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누에치기를 무척 중요시했다. 누에에서 생산된 견사가 비단의 원료가 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정은 매년 친잠례(親蠶禮), 선잠제향(先蠶祭享), 잠령제(蠶靈祭) 행사를 가졌다. 전자는 왕비가 궁궐에서 직접 누에를 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왕비가 직접 모범을 보임으로써 양잠을 장려하는 의미가 있다. 이중 누에고치를 직접 거두는 의식은 수견의(收繭義)라고 불렀다. 선잠제향은 매년 늦은봄 길한 뱀날(巳日)에 양잠신인 서능씨(西陵氏)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던 행사를 일컫는다. 잠령제는 매년 5월초 봄누에가 시작되기 전에 전국 잠사인들이 누에의 혼을 위로하고 풍잠을 기원하는 제를 말한다. 조선이 양잠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건국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성계가 "농상을 권하고 학교를 일으키라"는 하명을 직접 내린다. "농상(農桑)은 왕정(王政)의 근본이며, 학교는 교화하는 근원이다. 즉위한 이래로 여러 번 교서를 내려 농상을 권하고 학교를 일으키라는 뜻을 보였으나, 수령은 거행하는 데 힘쓰지 않고 감사는 더 고핵(考劾)하지 않아서 모두 실효가 없으니, 내가 심히 염려된다."- 양잠과 관련된 지명으로 서울에 '잠실'(蠶室)이 남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과거 누
세종대왕의 국가통치에 대한 열정은 실로 다방면에까지 뻗쳤다. 그중에는 세정(稅政)에 대한 개혁도 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과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 등이 이때 탄생한다. 전분육등법은 말 그대로 토지 비옥도를 여섯 등급으로 나누어 전세(田稅)를 걷는 것을 말한다. 연분구등법은 그해 농사의 풍흉을 9등급으로 나누어 전세를 거둬들이는 것을 일컫는다. 이 경우 최고 풍년을 들었을 때는 '上上年', 가장 흉년이 들었을 때는 '下下年'으로 표현됐다. 충북은 도세가 미약한 편이다. 때문에 중앙에서 어떤 행정적인 시험을 하고 싶을 경우자주 그 첫번째 대상지가 됐다. 세종이 두 전세제도를 시험한 곳 역시 충청도, 그중에서 청안현이었다. 시험 과정은 1년 동안 매우 치밀하게 진행됐다. 먼저 판관 등을 청안으로 보내 땅의 비옥도를 등급으로 메길 수 있는지를 알아보게 했다. '경차관으로 내자 판관 박회·사직 조욱생 등을 청안현에 보내어 그곳의 전지의 품등(品等)을 분류하게 하였다.'- 그 다음에는 정인지, 김종서 등 당대 거물급 인사를 파견됐다. 이는 세종이 두 전세법에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다음 내용은 눈여겨 볼 부분이 있다.
흔히 '천방지축마골피'를 희성이자 천계(賤系)를 대표하는 성씨로 알고 있는 경향이 많다. 근거가 없는 설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나타난 현상이다. 일제 강점기가 돼서야 과거 접할 수 없었던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이 외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영향으로 각 성씨들 사이에 족보를 만들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고, 이때 조선총독부 산하 일제 고등경찰이 앞서 언급한 '천방지축마골피' 설을 퍼트려 우리 민족을 이간시키려 했다는 설이 있다. 축씨와 골씨가 지금도 존재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천씨는 '하늘 천(天)'자와 '일천 천(千)'자 등 두 성씨가 사용되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천(天)씨는 2천년 기준으로 밀양 등 5개 본관에 1천여명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정조 때 천명익이라는 인물이 진사시에 합격한 것으로 봐서 천계는 아니다. 영양 천씨(潁陽 千氏)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들어온 성씨로, 중시조 천만리가 자헌대부와 화산군에 책봉됐다. 역시 천계가 아닌 것으로 봐야 한다. 방씨도 대표격인 온양방씨(溫陽方氏)의 경우 중시조로 알려진 방운이 고려 성종 때 온수군에 봉해지자 온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남양 방씨(南陽 房氏)는 고
