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椒水里)에 거동하시는 데도 (…)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그 유명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1445)의 상소문이다. 요약하면, "왜 초정에까지 와서 한글창제 작업에 급급하십니까" 정도가 된다. 현재 초정약수에는 세종대왕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바로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초정약수 지칭)에서 급급하게 하시어'라는 구절이 동상 설립의 근거가 됐다. 그러나 최만리 상소문은 그가 혼자 올린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실록의 서두에는 '최만리 등이 상소하기를'이라는 복수의 표현이 등장한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상소에 동참했던 나머지 이름들이 세종에 의해 하나씩 거명된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김문(金汶)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실록의 행간을 보면 세종은 지극히 논리적인 성격으로 화를 좀처럼
한때 목욕물에 하반신만을 담그는 반신욕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이와 관련,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신욕을 일본 목욕문화라고 알고 있다. 꼭 그렇지도 않은 면이 있다. 조선시대 임금 중 태조, 태종, 세종, 세조, 숙종 등이 온천을 자주 찾았다. 이중 숙종의 목욕 방법은 좀더 독특했다. 실록을 보면 그는 항상 배꼽 아래만을 목욕물에 담갔다. '오시(午時)에 임금이 온정(溫井)에 나아가 두부(頭部)를 5백 바가지 감고, 배꼽 아래를 각 이각(二角) 동안 담갔다.'- 숙종이 왜 반신욕을 했는지 밝혀진 것은 없다. 정황상 배꼽 윗부분에 피부 질환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이각'(二角)은 30분 정도의 시간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1시간의 1/4을 '일각'이라고 불렀다. 온천은 아니지만 세종대왕은 격무로 얻은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우리고장 청원 초정약수를 찾았다. 1444년(세종 26) 때의 일이다. 이때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최만리·?~1445)가 그 유명한 상소문을 올리게 된다. "왜 여기까지 와서 나라에 급한 것도 아닌 한글창제 작업에 급급하느냐"고 강하게 따진다.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초수리)에 거동하시는 데도 (…) 계달하는 공무에…
성종은 보위에 무사히 오르자 그 고마움으로 74명의 공신을 선정했다. 이른바 좌리공신(佐理功臣)이다. 1등은 신숙주·한명회 등 9명, 4등은 황효원·김순온 등 45명이었다. 이중 황효원(黃孝源·1414∼1481)에 대한 인물평이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그는 형조참판을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했다. 성종이 보위에 오르기 전인 1460년의 일이다. 이때 황효원은 우리고장을 매우 잘 다스렸던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 관찰사 황효원에게 유시하기를, "경이 내가 백성을 사랑하는 뜻을 몸받아서 마음을 다하여 어루만지며 사랑하여 선정의 명성이 널리 퍼졌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있다. 이민(吏民)이 상서하여 경을 남겨두기를 청하므로 내가 실로 은혜를 가상히 여겨 민정을 어기지 않고 경을 그곳에 남겨두겠다."'- 임기가 다 되어 이임을 해야 하나 도민들의 간청에 의해 충청감사로 다시 남겨두겠다는 뜻이다. 세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효심'까지도 배려를 한다. 그는 충청도에서 가까운 경상도 상주 인물이었다. '경(卿)은 비록 늙은 어미가 있지마는 길이 멀지 않으므로 경(卿)이 마음대로 내왕하면서 서로 만나도록 할 것이니, 더욱 힘써서 공(功)을 나타내도록 하라"…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사관(史官)이 됐고, 이때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실었다. 이것이 발단이 돼 일어난 것이 조선시대 첫번째 사화인 무오사화(연산군 4년·1498)다. 김종직은 단종을 죽인 수양대군 세조를, 의제(초나라 회왕)를 죽인 항우(項羽·bc232~202)에 비유해 세조를 은근히 비난했다. 스승 김종직의 시신이 무덤에서 꺼내져 부관참시됐고, 사관 김일손은 "파당을 만들고 세조를 무고했다"는 죄로 연산군에 의해 능지처참됐다. 