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거나 살거나 함께 고생하자던(死生契闊) / 당신과는 굳게 언약하였지(與子成說) / 섬섬옥수 고운 손 힘주어 잡고(執子之手) / 단둘이 오순도순 백년해로하자고(與子偕老)'. 중국 시경(詩經)에 등장하는 '격고'(擊鼓)라는 한시다. 춘추전국시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시에는 고향을 등지고 멀리 떨어진 전장에서 아내를 그리워하는 한 병사의 애절함이 배여 있다. 이 표현이 국내에 유입돼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과 함께 결혼식 주례사의 단골 내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비슷한 표현으로는 '살아서는 같은 방을 쓰고(生則同室) / 죽어서는 같은 무덤을 쓰네(死則同穴)'도 있다. 조선시대도 백년해로가 주요 미덕이 됐다. 따라서 평민들의 이혼은 쉽지 않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면도 있었다. 질투 등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범했을 경우 남편은 아내를 내쫓을 수 있었다. 이같은 행위를 아내를 버린다는 뜻에서 기처(棄妻) 또는 휴기(休棄)라고 불렀다. 아내가 무척 싫어졌으나 칠거지악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조선시대 남편들은 이때는 아내를 소박(疏薄)했다. 내쫓지 않으면서 구박하는 것을 말한다. 소박당한 아내는 평생 뒷방차지 신세가 되어 첩 주위를…
'구름도 자고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 추풍령 구비마다 한많은 사연 /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보는 /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 고개'- '기적도 숨이차서 목메어 울고가는 / 추풍령 구비마다 싸늘한 철길 / 떠나간 아쉬움이 뼈에 사무쳐 / 거치른 두뺨위에 눈물이 어려 / 그 모습 어렸구나 추풍령 고개'- 가수 남상규씨가 불러 크게 히트한 대중가요 '추풍령'이다. 가사 내용이 너무 정겨워 1·2절 모두를 소개했다. '추풍령'은 남상규씨 뿐만 아니라 배호, 나훈아, 이미자 씨 등도 불렀다. 그 만큼 추풍령은 지금의 50대 이상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 일이키는 노래다. 추풍령면소재지에서 김천 방향으로 잠깐 달리면 추풍령 노래비를 만날 수 있다. 고풍스런 한자 글자체 때문에 꽤 오래 전에 세워진 노래비처럼 보이나 그렇지는 않다. 지난 88서울올림픽 때 성황 봉송을 기념, 그해 9월 영동군에서 세웠다. 추풍령는 '秋'와 '風' 자가 만나면서 묘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지명어다. 언뜻보면 명시(名詩)에 등장하는 시어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중국 무협영화에 나오는 이름같기도 하다. 지명 추풍령이 어디서 유래했는가를 밝혀 놓은 사료는 존재하
고려와 조선 조정은 출장나가는 관원들을 위해 국영 숙박시설인 원(院)을 운영했다. 원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비교적 활발하게 운영됐다. 임진왜란 후 이른바 참(站) 제도가 도입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그 흔적이 지명에 더러 남아 있다. 조치원, 광혜원, 장호원 등이 이에 해당한다. 광혜원은 한때 '양질의 쌀이 만 되(升)나 난다'는 뜻으로 만승면(萬升面)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지난 밀레니엄 때 주민들이 과거 역사를 되찾자는 의미에서 지금의 광혜원으로 개명했다. 광혜원 주민들이 이름을 바꾼 데는 나름의 역사적인 이유와 근거가 있다. 청주에서 서울을 가려면 지금은 고속도로를 주로 이용한다. 고속도로가 없던 시절에는 달랐다. 청주-오창-진천-광혜원-용인 등을 경유했다. 바로 17번 국도다. 조선시대 거유 우암 송시열도 이 코스를 자주 이용했다. 문집 송자대전에 우암의 동선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등장한다. 인용문중 '만의'는 수원을 말한다. '19일에 만의(萬義)에서 출발하여 20일에 죽산 광혜원에 머물렀는데(…) 21일에 국장도감 낭청이 지문의 첨가와 개정에 관한 일로 진천(鎭川)까지 뒤쫓아왔다. 22일에 승지가 또 뒤쫓아와서 서원(청주 옛이름)에서 유지(諭旨)
전회에 지리지의 표현을 빌어 우리고장 단양인물인 황계옥을 소개한 바 있다. '본조 황계옥(黃啓沃) 과거에 올라 벼슬이 홍문관 응교에 이르렀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본문 중 '문명'이 있었다, 즉 문필로 이름을 날렸다는 것은 시를 잘 지은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황계옥은 투철한 관료정신 외에 또 다른 진면목을 지니고 있었다. 실록에 이와 관련된 표현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그는 시짓기 대회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당시 심사관은 서거정, 이승소 같은 당대 문장가들이었다. '문신을 불러서 춘설(春雪)을 제목으로 금체고시(禁體古詩) 20운(韻)을 짓도록 명하고, 서거정·허종·이승소·이파(李坡)·어세겸·노공필로 하여금 등급을 정하게 하였는데, 홍문관 정자(正字) 황계옥이 수석을 차지했으므로 표피좌자(表皮坐子)를 하사하였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금체고시는 금체와 고시가 합쳐진 표현이다. 이중 금체(禁體)는 특정어의 사용을 금하는 시를 말한다. 가령 눈(雪)이 제목으로 들어간 시에는 옥(玉)·은(銀)·여(麗)·서(絮)·노(鷺)·학(鶴)같은 글자를 쓰지 못한다. 고시(古詩)는 말 그대로 옛 형태의 시로, 구수(句數)·자수(字數)에 제한이 없고 압운(押韻)에도