삼국시대에도 성(姓)은 존재했으나 지배층 일부에 국한된 것이었다. 우리나라 성씨제도는 고려태조 왕건이 지방호족 세력을 끌어안기 위해 이른바 사성(賜姓) 정책을 시행하면서 본격화됐다. 특히 고려 문종 9년(1055) '성씨가 없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이 공포되면서 성의 보편화가 어느 정도 이뤄졌다. 성씨 제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족보다. 족보는 핏줄에 대한 종적 기록이지만, 의도적인 대외 과시용 성격도 강하다. 이 때문에 상당수 족보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가 고시조이고, 고려조 △△△가 중시조이다라'는 식으로 유구하게 표현된다. 물론 사실이 아닌 경우도 많다. 고려의 의종대의 사료에 "옛날에는 족보가 없어 조상의 이름을 모두 잃었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는 고려 전기까지는 최소한 족보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후부터 가문 과시용 족보가 많이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조상을 바꾸는 것은 환부역조(換父易祖)와 남의 조상에 자신을 이어붙이는 가탁(假託) 현상이 일어났다. 조선시대는 족보에 대한 불법행위는 강상윤리로 다스렸다. '삼사에서 아뢰기를, 심상운이 환부 역조(換父易祖)한 것과 같은 것은 곧 인륜(人倫)의…
진휼((賑恤)은 굶주리거나 질병에 걸린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말한다. 농업국가인 조선도 이 진휼정책에 국가적인 관심을 쏟았다. 그 어렵던 시절에 복지정책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사간원의 상소 내용도 실려 있다. 진휼을 왕정의 기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궁한 사람을 구제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왕정(王政)에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 한(漢)나라의 상평창(常平倉)과 당(唐)나라의 의창(義倉)도 또한 이 때문에 설치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휼을 국가 제일 정책으로 내세운 이면에는 또 다른 절실한 이유가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농민은 생산과 조세의 주체였다. 이 경우 농민들이 기근 등으로 유랑을 하면 세금을 걷을 수 없고, 세금이 잘 걷히지 않으면 국가재정이 파탄에 빠지게 된다. 진휼정책은 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의도도 지녔다. 조선시대 굶주린 백성을 보살피는 책무는 기본적으로 수령과 관찰사였다. 그러나 사태가 급박할 경우 임금의 명에 의해 중앙에서 임시 사신이 지방에 파견됐다. 이들을 진휼사(賑恤使)라고 불렀다. 세종대 안순(安純·1371∼1440)이라는 인물이 우리고장 충청도 진휼사로
전회에 조선 조정이 왜 진휼정책을 중요시 했는가를 살펴봤다.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1차적인 목표지만 그 이면에는 국가재정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고 밝혔다. 기근에 대한 책임은 1차적으로 수령이 졌다. 따라서 고을주민 구제를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 곤장을 명령하던 수령이 도리어 곤장을 흠뻑맞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다. 진휼은 그만큼 중요시됐다. '예조 판서 황희(黃喜)가 계하기를, "고양현에 굶어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하여 승정원주서 이극복(李克復)을 명하여 가서 살펴보게 하였더니, 사비(私婢) 모란의 모자(母子) 세 사람이 굶주리어 부종(浮腫)이 났고, 소동(小童) 1명은 굶어 죽었다 합니다." 하니, 의금부에 명하여 현감 김자경(金資敬)을 추핵하니, 곤장 80대에 좌죄(坐罪)하였다.'- 조선 제일의 책사 한명회는 청주가 본향인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의 묘가 천안 수신면(당시 청주목 소속)에 위치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한명회의 장소(葬所)는 충청도 청주 땅인데 3일의 노정이 되니 백관이 회장하기가 어렵습니다. 발인하는 날에 각사의 한 관원이 담복으로 먼저 도문(都門) 밖 육조·의정부에서 설전한 곳에 나아가서, 위(位)
'많은 사람이 비슷한 증상을 나타내며 앓는 돌림병.' 조선시대 사람이 역병(疫病)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이다. 오늘날 전염병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발생 원인에 대한 생각은 웃음이 나올 정도로 비과학적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역병에 대해 기후와 환경 이상이 그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체로 억울하게 죽은 자의 원혼이나 제사밥을 얻어먹지 못한 잡귀들이 천지간을 떠돌아다니다 만들어낸 결과로 생각했다. 때문에 임금은 물론 지방에서도 연례 행사로 제사를 지냈다. 바로 '여제'다. 특히 역질이 만연할 징후가 보이면 봄철에는 청명, 가을철에는 7월 보름, 겨울철에는 10월 초하루에 여제를 지냈다. 역질이 함경도 등 국경지역에서 발병, 사람이 많이 죽을 경우 집단 이주정책을 긴급히 쓰기도 했다. 국경 방어를 위해서는 인적 자원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죄인들은 강제로 이주시켰다. 역질을 옮겨온 원귀를 쫓는데는 군기감이라는 기관도 동원됐다. 군기감은 병기 제조를 관장하던 기관으로, 특히 화약·각궁(角弓)·화포를 만드는 것이 주임무였다. 군기감은 화약이 갖고 있는 뜨거움과 요란한 소리를 이용해 역귀를 쫓으려 했다. '군기감에서…