김일손은 성격이 강한 것으로 구전되나 낭만적인 모습도 많이 발견된다. 그가 우리고장 남한강 물길을 따라 내륙여행에 나섰다. '한 고개를 넘어 단양 지경에 들어서면 장회원이 된다. 그 아래에서 말고삐를 늦추면 점점 아름다운 지경으로 들어가는데, 홀연히 쌓인 돌무더기가 우뚝 솟고 총총한 봉우리가 첩첩이 푸르러 좌우가 아득하고 동서로 현혹되어 아무리 교력(巧歷)이라도 셀 수가 없다.'- 장회원은 지금의 장회루를 말한다. 이곳에 서면 구담봉, 옥순봉, 단구협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구담봉은 기암이 거북을 닮았다고 해서, 옥순봉은 희고 푸른 바위들이 힘차게 솟아올라 마치 죽순과 같다하여 불여진 이름이다. 단구
조선시대 사관(史官)은 매일 임금의 거둥이나 관리들의 잘잘못을 기록했다. 바로 사초(史草)다. 사관들은 이 사초를 매달마다 1책 혹은 2책으로 묶었고, 그해 마지막 달에 왕에게 책수만을 보고했다. 이렇게 사초가 책으로 묶어진 것은 시정기(時政記)라고 불렀다. 비밀을 생명으로 하는 사초는 실록을 편찬하는데 기초사료로 사용됐다. 종이는 펄프가 나오기 전까지 귀한 존재였다. 조선시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록이 편찬돼 제구실이 끝난 사초는 세초(洗草)라고 해서 물에 빨아 먹물을 뺀 후 다시 사용됐다. 조선시대 모든 왕들은 사초를 보고 싶어했다. 우리나라 역대왕 중 최고의 성군은 단연 세종대왕이다. 그는 인품이나 능력면에서 나라를 가장 잘 이끌었다. 그러나 세종대왕도 인간인 이상 사초를 무척 보고 싶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자 당시 몇몇 대신들이 "어떠한 경우든 사초만은 안된다"고 버텼고, 세종은 짜증섞인 반응을 보인다. "지금 친히 관람하고자 하는 것은 착하고 악한 행실의 자취를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임신년의 왕위에 오를 때에 임금과 신하 사이의 몰래 서로 이야기한 말을 대부분 사신(史臣)이 알지 못한 것이 많다. (…) 사신이 어찌 능히 임금과…
완벽(完璧)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 조나라 혜문왕은 '화씨의 벽'(和氏之璧)이라는 희귀한 구슬을 갖고 있었다. 원래 한 신하의 애장품이었으나 강제로 빼앗았다. 강대국 진나라의 소양왕이 이 소문을 듣고 욕심이 생겼다. 그는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 15성(城)과 구슬을 맞바꾸자고 청했다. 혜문왕은 소양왕의 속내가 뻔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했다. 이때 그 유명한 인상여(印相如)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진나라로 가 화씨지벽을 일단 소양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구슬을 받아 쥔 소양왕은 "과연 훌륭하구나"라고 감탄사를 연발하면서도 15성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를 예상하고 있었던 인상여가 "그 구슬에 한 군데 조그만 흠집이 있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소양왕이 이를 무심코 내주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인상여의 다음 말이 이어진다. "우리는 신의를 지키느라 구슬을 지참했으나 왕은 15성의 약속을 지킬 듯 싶지 않으니 이 구슬은 일단 소생이 지니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생의 머리와 더불어 이 구슬을 부숴 버리겠습니다."- 인상여는 구슬을 무사히 조나라로 도로 가져올 수 있었다. 여기서 '완벽귀조'라는 표현이 생겨났고, 그 준말이 '완벽'이다.…
전회에 우리고장 충주와 질긴 인연을 가진 인물로 이순몽을 소개했다. 그는 친구 황상(黃象)의 애첩인 월하봉이라는 기생과 사통했다. 그 결과, 자신은 물론 월하봉의 머리가 빡빡 깎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황상이 이를 알고 반인(伴人)과 노복(奴僕)을 거느리고 가서 순몽과 월하봉을 잡고 모두 그 머리를 바싹 깎았으므로, 명하여 의금부에 가두고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유유상종(類類相從) 중에 친구를 만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온 말이 '그 친구의 그 친구'라는 표현이다. 이순몽의 친구 황상에게도 궁금증의 시선이 쏠린다. 황상 역시 무신 출신이다. 그는 세종 연간에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할 때 휘하의 중군장으로서 큰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도 친구 이순몽과 마찬가지로 '육봉'(肉棒)을 잘못 휘둘러 망신을 당하게 된다. 가뭄이 크게 들자 태종이 전국적으로 금주령을 내렸다. 황상이 이를 어겼다. 그것도 기생까지 끼고 술을 마시다 관원에게 적발됐다. '전 소감 황상을 영흥부로 귀양보내었다. 이때에 크게 가물어서 금주령이 엄하였는데, 황상이 의순고별좌로서 주모(酒母)의 집에 들어가 기생을 대하고 술을 마시다가 헌부(憲府)에 적발되었다.'- 유배형이
