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표현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이는 거꾸로 얘기하면 장인과 사위 관계는 장모와 사위에 이르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시집보낸 딸을 걱정하는 마음이 장모를 그렇게 만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전기는 이같은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당시의 사대부들은 사위도 친아들처럼 여겼다. 따라서 장인은 자신의 집 근처에 서옥(胥屋·사위의 집)을 마련해주고 노비와 토지까지 보태주기도 했다. 조선전기 선비들이 유난히 처가살이를 많이 한데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 존재한다. 흔하지 않지만 사위가 장인에게서 글을 배운 사례도 있다. 장가가서 글을 배웠다는 것은 학문의 시작이 크게 늦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사위에게 글을 가르쳐준 장인은 그 마음씨가 더 아름다워 보인다. 조선전기 경북 김천에 김시창(金始昌·1472∼1558)이라는 인물이 생존했다. 그는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효행이 지극했는지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두번 등장한다.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다음과 같이 천거하였다. 유학 김시창(金始昌)은 금산(金山, 김천 지칭)에 사는 사람으로 효행이 있고 젊어서부터 독실한 뜻으로 힘써 행하며 행동에는 옛사람을 본받았습니다. 여러번 과거에 떨
전회에 칠서(혹은 강변칠우) 사건을 언급한 적이 있다. 칠서사건은 조선 광해군대 여주 한강변에 살던 7명의 패거리가 역모를 도모했다가 적발된 것을 말한다. 박응서·김평손·심우영·서양갑·박치의·박치인·이경준 등 7명은 대부분 명문가 서자 출신이었다. 박응서의 아버지는 영의정, 서양갑은 목사, 심우영은 관찰사, 이준경은 병마절도사였다. 이들은 여주의 강변에 '무륜(無倫)'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벼슬아치가 되지 못하는 불만을 시와 술로 달랬다. 강변칠우에 포함돼 있지 않으면서 훗날 함께 화를 당한 인물이 있다. 유인발(柳寅發)이다. 실록 광해군일기에는 그의 이름이 9번 등장하나 신상 정보가 될만한 표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충주 출신인 것만 확인될뿐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 사료에 의하면 유인발은 무과에 합격했으나 어떤 이유로 유랑생활을 하던 '떠돌이 무사'였다. 이런 그가 왜 칠서와 뜻을 함께 하게 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여려 정황상 칠서 우두머리 격이었던 서양갑(徐羊甲··~1613)에게 포섭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록을 보면 서양갑은 역모를 제일 먼저 제의했고, 또 시국에 대해 나름의 철학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박
상소문(上疏文)은 신하가 국왕에게 올리는 글로, 봉장(封章), 주소(奏疏), 진소(陳疏)라고도 한다. 국가 최고 권력자에게 올리는 글인 만큼 어느 정도 서식을 갖추어야 했다. 겉봉투에는 '上前開折(상전개절)', 또 뒷면은 이어 붙인다는 의미로 '臣署名(신서명)'이라고 표시했다. 조선 명종대 우리고장 단양군수를 지낸 인물로 황준량(黃俊良·1517∼1563)이 있다. 이황의 제자였던 그는 단양군수로 재직하던 1557년 명종 임금에게 '민폐 10조'의 상소문을 올린다. 16세기 후반이면 지금으로부터 대략 5백년전이다. 따라서 상소문의 행간을 들여다보면 당시 단양 사람들의 생활상을 어느정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단양은 궁벽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해 상소문을 읽는 사람의 코끝을 찡하게 한다. 상소문은 '신은 장구(章句)나 아는 보잘것없는 유자(儒者)로서 경세(經世)하는 재주가 없는데 외람되이 군수의 책임을 맡았으니 잔폐된 고을을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책임이 중합니다'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어진다. '우거진 잡초와 험한 바위 사이에 있는 마을 집들은 모두 나무 껍질로 기와를 대신하고 띠풀을 엮어 벽을 삼았으며 전지는 본래 척박해
