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때 충북에는 보은(후에 군으로 승격), 제천, 회인, 연풍, 음성, 청안. 진천, 영춘, 영동, 황간, 청산 등 11현(縣)이 존재했다. 이들 현에는 종6품 외관직인 현감이 파견됐다. 현감의 임기는 6년으로 관찰사의 3배에 해당했다. 이처럼 현감 임기가 의외적으로 길었던 것은 중앙 관료들의 지방근무 기피현상과 관련이 있다. 자원자가 많지 않다보니 임기를 길게 하는 방법이 택해졌다. 조선 세종 때의 우리고장 영동 현감으로 곽순(郭珣)이라는 인물이 부임해 왔다. 이 즈음 영동지역은 계속된 가뭄으로 식량난을 겪고 있었던 모양이다. 곽순의 하직 인사를 자리에 세종이 이와 관련된 내용을 언급한다. '영동 현감 곽순(郭珣)과 신천현감 박기명(朴基命)이 하직을 고하니, 불러들여 보고 곽순에게 이르기를, " 그 도에는 근래에 실농하여 백성의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니, 항상 구휼을 더하여 형벌을 삼가고 농사를 장려하라" 하고…'- 그러나 영동지역의 식량난은 조정에서 보기보다 훨씬 심각했던 것 같다. 곽순은 올린 상언에는 "10명 중 8,9명이 굶고 있다"고 적혀 있다. 상언(上言)은 신하가 사사로운 일로 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을 말한다. 간관(諫官)이 올리는 상소(
얼마전에 충주 팔봉서원과 음성 지천서원에 제향된 인물로 김세필(金世弼·1473∼1533)을 소개한 적이 있다. 생전의 그는 두번의 사화(史禍)를 겪었다. 그는 폐비윤씨(연산군 생모) 묘의 이장 문제로 연산군에게 밉보이면서 거제도로 유배됐다. 1차 유배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연산군이 종종반정으로 실각하면서 유배지에서 빨리 풀려났다. 그는 기묘사화 때 또 한번의 고초를 당했다. 왕도정치를 지지했던 그는 조광조(趙光祖)가 사사된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고 간언하다 매를 맞고 유춘역(留春驛)이라는 곳으로 유배됐다. 그는 중도에 풀려났으나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고향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서 후진 양성에 몰두했다. 어떤 사학자는 이때를 충주사림의 절정기로 보고 있기도 하다. 이연경, 이자, 노수신 등이 이 언저리에 등장한다. 그 평화는 아들에게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늦게 얻은 자식으로 김저(1512∼1547·3남)가 있었다. 그는 문과에 급제한 후 충청도 어사로 파견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의 소윤이 윤임의 대윤 일파를 공격한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그는 이때 이조좌랑이라는 직책으로 있으면서 "소윤이 너무 많은 사
조선시대 '예무이적'(禮無二嫡)의 논리가 있다. 이는 '한 남편에게 두 사람의 정실 아내는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때문에 첩에게서 난 자식은 모두 서자가 돼야 했다. 이 논리는 이른바 종모법(從母法)을 통해 세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는 부계가 양반이라도 모계가 천인이면 그 자식도 천인으로 취급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그 반대인 종부법(從父法)도 한시적으로 시행됐다. 이는 어머니가 첩이라도 아버지가 양인이면 그 자식도 양인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언뜻보면 좋은 의미로 보일수 있으나, 이 경우 양인이 된 첩의 자식은 부역을 의무적으로 져야했다. 왕족출신 서자인 이몽학(李夢鶴·?∼1596)이 시국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이몽학이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 사료에는 잘 기술돼 있지 않다. 그는 1596년(선조 29) 야음을 틈타 홍산현을 함락하고, 이어 청양 등을 함락한 뒤 그 여세를 몰아 홍주성에 돌입하였다. 그러자 당시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성문을 닫은 채 방어에만 급급했다. 이때 사태를 반전시킨 벼슬아치가 신경행(辛景行·1547∼1623)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우연찮게 난을 진압하는데 일정부분 공을 세우게 된다. '목사 홍가신은