조선 창업자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은 경주 등 전국 5곳에 보관돼 있었다. 세종 연간에 이를 보수하기 위한 작업이 한양에서 실시됐다. 이때 영남대로를 따라 올라온 경주의 어진이 우리고장 충주에 일정기간 머물게 된다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임금의 초상화는 매우 극진하게 다뤄졌다. 특히 창업자 이성계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때문에 당시 조정은 어진을 안전하게 운송할 중앙 고위관료를 전국에 파견했다. 이때 경주에 파견돼 충주까지 올라온 인물이 판중주원사 이순몽(李順蒙·1386∼1449)이었다. '판중추원사 이순몽(李順蒙)을 경주에, 예조 판서 김종서(金宗瑞)를 전주(全州)에 보내어 태조(太祖)의 쉬용을 봉영(奉迎)하여 오게 하였으니, 이는 장차 고쳐 그리기 위함이었다.'- 판중추원사는 귀에 익숙치 않은 관직명이지만 품계가 꽤나 높았다. 조선전기에는 정이품이었으나, 세조 12년에 판중추부사로 고치고 종일품으로 한 단계 상향 조정했다. 이순몽은 무신 출신으로 남으로는 대마도, 북으로는 여진족을 정벌하는 등 가는 곳마다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따라서 태종과 세종의 총애가 남달랐다. 여기에는 그의 아버지 이응(李膺·1365∼1414)이 좌명공신에 오른 점도 크게
제천 청풍면에 한벽루( 寒碧樓)라는 멋진 누각이 있다. 보통의 누각은 조망성이 좋은 곳에 독립적으로 세워진다. 이에 비해 한벽루는 누각의 본채 외에 날개 건물인 '익랑'(翼廊)을 거느리고 있다. 한벽루의 역사는 의외로 깊어 고려시대에 처음 신축됐다. 나름의 사연이 있다. 고려시대 청풍은 '군'(郡)이 아닌 '현'(縣)이었다. 중앙 관료가 직접 파견되지 않고 이웃 수령의 통치를 받았다. 이런 궁벽한 시골에서 청풍현 출신인 '청공'이라는 스님이 왕의 스승, 즉 왕사가 됐다. 제 27대 충숙왕(忠肅王·1294~1339) 때의 일이다. 청풍 한벽루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누각으로, 이때 행정 지위도 '현'에서 '군'으로 승격됐다. 한벽루는 경관이 빼어난 곳에 위치하다 보니 하륜, 정인지, 이황, 우암 송시열,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유명한 묵객들이 자주 찾았다. 이중 하륜은 한벽루 중수기를 남겼다. 조선초기 문신인 하륜(河崙·1347∼1416)은 우리 고장이 아닌, 지금의 경남 진주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벽루 중수기를 쓴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중수기 행간에 그 힌트가 들어 있다. '내가 옛날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정군은 바야흐로…
조선시대 때 양반가 아녀자가 간통을 하면 '자녀안(恣女案)'이나 '유녀적(遊女籍)'이라는 것에 이름이 올랐다. 평생 간음한 여성으로 낙인찍혀 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일부 가문에서는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우려, 자살을 종용하기도 했다. 1530년(중종 25)에 쓰여진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우리고장 황간현을 다소 부정적으로 적었다. "옛날 현(縣)이 승격되기 전에는 거주하는 백성들이 적고, 소나무와 참나무가 하늘을 덮어 가장 그윽하고 깊숙한 데다가, 들짐승이 맘대로 뛰놀고 도둑들이 노략질하기 때문에, 여기를 지나는 자는 여럿이 무리를 지어야만 비로소 다니곤 했다."- 이를 전후해 이은(李山+言)이라는 인물이 황간현감으로 부임했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조선시대 판 새마을운동'을 전개했다. 황간읍성이 이때 축조됐다. '이은이 전 삼사좌윤으로서 비로소 이 고을 감무가 되어 백성들의 고통스러움을 개탄하고 이것을 힘써 없앴기에 호구(戶口)가 날마다 늘고, (…) 이에 나무를 베어내고 돌을 쪼개어 이 성을 쌓아서 며칠 안 되어 공사가 완성되어, 백성들은 성에 보전하게 되고, 성은 덕에 보전하게 되었으니, 이후(李侯)의 공이 더욱 빛남이 있도다.'-