간신(姦臣)은 공통적으로 공권력을 사유화하고, 또 국법상의 기능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하거나 변형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유자광, 임사홍, 이이첨, 윤원형, 홍국영 등에서 이런 모습이 발견된다. 이이첨(李爾瞻·1560~1623)은 선조~광해군 연간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가 관료시절 초기부터 간신의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다. 그는 효자였고, 그 때문에 현감재직중 관찰사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상인(喪人) 전 평강 현감 이이첨은 천성이 효우(孝友)하고 제행이 고결하여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김에 애경이 지극하였다. 임오·계미년 사이에 그의 아버지와 계조모가 서로 잇달아 죽었는데 여막에 거처하면서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거의 멸성(滅性)할 지경에 이르렀고…"- 왜군이 한반도를 유린하면서 조선 역대 왕의 영정은 모두 불탔다. 그러나 태조와 세조의 영정은 홍여율(洪汝栗)과 이이첨의 결사적인 보존노력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작은 노력이 아닌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이첨은 광릉 참봉으로서 봉선전의 영정을 받든 것으로 조정의 명령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첨이 변란 처음부터 피난할 생각을 하지 않고(…) 또 이번에 적의 불길 속에서 영정을 받들어 내왔
청주가 교육도시임을 주장할 때 자주 거론되는 것이 망선루(望仙樓)이다. 망선루는 고려시대 때 과거시험의 합격자 방이 붙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공민왕은 홍건적을 피해 청주에서 7개월 가량 머문다. 임시수도 생활이 길어지자 과거시험을 봤고, 그 합격자 명단을 망선루에 내걸었다. 근현대기의 망선루는 자주 이전했다. 지금의 중앙공원 망선루는 제일교회측이 부대건물로 사용하던 것을 청주시에 기증하면서 공원 안으로 이건(移建)됐다. 2천년 밀레니엄 때의 일이다. '옛 이름은 취경루(聚景樓)이다. 지정(至正) 신축년에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안동으로부터 이곳에 옮겨 와 수개월 동안 머물렀었다. 도적이 평정되자 문과와 감시(監試)의 합격자 방을 붙였었는데, 훗날 사람이 그 방을 써서 누각에 게시하였다.'- 인용문에서 보듯 망선루의 본래 이름은 취경루로, '경치를 끌어들인다'는 뜻을 지닌다. 이 누정 이름을 망선루로 바꾼 인물이 한명회(韓明澮·1415∼1487)다. '누각은 오랫동안 헐어 있었는데, 천순(天順) 신사년(세조 7년)에 목사 이백상(李伯常)이 새로 중수하고, 한명회(韓明澮)가 누각의 편액을 고쳐서 망선루라 하였다.'- 한명회는 청주가 본관이나 여러 정황상
포도청(捕盜廳)은 지금의 경찰청과 같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포도청은 전국적인 기구는 아니었다. 성종대까지만 해도 지금의 수도권을 좌변과 우변으로 나눠, 서울의 동부·남부·중부와 경기좌도는 좌변포도대장이 맡았다. 반면 서울의 서부·북부와 경기우도는 우변포도대장이 맡았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좌·우변 포도청을 폐합해 경무청(警務廳)을 설치했다. 전회에 박응서라는 인물을 소개한 바 있다. 그는 대북파 이이첨(李爾瞻)의 꾐에 빠져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거사자금 마련을 위해 강도짓을 했다"고 거짓 자백했다. 이때 박응서의 형관을 맡은 인물이 당시 좌변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1623)이다. '좌변포도대장 한희길이 아뢰기를, "지난 달에 조령(鳥嶺) 길목에서 도적이 행상인을 죽이고 은자(銀子) 수백냥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적괴(賊魁)인 서얼 박응서는 도망갔고 도적 허홍인의 노비 덕남 등을 체포했는데…'- 그러나 그도 엄밀히 말하면 피해자였다. 그의 뒤에는 대북파 영수인 이이첨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이첨이 이를 듣고 희길을 불러 묻기를 "자네가 큰 도적을 잡았다고 들었는데 그 실상이 어떠한가" 하니, 희길이 공초(供招)받은…
임진왜란이 끝나자 호성공신과 선무공신을 선발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호성공신은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는 데 공을 세운 문신에게 내린 훈호(勳號)를 지칭한다. 무신에게는 선무공신이라는 훈호가 주어졌다. 호성공신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일어났다. 1등에 이항복(李恒福)·정곤수(鄭崑壽) 등 2명이 선발됐지만 나머지 등급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 대상이 됐던 인물은 정운, 이희득, 심희수, 유몽정등 4인이었다. 특히 심희수와 유몽정은 역할이 비슷, 공신 포함 여부를 놓고 삼정승들이 마지막까지 고심했던 흔적이 실록에 나타난다. '만일 심희수을 녹공할 경우에 유몽정(柳夢鼎)은 임진년의 성절사로서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행할 적에 뒤따라갔고, 북경에 도착해서는 정문(呈文)하여 위급을 상고(上告)하는 노고가 있었으니, 유몽정만 유독 빠지게 된다면 미안스러울 듯합니다.'- 파문이 가라앉은 후 유몽정 아들 '영'이라는 인물이 "아버지가 공신에 선정되지 않은 것은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이는 유몽정이 호성공신에 포함되지 못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실제 호성공신 최종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당시 조정도 "안타깝게 됐다"는