우리나라 안경은 임진왜란 때 유입됐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몇해전 조선시대 김성일이 사용하던 실물 안경이 그의 후손들에 의해 공개됐다. 김성일은 황윤길과 함께 임진왜란 직전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했던 인물이다. 이듬해 귀국한 두 사람은 상반된 보고서를 내놨다. 정사 황윤길은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고, 반면 김성길(金誠一)은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당시는 짧은 기간이나마 동인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두 사람의 보고 내용중 동인인 김성일 것이 채택됐고, 결과는 불문가지였다. 김성일은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에 사망했다. 그렇다면 그는 임진왜란 이전에도 안경을 썼을 확률이 높다. 이와 관련 국내 안경광학과 한 교수는 "일본이 아닌 중국을 거쳐 유입된 것 같다"는 견해를 내놓은 바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안경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정조실록에서 그 내용을 접할 수 있다. 정조는 그러나 안경쓰는 것 자체에 대해 부담스러운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차대(次對)가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시력이 점점 이전보다 못해져서 경전의 문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안경은 2백 년 이후
전회에 구수복이라는 인물을 소개했다. 그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이조좌랑이라는 직책에서 파직되어 우리고장 보은 지역을 일시적으로 찾았다. 지면 관계상 모두 소개하지 못했지만 이 대목에는 곡절이 더 존재한다. 그가 보은 속리산 일대를 찾은 데는 장인의 권유가 먼저 있었다. 문과방목을 보면 그의 장인은 이수(李穗)라는 인물로, 벼슬이 정3품에 이르렀다. 문과방목은 조선시대 문과 합격자들의 신상을 기록한 사료를 말한다. 당시 구수복의 장인은 보은에 별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기묘년에 공이 이조 좌랑으로 파직되자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의 장인이 딱하게 여겨 보은(報恩)에 있는 별장에 살도록 했더니…'-< 연려실기술> 그러나 구수복의 장인 별장 처가살이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요즘 명절 풍속도의 하나로 '장인과 사위가 자주 다툰다'는 내용이 신문 지상에 보도된 적이 있다. 여성들이 경제전선에 뛰어들면서 처가의 발언권이 강해진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같은 현상은 아니지만 둘 사이에도 비슷한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 후에 농장의 종이 싫어해서 장인에게 헐뜯기를, "좌랑이 농막을 차지한 후로 종들을 혹사하여 장차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장인이
조선시대 양반가 남자들은 자신의 혈육임에도 불구하고 서자와 얼자, 즉 서얼(庶孼)을 심하게 차별했다. 서자는 양인(良人) 첩의 자손을, 얼자는 천인(賤人) 첩의 자손을 일컫는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기가 뿌린 '씨앗'이라고 해도 양반의 숫자가 많아지면, 양반 전체의 기득권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이처럼 서얼 차별의 근원에는 조선 양반들의 집단적 이기심이 깔려 있었다. 모든 양반들이 서얼 차별제도를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의식있는 일부 관료는 능력있는 인물은 서얼을 따지지 말고 과감히 발탁할 것을 주장했다. 조선 중종 때 두 명의 관료가 같은 주제를 놓고 서로 다른 내용을 상소한다. '김정국이 아뢰기를, "서얼에 대해서는 나라에 정해진 법이 있으니 고쳐서는 안 됩니다. 전에는 서경(署經)할 적에 그 선조(先祖)가 미천하면 서경하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구수복이 아뢰기를, "서얼은 법이 이미 그러하지만, 어진이가 있다 하더라도 과거에 구애되어 포부를 펴지 못하니, 이것도 사람을 쓰는 길에 방해가 됩니다"'- 인용문 중 서경은 인사 등이 있을 경우 왕의 재가 있은 후 대간도 함께 서명을 하는 제도를 말한다. 일종의 왕권견제 행위로 볼 수 있다. 1519년 중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1906~1967)가 퇴위한 후 가진 직업은 문사관이었다. 문사관(問事官)은 문헌을 관리하거나 죄인의 신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말한다. 지금으로 치면 법원, 검찰청의 서기와 비슷하다. 전회에 이른바 이홍윤 역모사건으로 충주목이 유신현으로 읍호 강등되고, 그에 따른 연좌제로 충청도가 청홍도(淸洪道)로 바뀌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연좌제는 가족에게 보다 혹독하게 적용됐다. '이홍윤과 배광의·최대관·이휘·이무정은 대명률(大明律)에 의거, 수종(首從)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능지 처사(凌遲處死)하고, 아버지와 16세 이상의 아들은 모두 교수(絞首)에 처하고, 15세 이하 아들 및 어머니·딸·아내·첩·할아버지·손자·형제·자매, 그리고 아들의 아내와 첩은 공신의 집에 종으로 주었으며, 재산은 모두 적몰(籍沒)하였다.'