1623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倧·후에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인조반정'이다. 그 결과, 광해군은 서인으로 강등돼 강화도로 유배됐다. 그리고 대북파 이이첨 등 수십 명은 참수됐고,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됐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30여명은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호를 받고 권좌의 요직을 나눠가졌다. '이첨은 한찬남·백대형·정조·윤인·이위경 등과 함께 먼저 형을 받았고, 이원엽·이홍엽·이익엽은 먼저 참형되었으며 이대엽은 옥중에서 죽었다. 그리고 정몽필 등 여러 총신들과 유희분·유희발 등은 차례로 참형을 받았고, 정인홍·이강·원종·신광업 등은 추후하여 형을 받았다.'- 인용문 중에 유희분(柳希奮)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위하여 대북에 속한 언관·유생들을 동원했던 인물이다. 그의 조카가 유효립(柳孝立·1579∼1628)이라는 인물이다. 그도 연좌법에 따라 우리고장 제천으로 유배됐다. 유효립은 그러나 순응보다 모반을 결심했다. 대략 두 가지 이유가 작용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의 작은아버지 유희분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가문이 풍비박산됐다. 또 그는 권좌에서 쫓겨난 광
우리고장 제천 인물인 김식(金湜·1482~1520)은 조선시대 최장거리 도망자로 유명하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이때 김식은 단지 조광조와 절친하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야 했다. 처음에 외딴섬으로 유배되는 절도안치(絶島安置) 형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의 도움으로 형량이 감경, 경북 선산으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러나 유배기간 중 신사무옥이 일어나면서 그에게 진짜 절도안치 형이 떨어졌다. 그는 형량이 지극히 부당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최운은 거제도로 이배되기 직전 탈출을 감행했다. 고된 행로가 시작됐다. 김식은 경북 선산에서 동쪽으로 지리산 부근까지 이동했다. 그러나 김식은 도망자 생활에서 오는 육체·정신적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유숙할 곳이 없어 산골짜기를 경유하여 지리산에 가려고 거창현 수도산 남쪽에 이르렀는데 밥을 먹지 못한 지가 수일이었다. 하루는 고제원(高梯院) 동북편 산기슭에 머물면서 고사리를 캐어다가 먹으려고 우음산을 시켜 마을 집에서 불을 구해 오라고 보낸 후 드디어 스스로 목을 맸다. 경진년 5월 16일이었다.'- 앞서 김식은 도망자 생활 중에 자기를 숨겨줄 수 있을 정도로 믿음이 가는…
조선시대 후궁들은 왕의 총애와 왕자 생산 여부에 따라 종4품에서 정1품까지 8등급으로 분류됐다. 가장 높은 등급은 정1품인 빈(嬪)으로 희빈 장씨에게서 그 예를 만날 수 있다. 태종의 정비는 원경왕후 민씨로 4남4녀를 뒀다. 원경왕후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남편(이방원)이 선수를 쳐 정도전을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대륙 중국에는 이른바 '일취구녀제'가 존재했다. 왕비를 포함해 9명을 후궁을 거느닐 수 있다는 뜻이다. 태종도 이 제도를 크게 의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태종의 바람기는 정도 이상으로 심했다. 9명의 후궁을 둔 것으로 전해지나, 일부 사료는 17명까지 언급하고 있다. 태종의 바람기를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일부는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후궁을 계속 늘렸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튼 민씨의 불만은 계속 쌓였고, 결국 친정 남동생인 민무질·민무구 형제가 사사되는 불행을 겪었다. 이같은 흐름 중에 한 신하가 감히 태종의 바람기를 질타하는 상서를 올렸다. 방문중(房文中)이다. "정비(靜妃)와 명빈(明嬪)이 각각 양전을 설치하여, 빈으로서 적비(嫡妃)와 나란하게 함은 신(臣)의 이해할 수 없는 첫째이요,
기축옥사(1589·선조22)는 학문적으로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다만 기존의 주장을 따를 경우 주인공 정여립은 모반준비 단계에서 도참사상을 교묘히 이용했다. '전날에, "목자(木子=李)는 망(亡)하고 전읍(奠邑=鄭)은 흥(興)한다"는 동요가 떠돌아 다녔는데 여립이 이것을 옥판(玉板)에 새겨서 중 의연(義衍)을 시켜 지리산 석굴 속에 감추어 두게 한 후, 뒤에 산 구경 갔다가 우연히 이것을 얻은 것처럼 꾸몄다.'- 그는 계룡산을 구경하고 어느 폐암(廢庵·중없는 절)에서 시 한 수를 지어 벽에 붙여놓기도 했다. 정감록은 '이씨의 한양 도읍 몇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鷄龍山) 도읍 몇백 년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정여립은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도 정씨 성을 가졌다. 다음은 그 문제의 시다. '남쪽 나라 두루 다녔더니( 客行南國遍) / 계룡산에서 눈이 처음 밝도다(鷄岳眼初明) / 뛰는 말이 채찍에 놀란 형세요(躍馬驚鞭勢) / 고개 돌린 용이 조산(祖山)을 돌아보는 형국이니(回龍顧祖形) / 아름다운 기운이 모였고(蔥蔥佳氣合) / 상서로운 구름이 나도다(··瑞雲生) / 무기(戊己) 양년에 좋은 운수가 열릴 것이니(戊己開亨運) / 태평 세월을