성안은 인구가 조밀하고 또 목재건물도 적지 않게 존재, 보기와 달리 화재에 취약한 편이다. 1419년(성종 2) 함경북도 회령성 안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다. '영안도 관찰사 성준(成俊)이 치계 하기를, "3월 10일 회령부의 성 안에서 실수로 불이 나 연달아 3백여 집을 태우고 남녀 6명과 소 3두와 말 4필이 타서 죽고, 관중(官中)에 소장된 문서와 군기(軍器)도 타서 훼손된 것이 거의 10분의 8에 이르렀으니…' 당시 조정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경차관(敬差官)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경차관은 조선시대 때 특수임무를 띠고 각 도에 파견되는 관리를 일컫는 말로, 세곡, 군사, 구황, 재민(災民)과 관련된 업무 등을 수행했다. 이때 경차관으로 선발된 인물이 황계옥(黃啓沃·?~1494)이다. 성종이 변방의 화재에 이같이 신속한 결정을 내린 것은 화재의 규모도 그렇거니와 여진족의 침입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황계옥이 성종을 알현하고 회령으로 출발했다. '아마도 야인(野人)이 틈을 타서 소란을 피울 듯합니다. 이 고을은 다른 여러 고을의 예가 아니고 야인이 왕래하면서 살펴보는 경우가 매우 많으니, 관사(館舍)를 영조(營造)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실수로 불을 낸 인민
적지 않은 사람들이 1592년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부산성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토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는 1년 앞서 왜승 겐소(玄蘇)를 조선에 보내 "명나라를 칠려고 하니 조선 땅을 지나가게 해달라"는 협박을 해왔다.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다. 조헌이 이를 알고 겐소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겐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선봉군에 국사(國使)와 역관 자격으로 종군하였다. 또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대치할 때 양측 강화회담에 참여하는 등 일본의 전시외교 활동에 종사했던 인물이다. 정명가도에 관련된 내용이 실록에 실려 있다. ' '이보다 먼저 일본국 사신 현소(玄蘇) 등이 와서 '명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조선에서 길을 인도해 달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상이 조정 신하들과 의논하여 성절사 김응남(金應南)이 갈 적에 왜적이 중국을 침범할 뜻을 갖고 있음을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하였는데…'- 조선 조정은 이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의 정명가도에 대한 내용이 오키나와(琉球) 사람을 통해…
전회에 영동 황간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한 때를 제외하고 조선시대 내내 현(縣)의 지위를 유지했다'고 밝혔다. 이는 황간이 현의 지위를 한때 상실한 적도 있었음을 의미한다. 황간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렸다. 이후 1914년 부군면(府郡面) 통폐합 조치에 따라 지금의 면이 됐다. 이 설명에는 빠진 부분이 있다. 황간현은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선조 26년(1593년) 지금의 옥천 청산현에 병합돼 현 자체가 없어진 적이 있다. 이를 둘러싸고 두가지 주장이 존재한다. 임진왜란 때의 황간현감은 박몽열(?~?朴夢說)이라는 인물이다. 그가 당시 충청병사 황진(黃進·1550∼1593)을 따라 진주성 전투에 참가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이 치계하였다. "신들이 진주를 외원(外援)할 목적으로 삼가 고현에서 진군하였는데, (…) 우리의 제장으로는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黃進) 등이 성 안에 유진(留陣)하고 있었는데 이달 20일 오후에 왜적 2백여 명이 동쪽의 성 밑으로 진격해 왔다.'- 선조실록은 전반부에는 병마절도사(병마)를, 뒷 부분에는 현감급 참전인물을 적고 있다. 다음 내용에는 황간현감 박몽