- 본문중 대명률은 명나라 형법을 일컫는다. 이홍윤을 심문할 때 문사관으로 배석한 관원이 민기(閔箕·1504∼1568)라는 인물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사료마다 다소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기유년(1549)에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 5월에 충주(忠州)에서 이홍윤(李洪胤)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공이 문사관(問事官)이 되었다.…
전회에 유석(劉石)이라는 인물의 패륜사건으로 '충주목'이 '예성부'로 읍호가 강등됐고, 그에 따른 여파로 '충청도'도 '청공도'(淸公道)로 행정지명이 바뀌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때가 1540년(중종 35)이다. 그로부터 9년 후 충주가 이번에는 다시 유신현(維新縣)으로 읍호가 강등된다. '충청도를 고쳐 청홍도로 만들고, 충주를 강등시켜 유신현(維新縣)으로 만들었다. 이기를 의정부 영의정으로, 이해를 청홍도 관찰사로, 이치를 유신 현감으로 삼았다.'- 청홍도할 때의 '홍'은 홍주(지금의 충남 홍성)에서 왔다. 1547년(명종 2년) 이른바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났다.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 벽위에 붙여진 벽서에는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세를 농락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벽서 내용은 상부에 보고 되었고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지시하여 윤임의 일파를 숙청했다. 그 과정에서 송인수·이약빙·임형수 등도 윤임의 일파로 지목돼 함께 사사했다. 거론된 인물중 이약빙은 우리고장 충주출신이고, 그에게는 홍남, 홍윤 두 아들 형제가 있었다. 그중 홍남은 벽서 사건에 간접적으로 연루됐다는 누명을 받아…
충주 별칭 중의 하나로 '예성'(蘂城)이 있다. 이 때의 '예'(蘂) 자는 꽃술이라는 아름다운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예성'이라는 별칭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고려시대부터 등장한다. '충주목은 (…) 대원(大原, 성종이 정한 명칭이다) 또는 예성(蘂城, 고종 42년에 다인철소 사람이 몽고 침략군을 방어함에 공로가 있었다고 하여 익안현으로 승격시켰다)이라고도 부르며…'- 위 내용만 가지고는다인철소의 승격과 예성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와 관련 지난 1970년대 후반 충주 한 가정집에서 태극과 꽃 문양의 석조물이 발견돼 화제가 된 것이 있다. 당시 충주 향토사학회에서는 이를 '예성 심방석'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고려시대 충주 별칭인 예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유물인지는 여부는 추가 고증이 필요해 보인다. 지금까지는 예성에 대한 긍정적인 내용들이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이 예성의 명칭이 부정적으로 사용됐다. 시리즈로 언급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연좌제의 일종인 읍호(邑號) 강등 사례가 심심찮게 발생했다. 이는 반역, 폐륜같은 국사범이 나올 경우 목(牧)을 현(縣)으로 내리는 등 행정 지위를 낮추는 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한 생원이 기개높게 상소하는 장면이 기묘록보유에 등장한다. '참판 이찬(李澯), 참지(參知) 김노(金魯)는 모두 나이가 젊고 글씨를 잘 쓰므로 두 사람에게 붓을 들고 종이를 앞에 놓게 하더니, 공이 줄줄 불러대는데 글이 샘솟듯 하여 김(金)과 이(李)가 미처 받아쓰지를 못 하였다. 단번에 10여 편을 썼는데 사연이 매우 간절하였다.'- 본문에 등장하는 '공'은 박광우(朴光佑·1495∼1545)라는 인물이다. 생원은 지금으로 치면 초급 과거에 합격한 신분 상태를 말한다. 이들에게는 두가지 선택이 주어줬다. 곧바로 하급관리로 나가거나 또는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생원·진사 시험보다 더 높은 것이 바로 문과시험으로, 지금의 고시(高試)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문과 합격자를 기록해 놓은 것으로 국조방목(國朝榜目)이라는 것이 있다. 박광우 이름이 이 기록에 등장한다. 따라서 서두의 박광우 상소는 정식관리 신분이 아닌, 유생 상태에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문과급제 후의 박광우는 여지승람 편찬에 관여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그는 한때 강릉부사 직도 수행했다. 이때 고찰 월정사도 들렸던 모양이다. '월정사' 제목의 한시가 전해진다. '솔 그