임금의 초상화를 어진(御眞)이라고 부른다. 사용 빈도는 낮지만 신어(神御), 성용(聖容), 왕상(王像), 어영(御影) 등도 같은 표현이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어진은 의외로 많지 않다. 태조, 영조, 철종, 고종 어진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중 태조 어진은 보물 제 931호, 영조 어진은 932호로 각각 지정돼 있다. 철종 어진은 1/3 가량이 소실됐음에도 불구하고 보물 1492호로 지정돼 있다. 어진 중 유일하게 군복(軍服)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화려한 색채와 세련된 선도 돋보이고 있다. 현재 태조 어진은 서울이 아닌 전주 경기전 단 1곳에만 보관돼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태조 어진은 전란 등을 우려해 전국 5곳에 분산·보관했다. 보관하던 전각도 지역에 따라 그 이름이 각각 달랐다. '의정부가 이조의 첩정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의 전직(殿直)은, 청하옵건대, 영흥 선원전(璿源殿) 의 전직의 예에 따라 감사의 천망(薦望)대로 임명해 보내되, 전주와 경주에는 토관(土官)이 없으니…'- '전직'은 전각을 지키는 사람을 말한다. 인용문 중에 집경전이 보인다. 이 전각은 처음에
폭군 연산군(燕山君·1476~1506)이 처음부터 폭정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집권 3년차까지는 조세제도를 정비하는 등 국정을 나름대로 옳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생모 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엄씨의 모함으로 내쫓진 끝에 사사(賜死)당한 것을 알고부터는 희대의 광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광기 중 음탕한 짓에 해당하는 내용을 당시 사관이 사론(史論)으로 적었다. '왕이 음탕이 날로 심하여, 매양 족친 및 선왕의 후궁을 모아 왕이 친히 잔을 들어서 마시게 하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녹수(綠水) 및 괴는 궁인을 시켜 누구의 아내인지를 비밀히 알아보게 하여 외워 두었다가 이어 궁중에 묵게 하여 밤에 강제로 간음하며 낮에도 그랬다'- 이같은 유형의 내용은 연산군일기에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 연산군일기는 "백마(白馬) 가운데 늙고 병들지 않은 것을 찾아서 내수사(內需司)로 보내라"라고 했다고 적었다. 정력과 관련된 내용이다. 연산군의 성격은 음탕함을 넘어 폭력성도 자주 보여주고 있다. 그가 즐겨하던 실록 속의 형벌 내용으로는 포락, 착흉, 촌참, 쇄골표풍(碎骨瓢風) 등이 있다. 포락은 불구덩이에 떨어뜨려 죽이는 것을, 착흉은 가슴을 뽀개는 것을
"오늘은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히 하겠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약속과 같이 하라. 내가 깊이 생각하여 보니 간당(姦黨) 중에서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자로는 김종서(金宗瑞) 같은 자가 없다."- 문종은 자신의 단명을 예견하고 김종서, 황보인 등 원로대신에게 어린 왕자(단종)를 잘 보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기회를 틈타 수양대군은 1453년 한명회 등 권력에서 소외돼 있던 자들을 포섭, 원로대신을 무력으로 공격·살해했다. 바로 계유정란이다. 세조의 역사는 이들을 정난공신이라고 적었다. '정난'(靖難)은 난을 평정했다는 뜻이다. '정난의 공을 논하여 세조(수양대군 지칭)·정인지·한확·박종우·김효성·이사철·이계전·박중손·최항·홍달손·권남·한명회를 1등으로 삼고… 인용문 중 박종우(朴從愚··∼1464)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이후 평안도 도체찰사로 나가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도체찰사는 왕명에 따라 민정을 총괄적으로 살펴보는 직책으로 정1품의 품계를 지녔다. 박종우의 간접적인 유품인 완문, 계하사목,교첩 등이 우리고장 충주의 운봉박씨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완문은 충훈부에서 내린 것으로, 정난공신 박종우의 공적을 인정하고 박흥래가 그 자손임을 확인하