영남에서 추풍령 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만나는 곳이 영동 황간이다.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으로 간주돼 왔다. 황간은 지금은 면(面)이다. 그러나 황간은 한 때를 제외하고 조선시대 내내 줄곧 현(縣)의 지위를 유지했다. 황간은 지금도 인구수가 적은 편이지만 조선시대 때도 궁벽한 곳이었다.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당시 인구가 적었고, 족제비털, 송이같은 토산물이 많이 나왔다. '궁벽'은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나 실록에는 자주 등장한다. 매우 후미지고 으슥하다는 뜻이다. '호수가 3백 8호요, 인구가 7백 42명이다. (…) 땅이 메마르며, 기후가 많이 차다.토공(土貢)은 족제비털(黃毛)·지초(芝草)·수달피·삵괭이가죽이요, 토산(土産)은 송이(松茸)이다.'- 인용문 중 토공은 해당지역 토산물로 궁궐에 진상하는 것을, 토산은 해당 지역에서 생산되나 진상 대상은 아닌 품목을 말한다. 황간의 이같은 모습은 중종(16세기) 대에 이르러서도 거의 변하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25년(1530)에 이행(李荇) ·홍언필(洪彦弼) 등이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한 지리서다.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하늘을 덮어 가장 그윽하고 깊숙한 데다가,…
조선시대 역대 임금 중 약수를 가장 많이 찾은 인물은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은 격무로 얻은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약수가 나는 곳을 즐겨 찾았다. 세계 3대 광천수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우리고장 초정약수도 그중 하나였다. 보통사람의 움직이는 행동은 '거동'(擧動)이라고 한다. 반면 임금의 움직임은 쓰기는 '擧動'으로 쓰지만 읽기는 '거둥'이라고 읽는다. 인용문 중 거둥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등장했다. 익히 알다시피 세종대왕은 초정약수로 거둥을 하고 나서도 훈민정음 창제작업을 골몰하게 된다.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椒水里)에 거동하시는 데도 (…) 계달하는 공무(公務)에 이르러도 또한 의정부(議政府)에 맡기시어,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그 유명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1445) 상소문이다. 요약을 하면, "왜 초정에까지 와서 한글창제 작업에 급급하십니까" 정도가 된다. 현재 초정약수에는 세종대왕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바로 '언문 같은 것은 (…) 어찌 이것
지금의 문의는 일개 면에 불과하다. 그러나 문의는 고려시대부터 '현'(懸)의 행정적 지위를 가졌다. 그뒤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쳐 1895년(고종 32) '군'으로 승격됐으나 1914년 개편 때 청원군 소속이 되면서 '면'(面)이 됐다. 과거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당시 객사 건물이었던 문산관(文山館·도 유형문화재 제 49호)이다. 문의는 대청호를 끼고 있어 경관이 수려한 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때는 궁벽하게 인식됐던지 유배지로 자주 이용됐다. 이 부분은 대청호가 없었던 것을 감안해 볼 필요가 있다. '첨지돈녕부사 안종렴이 숙직에 들어갈 당번날에 처부의 제삿날이라고 거짓 고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헌부에서 추핵하니, 종렴이 승복하지 않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매 항복하므로, 문의현(文義縣)에 부처(付處)하였다.'- 유인숙(柳仁淑·1485∼1545)은 을사사화 때 윤임의 당여(같은 일파)라는 이유로 사사된 인물이다. 이때 희증, 희맹, 희안 등 그의 세 아들도 연좌제에 의해 유배지에서 처형됐다. 이들의 유배지도 문의였다. 그러나 풍수적 의미의 문의는 달랐다. 조선시대 조정에서는 문의를 풍수상으로 매우 중하게 여겼다. 특히 문의의 진산인 양성산은 명당
조선시대 '예무이적'(禮無二嫡)의 논리가 있다. '한 남편에게 두 사람의 정실 아내는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그럴듯 해보이지만 이같은 논리 때문에 첩에게서 난 자식은 모두 천인이 돼야 했다.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의 9번째 여자인 장녹수(張綠水·?~1506)는 천인 출신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첩이었고, 이 때문에 장녹수는 제안대군(齊安大君·성종의 친형)의 가노(家奴)에게 시집을 가야 했다. 장녹수는 의외로 미모는 빼어날 정도로 뛰어나지 않았으나 노래를 무척 잘 했던 것으로 사료는 적고 있다. 그녀는 '노비의 아내'였던 시절에 노래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었다. 그러다가 대군의 가노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연산군과 장록수 사이에 연분이 싹트도록 한 사람은 삼촌 제안대군이었다. 이미 폭정기에 접어든 연산군이 어느날 미복 차림을 하고 한잔 걸칠 요량으로 삼촌집을 찾았다. 게서 만난 것이 장녹수다.