조선시대 때 환관의 또 다른 이름으로 엄인(門자 안의 奄자와 人), 화자(火子), 고자(鼓子) 등이 있다. '엄인'은 고려시대의 원나라 간섭기에 주로 사용됐다. 이때의 '엄'자는 그 훈이 '고자엄'으로, 글자 그대로 성불구자를 의미한다. '화자'와 '고자'는 보다 노골적인 성적 의미를 담고 있다. '화자'의 '火'는 남자의 몸(人)에서 두 개의 남성성이 떨어져 나간 것을 의미하고 있다. '고자'할 때의 '고'는 글자 그대로 북을 의미한다. 북의 속이 비었듯이 남성의 그것도 비었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대개 2가지 방법으로 환관이 됐다. 어릴적 개에게 고환을 물린 아이가 환관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또 다른 경우는 사설 내시양성소인 내자원(內子院)을 통해 내시가 됐다. 이때 남성성을 거세하는 수술은 주로 비오고 천둥치는 날 했다. 비명 소리가 밖으로 빠져나가도 괜찮기 때문이었다. 당시 환관들은 생식성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생활도 영위했고 양자를 입적시키기도 했다. 이때 여자의 집안과 양자된 자의 부모에게는 적지 않은 재물이 건네졌다. 전회에 조선전기 최고 환관인 김처선과 그의 양자 이공신을 언급한 바 있다. 양부 김처선은 주군 연산군에게 직언을 했다가 참
동서를 막론하고 궁녀에 대한 소유권은 왕에게 있었다. 이런 구도 안에 또 다른 남성이 존재하면 이성적으로 돌발적인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거세남 환관(일면 내시)의 기원은 이같은 궁궐내 환경과 관련이 있다.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환관 역사도 비교적 오래 됐다. 통일신라의 흥덕왕은 즉위년(826)에 왕비 장화부인을 잃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등장한다. '외짝 새도 제짝을 잃은 슬픔에 젖거늘, 하물며 훌륭한 배필을 잃었는데, 어떻게 무정하게 금새 다시 장가를 든다는 말인가? 그렇게 말하고는 끝내 따르지 않았다. 또한 시녀들까지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좌우의 심부름꾼은 오리지 환수(宦竪) 뿐이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환수'가 바로 환관을 지칭한다. 조선 전기의 최고 환관으로는 단연 김처선(金處善·?~1505)이라는 인물이 꼽힌다. 그는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여러 임님을 모셨다. 연산군도 처음에는 그에게 말(馬)을 하사하는 등 비교적 곰살맞게 대했다. 그러나 생모 윤씨가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죽어간 것을 알고는 분노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그같은 심리 상태는 폭정을 뛰어넘어 광기로 이어졌다. 이같은 상황에서 성리학적 소양이…
조선시대 선비들도 정신적인 자유를 추구했다. 가장 흔한 방법은 전원을 찾아 유유자적하는 삶이었다. 이른바 은거(隱居)다. 이것 외에 의식적으로 한직(閑職)을 맡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됐다.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백거이(白居易·772~846)는 그의 인생 말년에 명목상 직책만 맡은 채 시, 술, 거문고 등을 벗삼아 즐겼다. 그는 이같은 생활 방식을 시로 남겼다. 그의 시 '중은'(中隱)이다. '大隱은 조정과 저잣거리에 숨고(大隱住朝市) / 小隱은 산속에 들어가는 것이라네(小隱入丘樊) / 산속은 너무 쓸쓸하고(丘樊太冷落) / 조정과 저잣거리는 너무 시끄럽다네(朝市太·喧) / 차라리 대은과 소은의 중간에 은거하여(不如作中隱) / 관직에 은거하는 것이 적당하다(隱在留司官)….' 그가 왜 시제목을 '중은', 즉 '중간 정도에 숨는다'로 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산속같이 너무 적막한 곳은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 중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등장한다. '그대가 질펀하게 놀기를 좋아한다면(君若愛游蕩) / 성 동쪽에 봄 동산이 있다네(城東有春園) / 그대가 한번 취하기를 바란다면(君若欲一醉) / 항상 손님으로 잔치자리에 참석할 수 있다네(時出赴賓筵) / 낙양에