조선 광해군대 여주 한강변에서 강변칠우(江邊七友)를 자처하는 패거리가 서자에게도 관계 진출을 허용해 주도록 건의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강변칠우는 7명의 명문 서자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것으로, 박응서·김평손·심우영·서양갑·박치의·박치인·이경준 등을 말한다. 박응서는 영의정, 서양갑은 목사, 심우영은 관찰사, 이준경은 병마절도사의 서자였다. 이들은 여주의 강변에 '무륜(無倫)'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시와 술로써 소일하며, 관계에 진출하지 못하는 불만을 토로했다. '칠우'라는 명칭은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모방했다. '칠우'의 본멤버는 아니었지만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1569~1618), 이재영(李再榮·1553~1623) 등도 가끔 찾아와 이들과 어울렸다. 1612년에는 조령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 수백냥을 약탈하는 강도살인 사건이 발행했다. 이때의 조령이 괴산 사면인지, 문경 사면인지는 분명치 않다. 범인들은 강변칠우였고 이들은 이듬해 모두 검거됐다. 제도 불만이 악행으로 이어진 사건이었다. 직전의 조정은 북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나 후계 문제로 분열했다. 대북파는 광해군,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옹호했다. 당시 대북파의 영수였던 이이첨(李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맹활약했다. 게다가 분조(分朝)의 경험까지 있어, 그가 왕위를 승계하는 것은 당연시 됐다. 선조의 분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자신의 유고를 대비해 그렇게 했다는 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선조 자신이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는 설이다. 임진왜란이 종전되자 광해군의 왕위계승 환경은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선조와 광해군 사이에 이와 같았다. 선조는 광해군이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고 있는 것을 알고 자신이 제거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불안감은 증오심으로 발전했다. 선조는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라"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게 악감정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의인왕후 박씨가 사망하자 선조는 바로 후처를 맞이했다. 그가 바로 인목황후 김씨였다. 이때 선조의 나이 50세, 인목황후는 19살이었다. 1606년에 영창대군을 낳자 왕위계승을 둘러싼 문제가 분격적으로 불거졌다. 얼마안가 선조는 병이 위독하자 영창대군에게 선위하는 교서를 내렸다. 선조는 신임하던 일곱 신하에게 영창군의 뒤를 유명(遺命)으로 부탁하기도 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을사사화는 윤형원의 소윤이 윤임의 대윤을 공격, 이로 인해 사림이 크게 화를 당한 사건을 말한다. 노수신(盧守愼·1515∼1590)도 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 유배를 가야 했다. '노수신과 정황은 본래 못나고 망령된 사람인데 헛된 칭예(稱譽)를 내세우며, 부박한 무리를 고무 선동하여, (…)사습의 궤격함을 빚어내어서 시사(時事)를 분란하게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울러 멀리 유배시키소서" 하니…'- 그가 유배생활을 하던 1546년 이른바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났다. 벽에는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세를 농락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벽서의 내용은 임금에게 보고되었고, 당시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지시하여 잔여 윤임 일파를 완전 숙청했다. 이 사건 역시 소윤이 잔여 대윤을 공격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다. 노수신은 여기에도 연루됐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에 송인수·이약빙은 사사하고, 이언적·정자는 극변안치 하고, 노수신·정황·유희춘·김난상은 절도안치 하고 (…) 윤강원·조박·안세형·윤충원·안함은 부처하고자 한다.'- 인용문 중 극변안치는…