풍수가들은 충주의 풍수가 매우 좋다고 말하고 있다. 산이 높고 물이 깊으며 들이 넓기 때문이다. 이런 지리(地理)라면 한번쯤 나라의 도읍지가 됐을 수도 있으나 그렇치는 못했다. 풍수가들은 그 이유로 충주가 풍수상 인체의 어깨 쯤에 위치하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 우리 몸의 어깨는 전면이 아닌 후면에 위치한다. 이때 그 기준점이 되는 것이 백두대간이다. 이와 관련 풍수가들은 충주가 백두대간 안쪽, 즉 경상도 북부지역에 위치했으면 도읍지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지만 충주를 도읍지로 삼으려 했던 시도는 고려시대부터 나타난다. 고려 후기는 왜구의 극성기였고, 이 때문에 개경의 방어가 불안해지면서 도참설이 횡행하였다. 도참설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 혹은 징조를 통칭하는 말이다. 그것을 적은 책은 비기, 밀기 혹은 비결이라고 부르고 있다. 충주로의 천도는 신돈(辛旽·?~ 1371)이 공민왕에게 알리지 않고 은밀히 추진했다. 신돈은 충주가 내륙의 요새이며 교통의 중심지라는 지정학적 조건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돈이 비밀리에 시중 이춘부를 시켜 충주 천도를 청하니 왕이 크게 노했으나, 신돈이 송경은 해구가 두렵다고 하자 노염을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은 표현 중에 '창생'(蒼生)이라는 단어가 있다. '왕의 왕인 지위에 앉아서 억조의 창생을 다스리던 그는…'.(김동인의 '젊은 그들'). '그 본의가 결단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가운데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라.'(문순태의 '타오르는 강') 창생은 직역하면 '푸른 삶'이지만, 지금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영어로는 'The people'로, 창맹(蒼氓)·창민(蒼民)도 같은 뜻이다. 광제창생(廣濟蒼生·널리 백성을 구제함), 여로창생(如露蒼生·아침 이슬과 같이 덧없는 많은 백성)도 여기서 파생됐다. 조선 중기 때 '창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멋진 시를 지은 인물이 있다. 신재 최산두(崔山斗·1483-1536)다. 15세 때 통감강목(通鑑綱目) 80권을 가지고 석굴(石窟)에 들어가 2년간 여러번 독파를 하고 나왔다는 인물이다. '운창에서 도학 궁리 아홉 해를 보냈는데 / 연일 두고 쏟는 빗발 은하 포구 이었는지 / 강산을 온통 수국으로 할라치면 / 창생(蒼生)들은 포구에서 배를 붙들려 하겠지.'- '천자암 장맛비'(天子菴 霖雨)라는 제목의 시로, 창생들도 도학 공부를 열심히 하면 끝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얼마전 김익수(金益壽·?~?)라는 인물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일반의 생각과 달리 푸대접 받았던 일반어사로 유명했다. 실록에 실려있는 내용이 너무나 생생, 안쓰러움과 함께 웃음을 나올 정도다. '신은 말을 타고 다니느라 피곤한데다가 밥먹을 겨를도 없어서 기갈이 심했으나 전혀 음식을 공궤(供饋)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대로 밤을 새웠는데 아침에도 역시 이와 같았으므로 또 밥을 먹지 못한 채 나왔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김익수가 우리고장 충청도관찰사를 매우 이례적으로 두번이나 역임했다고 밝힌 바 있다. 8도감사를 모두 지낸 인물은 있어도, 특정지역 관찰사를 두번 역임한 인물은 그 사례가 매우 희귀한 편이다. 관찰사는 국왕의 특명을 받은 사신으로, 끊임없이 도내를 순력하면서 1년에 두 차례 수령을 비롯한 모든 지방관리에 대한 성적을 평가, 조정에 보고했다. 이를 '포폄'(褒貶)이라고 부른다. 그가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충청도 지방에서 대홍수가 발생했다. 그 내용