조선 중종 때의 인물로 유여림(兪汝霖·1476∼1538)이 있다. 그가 우리고장 충청도관찰사(감사)로 임명됐다. 조선시대 때는 외직, 즉 관찰사로 나갈 때는 임금 앞에서 배사(拜辭)라는 의식을 가졌다. 이는 임지로 가기 전에 임금에게 공손히 절하고 하직 인사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당시 충청도에서 미풍양속에 위배되는 일이 더러 발생했던 모양이다. 중종이 배사를 위해 궁궐에 들어온 유여림에게 이를 바로 잡으라는 하명을 한다. "백성들의 기쁨과 슬픔은 수령에게 달렸고 수령의 현부(賢否)는 감사가 출척(黜陟)을 엄명하게 하는 데 달렸으니, 경은 가서 힘쓰라. 그리고 충청도는 근래 풍속이 투박해졌으니 경은 풍속 혁신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라"- 본문 중 출척은 무능한 관리를 물리치고 유능한 관리를 품계를 올려주는 행동을 일컫는다. 유여림이 부임 1년만에 '실적 보고'를 하게 된다. 관내 효자와 열부를 찾아내 임금께 보고하는 글인 장계(狀啓)를 올렸다. '충청도 관찰사 유여림이 장계하기를, "충주(忠州) 사는 전 혜민서 참봉 하숙륜은 어머니가 악질(惡疾)에 걸리자 다리 살을 베고 손가락을 잘라 불에 태워 약에 타서 드리니 그 병이 쾌차하였고, 지성으로 봉양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최대 폭군인 연산군은 기분내키는대로 죄명을 만들었고 이를 집행했다. 그러나 그도 내심으로는 법치가 옳은 것임을 알고 있었다. 연산군이 어떤 사건에 대해 변명한다. '전교하기를, "죄인 이극균, 윤필상 등의 할아비 및 아재비·조카는 비록 죽었더라도 모두 부관참시하라 이 일은 율문에 없는 것인 듯하지만, 율문이 없는 것은 이럴 리가 없기 때문이다. 비상한 간흉은 상법(常法)으로 다스려서는 안 되므로 율문에 없는 형벌로 다스린다" 하였다.'- 본문 중에 윤필상(尹弼商·1427∼1504)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그는 적개, 좌리 등 두번의 공신 반열에 올랐다. 그는 이같은 공훈을 바탕으로 성종대에 조선관료의 꽃인 영의정 자리에 올랐다.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신하의 이름은 송시열로 2천8백여번이 된다. 윤필상도 이에 못지 않아 2천6백여번 등장하고 있다. 주군이 바뀌면서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 시련은 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에게 '절개를 지키지 않았다'는 죄명이 씌워졌다. 연산군의 국문이 시작됐다. '전교하기를, "신하로서 인군을 섬길 때는 죽든 살든 한 절개를 가져야 하는 것인데, 윤필상(尹弼商)이 전에는 그렇게 의
이세좌와 연산군과의 악연은 역사에서 자주 거론된다. 이세좌는 성종이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내릴 때 약사발을 가지고 간 인물이다. 이른바 봉약관(奉藥官)이다. 결국 이세좌는 이 사실을 안 연산군에 의해 극형을 당한다. 전회 소개했던 내용이다. 대대로 문벌이 높은 가문을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고 부른다. 이때의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이 아닌 신라, 고려, 조선를 일컫는다. 조선전기의 삼한갑족 1위는 왕족 전주이씨를 제외하고 청주한씨다. 그러나 청주한씨는 한명회를 정점으로 하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뒤를 이은 문벌가문이 광주이씨다. 그러나 광주이씨도 연산군대의 사화로 가문이 크게 위축된다. 그 전환점에 서있는 인물이 앞서 언급한 봉약관 이세좌다. 이세좌의 집안 조카뻘되는 인물로 이수공(李守恭·1464∼1504)이 있다. 그는 1498년 무오사화 때 '난언'(亂言)을 알고도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상도 창성(昌城)으로 유배됐다. 이때의 난언은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의미한다. "강경서·이수공·정희량·정승조는 난언(亂言)한 것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아니하였으니 아울러 곤장 1백 대에 3천 리 밖으로 내쳐서 봉수군(烽燧軍) 정로한(庭爐
계량화된 수치만으로 어떤 학생의 미래성장 가능성이나 특기를 충분히 검증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도 이같은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 제도를 한시적으로 도입했다. 시험이 아닌 추천에 의해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였으나 객관성은 자주 문제됐다. 사학자들이 중종대 현량과 급제자 28명을 출신지별로 분석한 결과, 전체 급제자 28명 중 한양 10명, 충청도 8명, 경기도 2명, 경상도 5명, 전라도 1명, 강원도 1명, 미상 1명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충청도 8명을 다시 분석한 결과, 충주·음성 출신이 5명으로 조사됐다. 이는 이미 이때부터 서인의 뿌리인 기호사림이 서서히 세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사가들은 충주·음성을 기호사림과 분리해 '충주사림'이라고 별도로 칭하기도 한다. 충주·음성 출신 급제자 중에는 김구(金絿·1488∼1534년)라는 인물도 있다. 그는 30대 초반에 홍문관 부제학이 될 정도로 장래가 촉망됐다. 여기에는 먼저 정계에 진출한 김정, 김식 등의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사가들은 보고 있다. 