얼마전 청주인물 박훈(朴薰·1484∼1540)을 소개한 적이 있다. 조광조와 절친했으나 기묘사화 때 화를 입어 16년 동안 성주, 의주, 안악 등의 유배지를 전전해야 했다. 그의 부친이 박증영(朴增榮·1464∼1493)이다. 그는 22살 나이에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오를 정도로 매우 총명했다. 사가독서는 조선시대 때 인재육성 차원에서 젊은 문신들에게 특별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말한다. 세종 때 처음 도입됐고 신숙주, 성삼문 등이 모두 사가독서 출신이다. 1456년(세조 2) 집현전의 혁파와 함께 폐지됐다가 성종 때 다시 부활됐으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하면서 그 기능이 흡수됐다. 박증영은 29살 나이로 단명했다. 때문에 그에 대한 사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일부 문헌은 그가 총명함과 더불어 기개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박증영이 아뢰기를, "불교는 청정(淸淨)한 것을 종(宗)으로 삼는데 어찌하여 흥판(興販)을 하여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먹을 것이 넉넉한 연후에야 청정한 교(敎)를 닦을 수 있다.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중은 장차 먹지 아니하고 굶어 죽어야 하겠는가.'- 임금이 말하기를, "승인의 흥판(興販)을 금
기린각(麒麟閣)이라는 중국 음식점 이름을 종종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본래 의미의 기린각은 음식과는 관련이 없다. 중국 전한 때의 황제인 무제(武帝·BC 156~BC 87)가 장안에 기린각이라는 누각을 세웠다. 그후 선제(宣帝·BC 91~BC 49) 황제는 11인의 공신상 그림을 기린각에 걸었다. 이때부터 기린각은 입신양명을 상징하게 됐다. 조선 중종대의 인물로 박영(朴英·1471∼1540)이 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宣傳官)에 오르는 등 전도가 양양했으나 어떤 이유에서 인지 기린각이 되는 것을 꺼렸다. 선전관은 임금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던 직이었다. 그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이를 핑계로 낙향, '송당'(松堂)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유유자적했다. '사신은 논한다. 박영은 선산 사람이다. 소시 적에 무예를 업으로 삼아 무과에 올랐다. 그리고 유학의 서적을 통달하고 낙동강 가에 집을 지어 살며 영화와 복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남쪽 변방에 장수로 나가서 시를 쓰기를, 투구 쓰고 갑옷 입은 왕손 늙어가네 기린각에 이름 오르는 것 마음에 없어…'- 그는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이제)의 외손자이기도 했다. 인용문의 '왕손'이라는 표현은 그래
조선시대에는 삼금이 존재했다. 송금(松禁), 우금(牛禁), 주금(酒禁)이 그것이다. 이중 금주령은 흉년 때 곡식 절약이 주목적이었으나 적용 범위는 일정하지 않았다. 사신 접대용, 혼례용, 약용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했다. 술을 점잖게 이르는 말인 '약주'는 여기서 유래한 표현이다. 이밖에 겨울 추위가 심할 때는 체온유지 등을 위해 금주령을 일시적으로 완화했다. 관련 내용이 실록에 등장한다. "수원 부사 김사원(金嗣源)은 술을 많이 장만하여, 장례(葬禮)에 모인 재상에게 주었으므로, 본부에서 바야흐로 국문(鞫問)하는데, 이제 관찰사 김양경(金良璥)이 아룀에 따라 국문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사헌부에서 차자(箚子)를 올린 것으로, 뒤에는 "김양경이 금주령에 관한 규정을 어겼으니 파직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뒤따른다. 이에 성종은 "무리를 지어 술을 마셨다면 워낙 죄가 있겠으나, 비바람이 일던 날에 늙은 재상에게 술을 주었는데 무슨 안될 것이 있겠는가. 그것을 말하지 말라"며 감양경을 감싼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차자'는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을 일컫는다. 김양경은 상주 사람이나 우리고장 충청도관찰사를 오래 지냈다. 사료