복정(卜定)은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먼저 점(卜)을 쳐서 길지를 정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밖에 조선시대 그 지방의 토산물을 강제로 바치게 하던 것을 복정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남에게 억지로 부담지우는 것을 '복정씌운다'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유래했다. 복정은 궁궐의 부족한 물품을 채우는 것이 1차적인 목표였다. 그러나 중국사신 접대용으로도 복정이 자주 하명됐다. '간원이 아뢰기를,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사체가 중대하니, 유사(有司)로서는 마땅히 마음을 다해 조처하여 사대하는 성상의 지극한 정성을 우러러 몸받아야 할 것입니다. (…) 그러나 신들이 해조(該曹)에서 각도에 분정한 물목을 가져다 보건대…"'- 복정은 강제성을 띄었다. 이는 하명된 양을 채우지 못할 경우 벌이 가해졌음을 의미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파직이라는 중징계도 내려졌다. 그와 같은 일이 우리고장 충청도의 한 병영에서도 일어났다. '간원이 아뢰기를, "충청 병사 김거병은 연소한 무부로서 부임한 뒤로 방비에는 뜻이 없고 오직 군졸을 침어(侵漁)하는 것으로 일을 삼는 데다가 법금(法禁)을 무시하고 가족을 많이 거느리고 가 있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이번에 조사가 왔을 때 각도에 복정
조선시대 어사(御史)는 암행어사와 일반어사로 구분됐다. 암행어사는 글자 그대로 왕명을 받고 비밀리에 지방을 순행하면서 악정(惡政)을 살피던 특명 관직을 말한다. 이들의 임명과 임무는 일체 비밀에 붙여졌다. 암행어사 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세조 때였다. 성종실록에 '암행어사'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나, 세조 때 이미 도입됐던 정황이 나타난다. '옛날에 세조(世祖)께서 신에게 분부하기를, '지금 그대들을 보내는 것은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옛날 사람의 말에 '고양이를 기르는 집에서는 쥐가 함부로 다니지 못한다' 고 했으니, 암행어사(暗行御史)가 한 번 나간다면 탐관(貪官)이 저절로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암행어사 제도는 조선 전기에는 그리 발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신간의 신뢰를 해치는 것이라고 해서 안 좋게 여겼다. 대신 공개리에 활동하는 일반어사 제도가 더 많이 활성화됐다. 종류도 파견 목적에 따라 순무, 균전(均田), 독운(督運) 등 매우 다양했다. 순무는 순찰, 균전은 형평 과세, 독운은 조운을 살피는 것을 일컫고 있다. 이밖에 호패(號牌), 구황(救荒), 재해 점검을 위해서도 일반어사가 자주 파견됐다. 암행어
얼마전 우리고장 음성 인물 채수(蔡壽·1449~1515)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연산군 시절을 산 인물이다. 연산군이 보위에 오른지 5년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채수는 이때 정희대비(세조의 비)가 폐비윤씨에 대해 적은 글을 사관에게 넘겨줬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당시 분위기로는 극형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러나 그는 곤장 70대만 맞고 풀려난다. 이때 실록에 우리고장 지명이 어느 때보다 많이 등장한다. 누가 "기생을 데려다 잔치를 했다"고 고변을 한 모양이다. '신이 먼저 충주에 가서 기다리자 아비가 또한 뒤따라 왔었습니다. 단지 하룻밤을 자고서 이튿날 신이 먼저 떠나 안부역(安富驛)에 이르고 아비가 뒤에 왔는데, 충주의 수령이 잠시 전별만 했을 뿐이고 기생을 데리고 잔치를 하느라 오래 머무르며 폐단을 만든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안부역은 지금의 수안보 일대를 말한다. 그의 손자가 채무일(蔡無逸·1496∼1556)이다. 조선시대 화가는 이른바 문인화가와 화원으로 대별된다. 문인화가는 사대부를, 화원은 속칭 환쟁이를 일컫고 있다. 문인화가도 조선시대 미감(美感)을 일정 부분 주도했다. 그러나 이들은 화가로 이름이 남는 것을 꺼려했다. 따라서 자식들에게
재실(齋室)은 묘제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을 말한다. 재실과 같이 죽음에 관련된 문화는 엄숙한 편이다. 따라서 일반 주택과 차이가 많다. 재실의 누(樓)는 묘제를 지낼 때 주로 사용되는 공간으로 문중회의와 묘제 후 음복하는 장소로 사용된다. 전사청(典祀廳)은 제사에 필요한 기구 및 제수를 보관하는 곳으로 유사실(有司室)로 연결된다. 유사실은 제수 점검, 제사절차 협의, 문중회의 주관 등을 담당하는 유사들이 거처하는 공간이다. 재실도 엄연한 건축물이기 때문에 묘지기, 산지기 등 관리인이 필요했다. 조선시대 묘·산지기는 상민이나 천민 신분으로, 재실의 문중에 신분·경제적으로 종속됐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경주 부윤(慶州府尹) 전동생은 그 첩(妾)이 죽으니, 치내(治內)에 장사하고, 또 관노(官奴)를 묘지기(墓直)로 정하였으며, 품관(品官)이 있는 인리(人吏)로 하여금 재(齋)를 베풀게 하여…'- 그러나 재실문화는 근래들어 거의 붕괴됐다. 묘직이나 산직은 경제적으로 수지가 맞지 않는다. 또 조상숭배와 동족 관념이 희박해 지면서 제사 참가율이 하락, 폐허로 변하는 재실이 크게 많아지고 있다. 이런 환경속에 우리고장 영동 용산면 율리에 송담재(松潭齋·충북문화재