1589년 정여립(鄭汝立·1546 ~ 1589)이 모반을 꾀했다는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율곡 이이의 문하생이었던 정여립은 표변했다. 율곡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서인을 비판했다. 이후 전북으로 귀향, 대동계를 조직하여 무술을 연마하기도 했다. 그해 황해도 관찰사, 안악 군수 등이 정여립이 대동계 사병을 이끌고 반란을 시도, 선조 임금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려 한다고 고변했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정여립은 진안 죽도(竹島)의 토굴에서 자결했다. 혐의자에 대한 국문에 2년의 시간이 걸렸고, 이때 형관을 맡은 사람은 정철이었다. 기축옥사로 동인 1천여명이 희생됐고, 한때 전라도는 반역지향(叛逆之鄕)이라 하여 인재 등용이 제한됐다. 기축옥사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정여립의 반란으로 규정됐다. 1980년대 이후부터는 서인의 책사였던 송익필이 조작했다는 설, 서인의 집단 조작설, 정여립의 혁명적인 주장이 옥사를 초래했다는 설 등 여러 주장이 혼재하고 있다. 기축옥사 때 자살한 정여립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스레 염(殮)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한백겸(韓百謙·1552~1615)이다. 또한 그는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李震吉)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이기도 했다. 한백겸도 체포
영동군 양강면 두평리 561번지에 자풍서당(資風書堂)이라는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중앙에 대청이 자리잡고 있어 시원스러움이 느껴지는 18세기 건물이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유교건축물 내에 불탑이 자리하고 있는 점이다. 영동군 향토유적 제8호로, 공식 명칭은 '두평리 5층석탑'이다. 1989년 지하에서 발굴된 이 석탑은 신라말~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래 이곳에는 풍곡사(風谷寺)라는 사찰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억불숭유 정책에 따라 사찰이 폐지되고 유교 건축물이 세워졌다. 종교간에도 역전과 반전이 있었던 셈이다. 자풍서당의 관리가 잘 안 되어 있는 모양이다. 주변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닭까지 잡아 주고 또 건물 아궁이 주변이 불에 끄슬려 있다고 최근 언론에 보도됐다. 자풍서당할 때의 '자풍'은 자법정풍(資法正風)에서 딴온 말로, 광해군 65년(1614) 정구(鄭逑)라는 인물이 작명했다. '資'는 명사로 쓰이면 재물을 뜻하지만, 술어로 사용되면 '헤아리다', '바탕으로 하다'는 뜻을 지닌다. 그렇다면 자법정풍은 '법을 바탕으로 해서 풍속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 된다. 조선시대 예학을 논할 때 좌우에 나란히 위치하는 인물이 김장생과 정구다.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는 혼동되는 면이 있다. 한자가 둘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 설명해 주고 있다. 누각 할 때의 '다락樓' 자는 마치 이층집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누각은 1층은 기둥만 세운 채 벽을 비우고 2층에는 마루를 깐 건축물로, 관아에서 부속 건물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 정자는 규모가 누각보다 작으면서 1층으로만 지어지면서, 과거 선비 개인의 피서나 음풍농월 장소로 주로 이용됐다. 누각과 정자의 공통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누허즉능납만경'(樓虛則能納萬景)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의역하면 '누각이 비어 있어야 주변의 많은 경치를 불러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 선조들은 취경 즉, 경치를 불러들이기 위해 누정에 벽과 문을 설치하지 않았다. 선사상은 '마음을 비워야 선행을 쌓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둘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충북에도 유명한 누정이 적지 않다. 지명도가 높은 누정으로 제천 청풍의 한벽루(보물 제528호)와 영동 황간의 가학루(도유형문화재 제 22호) 등이 있다. 청풍 한벽루는 물가, 가학루는 추풍령 바로 밑의 영로(嶺路) 변에 위치하고 있다. 가학루는 조선 태종 3년(1403)에 당시 황간현감 하담