국어사전에서 감옥(監獄)이라는 단어를 찾으면 '죄인을 가두는 곳'이라는 설명구를 만날 수 있다. '대한 제국 때 형벌의 집행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융희 원년(1907)에 감옥서를 고친 것이다'라는 부연 설명이 뒤따른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감옥'이라는 표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옥'(獄)이라고 불렀다. 감옥은 일본식 표현이다. 갑오경장 무렵에 감옥이라는 표현이 들어오면서 토종어 '옥'을 물리치고 대중성을 획득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감옥'이라는 표현이 수입되자 경무청 산하 전옥서(典獄署)를 감옥서(監獄署)로 바꿨다. 이후 '서' 자가 떨어져 나가면서 지금의 '감옥'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그러나 감옥은 문법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표현이다. 감옥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옥을 살핀다'는 뜻이 된다. '죄인을 가두는 곳'이라는 의미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따라서 앞으로 '감옥'이라는 말 대신 '교도소'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청주시가 과거 읍성터를 발굴조사하면서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명문이 새겨진 성돌 외에 우물터, 성벽 기초석 등이 잇따라 출토되고 있다. 이제 시작인 만큼 더 많은 발굴 성과가 기대되고 있다. 청주읍성은…
이홍윤 역모사건의 파장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당시 사건으로 인해 충청도와 충주목은 그 행정적 위치가 연좌법에 따라 한 단계씩 강등됐다. 1549년의 일이다. 이때 청홍도 관찰사로 부임한 인물이 이해(李瀣·1496∼1550)다. '충청도(忠淸道)를 고쳐 청홍도(淸洪道)로 만들고, 충주(忠州)를 강등시켜 유신현(維新縣)으로 만들었다. 이기(李초두변+己)를 의정부 영의정으로, 이해(李瀣)를 청홍도관찰사로, 이치(李致)를 유신현감으로 삼았다.'- 전회에 최하손 고변사건을 다루면서 당시 유신현감이었던 이치(李致·1504∼1550)라는 인물을 언급한 바 있다. 이치는 이 사건으로 인해 처참하게 죽어갔다. '고문을 당하여 도중에서 죽었는데 때가 마침 한 여름이어서 시체가 불어터졌다.'- 같은 시기 이치의 직속 상관이었던 이해도 거의 닮은꼴로 희생됐다. 이는 그가 당시 권력자였던 이기, 윤원형 등 소윤 일파와 권력의 대척점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인종 때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를 우의정에 앉히는 것을 반대하고 되레 탄핵했다. 이해는 이 때문에 이기와 그의 심복인 이무강(李無彊·?~?)의 원한을 샀다. 이런 상황에서 이해와 이홍남이 크게 다투는 사건이 벌어
'사신은 논한다. 이 옥사에 연루되어 주륙당하거나 귀양간 자가 무려 40∼50인에 달하여 충주(忠州) 전체가 온통 비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이홍남이 꾸며낸 일이었다. 그런데 이홍남이 자손을 둔 것이 어찌 천도(天道)이겠는가.'- 이홍윤 역모사건은 16세기 중반 우리지역 충주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외형상 이 사건은 곧 종결되는가 싶었으나 또 다른 사건의 발단이 됐다. 그것의 출발점은 역시 이홍윤 사건이었다. 명종은 이홍윤 사건 후 이른바 인사를 단행했다. 이때 유신현 현감으로 부임한 인물이 이치(李致·1504∼1550)다. 그 직전 연좌제에 따라 행정적 강등과 이름이 바뀌는 조치가 단행됐다. '충청도(忠淸道)를 고쳐 청홍도(淸洪道)로 만들고, 충주(忠州)를 강등시켜 유신현(維新縣)으로 만들었다. 이기(李초두변+己 기)를 의정부 영의정으로, 이해(李瀣)를 청홍도 관찰사로, 이치(李致)를 유신 현감으로 삼았다.'- 이와 관련, 당시 사관이 실록 말미에 이례적으로 '사신은 논한다. 다시 이기를 의정부 영의정으로 삼았다. 옥사가 한번씩 이루어질 적마다 이기 등의 직급이 올라가니 아, 슬프도다'라는 내용의 사론(史論)을 적었다. 사관이 영의정 이기만을 특정해