연산군은 폭정 만큼이나 식탐이 강했다. 맛이 있거나 몸에 좋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 즉시 진상을 명령했다. 그 대상도 짐승, 해물을 가리지 않고 다양했다. '경기감사에게 하서(下書)하기를, "해별(海鱉)·강돈(江豚)·옥복(玉腹) 각두 마리씩을 산 채로 잡아 봉진하라" 하였다.'- 인용문 중 해별은 바다자라, 강돈은 돌고래를 말한다. 옥복은 지금의 사문화돼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다만 옥돔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연산군의 식탐은 외국 것도 가리자 않았다. 당시 부산 등 남해안 지역에 일본 전복이 유입된던 모양이다. '전교하기를, "왜전복(倭全鰒)이 있다 하니, 사서 바치도록 하라. 이 물건 뿐 아니라 모든 특이하게 맛난 것은 널리 구해서 바치라" 하였다.'- 호색한이었던 연산군은 보양식에도 당연히 관심을 보였다. 이번에는 백마(白馬)가 정력에 좋다는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역시 진상을 명령한다. '전교하기를, "백마(白馬) 가운데 늙고 병들지 않은 것을 찾아서 내수사(內需司)로 보내라" 하였으니, 흰 말의 고기는 양기(陽氣)를 돕기 때문이었다'- 연산군 식탐을 길게 이야기한 것은 왕의 밥상에도 정치적인 색채가 상당 부분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사람에게는 인명(人名)이 있고, 땅에는 지명(地名)이 있다. 한반도 지명 분류를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은 아쉽게도 일본인 젠쇼에이스케(善生永助)였다. 그는 1935년 발간한 '조선의 취락'이라는 책에서 한반도 취락과 지명을 학문적으로 처음 분류했다. 지명은 땅에 대한 단순한 호칭같지만 그 이상의 문화·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지명은 토지에 고착된 것이기 때문에 보수성이 매우 강한 편이다. 경기도 수원의 지명에서 이같은 현상을 발견된다. 수원(水原)은 상고시대에는 매홀(買忽)로 불렸다. '매'는 '물', '홀'은 '성'을 의미한다. 지금의 수원은 고대 후기에는 수성(水城), 고려 시대에는 수주(水州)라는 지명을 갖고 있었다. 근원인 '물 水' 자는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명의 보수성은 역으로 그것이 바뀔 경우 종종 적지 않은 혼란을 초래한다. 우리고장 보은군에서 그같은 사례가 발견되고 있다. 신라는 470년(자비마립간 13) 3년의 공사 끝에 보은에 산성을 쌓았다. 바로 삼년산성으로, 보은군의 최초 이름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은 여기서 유래했다. 이후 삼년군으로 첫 개명을 하게 된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 삼년산군을 '보령'(保齡)으로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의약서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있다. 세종의 명에 의해 1433년 노중례, 유효통, 박윤덕 등이 편찬했다. 내과·전염병·외과·이비인후과·안과·산부인과·소아과·치과 등 각종 임상을 망라적으로 다루고 있어 종합 의약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향약집성방의 모든 내용이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에 앞서 편찬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跋)이라는 의약서를 꽤 많이 인용했다. 향약제생집성방은 권중화, 김사형, 김희선, 조준 등이 지은 것을 제생원(濟生院)에서 편찬했다. 당시 실력자인 권근(權近)이 이 의서의 발문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제생원의 향약집성방은 이 백성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 예천백 권상(權相) 중화仲和)와 더불어 그가 일찍이 저술한 향약방을 가지고 다시 수집을 더하여 전서의 판각을 완성하니, 장차 중외에 반포하고 영원히 전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모두 그 거주하는 곳에 따라 약을 구할 수 있고, 병중에 따라 치료할 수 있음을 알게 하고…'- 찬자 4명중 한 명인 권중화(權仲和·1322∼1408)는 개인적으로 황당한 경험을 한다. 그는 고려의 사신으로 명나라에 들어갔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고려시대 천민계급이 하나로 양수척(楊水尺)이 있다. 달리 수척(水尺)·화척(禾尺)·무자리라고도 불렀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후삼국시대 압록강 밖으로 망명했던 후백제 잔민, 여진 또는 거란 계통의 북방 귀화인 설 등이 있으나 아직 정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없다. 