기수학(氣數學)이라는 것이 있다. 일반인들은 점술학으로 많이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기수학자로는 명종 때 인물인 박지화(朴枝華·1513∼1592)가 꼽히고 있다. 그는 벼슬이 이문학관(吏文學官)에 이르렀다. 이문학관은 승정원 소속으로, 중국 외교문서와 관련된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그러나 그는 서자 출신으로, 승진에 한계가 있었다. 그는 명산을 유람했고, 특히 금강산에 들어가 7년간 수도했다. 이수광은 이런 그를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그는 밥을 먹지 않고 솔잎과 소나무 껍질만 먹었으며, 엄동설한에도 무명옷을 입고 지냈다'고 적었다. 그렇다고 그가 도인의 모습으로만 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실력을 보고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다음은 문신 신흠(申欽·1566∼1628)이 지인 박인수(朴仁壽·1521∼1592)가 박지화에 감화되는 모습을 적어 놓은 내용이다. '그러다가 수암 박지화를 만나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들었고(…). 이로부터 도의 진수에 깊이 맛들여서 평소에 방 하나를 말끔히 정돈하여 왼편에는 거문고, 오른편에 책을 놓아두고 거처하였으며 세간의 영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본문중 '위기지학'은 타
전회에 세종대왕과 불교정책을 언급했다. 이때 '태종에 이어 조선 초기의 가장 강력한 억불책의 하나였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태종은 종교정책에도 과단성을 발휘했다. 그는 사원 혁파를 단행해 사찰의 노비와 전답을 국고에 환수했다. 그는 이같은 연장선에서 유교적 사회질서의 정착을 위해 가정에는 가례(家禮), 그리고 향리에는 이사법(里社法)을 보급했다. 가례는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절을 말한다. 그러나 이사법은 자주 접하던 용어는 아니다. 이사법은 조선시대 각 향리에서 토신(土神)을 모시는 것을 말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 자리에서 풍년을 빌었고, 또 마을 인심(人心)을 밝게 하기 위한 의견을 주고 받았다. 넓은 의미의 현대판 반상회로 볼 수 있다. 이를 처음 건의한 인물이 허지(許遲·1372∼1422)다. '무릇 우리 동리(同里)의 사람은 각각 예법(禮法)을 존중하고, 힘을 믿고 남을 능욕(凌辱)하지 않는다. 위반하는 자는 먼저 함께 다스린 뒤에 관(官)에 넘긴다. 혹은 가난하여 도와주는 이가 없으면 그 집을 두루 도와주되, 3년에 자립하지 않으면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한다.'- 손으로 출처를 가리고 보면 "어느 동네 반상회 때 나온 얘기인가" 할 정도로 현실적
조선시대는 유교를 숭상하는 것에 반비례해 불교를 억압했다. 조선 개국의 설계자인 정도전은 그 정도가 더 심해 석가모니를 아예 '불씨'(佛氏)라고 불렀다. 고려말 사대부들이 불교를 줄기차게 공격한데는 이데올로기 외에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고려 후기의 전국 사찰들은 노비 외에 광범한 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사찰들은 여기서 나오는 잉여자본을 고리대금업에 재투자, 막강한 경제력을 확보했다. 고려후기를 '사원경제'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원경제를 공격해야 사대부 자신에게도 재분배된 토지가 돌아올 수 있었다. 세종대왕은 당시 대신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불교 여러 종단을 선·교종 양종만 남기고 산문 폐쇄령을 내렸다. 이때 불교 통폐합을 강력하게 건의한 인물이 당시 대사헌 하연(河演·1376∼1453)이었다. '세종 계묘년에 대사헌 하연(河演)이 동료들과 함께 상소하기를, 부처는 임금을 버리고 작위를 사양하였는데, 역대에서 깊이 믿어서 널리 절을 짓고 전지를 시주하며 노비를 바쳐서, 중외 사찰에서 나누어 부친 밭이 1만 1백여 결이나 됩니다. 동포 백성들이 주려 죽는 판인데, 놀고 있는 중들에게 또 무슨 밭을 주어서, 그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할…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가 / 홍안은 어디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 잔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 하노라'. 임제(林悌·1549∼1587)의 시조다. 그는 서도병마사가 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 위 시조를 짓고 제사지냈다가 부임하기도 전에 파직당했다. 임제는 그후 다시 복직되나 본래의 호방한 성격은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질시하는 벼슬아치 사회에 대해 환멸과 절망을 느낀다. 그는 10년간의 관직생활을 뒤로 하고 전국을 유람하기 시작했다. 이때 만난 여성이 한우(寒雨)라는 평양 기생이다. 둘이 나눈 시조가 '해동가요'(김수장), '청구영언'(김천택)에 각각 전해지고 있다. 먼저 임제가 한 수 읊는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를 / 우장(雨裝) 업시 길을 나니 /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온다.' 한우가 화답한다. '어이 얼어 잘이 므스 일 얼어 잘이 /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듸 두고 얼어 자리 / 오늘은 비 맛자신이 녹아 잘 노라.' 임제가 '한우'라는 기생 이름에 빗대어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자겠다고 한다. 그러자 한우는 자신을 찬비에 빗대어 원앙침 비취금 속에 녹아 자라고 한다. 남녀간 서로의 수작을