부역은 국가나 도로 등 공적인 사업을 위해 보수없이 국민에게 노역을 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부역은 획일성을 지니면서 곧잘 형평성의 문제를 야기했다.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자마자 이 부분의 개선책을 직접 언급한다. '환과고독(鰥寡孤獨)은 왕정(王政)으로서 먼저 할 바이니 마땅히 불쌍히 여겨 구휼해야 될 것이다. 소재 관사에서는 그 굶주리고 곤궁한 사람을 진휼(賑恤)하고 그 부역(賦役)을 면제해 줄 것이다.'- 인용문 중 '환과고독'은 맹자가 처음으로 언급한 표현이다.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왕도정치(王道政治)에 대해 묻자 맹자는 이렇게 답한다. "늙어 아내 없는 이를 홀아비(鰥), 늙어 남편이 없는 이를 과부(寡), 늙어 자식이 없는 이를 외로운 사람(獨), 어리고 아비 없는 이를 고아(孤)라고 합니다.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은 천하에 궁벽한 백성들로서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일반어가 된 고독은 사실은 가족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것이 발전해 '몹시 외롭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실록에 한 신하가 부역과 관련된 상소를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장령 곽은(郭垠)과 헌납 양면(楊沔)이 아뢰기를, "날씨가 추울 때에 수리도감(
대곡 성운(成運·1497~1579)은 본래 한양에 거처하고 있었으나 형 '우'가 을사사화의 참화를 당하자 우리고장 보은을 찾았다. '공(성운 지칭)은 나면서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일찍이 세속의 그물을 벗어났다. 그 형 우(禹)가 을사사화에 비명으로 죽으니, 이로부터 더욱 세상에 뜻이 없고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시가 그 인품과 같아서 한가롭고 아담하여 서호처사(西胡處士)의 운치가 있으니…'- 속리산을 찾은 성운이 마냥 은둔만은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시문집에는 거유 조식(曺植·1501~1572) 등과 교유한 흔적이 많이 나타난다. 다음은 조식에게 보낸 한시 한 수다. '높은 기러기 날개 치며 남쪽 향해 날아가니(冥鴻矯翼向南飛) / 때는 바야흐로 가을 바람 낙엽질 때라(正値秋風木落時) / 땅에 가득한 벼와 기장을 닭과 오리는 쫓아다니지만(滿地稻梁鷄鶩豚) / 푸른 하늘 구름 밖에서 스스로 기심을 잊네(碧天雲外自忘機)'- 익히 알다시피 그의 대표 문집은 대곡집(大谷集)이다. 그러나 이 문집은 성운 자신이 완성한 것은 아니다. 사연이 다소 깊다. 아들이 편집에 나섰으나 완성하지 못했고, 그 손자대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됐다. 성운은 아들이 없었다. 그러자 그는…
청원상주 고속도로를 상주 방향으로 타고가다 보면 보은 삼승면에 이르러 오른쪽 방향으로 우뚝 솟은 산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바로 속리산과 구병산 사이에 위치하는 금적산(金積山·652)이다. 세간에서는 보은군의 최고봉인 천황봉(1,058m)을 '지아비산', 구병산을 '지어미산', 그리고 금적산을 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들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 정상에는 봉수대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 봉수대는 옥천 청산의 박달라산에서 받은 신호를 북쪽의 용산점 봉수대로 전하는 역할을 했다. 현재 봉수대 흔적은 많이 사라지고 주변에 송신탑이 위치하고 있다. 학문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이른바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해 학문을 하는 것을 일컫는다. 논어 헌문 편은 위기지학이 무너진 풍토를 한탄하고 있다. '옛날의 배움은 자기를 위한 것이었다(古之學者爲己). 요즘의 배움은 남을 위한 것이 되고 있다.(今之學者爲人)' 조선시대 때 위기지학에 충실했던 인물의 한 명으로 명재상 황희(黃喜·1363~1452)가 꼽히고 있다. 그는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주위로부터 두루 존경을 받았다. 실록에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이황은 타고난