양수척은 떠돌이 생활을 하며 도살, 광대 등의 직업을 갖는 등 한반도 집시처럼 살았다. 특히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왜구(倭寇)로 가장, 민가와 관청을 노략질 하기도 했다. 또 거란군이 고려에 쳐들어올 때 그 앞잡이 노릇을 하는 등 그 이미지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양수척은 조선시대에도 고민거리였다. 세종대왕이 온건책을 내놓았다. 명칭도 이때부터 지금도 사용하는 백정으로 바뀌게 된다. '병조에서 계하기를, (…) 비옵건대, 칭호를 백정(白丁)이라고 고쳐서 평민과 서로 혼인하고 섞여서 살게 하며, 그 호구를 적에 올리고, 경작하지 않는 밭과 묵은 땅을 많이 점령한 사람의 밭을 나누어 주어서 농사를 본업으로 하게 하고…'- 세종이 온건책만 구사한 것은 아니었다. 강경책도 병행했다. 누범으로 개전의 정이 뚜렷하지 않은 양수척에 대해서는 극형을 마다하지 않았다. '형조에서 아뢰기를, "백정 약로(若
1394년(태조2) 6월 14일 갑자기 대간과 형조에서 올라온 상소 한 장이 궁궐 분위기를 삽시간에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대신들이 내시 이만(李萬)이 남대문 밖에서 목이 달아나고 세자빈궁 현빈유씨가 자기 집으로 쫓겨난 이유가 무엇이냐고 왕에게 묻는 대목이 나온다, '대간과 형조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가만히 보건대 내수(內竪) 이만(李萬)이 참형을 당하고, 현빈 유씨(柳氏)가 내쫓겨 사제로 돌아갔으나, 나라 사람들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하여 의심하고 두려워함이 그치지 않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좌우(左右)의 친근한 사람을 법사에 내려 국문해서 나라 사람들의 의심을 없애게 하소서."'- 이에 대해 태조 이성계는 이들을 다짜고짜 순군옥에 가둬버렸다. 순군옥(巡軍獄)은 고려시대 도적질이나 난을 일으킨 사람을 잡아 가뒀던 곳이다. 이 순군옥은 조선 초기까지 유지되다가 태종 14년 의금부로 대체됐다. 모두 7명의 신하가 갖혔다. '임금이 노하여 우산기 상시 홍보(洪保)·좌습유 이조(李·)·사헌중승 이수·시사 이원(李原)·형조정랑 노상(盧湘)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었다.'- 조선시대가 일인지하의 전제정치로 흐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왕권을 견제하
마패(馬牌)는 중앙 벼슬아치가 공적인 업무로 지방 출장을 나갈 때 역마(驛馬)를 징발할 수 있는 징표를 말한다. 한쪽 면에 연호·연월일과 '상서원인(尙瑞院印)', 또 다른 면에는 가용할 수 있는 말의 수를 새겼다. 상서원은 옥새와 병부 등 여러가지 패를 관리하던 곳으로 6부 중 이조에 속했다. 암행어사와 마패는 눈익은 조합이다. 역졸이 마패를 들고 '암행어사 출두'라고 크게 외치는 모습이 사극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조선시대 마패법 실시를 처음 건의한 인물은 이응(李膺·1365∼1414)이다. '마패법을 세워 아뢰었다. 병조 판서 이응이 아뢰었다. "처음에 마패를 상서사(尙瑞司)에 속하게 하여 이를 무겁게 하였으나, 이제 정부에서 포마(鋪馬)를 발하는데…."'- 그는 장수하지 못하고 50나이에 졸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유난히 길(路)과 관련된 업무를 많이 처리했다. 마패가 땅길에 관련된 것이라면, 세곡(稅穀) 운반은 물길과 관련이 깊다. 실록에는 이응이 물길과 세곡을 함께 언급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조선 초기에는 경상도 세곡을 남해, 서해 등을 거치는 해로 운송을 택했다. 예나 지금이나 해로 운송은 거센 바람이 문제가 된다. 경상도의 조운선 34척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간신으로 유자광과 임사홍이 꼽힌다. 이중 임사홍(任士洪·?∼1506)은 갑자사화를 주도, 정국을 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임사홍이 본래부터 간신 기질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자신이 효령대군(세종의 형)의 손녀 사위가 되는 등 문벌집안 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세 아들 중 두명이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 임사홍은 이때까지만 해도 관료직을 무난히 수행, 정치적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당시 우승지(정3품)로 있던 임사홍이 성종에게 우리고장 청주와 관련된 계목을 올렸다. 계목은 중앙 관부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문서의 일종을 말한다."청주에 사는 전 훈도 경연(慶延)은 효로써 어버이를 섬겨서 생존했을 때의 봉양과 사망했을 때의 장례에 있어서 각기 성경(誠敬)을 다하였으므로, 향당에서 칭송하며 사모하고 있습니다."-향당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향촌 자치조직으로, 달리 유향소라고 불렀다. 지금으로 치면 지역 유지들의 모임으로 볼 수 있다. 이같은 보고가 있은 후 성종이 직접 경연을 궁궐로 불러 올렸던 모양이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오간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버이를 위하여 물고기를 구하였으니, 너의 효심(孝心)이 실로 지극하다. 그러나, 물에