중국 고서 중에 '잠서'(蠶書)가 있다. 북송 때 진관(秦觀·1049~1100)이라는 인물이 지은 책으로, 가장 이른 시기의 잠업책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때 이 잠서를 알기 쉽게 풀이한 인물이 서강(徐岡·?∼1461)이다. 또 그는 최항 등과 함께 손자주해(孫子註解)를 교정할 정도로, 학문에 관한 한 경지에 올랐다.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행동으로도 나타났다. 그의 직언은 유명했다. 단종실록 내용이다. '헌납 서강(徐岡)이 본원의 뜻을 가지고 아뢰기를, "신 등이 듣건대, 내일 장차 동교에 사냥한다고 하는데, 사철 강무같은 것은 인군(人君)의 부득이한 일이지만, 지금 명분도 없는 사냥을 자주 행하시는 것은 불가할 것 같으니, 청컨대 이를 정지하소서…"'- 이 대목의 실록 내용은 훨씬 더 길다. 단종이 '뭐 그런 것을 가지고!'라는 식으로 말을 해도 그는 직언은 계속 된다. 시쳇말로 임금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있다. '서강이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나이가 바야흐로 어리신데, 자주 사냥을 구경하러 다니시고 학문을 폐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주군이 바뀌었지만 그의 직언 태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상대가 단종과 정반
우리나라 역대 조정은 고대 이래로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제사를 지냈다. 시대에 따라 다소 다르기는 하나 대체로 '국가의 흥망성쇠는 산천의 음양 조화와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명산대천에 대한 이같은 인식은 조선시대 들어서 다소 변하게 된다. 산천신에 신격(神格)을 부여하는 것은 종전과 같았다. 다만, 산천신을 신하로 의식하는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왕은 이르노라! 그대 백악(白岳)과 목멱산(木覓山)의 신령과 한강과 양진 신령이며 여러 물귀신이여! (…) 그대들 신령이 있거든 나의 지극한 회포를 알아주어, 음양을 탈 없이 하고 (…) 신도 또한 영원히 먹을 것을 가지리라. 그러므로 이에 알리는 바이다."- 태조 이성계가 참찬문하부사 김입견(金立堅)이라는 인물을 보내서 산천의 신에게 고유한 내용의 일부다. 고유문(告由文)은 중대한 일을 치르고자 할 때나 치른 뒤에 그 까닭을 적어서 사당(祠堂)이나 신명에게 고하는 글을 말한다. 인용문을 보면 '왕은 이르노라', '이에 알리는 바이다' 등의 표현에서 보듯 신을 휘하처럼 하대하고 있다. 조선시대 제사에 대한 의식은 국조오례의 길례(吉禮) 편에 적혀 있다. 길례는 조선시대 제사의 종류를 사(祀), 제(祭), 향(享
일제는 한반도를 강점한 후 산림자원도 수탈해 갔했다. 이때 맹수인 호랑이는 방해물이 됐다. 따라서 일제는 호랑이 포획을 장려했고, 그 과정에서 한반도 호랑이가 멸종됐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까지도 상황은 그 반대였다. 호랑이가 자주 출현하면서 전국 곳곳에서 희생자가 속출했다. 따라서 호환(虎患)이라는 단어가 대중어로 사용됐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관련 내용이 64건이나 등장하고 있다. 호랑이가 가장 많이 출몰한 지역은 북한지역이었고, 그 다음은 태백산맥을 끼고 있는 영동이었다. 호랑이는 산간벽지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능과 궁궐에도 출몰했고 심지어 궁안에 새끼까지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비망기로 홍경신(洪慶臣)에게 전교하였다."내가 듣건대, 창덕궁 안에서 어미 호랑이가 새끼를 쳤는데 그 새끼가 한두 마리가 아니라고 한다. 발자국을 찾아 잡도록 이미 전교를 내렸으니 지금처럼 초목이 무성한 때에는 군대를 풀어 잡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발자국을 찾아내어 제거하는 방법이야 어찌 없겠는가.'- 호랑이를 애완동물처럼 대했다면 정상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한 인물이 있었다. 