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웹출고시간2014.07.03 18:48:29
  • 최종수정2014.07.03 18:48:29
어떻게 하다 감독이 됐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다. 어렸을 때부터 감독에 대한 대단한 꿈을 품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 번도 감독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때는 그런 직업이 있는지도 몰랐다.

4년 전까지는 '장철수'를 검색하면 항상 배우 오지호가 떴었다. 드라마 '환상의 커플'에서 오지호가 '장철수'라는 캐릭터를 연기했었기 때문이다. 나상실의 남자친구인 장철수에게 빼앗겼던 장철수란 본명을 실제인물 장철수가 되찾기까지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한 사람의 일부를 보려면 현재만 보면 되지만, 한 사람의 전체를 보려면 반드시 출생과 성장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에 과거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거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전기가 6살 때 들어올 정도로 외진 강원도 산골이다. 호롱불, 촛불, 반딧불만 보던 내가 처음으로 백열등 전구 '다마'의 황금색 불빛을 보았을 때 받은 충격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처음 전기를 발명해 불을 켰던 '에디슨'보다야 덜하겠지만, 아무튼 놀라움 그 자체였다.

조금 더 형편이 나은 집은 형광등을 달았는데. 초크 다마의 번개 불같은 지직거림 이후에 팟!하고 켜지는 형광램프의 비취빛은 어린 촌놈의 입에서 침을 줄줄 흐르게 할 정도로 황홀경을 자아냈다. 그 이후에 들어온 장롱형 흑백 테레비에 대해서는 "오 마이 갓!" 신이 하지 못한 일을 인간이 한 최초의 일이라고 밖에는 설명하지 못하겠다.

당연히 동네 사람들은 흑백TV가 있는 집에 모두 모여 극장식 TV관람을 즐겼고, 아무리 가난해도 빚을 내서 TV와 안테나를 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동네에 전화가 한 대 들어 왔고, 전화가 오면 반장님은 확성기로 "누구누구 어머니 전화 받으러 오세요~"하고 방송을 했다.

도시에서 태어났으면 내 아버지뻘 되는 분들이 겪을 일을 나는 겪었다. 그렇게 뒤처진 동네에서 태어난 게 훗날 영화를 하는데 있어 이토록 엄청난 도움이 될 줄은 달도 모르고 별도 몰랐다. 그 곳은 다름 아닌 충절의 고장, 박물관 고을 영월이다.

영월중에서도 변두리 산골에서 초등학교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 워낙 산골이라 학생 수가 얼마 안됐고, 그래서 공부를 안 해도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말썽쟁이였던 내가 첫 성적표를 받는 순간 우등생으로 이미지를 갈아탔고,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은 나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이런! 제도권 교육이 날 살릴 줄이야... 한번 칭찬 들으면 또 칭찬 듣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일거다. 게다가 무서운 아버지도 성적표나 상장 앞에서는 약하다는 걸 알고 난 후부터는 나의 안위를 위해서도 성적관리를 했다.

하지만 '제천시'에 있는 고등학교를 가면서부터 공부가 맘대로 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성적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잘 오르지 않았다. 그 당시 문과 이과 한 반씩 특수반을 만들어 우수 학생들을 집중 지도해 주었는데. 항상 몇 등 차이로 그 반에 못 들어갔다. 그 반 학생들만 대우 받는 모습에 상당히 박탈감과 서러움을 많이 느꼈었고, 좌절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가장 아름답고, 추억이 많다던 고등학교 시절은 나에겐 어두운 터널과 같았다. 그때가 내 인생의 암흑기였다는 사실은 한참 나이를 먹은 후에야 느끼게 되었다. 제천이라는 '시'에는 영월'군'에 없던 영화관이 몇 개 있었는데, '성룡영화' 같은 게 나오면 보러가는 애들이 있었다. 나로서는 TV에서도 하는 영화를 뭣 하러 극장에서 돈 내고 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넉넉한 형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영화는 나에게 사치였다. 내가 갖지 못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당시엔 영화라는 자체를 매우 싫어했다.

그렇게 싫어하던 영화를 직업으로 삼아 현재 영화감독을 하고 있다니...인생이란 참 묘하다.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은밀하게 위대하게' 감독

묘한 과정을 간략하게 쓸 수 없지만 그래도 한마디로 써 본다면, "어쩌다보니"이다.

대학에 들어간 이야기부터 하자면 대학에 들어가서야 대학이란 곳에 예체능과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학에 문과와 이과만 있는 줄 알았었는데!! 어처구니가 없었다. 스스로가 얼마나 우물 안에 살았었는지 여실히 증명이 되는 순간 학교를 자퇴했다. 그리고, 학교 다닐 때 즐거웠던 미술시간을 떠올리며 입시미술학원으로 갔다. 삼수생의 나이로 1년간 꿈을 쫒는 시간은 로얄 제리 맛이었지만, 1년 후 내가 받은 것은 대학합격증이 아니라 군대 영장이었다. 대학 탈락이라는 인생의 첫 실패 후 군대에서 와신상담하며 몰래몰래 공부를 했고, 드디어 제대 후 두 달 만에 원하던 학교에 합격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러나 광고가 하고 싶어 천신만고 끝에 들어간 미대 시각디자인과에서 내가 자주 만나던 선배들이 모두 영화광이었다. "광고도 영화에서 나왔다. 영화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그들과 어울린 것이 큰 실수였다. 언젠가 광고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겠지하고 그들을 ㅤ쫒아다니며 단편영화작업을 도와주다보니 영화의 세계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됐고, 나도 모르게 조금씩 발을 들여놓게 됐다. 그로부터 5년 후 서른 살이 가까웠을 무렵 정신 차리고 보니 그들은 모두 영화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만 빼고ㅜㅜ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