봉작(封爵)은 왕자·외척·공신에게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등의 명예 칭호를 부여하는 제도를 말한다. 다섯 단계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5등 봉작제'라고도 한다. 동서양은 물론 우리에서도 조선 초기까지 사용했다. 그러나 태종대 이르러 중국의 명호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사대(事大)에 어긋난다고 판단, 봉군제를 채택하게 된다. 봉군제는 '○○君'으로 칭하는 것을 일컫는다. 크게 보면 '봉군'도 봉작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으나 의미는 다소 다르다. 봉작제는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될 때 부활된다. 주체 의식이 복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회에 한상경(韓尙敬·1360~1423)이라는 인물을 소개한 적이 있다. 한명회에게 큰할아버지가 되는 한상경은 일반에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청주한씨 문중으로부터는 높은 추앙을 받고 있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으로부터 옥새를 넘겨받아 이를 태조 이성계에게 건넨 인물이 바로 한상경이다. 그는 효심도 남달랐다. 한상경은 자신의 병이 깊어지자 부모보다 먼저 죽을까봐 노심초사했다. "내가 병이 있은 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다만 먼저 죽어서 늙은 어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자
칠거지악(七去之惡)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존재하던 제도로, 조선시대 이혼의 근간이 됐다.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는 것,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 부정한 행위를 하는 것, 질투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밖에 나병·간질 등의 유전병을 가진 경우, 말이 많은 것, 도둑질 행위 등도 포함된다. 대부분의 이유는 봉건적 가족제도의 필연성에서 나왔다.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함은 불효의 표현이고, 아들이 없음은 가계 계승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일이며, 부정한 행위는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세종대에 이맹균(李孟畇·1371∼1440)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을 지내는 등 관료로서는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질투심이 강한 부인이씨 때문에 불행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질투심이 병적으로 강했던 부인 이씨는 집안의 종을 의심, 그녀를 죽였다. 의정부에서 이를 인지, 세종에게 직접 보고를 한다. '의정부에서 사인(舍人) 이인손(李仁孫)을 시켜 아뢰기를, "이맹균의 처 이씨가 죄 없이 집 여종을 죽였으므로, 전하께서 듣고 깜짝 놀래시어 곧 헌부(憲府)로 하여금 논핵하게 하였는데…'- 아내의 질투는 칠거지악의 네번째에 해당한다.…
이성계가 '칼'로 조선을 건국했다면, 정도전은 그 '머리'에 해당한다. 정도전을 조선 건국의 총설계사로 부르는데는 나름의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는 먼저 '조선경국전'(1394·태조3)을 지어 이성계에게 바쳤다. 조선왕조의 헌법으로 불리는 조선경국전은 국호(國號)부터 관리선발까지 국가 운영에 대한 내용을 망라적으로 담았다. 그는 또 한양 천도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등 수도 경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숭례문 등 한양 4대문 이름도 그가 지었다. 그러나 그는 의원내각제와 성격이 비슷한 신권(臣權)정치를 추구했다. 일종의 권력분점인 셈이다. 여기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수복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 과정에서 사병혁파가 거론됐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방원(후에 태종) 입장에서 볼 때 이는 국정을 쥐락펴락 하는 것이자, 2인자 위치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정도전은 이방원의 기습을 받고 희생됐다. 정도전은 아들을 많이 뒀다. 이들도 유탄을 피할 수 없었다. 세 아들이 살해되거나 자살했다. '도전이 아들 4인이 있었는데, 정유(鄭游)와 정영(鄭泳)은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 급함을 구원하러 가다가 유병(遊兵)에게 살해되고, 정담(鄭湛)은 집에서 자기의 목을 찔