짐작했겠지만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이) 우리(檻)에 큰 호랑이와 큰 멧돼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약천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 지은 시조로,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생활의 풍류를 즐기며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주제는 권농(勸農)이지만 농촌의 평화로움도 잘 드러나 있다. 남구만은 목가적 시조를 남긴 것과 달리 정치적으로는 굴곡이 많았다. 그는 송시열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면서 소론의 영수로 떠올랐다. 그러나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면서 강릉으로 유배됐고, 장희빈에 대한 극형을 반대하다가 완전히 실각·낙향했다. 남구만의 사당과 묘는 경기도 용인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유난히 우리고장 충북에도 많은 족적을 남기고 있다. 그는 현종대에 청주목사를 역임했다. 그가 올린 상소문이 실록에 전해지고 있다. '청주 목사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전세 및 대동미 여분을 받아 본읍에 두었다가 진휼의 자본에 충당하고, 속오군의 복호는 그대로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잃지 말고(…)" 하였는데, 상이 그 소를 비국에 내려 의논하여 아뢰게 하여, 속오군을 급복하는 일 외에는 모두 그 말대로 따랐다.'- 실록 수정본은 고친…
실록에는 다양한 형태의 기생 이름이 등장한다. 장중경(掌中輕), 세류지(細柳枝), 내한매(耐寒梅), 일타련(一朶蓮), 적선아(謫仙兒), 계궁선(桂宮仙), 승양비(勝楊妃). 장중경은 손바닥 안에서 춤을 출 정도로 가려리다, 세류지는 버들가지처럼 하늘거리는 허리, 내한매는 추운 겨울을 견뎌낸 매화, 일타련은 진흙속의 한 송이 연꽃, 적선아는 죄를 지어 인간세계로 귀양온 선녀, 계궁선은 달나라 궁궐에 사는 선녀를 각각 일컫고 있다. 여러 기생 이름중 압권은 아무래도 승양비(勝楊妃)인 것처럼 보인다. 미모로 양귀비를 뺨친다는 뜻이다. 기생과 관련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만들어낸 왕은 연산군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건 말건 자기 욕심부터 채웠다. 여기에도 승양비, 내한매의 이름이 등장한다. '기녀(妓女) 승양비(勝陽妃)·내한매(耐寒梅)는 자색(姿色)이 있었는데, 계성군(桂成君) 이순(李恂)이 가까이하는 바였으므로, 비록 감히 원(院)에 뽑아 들이지는 못하였으나, 왕이 자주 비밀히 불러다가 간음하였다.'- 조선시대 기생 이름 중 영자, 순희 식으로 흔한 이름은 '홍일점'(紅一點) 또는 '일점홍'(一點紅)이었다. 두 단어는 같은 뜻으로, 글자 그대로 푸른 잎 가운데
고려 태조 왕건은 지방 호족의 세력을 흡수하는 방편으로 성(姓)을 하사했다. 이른바 사성(賜姓) 정책이다. 이와 관련해 평민들에게도 성(姓)에 앞서 본관이 먼저 주어진 경우도 있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 결과다. 세금과 관련이 있다. 양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려면 거주지가 명확하고 고정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유랑생활을 하면 세금 부과가 쉽지 않다. 지금의 가족관계등록법에 고려 본관제도의 잔상은 남아 있다. 바로 본적란이다. 본적란을 보면 당사자나 그 선대가 어느 곳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려시대 평민들은 역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를 상당 부분 제한받았다는 것이 된다. 성씨·본관 문화와 관련해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는 표현이 종종 사용된다. 이때의 삼한은 원삼국 시대의 마한, 변한, 진한이 아닌 신라, 고려, 조선조를 일컫고 있다. 누대에 걸쳐 문벌이 좋은 가문이라는 뜻으로, 달리 의관갑족(衣冠甲族)이라고도 한다. 어느 성씨·본관이 삼한갑족에 속하는지는 주관적인 면이 있다. 이와 관련, 상당수 문중이 자신들의 선조를 아전인수 격으로 삼한갑족에 포함시키고는 한다. 전주이씨를 제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삼한거족이
고려의 말기의 왕으로 '우'와 '창'이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호가 주어지 않았다. 왕씨가 아닌 신씨의 씨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때의 신씨는 신돈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야 쿠데타 명분이 보다 뚜렷해질 수 있다. '고려사'는 고려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고려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초 정인지 등이 작성했다. 승자의 시각 여부를 떠나 고려사가 없었다면 한국 중세사는 어둠 속에 묻힐 뻔 했다. 고려사가 편찬되기까지는 곡절이 많았다.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도 실록을 작성, 보관해 왔다. 그러나 잦은 외침과 내란 등으로 그 보관이 쉽지 않았다. 고려 고종 때 안전한 장소를 물색하던 끝에 합천 해인사에 실록 보관을 위한 외사고를 설치했다. 당시 중앙에 있는 춘추관사고는 내사고, 이를 분산·배치했던 지방사고는 외사고로 불렀다. 그러나 해인사 외사고도 몽고 침략과 왜구창궐로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다. 1381년(우왕 7)에 충주 개천사로 옮겨져 약 2년간 머물렀다. 이것은 1383년(우왕 9) 죽주 칠장사로 옮겨가고, 약 7년 뒤인 1390년에는 다시 충주 개천사에 옮겨 약 30년간 존치되다가 충주읍성 안으로 옮겨졌다. 충주성…