1545년(명종 즉위년) 소윤 윤원형이 대윤 윤임 일파를 공격하는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충주인 이약빙도 이 사건에 연루돼 사사됐고, 그의 아들 이홍남(李洪男·1515 ~?)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됐다. 이홍남은 유배지에서 빨리 풀려나기 위해 '이홍윤(동생)이 배광의, 김의순 등과 역모를 꾸몄다'는 내용의 고변 편지를 승정원에 접수했다. 전회에도 언급한 이른바 이홍윤 역모사건이다. 이홍남, 홍윤 형제는 재산다툼으로 사이가 극히 안 좋은 터였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은 역모사건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다. 3일 뒤 풍성부원군 이기, 좌의정 황헌, 좌승지 정언각 등으로 국청(鞫廳)이 구성됐다. 국청은 조선시대에 역적 등 나라의 큰 죄인을 신문하기 위해 왕명으로 설치하는 임시관청을 일컫는다. 다음은 국청에서 작성한 심문 내용이다. "이홍윤을 형신할 때 무송수 이언성과 모산수 이정랑이 그 초사에서 나왔으니 잡아다 추문하게 하소서. 또 모의책(謀議冊)이 충주 본가에 있다고 하여 먼저 간 도사(都事)로 하여금 가지고 오도록 하였으나 틀림없이 가지고 올지는 기필하기 어려우므로 다시 이홍윤으로 하여금 대체적인 것을 적게 하여 입계합니다."- 인용문 중에 모산수 이정랑이라는 이름이
조선시대 충청도에는 충주, 청주, 공주, 홍주(지금의 홍천) 등 4곳의 계수관이 존재했다. 이와 관련, 당시 조정은 역모나 반윤리적(일명 강상죄)인 사건이 일어날 경우 연좌제를 적용해 도(道)의 이름을 아예 바꿨다. 가령 충청도 충주에서 어떤 역모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충' 자를 빼고 '공'이나 '홍' 자를 넣었다. 이 경우 충청도는 공청도나 홍청도가 된다. 명종 때 충주에서 이른바 이홍윤 역모사건이 발생했다. 형 이홍남이 동생 홍윤이 역모를 꾀했다고 거짓 고변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충주지역 유림 40-50명이 처형 당하거나 유배됐고, 충주는 목에서 유신현으로 강등됐으며, 충청도는 청홍도가 됐다. 어떤 사가는 이 사건을 지금도 "충주지역이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저해요인이 됐다"고 평하고 있다. 당시 청홍도관찰사의 한 명으로 심수경(沈守慶·1516∼1599)이라는 인물이 부임했다. 그는 '물'(水)과 악연을 가진 관찰사로 유명하다. 1562년 정릉(靖陵·중종임금의 묘)을 이장할 때의 일이다. 경기도관찰사었던 그는 선창이 있어야 대여(大輿)가 한강을 건널 수 있음에도 불구, 이를 설치하지 않아 파직됐다. 대여는 국상 때 사용하는 큰 상여로, 1줄을 8∼15명
전회에 우리고장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이천이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갑인자 개량을 주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세조 원년(1455)과 성종 15년(1484)에 각각 을해자와 갑진자도 만들어지나 조선시대를 통털어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세종대의 갑인자였다. '이에 이천에게 명하여 그 일(갑인자 개량 지칭)을 감독하게 하고, 집현전 직제학 김돈·직전 김빈·호군 장영실·첨지사역원사 이세형·사인 정척·주부 이순지(李純之) 등에게 일을 주장하게 맡기고…'- 인용문 마지막에 이천과 갑인자를 함께 개량한 인물로 이순지(·∼1465)가 보인다. 주부(主簿)는 종친부, 내의원, 전옥서 등 종6품군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이순지는 일반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료에는 천문에 조예가 깊은 인물로 등장한다. 구한말 간행된 백과사전류로 증보문헌비고(1908)가 있다. 이 사료를 보면 당시 사람들도 북극고도, 즉 위도를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정황상 중국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습득한 것으로 보여진다. '북극고도: 한양의 북극고도는 37도 39분 15초이다. 북극은 하늘의 지도리로서 그 곳에 매여 있어서 옮기지 않는다. 지평으로부터의 고도에 높고 낮음이 생기는 것은…
조선시대 과학사를 논할 때 좌우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아무래도 장영실(蔣英實·?~?)과 이천(1376∼1451)일 것이다. 일반인들은 두 사람 중 장영실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그 유명한 자격루(1434)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종의 명을 받아 만든 자격루는 일종의 자동 시보장치로, 당시로서는 최첨단 과학을 상징했다. 장영실은 그 공로로 대호군에까지 승진했고, 그 은총에 보답하려고 또 다른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만들기도 했다.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천도 천문기구, 금속활자, 화약무기 등의 분야에서 장영실에 못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사학자들은 이중 금속활자 개량을 이천의 최고 업적으로 치고 있다. 고려시대 금속활자는 조선시대들어 외형상 반쪽만 계승된다. 금속활자를 만드는 것이 워낙 힘들다 보니 사대부 집안과 사찰에서는 목판으로 문집과 경전 등을 간행했다. 목판본이 많이 현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조선 조정은 고려 금속활자를 계승, 성능 개량을 꾸준히 시도했다. 그 결과, 조선초기의 금속활자는 시간적으로 계미자(태종), 경자자(세종), 갑인자(〃) 순으로 개량됐다. 바로 이천이 경자자와 갑인자 개량을 주도했다. 계미자
