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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보영

결실한 열매들로 가득한 들녘이다.

지난 봄여름 내내 꽃눈이 트고 열매를 맺으며 자라 가느라 성숙의 함성으로 충만하던 가을 들판은 온통 황금빛이다. 심었는가 싶었는데 콩고물처럼 부드러운 꽃술을 달고 나락이 패는가 싶더니 익은 곡식들의 수런대는 소리로 떠들썩하다. 나뭇가지에 걸린 세월을 익히며 붉게 물들어 가는 산 벗 나무 잎들은 바람의 입맞춤에 자지러진다.

시골집 마당가에 널려 있는 붉은 고추는 햇살아래 곱기만 하다. 고추가 널린 마당가는 방금 비질을 한 듯 싸리 빗자루 지나간 흔적이 있어 더욱 정겹다. 햇살이 고루고루 닿도록 고추를 뒤적이던 아낙네는 가끔씩 손길을 멈추고 먼데 하늘을 바라본다. 아낙의 눈빛이 하염없이 깊어 보이는 것은 어쩌면 집 떠나 타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이 못 견디게 보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볕 좋은 날 시골집 마당 하나 가득 널려 있는 붉은 고추들 위로 맑고 푸른 햇살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볼 때면 모든 일상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털퍼덕 주저앉아 마음껏 햇살을 맞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늘 아쉬웠다.

풋풋한 향기로 넘쳐났던 나의 정원에도 이제는 고운 빛깔과 달콤함은 모두 사라지고 마른 잎들만 갈바람을 맞으며 서걱거리고 있다. 따가운 한 여름의 햇살도 넉넉히 가릴 수 있을 만큼 크고 넓었던 연잎도 이제는 아버지가 입으셨던 베옷처럼 퇴색해 버렸다. 곧고 긴 목대위에서 하늘을 향해 오만스러우리만치 당당한 모습으로 피어있던 백련도 이제는 순백의 제 빛깔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다갈색 연밥들이 메마른 줄기위에 매달려있을 뿐 달콤한 향기에 매료되어 넘나들던 벌 나비들의 발걸음도 뜸해진지 오래다.

갑자기 윙윙거리는 기계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달려가 보니 겨울채비에 마음이 급해진 남편이 마른 꽃들을 잘라내고 있다. 아차, 싶어 소리를 쳐보지만 벌써 일부분은 잘려져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다. 제 모습을 잃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저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까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쿵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동안 나의 손길과 마음이 머물렀던 흔적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 같은 안타까움이 전신을 휘감아 돈다. 저들을 가꾸며 흘렸던 땀방울이 얼마며 고운 꽃들을 피우내기 위해 가슴앓이 한 적은 또 얼마나 많았는데.

성큼 닥아 온 가을의 문턱에서 서성이고 있는 내안에 또 하나의 나이테가 자리 잡을 채비를 하고 있다.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닥아 오는 세월을 받아들여야한다는 사실 앞에 가슴이 시리다. 지나 온 세월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지금보다 더 잘 살아 낼 자신도 없으면서 해가 갈수록 아쉬움만 더해간다. 요즈음 나는 부쩍 눈물이 많아진 것 같아 부끄럽다. 누가 볼 새라 이 무슨 주책인가 싶어 멈추어 보려 하지만 한 번 터진 눈물샘은 왜 그리도 마르지 않는지 야속하기만하다. 스치는 바람소리에도 마당하나가득 피어 있는 들꽃을 보면서도 공연스레 눈물이 난다. 그 중에도 어려운 역경을 딛고 목표점에 도달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더욱 그렇다. 그 것은 아마도 결실한 열매들로 가득한 들녘이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고 뇌성과 바람을 견뎌 내었을까 싶어서이고 정상에 오른 이들의 삶의 뒷면에 있었을 고난의 흔적들이 느껴져서인지도 모른다.

가을걷이를 하며 마른 꽃들의 모습에서 우리네 일생을 본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련만 그들의 뒷모습에서는 웬 지 시린 바람소리가 난다. 푸르고 윤기 나던 시절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써 힘쓰고 애써왔던 지난날의 삶이 피붙이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잊혀져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들의 어깨를 더욱 좁아지게 하는지도 모른다.

진정 아름다운 것은 어떤 것일까. 제 소임을 다하고 떠나는 것들 모두는 소임을 다 했다는 그 이유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빛나는 아름다움을 지녔으리라. 아버지가 입으셨던 상복처럼 빛바랜 정원안의 연잎들도. 경기장을 떠나는 패자의 뒷모습도. 운신의 폭이 줄어드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의 가녀린 어깨도 진정 아름다운 것이리라. 그들이 살아 낸 세월의 뒤안길에 치열했던 삶의 흔적들이 녹아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만추의 낙엽들이 수런거리는 이 가을날의 쓸쓸함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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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