김정은 우리고장 보은, 김식은 제천출신 인물로, '범기호사림'으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다. 김구는 글씨를 잘 써 한석봉, 안평대군, 양사언…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 이지함(1517~1578)은 충북과도 적지 않은 인연을 맺고 있다. 토정은 기인의 이미지와 달리 이른바 명문가 출신이다. 북인의 영수였던 '이산해'가 그의 친조카다. 그리고 형은 이지번(李之蕃·?~1575)이다. 이지번, 지함 형제는 우정이 매우 돈독했다. 실록에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아우 지함은 박학다식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본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형 지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어려서 글을 배우지 않았었는데 그의 형 이지번의 권고를 받고 마침내 분발하여 학문에 주력하면서 밤을 새워 날이 밝도록 공부하곤 했다. 그리하여 경전을 모두 통달하고 온갖 사서(史書)와 제자백가의 책까지도 섭렵하였다.'- 수정실록은 실록이 편찬된 후 어떤 이유로 일부 내용을 고치는 것을 말한다. 선조와 경종대 등 2개의 수정실록이 존재한다. 이밖에 '개수실록'과 '보궐정오'라는 형식도 있다. 개수실록은 처음 부터 완전히 뜯어 고치는 것을, 보궐정오는 본래의 실록에서 잘못된 글자나 내용을 고친 뒤 부록처럼 붙이는 것을 말한다. 이지번의 호는 여러 개가 있다. 이중에는 구선(龜仙), 구옹(龜翁)이라는 호도 있다. 이때의 '龜'는 우리…
조선시대 명의하면 허준(許濬·1537~1615)만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으나 꼭그렇지도 않다. 허준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어의(御醫)의 한 명으로 이공기(李公沂·?~?)라는 인물도 있다.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들을 기록한 사마방목에는 그의 친·외가에 대한 내용이 전혀 존재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취재'(取才)에 의해 어의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취재'는 재능이 있는 인물을 과거시험없이 하급직으로 등용하는 제도를 말한다. 어의로서의 이공기 활동은 대략 3시기로 구분되고 있다. 첫째 선조 임금의 이명증(耳鳴症) 치료, 둘째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 치료, 셋째 임진왜란 피난길의 선조 호종 등으로 나뉜다. 후대의 사가들은 대체로 선조를 이기주의적이면서 나약했던 인물로 평하고 있다. 선조는 이명증을 자주 앓았고, 이로 인해 침맞기를 무척 좋아했다.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왕세자가 입시하고, (…) 허준·이공기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왼쪽 귀가 심하게 울리고 들리지도 않으므로, 침을 맞지 않으면 낫지 않을 듯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다"하고(…)'- '또 이르기를, "전에 머리가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지난 가을에 침을 맞은 뒤부터
조선시대 전기에는 금화도감(禁火都監)이라는 곳에서 방화업무를 담당했다. 금화도감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인접한 가옥과 가옥 사이에 방화장(防火墻)을 쌓고, 또 요소마다 우물을 파 방화기기(防火器機) 등을 설치토록 하는 등의 행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 소방대원에 해당하는 조직으로 멸화군(滅火軍)이 존재했다. 이 조직에 대해서는 군인의 일부다, 아니다의 논란이 있으나 소방업무를 담당했던 것 만큼은 분명하다. 실록에 멸화군에 대한 표현으로 다음 내용이 나온다. '불을 끄는 사목(事目)을 도총부·병조·공조·한성부에 내려 주었는데, 그 사목에 이르기를, "1. 문서가 있고 전곡(錢穀)이 있는 여러 관사는 방화장을 쌓을 것. 1. 불을 끄는 군사 50인을 정하여 도끼 20개, 철구(鐵鉤) 15개, 숙마긍(熟麻실사변+瓦) 5개를 주고, 종루에 올라가서 망을 보게 할 것(…)'- 본문 중 '철구'는 쇠로 만든 갈고리를 뜻한다. '숙마긍'은 국어사전에 등장하지 않으나 이때의 '긍'은 밧줄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황상 마를 질기게 꼰 밧줄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철구와 숙마긍만 생각해도 불끄는 장면이 절로 연상되고 있다. 이것 말고 본문 중에 '전곡(錢穀)이