임금의 행차 때 어가(御駕) 주위에서 왕을 모시는 사람 또는 그런 행위를 호종(扈從)이라고 한다. 이때의 '扈'는 '따르다', 從은 쫓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호종이라는 표현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나타난다. '용례감찰사에서 방을 붙여 이르기를, "호종하는 신하들이 서로 돌아보고 웃고 이야기하거나 조복(조회 때 입는 옷)을 입고 걸어 다니는 것을 금지한다.…" 하였다.'- 융복은 철릭과 주립으로 된 옛 군복으로 평시에는 무신만 입었다. 철릭은 허리에 주름이 잡히고 큰 소매가 달렸다. 당상관(정3품 이상)은 남색이고 당하관은 분홍색이다. 주립은 한자로 '朱笠'이라고 쓴다. 말 그대로 무인들이 쓰던 붉은 갓을 말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중국 국경인 의주까지 피난갔다. 여차하면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선조가 내세운 논리는 '나라를 빼앗기면 나중에 도로 찾을 수 있지만 임금이 죽으면 나라도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종전이 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86명의 신하를 1~3등급으로 나눠 공신으로 녹훈했다. 이른바 호성공신(扈聖功臣)이다. 얼마전에 성달생(成達生·1376∼1444)이라는 인물을 가볍게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조선 무과 수석 합격생 1
[충북일보] 주말 동안 충북지역에 많은 비가 내리면서 도내 하상도로가 통제되고 나무가 쓰러지는 등 각종 피해가 속출했다. 청주기상지청은 지난 6일부터 7일까지 시간당 20~30㎜의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했다. 시간당 30㎜의 비부터는 보통 '폭우'라고 부르는 수준으로 밭이나 하수구가 넘치기 시작하고, 홍수나 침수 같은 비 피해 위험이 매우 높아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단계다. 충북도 등에 따르면 7일 오후 2시 30분 기준 도내에는 평균 62.1㎜의 비가 쏟아졌다. 지역별로는 △증평 121.5㎜ △괴산 116.5㎜ △청주 87㎜ △진천 52㎜ △단양 49㎜ △보은 45.3㎜ △충주 45㎜ △제천 41.7㎜ △영동 7㎜ △음성 4㎜다. 폭우로 인해 도내 하상도로와 둔치주차장은 일부 통제된 상태다. 현재 도는 청주시 무심천 하상도로, 미암교 하상도로, 충주시 달천 하상도로를 통제 중이다. 하상도로에 설치된 둔치주차장은 전체 27곳 중 15곳이 통제된 상황이다. 폭우 여파로 도내 각종 사건·사고도 잇따랐다. 이날 도에 접수된 풍수해 신고 건수는 총 20건이다. 피해 유형은 △수목전도 12건 △배수불량 4건 △낙석 1건 △기타 3건으로 집계됐다.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도가 친환경 에너지로 각광받고 있는 수소산업 육성을 위해 특화단지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수소특화단지 지정을 통해 산·학·연·관 생태계를 공고히 구축하고, 기업 지원과 기술 개발로 이 분야를 선도한다는 구상이다. 7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가 내년 상반기 공모를 통해 지정할 예정인 수소특화단지를 충주시에 유치할 계획이다. 도는 일찌감치 충주를 신청지로 낙점했다. 이 지역의 수소 인프라를 고려할 때 수소특화단지를 유치하면 관련 산업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충주는 수소 분야 기업 26곳이 둥지를 트고 있다. 국내 유일의 차량용 연료전지 생산 거점인 현대모비스를 비롯한 주요 부품업체들이 협력체계를 갖추고 있다. 청정수소 생산과 저장, 유통, 충전, 활용 등 전주기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는데다 그린수소산업 규제자유특구로 지정 받았다. 바이오가스에 기반한 그린수소는 전국에서 가장 저렴하게 공급하고 있다. 오는 2027년까지 하루 2.5t의 청정수소를 생산할 계획이다. 도와 충주시는 유치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다. 현재 수소특화단지 계획 수립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다. 결과는 올해 말 나올 예정이며 용역 과정에서 도출된 경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