전회에 칠서(七庶·일명 강변칠우) 사건을 언급한 바 있다. 말 그대로 7명의 서자들이라는 뜻으로, 박응서·김평손·심우영·서양갑·박치의·박치인·이경준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서자차별에 불만을 품고 모반을 기도했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이 사건은 조작 여부를 떠나 광해군이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증살하는 옥사로 이어졌다. 이른바 계축옥사다. 당시 역모를 도모했다고 진술한 인물은 박응서라고 밝힌 바 있다. 그도 서자의 서러움을 갖고 있었다. 그것의 씨앗이 된 친부는 우리고장 충주 인물로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1523∼1589)이다. 함흥차사로 유명한 박순과 한자가 같다. 그러나 함흥차사의 박순은 음성, 오늘 소개하는 박순은 충주 출신이라는 점이 다르다. 영의정 박순은 칠서사건으로 인해 결국 서자 박응서를 잃게 된다. 박응서는 진술의 댓가로 처음에는 잘 나갔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하면서 목숨을 잃었다. 박순이 첩을 얻게 된 사연도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대사헌·대제학·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 등을 두루 거친 다음 1572년(선조 5) 영의정에 올라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말이 15년이지 일국의 재상 자리에 15년간 있었다는 것은 그가 도덕, 행정
[충북일보] 주말 동안 충북지역에 많은 비가 내리면서 도내 하상도로가 통제되고 나무가 쓰러지는 등 각종 피해가 속출했다. 청주기상지청은 지난 6일부터 7일까지 시간당 20~30㎜의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했다. 시간당 30㎜의 비부터는 보통 '폭우'라고 부르는 수준으로 밭이나 하수구가 넘치기 시작하고, 홍수나 침수 같은 비 피해 위험이 매우 높아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단계다. 충북도 등에 따르면 7일 오후 2시 30분 기준 도내에는 평균 62.1㎜의 비가 쏟아졌다. 지역별로는 △증평 121.5㎜ △괴산 116.5㎜ △청주 87㎜ △진천 52㎜ △단양 49㎜ △보은 45.3㎜ △충주 45㎜ △제천 41.7㎜ △영동 7㎜ △음성 4㎜다. 폭우로 인해 도내 하상도로와 둔치주차장은 일부 통제된 상태다. 현재 도는 청주시 무심천 하상도로, 미암교 하상도로, 충주시 달천 하상도로를 통제 중이다. 하상도로에 설치된 둔치주차장은 전체 27곳 중 15곳이 통제된 상황이다. 폭우 여파로 도내 각종 사건·사고도 잇따랐다. 이날 도에 접수된 풍수해 신고 건수는 총 20건이다. 피해 유형은 △수목전도 12건 △배수불량 4건 △낙석 1건 △기타 3건으로 집계됐다.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도가 친환경 에너지로 각광받고 있는 수소산업 육성을 위해 특화단지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수소특화단지 지정을 통해 산·학·연·관 생태계를 공고히 구축하고, 기업 지원과 기술 개발로 이 분야를 선도한다는 구상이다. 7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가 내년 상반기 공모를 통해 지정할 예정인 수소특화단지를 충주시에 유치할 계획이다. 도는 일찌감치 충주를 신청지로 낙점했다. 이 지역의 수소 인프라를 고려할 때 수소특화단지를 유치하면 관련 산업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충주는 수소 분야 기업 26곳이 둥지를 트고 있다. 국내 유일의 차량용 연료전지 생산 거점인 현대모비스를 비롯한 주요 부품업체들이 협력체계를 갖추고 있다. 청정수소 생산과 저장, 유통, 충전, 활용 등 전주기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는데다 그린수소산업 규제자유특구로 지정 받았다. 바이오가스에 기반한 그린수소는 전국에서 가장 저렴하게 공급하고 있다. 오는 2027년까지 하루 2.5t의 청정수소를 생산할 계획이다. 도와 충주시는 유치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다. 현재 수소특화단지 계획 수립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다. 결과는 올해 말 나올 예정이며 용역 과정에서 도출된 경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