나라의 말과 글이 달라지면서 통역과 번역은 늘 필요했다. 조선시대 때도 이를 관장하기 위한 기구로 사역원(司譯院)이 존재했다. 사역원은 일반 생도 외에 강이관(講肄官)과 강예관(講隷官) 등으로 학생을 구성했다. 강이관은 관직이 있으면서 한달에 15일 정도, 강예관은 관리가 됐으면서 꾸준히 중국어 공부를 하는 학생을 일컫는다. 조선시대 외교정책의 기본틀은 사대교린이었다. 사역원에서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꾸준히 인재를 배출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규율이 엄격했다. 사헌부는 학생들의 성적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곤장을 상소하기도 했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사직 이계화·김예몽·예조좌랑 박적선·승문원박사 장계숙·돈녕부부승 홍일동·사정 윤자운이 강례관으로써 여러 해 동안 중국말을 강습했으나, 고의로 마음을 쓰지 않았으므로 조금도 실효가 없사오니, 죄가 장(杖) 80대에 해당하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거명된 인물 중에 김예몽(金禮蒙·1406~1469)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성품이 온화 청렴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한시에도 능했다는 사평을 받은 인물이다. 김예몽의 이름이 의방유취(醫方類聚)와 관련된 기록물에도 보인다. 의방유취는 세종대왕의 명에 의해…
관우(關羽,?~219)는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으로 삼국지연의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등장한다. 조조도 일찌기 그의 인간됨을 알아보고 신하가 되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이미 유비를 주군으로 모시고 있었다. 그러자 조조가 "사람마다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중국정부가 관우를 신으로 섬기는 자국내 민간신앙을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관우의 고향 산시성(山西省) 윈청시가 최근 관우 민간신앙인 '관공신속(關公信俗)'을 유네스코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키로 하고 모든 신청 준비를 마쳤다. 우리고장 영동군 영동읍 당곡리에도 관우를 주신(主神)으로 모신 십이장신당(十二將神堂·충북민속자료 제 2호)이 존재하고 있다. 다른 나라의 신, 그것도 실존했던 인물을 신으로 모시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기원후 3세기 때 관우가 손권 군사에 의해 아들과 함께 사로잡혀 처형당하자 중국 민간인 사이에서 그에 대한 신격화 움직임이 일어났다. 후대 쓰여진 서애 유성룡(柳成龍·1542~1607)의 기행문에서 당시 중국인의 관우 숭배 모습을 엿볼 수 있다. '5월 13일 묘에 크게 제사를 드렸는데, 이날이 관왕의
조선시대 때 각 도에 파견된 지방 행정의 최고 책임자는 관찰사였다. 달리 감사(監司)·도백(道伯)이라고도 불렀다. 관찰사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다소 변화했다. 조선 초기에는 도관찰출척사(道觀察黜陟使) 또는 안렴사 등으로 불렸다.이것이 관찰사로 굳어진 것은 세조 때이다. 도관찰출척사 시절의 충청도 최고 책임자 한 명으로 함부림(咸傅霖·1360∼1410)이라는 인물이 있다. 조선시대 대 8도 관찰사를 모두 역임한 인물은 반석평(潘碩枰·?~1540)과 함부림 딱 2명이다. 반석평에 대해서는 전회에 소개한 바 있다. 우리고장 음성 원남에 묻힌 인물로, 반기문 현 유엔 사무총장이 그의 16세 후손이 된다. 함부림은 우리고장 인물은 아니다. 강릉 인물로 이성계 사람으로 분류된다. 함부림은 충청도 도관찰출척사로 근무하면서 여기저기 적지 않은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하루는 속리산이 있는 보은현을 방문했던 모양이다. 세속과 떨어져 있는 속리(俗離) 세계를 그리고 있다. '함부림의 시에, "계원(鷄園)의 한가로운 일월(日月)이요, 안탑(雁塔)에 구름과 연기 자욱하네. 우연히 삼청동(三淸洞)에 들렸더니, 세상일 시끄러운 것 모두 잊었네" 하였다.'- 본문에 등장하는 '계원'은 인도
악성 박연의 스승으로 고려말 문신인 김자수( 金自粹·?~?)라는 인물이다. 그의 본관은 경주, 호는 상촌(桑村)으로, 조선전기 학자인 김세필(金世弼)이 그의 고손(증손자의 아들)이 된다. 그는 시문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릴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엇갈리고 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그를 고려에 절개를 지킨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광주의 추령(秋嶺)에 이르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이 땅은 바로 내가 죽을 곳이다.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오히려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신하가 되어 두 성(姓)의 임금을 섬길 수가 있겠는가.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 너는 반드시 추령 근방에 나를 매장하되, 절대로 비를 세우지 말고 초목과 함께 썩게 하라." 하였다.'… 본문에 등장하는 광주는 전남이 아닌 경기도 광주를 의미한다. 또 연려실기술은 경주김씨보(慶州金氏譜)를 인용, 김자수가 '내 평생토록 충성하고 효도하는 뜻을 오늘날 그 누가 알리오'라는 절명시를 남긴 것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김자수가 태조와 태종 등 두 임금을 섬기며 청주목사와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고 썼다. '청주 목사 김자수가 연사(年事)
