물의 과외공부

또 새벽을 기다린다

「물의 과외공부」 전문, 박용운 (시집 물의 과외공부, 가온문학, 2024)

시의 소재는 호수 속의 '물의 알갱이'다. 시인은 호수를 바라보고 관찰하며 기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네 원소 즉 '물, 불, 공기, 흙' 가운데 물은 다른 원소와는 다른 특이한 성질이 있다. '액체, 기체, 고체'의 세 가지 성질을 가지고 지구를 순환한다. 그 가운데 시인이 본 건 기체와 액체의 성질을 가진 물이다. 시인은 이러한 물의 과학적 형태 변화와 운동성에 "물의 과외수업"이라는 상상력을 가미하여 시의 문장을 초현실적으로 풀어낸다. 거기에 인간적인 꿈이 결합하며 시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시에서 물이 끝내 도달하고 싶은 것은 "무지개"로 나는 일이다. 그리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저녁 한 권"을 읽고"주변을 다 암기하고" 자신의 "필체"를 써나가지만 "수없이 날개짓"을 해도 "하늘에 한 글자도 쓰지 못한다." 아침이 오면 그 물의 "손가락"은 이슬로 "풀잎의 겉장"을 적실 뿐이다. 그리고 같은 날씨가 반복되는 한 물방울이 하늘 높이 올라가 무지개로 빛나는 일은 허사가 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물방울은 포기하지 않고 호수 "주변을 복습"하고, "새벽을 기다린다." 무거운 증기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호수 속 물의 운명에서 시인은 포기하지 않는 '인간 정신'을 읽어낸다. 사람의 경우는 어떨까.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일을 오랜 시간 무한 반복하는 건, 무지개를 빚기 위하여 물이 하늘로 오르는 일과 같다. 아마 어떤 이들은 지금도 자신의 꿈을 위하여 부단히 자기 학습을 무한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수천 번의 실험 끝에 한 가지 원리를 찾아낸 에디슨처럼 말이다.

새벽 한 시다. 잠시 바깥에서 축축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신다. 도로변 치킨집 여사장님이 이제야 일을 마치고 분주하게 가게 안을 정리한다. 우리의 일상이 모두 저런 게 아닐까. 매일 조금씩이라도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 그 힘과 에너지가 응축되어 삶의 원천이 되고 변화가 되어 새로운 삶을 만든다는 것 말이다. 공중에 떠있던 물의 입자가 조용히 잎사귀에 내려앉는다. 아름다운 연초록의 오월 잎새들. 과외수업을 마친 물의 힘을 받아 내일의 잎은 오늘의 잎보다 더 푸르고 풍성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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