조선시대 시문선집의 대표적인 것으로 동문선(東文選)이 있다. 서거정이 대표저자로 시(詩)가 4분의 1이고 나머지는 문장이 차지하고 있다. 이것 외에 이름이 같은 2개의 동문선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다. 1518년(중종 13)에 신용개(申用漑), 김전(金詮), 남곤(南袞) 등이 편찬한 것과 1713년(숙종 39) 송상기(宋相琦) 등이 편찬한 것도 전해져 오고 있다. 따라서 서거정의 것을 '정편 동문선', 신용개의 것을 '속동문선'(續東文選), 송상기의 것을 '신찬 동문선'으로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책이름을 동문선이라고 한 것은 중국의 '문선'(文選)을 따랐다는 뜻으로, 목차도 그것에 준하고 있다. 동문선은 관료·귀족의 미의식에 맞춰, 이른바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의 화려하고 숭엄한 문체로 쓰여진 것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따라서 철저하게 상층 지배층 중심의 시문을 의식적으로 실었다. 교서를 보면 조선시대 역대 왕들도 이 문체를 선호했다. 우리고장 출신으로, 동문선에 시를 남기고 있는 인물로 정수곤(丁壽崑·1452∼1486)이 있다. '찬 하늘의 짧은 해가 가벼운 북을 던지듯(寒天短日擲輕梭) / 나그네는 출새가를 길게 읊조린다(客子長吟出塞歌) /(…)/ 10년의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방대한 규모로 유명하다. 59권 42책으로, 저술 기간만 30년에 이르고 있다. 그는 부친 이광사 유배지인 신지도(薪智島)에서 42세 때부터 저술하기 시작하여 타계할 때까지 이 책에 매달렸다. 특히 그가 추구했던 객관주의 역사 의식은 지금도 사계의 표본이 되고 있다. 그는 역사 저술의 기본 태도로 '술이부작(述而不作)'을 견지했다. 서술은 하되 작문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흔히 연려실기술에는 야사 모음집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이긍익은 수집한 각종 야사를 글로 남기되 반드시 출처를 명기했다. 그러나 자신의 주관은 하나도 첨가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술이부작'이다. '연려실'은 그의 서실(書室)이름으로, 중국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옛 글을 교정할 때 명아주 지팡이에 불을 붙여 방안을 밝게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이긍익은 우리고장 청원 문의의 덕천사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덕천사우(德川祠宇) 숙종 갑술년에 세웠다. 유희령 호는 몽암(夢庵)이며 호조참의를 지냈다. 유흥룡 호는 숙옹(塾翁)이며 감찰을 증직하였다. 우신언 호는 묵재(默齋)이며, 찰방을 지냈다. 정응창 호는 유항(柳
조선시대 임금 중 재위 기관이 가장 짧았던 인물은 인종(仁宗·1515∼1545)이다. 임금이 된지 8개월만에 병사했다. 야사에 계모 문정왕후(1501~1565·명종의 생모) 독살설이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다. 어느날 인종이 문정왕후가 거처하고 있는 대비전을 찾았다. 이때 그녀가 그에게 떡을 건냈고, 인종은 이를 받아 먹은 후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못가서 숨을 거뒀다는 것이 독살설의 전모다. 인종은 재위기관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묘사화 때 희생된 조광조, 김정 등을 복원시키는 등 친사림파적인 정책을 많이 펼쳤다. 인종의 친사림파적인 정책에는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도 많이 작용했다. 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여론정치의 일환으로 상소권이 주어져 있었다. 이와 관련, 당시 유생들은 세번의 상소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 격정적인 내용이 자뭇 인상적이다. '아아, 하늘이 장차 사문(斯文)을 망하게 하려고 합니다. 조광조처럼 어진 사람이 있어도 억울하게 죽었고 (…)신들은 땅에 엎드려 마음 아파하면서 천심(天心)이 마침내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도(道)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조광조 한 사람이 죽자 온 세상이 취제하여 곧고 바른 말과 행실