충북학연구소는 올 상반기 충북을 빛낸 2010 역사·문화 인물의 한 명으로 신미대사(信眉·?~?)를 선정한 바 있다. 세종대왕을 도와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점이 선정 사유가 됐다. 신미대사의 속가 본관은 충북 영동 지방의 옛이름인 영산(永山)이다. 고려 공민왕 때 김길원(金吉元)이라는 인물은 홍건적을 토벌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출신지는 충북 영동이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영동(永同)에 집성촌을 형성했고, 김종경(金宗敬), 김훈(金訓)과 같은 조선전기 문신들이 배출됐다. 신미대사에 있어 김종경은 친할아버지, 김훈은 친아버지가 된다. 김종경은 악성 박연과 같은 마을에 살았고 또 허조(許稠), 맹사성(孟思誠) 등 유학자와 교유했다. 김훈은 나중에는 병마사(兵馬使)가 되지만 원래는 문과에 급제했다. 바로 신미대사 집안은 유교 명문가였고, 영산김씨의 종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명이 김수성(金守省)인 신미대사는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 평생 승려의 길을 걸었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자식 때문에 골치를 앓는 경우가 많다. 당시 김훈 집안은 그 반대였다. 신미대사 가족들은 아버지의 방탕한…
[충북일보] 주말 동안 충북지역에 많은 비가 내리면서 도내 하상도로가 통제되고 나무가 쓰러지는 등 각종 피해가 속출했다. 청주기상지청은 지난 6일부터 7일까지 시간당 20~30㎜의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했다. 시간당 30㎜의 비부터는 보통 '폭우'라고 부르는 수준으로 밭이나 하수구가 넘치기 시작하고, 홍수나 침수 같은 비 피해 위험이 매우 높아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단계다. 충북도 등에 따르면 7일 오후 2시 30분 기준 도내에는 평균 62.1㎜의 비가 쏟아졌다. 지역별로는 △증평 121.5㎜ △괴산 116.5㎜ △청주 87㎜ △진천 52㎜ △단양 49㎜ △보은 45.3㎜ △충주 45㎜ △제천 41.7㎜ △영동 7㎜ △음성 4㎜다. 폭우로 인해 도내 하상도로와 둔치주차장은 일부 통제된 상태다. 현재 도는 청주시 무심천 하상도로, 미암교 하상도로, 충주시 달천 하상도로를 통제 중이다. 하상도로에 설치된 둔치주차장은 전체 27곳 중 15곳이 통제된 상황이다. 폭우 여파로 도내 각종 사건·사고도 잇따랐다. 이날 도에 접수된 풍수해 신고 건수는 총 20건이다. 피해 유형은 △수목전도 12건 △배수불량 4건 △낙석 1건 △기타 3건으로 집계됐다.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도가 친환경 에너지로 각광받고 있는 수소산업 육성을 위해 특화단지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수소특화단지 지정을 통해 산·학·연·관 생태계를 공고히 구축하고, 기업 지원과 기술 개발로 이 분야를 선도한다는 구상이다. 7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가 내년 상반기 공모를 통해 지정할 예정인 수소특화단지를 충주시에 유치할 계획이다. 도는 일찌감치 충주를 신청지로 낙점했다. 이 지역의 수소 인프라를 고려할 때 수소특화단지를 유치하면 관련 산업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충주는 수소 분야 기업 26곳이 둥지를 트고 있다. 국내 유일의 차량용 연료전지 생산 거점인 현대모비스를 비롯한 주요 부품업체들이 협력체계를 갖추고 있다. 청정수소 생산과 저장, 유통, 충전, 활용 등 전주기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는데다 그린수소산업 규제자유특구로 지정 받았다. 바이오가스에 기반한 그린수소는 전국에서 가장 저렴하게 공급하고 있다. 오는 2027년까지 하루 2.5t의 청정수소를 생산할 계획이다. 도와 충주시는 유치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다. 현재 수소특화단지 계획 수립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다. 결과는 올해 말 나올 예정이며 용역 과정에서 도출된 경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