전회에 우리고장 인물 남이장군을 소개했다. 유자광의 모함으로 한참 기개가 높던 시기에 극형에 처해졌다고 밝혔다. 이때 며느리와 사이가 안 좋았던 남이의 어미도 극형에 처해진다. 죄목은 국상중에 고기를 먹었다는 것이었다. 정황상 조작의 가능성이 농후하나 문헌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 아뢰기를, "남이의 어미는 국상 성복(成服) 전에 고기를 먹었고 그 아들이 대역(大逆)을 범하였으며, 또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는 죄가 있으니, 청컨대 극형에 처하소서"하니, 명하여 저자에서 환열하게 하고, 3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하였으니.'- 조선시대 때 국상이 발생하면 백성들은 소복(素服)을 입고 백립(白笠)을 썼고, 또 빈소를 차린 후 곡반(哭班)을 편성하여 곡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가무, 도살, 혼인 행위도 엄격히 금지됐다. 나아가 고기도 먹을 수 없었다. 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도살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 엄하게 다스렸다. 국상과 관련해 고기와 생선이 들어가지 않은 투박한 반찬을 '소선'(素膳)이라고 불렀다. '문하 좌시중 성산백 배극렴이 졸하니,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을 하고,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충북일보] 주말 동안 충북지역에 많은 비가 내리면서 도내 하상도로가 통제되고 나무가 쓰러지는 등 각종 피해가 속출했다. 청주기상지청은 지난 6일부터 7일까지 시간당 20~30㎜의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했다. 시간당 30㎜의 비부터는 보통 '폭우'라고 부르는 수준으로 밭이나 하수구가 넘치기 시작하고, 홍수나 침수 같은 비 피해 위험이 매우 높아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단계다. 충북도 등에 따르면 7일 오후 2시 30분 기준 도내에는 평균 62.1㎜의 비가 쏟아졌다. 지역별로는 △증평 121.5㎜ △괴산 116.5㎜ △청주 87㎜ △진천 52㎜ △단양 49㎜ △보은 45.3㎜ △충주 45㎜ △제천 41.7㎜ △영동 7㎜ △음성 4㎜다. 폭우로 인해 도내 하상도로와 둔치주차장은 일부 통제된 상태다. 현재 도는 청주시 무심천 하상도로, 미암교 하상도로, 충주시 달천 하상도로를 통제 중이다. 하상도로에 설치된 둔치주차장은 전체 27곳 중 15곳이 통제된 상황이다. 폭우 여파로 도내 각종 사건·사고도 잇따랐다. 이날 도에 접수된 풍수해 신고 건수는 총 20건이다. 피해 유형은 △수목전도 12건 △배수불량 4건 △낙석 1건 △기타 3건으로 집계됐다.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도가 친환경 에너지로 각광받고 있는 수소산업 육성을 위해 특화단지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수소특화단지 지정을 통해 산·학·연·관 생태계를 공고히 구축하고, 기업 지원과 기술 개발로 이 분야를 선도한다는 구상이다. 7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가 내년 상반기 공모를 통해 지정할 예정인 수소특화단지를 충주시에 유치할 계획이다. 도는 일찌감치 충주를 신청지로 낙점했다. 이 지역의 수소 인프라를 고려할 때 수소특화단지를 유치하면 관련 산업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충주는 수소 분야 기업 26곳이 둥지를 트고 있다. 국내 유일의 차량용 연료전지 생산 거점인 현대모비스를 비롯한 주요 부품업체들이 협력체계를 갖추고 있다. 청정수소 생산과 저장, 유통, 충전, 활용 등 전주기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는데다 그린수소산업 규제자유특구로 지정 받았다. 바이오가스에 기반한 그린수소는 전국에서 가장 저렴하게 공급하고 있다. 오는 2027년까지 하루 2.5t의 청정수소를 생산할 계획이다. 도와 충주시는 유치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다. 현재 수소특화단지 계획 수립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다. 결과는 올해 말 나올 예정이며 용역 과정에서 도출된 경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