이준경(李浚慶·1499~1572)의 광주이씨 가문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심한 부침을 겪었다. 이준경의 증조부 이극감은 무오사화와 간접적인 관련이 있다. 간신 유자광이 조의제문을 밀고할 때 그는 그의 직속 상사였다. 이준경의 조부는 세좌(世佐)다. 그는 인수대비가 며느리 폐비윤씨(연산군 생모)에게 사약을 내릴 때 형방승지로서 이를 운반했다. 연산군이 가만둘리 없다. 그는 거제도로 이배되던 중 지금의 경남 사천에 이르러 자살 하명을 받고 스스로 목을 맸다. 이준경의 부친은 수정(守貞)으로, 그를 포함해 4명의 아들이 연좌법에 따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자 당시 사관이 이렇게 적었다. '왕이 이씨종친(광주이씨)이 강성한 것을 근심하여 모두 없애 종자도 남기지 않으려 하였다'- 이수정은 슬하에 윤경(潤慶)과 서두에 언급한 준경 등 두 아들을 뒀다. 이들도 연좌법에 따라 우리고장 괴산으로 유배됐다. 이들의 괴산 유배생활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실각하면서 자유의 몸이 됐고, 이후 충주의 사촌형 이연경(李延慶) 밑에서 수학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벼슬길에 나간 이준경에게도 첫 시련이 찾아왔다. 1549년 그는 충주 이홍윤 역모사건과 관련해 우리고장
우리나라 상례(喪禮)는 생각보다 복잡한 면이 있다. 문상(問喪)은 타인의 상사(喪事)에 대하여 슬픈 뜻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조문(弔問), 조상(弔喪)도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밖에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상례 중의 하나로 '심상'(心喪)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상복을 입지 않은 채 마음으로 슬퍼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는 스승을 위한 상례였으나 재가한 어머니 또는 계모, 적모(嫡母)를 위해 할 수 있다. 적모는 자신을 낳지 않았으나 법적인 어머니를 말한다. 조선시대 때 '심상' 때문에 목숨을 잃은 고위 관료가 있다. 매우 유능한 관료였으나 연산군이라는 시대성을 잘못 만나면서 뜻을 펴지 못하고 중도에 목숨을 잃어여만 했다. 정성근(鄭誠謹·?∼1504)이라는 인물이 여기에 해당한다. 정성근은 승지에 오르는 등 성종의 은혜를 입었고, 따라서 그가 승하한 이후에도 심상의 자세를 가졌던 모양이다. 조선의 국시가 유교인 만큼 이는 어찌보면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나 연산군에게는 이같은 모습이 달리 보였던 모양이다. 생모 폐비윤씨의 죽음과 관련해 연산군의 가슴 속에는 항상 아버지 성종에 대한 증오의 마음이 쌓여 있었다. 실록 곳곳에서 그런 흔적이 발견된다. 성종
오늘날 간통은 결혼의 파기, 즉 이혼을 전제로 배우자의 고소가 있어야만 성립한다. 조선시대 때는 부부 상호간의 고소 여부와 관계없이 적발 즉시 처벌 대상이 됐다. 이때 부인이 간통을 저질렀다면 그 부인과 간부(姦夫)는 곤장 90에 처했졌고, 또 흥분해서 간통 현장에서 부인과 간부를 죽였다 해도 비난 대상이 되지 않았다. 남녀 차별적 요소도 많아 남편이 다른 여자와 정을 통했다 하더라도 그 여자가 혼인한 여자만 아니라면 첩으로 삼으면 그만이었다. 반면 여성들에게는 평생의 족쇄가 채워졌다. 특히 양반 부녀자들의 경우 '자녀안(恣女案)'이나 '유녀적(遊女籍)'이라는 것에 이름이 올라 평생 간음한 여성으로 낙인 찍히거나 관노비가 돼야 했다. 이처럼 조선 정부는 간통을 개인이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접근했다. 얼마전에 민발(閔發·1419∼1482)이라는 인물을 소개한 적이 있다. 1469년 남이옥사가 일어났다.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 未平國), 바로 그 사건이다. 이때 민서(閔敍)라는 인물이 주살됐고, 그의 아우가 바로 민발이다. 그도 연좌제에 의해 극형에 처해질 위기를 맞았으나 충주로 유배되는 선에서 마무리 됐다. 그는 세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계유정난 때 수
'독대'(獨對)는 임금과 신하의 은밀한 만남이었기 때문에 자주 문제가 됐다. 문장가로 유명한 변계량(卞季良·1369~1430)이 상소를 올린다. "옛 제도에 따라 4품 이상으로 하여금 날마다 차례를 돌려 대답하게 하시어 더욱 말할 길을 넓히시어, 아랫사람의 심정을 다 아룀으로써 신하의 사특하고 정직함을 살피시면 매우 다행이겠나이다."- 변계량이 건의한 것은 독대의 반대개념인 이른바 '윤대'(輪對)였다. 윤대는 글자 그대로 문관은 6품 이상, 무관은 4품 이상의 관리가 임금 앞에 나아가 직무에 답변하는 것을 말한다. 윤대는 임금의 근무 강도를 고려해 하루 5명을 넘기지는 않았다. 연산군 때 한 신하가 윤대에 나아갔다. 얼마전에 강원도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연산군 시절에도 비슷한 폭설이 내렸던 것 같다. '윤대를 받았다. 내섬시부정 박삼길(朴三吉)이 아뢰기를, "(…) 강원도에 한 길 이상의 많은 눈이 내려서 노루·사슴들이 한 곳에 모여 서서 많이 굶어 죽었고 살아 남은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박삼길의 윤대는 계속 된다. 아래 인용문에 나오는 '여수'는 군대의 우두머리를, '패두'는 인부 열 사람의 우두머리를 일컫는다.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노가다 십
조선시대 농서로는 농사직설,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세종 때 정초, 변효문이 공동으로 지은 농사직설은 우리나라 농법을 처음으로 다룬 농서로 유명하다.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농서로, '중요한 것을 새롭게 취한 책'이라는 뜻의 촬요신서(撮要新書)가 있다. 상·하 두 권으로 이뤄진 이 책은 농업과 함께 주역, 세시적인 내용도 함께 다루고 있다. 그러나 농업적인 내용을 훨씬 많이 다루고 있어, 주로 조선 전기의 농서로 분류되고 있다. 이 책은 세종 때 지어졌다. 내용은 '경가'(耕稼·갈고 씨뿌림))와 '잠상'(蠶桑·누에)으로 크게 분류되고 있다. 그리고 사고의 모든 출발점이 주역, 그중에도 음양오행과 직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다수 내용은 웃음이 큭큭! 나올 정도이나 어떤 내용는 지금의 농업 재배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논밭 갈이를 할 때 가을갈이는 깊게 하고 봄갈이나 여름갈이는 얕게 해야 한다.' '보리에는 눈이 좋은 바 겨울에 눈이 많이 안 내리면 여물지를 낳는다'. '나무심는 길일: 갑술, 병자, 정축, 기묘, 계미, 임진일이 길하고 병술, 임술일의 2일은 흉하여 마땅하지 않다.' '잠신(蠶神)에게 제사함: 정월 오(午)일 원유
[충북일보] 주말 동안 충북지역에 많은 비가 내리면서 도내 하상도로가 통제되고 나무가 쓰러지는 등 각종 피해가 속출했다. 청주기상지청은 지난 6일부터 7일까지 시간당 20~30㎜의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했다. 시간당 30㎜의 비부터는 보통 '폭우'라고 부르는 수준으로 밭이나 하수구가 넘치기 시작하고, 홍수나 침수 같은 비 피해 위험이 매우 높아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단계다. 충북도 등에 따르면 7일 오후 2시 30분 기준 도내에는 평균 62.1㎜의 비가 쏟아졌다. 지역별로는 △증평 121.5㎜ △괴산 116.5㎜ △청주 87㎜ △진천 52㎜ △단양 49㎜ △보은 45.3㎜ △충주 45㎜ △제천 41.7㎜ △영동 7㎜ △음성 4㎜다. 폭우로 인해 도내 하상도로와 둔치주차장은 일부 통제된 상태다. 현재 도는 청주시 무심천 하상도로, 미암교 하상도로, 충주시 달천 하상도로를 통제 중이다. 하상도로에 설치된 둔치주차장은 전체 27곳 중 15곳이 통제된 상황이다. 폭우 여파로 도내 각종 사건·사고도 잇따랐다. 이날 도에 접수된 풍수해 신고 건수는 총 20건이다. 피해 유형은 △수목전도 12건 △배수불량 4건 △낙석 1건 △기타 3건으로 집계됐다.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도가 친환경 에너지로 각광받고 있는 수소산업 육성을 위해 특화단지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수소특화단지 지정을 통해 산·학·연·관 생태계를 공고히 구축하고, 기업 지원과 기술 개발로 이 분야를 선도한다는 구상이다. 7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가 내년 상반기 공모를 통해 지정할 예정인 수소특화단지를 충주시에 유치할 계획이다. 도는 일찌감치 충주를 신청지로 낙점했다. 이 지역의 수소 인프라를 고려할 때 수소특화단지를 유치하면 관련 산업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충주는 수소 분야 기업 26곳이 둥지를 트고 있다. 국내 유일의 차량용 연료전지 생산 거점인 현대모비스를 비롯한 주요 부품업체들이 협력체계를 갖추고 있다. 청정수소 생산과 저장, 유통, 충전, 활용 등 전주기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는데다 그린수소산업 규제자유특구로 지정 받았다. 바이오가스에 기반한 그린수소는 전국에서 가장 저렴하게 공급하고 있다. 오는 2027년까지 하루 2.5t의 청정수소를 생산할 계획이다. 도와 충주시는 유치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다. 현재 수소특화단지 계획 수립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다. 결과는 올해 말 나올 예정이며 용역 과정에서 도출된 경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