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는 승정원 소속 7품직인 주서(注書)가 작성했다. 주서는 승정원일기 작성을 위해 왕과 신하들이 만나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동석, 대화 뿐만 아니라 행동도 묘사하듯 기록했다. 영조와 관련된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영조 40년 10월 1일, 여느 때와 같이 저녁공부(夕講)를 마치고 약방에서 들인 탕제를 마시던 영조는 갑자기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놀라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성종이 한때 자신의 지어미였던 폐비윤씨(연산군 생모)에게 사약을 내릴 것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이때 사약을 운반한 책임자급 인물은 이세좌(李世佐)이고, 실무자는 당시 승정원 주서였던 권주(權柱·1457~1505)다. '이세좌가 나가서 내의 송흠(宋欽)을 불러서 묻기를, "어떤 약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하니, 송흠이 말하기를, "비상(砒石+霜)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므로, 주서 권주로 하여금 전의감에 달려 가서 비상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권주는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은 총명이 뛰어나서 한 번 보기만 하면 잊지 아니하였다. 8세에 사서를 읽고, 10세에 경서와 사서를 통달하였으며, 13세에는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문구를 지었다'.-
우량목에 대한 조선시대 산림정책은 전기는 금산(禁山), 후기는 봉산(封山)으로 대표된다. 이중 봉산제도는 '백목지장(百木之長·여러 나무중 으뜸)인 소나무 외에 특별용도를 지닌 다른 나무도 적극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황장목을 보호하는 산림은 황장봉산(黃腸封山), 밤나무는 율목봉산(栗木封山), 참나무는 진목봉산(眞木封山)이라고 각각 불렀다. 당시 황장목은 관(棺), 밤나무는 신주를 만드는데, 참나무는 배못을 만드는데 매우 요긴하게 사용됐다. 사료를 보면 우리고장 남한강 주변에도 봉산이 많이 설정돼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남한강 뗏목문화도 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때 충청도 관찰사로 온 인물이 이덕숭(李德崇·?~?)이다. 성종이 직접 그에게 산림과 관련된 하명을 내린다. "귀후서(歸厚署)의 판목(板木)을 강변에 위치한 모든 고을에 나누어 배정하고 이를 무역(貿易)하여 물에 띄워 내려 보낸 지 오래이다. 도내의 단양군은 백성들이 본래 피폐하고 경내의 모든 산에서 해마다 나무를 베어 내어 남은 제목이 없을 것이니, 진실로 한둘의 민호에서 독단으로 판비할 바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부근 경상도의 풍기·예천 등 경계에서 베어오는 한 나무에 끌어오는 인부가 거의…
조선시대에는 달이 태양을 가리는 일식을 커다란 흉조로 생각했다. 왕을 상징하는 태양이 달에 가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식이 예상되는 날에는 구식의(救蝕儀)라는 의식을 올렸다. 이는 태양이 빨리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임금을 포함한 모든 신하가 소복을 입고 기원제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일식이 있으므로, 임금이 소복(素服)을 입고 인정전의 월대 위에 나아가 일식을 구(救)하였다. 백관들도 또한 소복을 입고 조방(朝房)에 모여서 일식을 구하니 해가 다시 빛이 났다. 임금이 섬돌로 내려와서 해를 향하여 네 번 절하였다. 추보(推步) 하면서 1각(刻)을 앞당긴 이유로 술자(術者) 이천봉(李天奉)에게 곤장을 쳤다'.- 본문 중 '추보'는 천체 운행을 관측하는 행동을 말한다. 내용만 보면 일식이 오래 진행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과 관계없이 당시 천문관의 예상이 조금 빗나간 것으로 보인다. '1각(刻)을 빨리 예측한 이유로 천문관 이천봉에게 곤장내려졌기 때문이다. 이때의 '1각'은 지금으로 치면 14분 정도가 된다. 조선은 매해 연말 '동지사'라는 사신을 중국에 보내 달력을 얻어왔다. 이것으로 조선의 역법을 삼았다. 그러나 중국의 땅과 환경이 다르다 보니…
사약을 받은 폐비윤씨(연산군 생모)는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 묻혀졌다. 폐비가 되기 전까지 일국의 왕비였으나 그녀의 묘비에는 '尹氏之墓'가 새겨졌다. 이른바 민묘(民墓)라는 뜻이다. 한때 지아비였던 성종은 "이렇게까지 해준 것도 과분하다"는 투의 표현을 한다. '어서(御書)하기를, "단지 제사 의식만 정하면 되지 어찌 명호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명호를 더하려 하면 이것은 바로 추숭(追崇)하는 것이니, 어찌 그릇된 것이 아니겠는가. 죄지은 사람이 제사나마 받는 것으로 족하다"하였다'.- 연산군은 보위에 오른지 얼마 안 돼 임사홍의 고자질로 자신의 생모가 억울하게 사사된 것을 알았다. 그는 어머니 폐비윤씨의 한을 풀어주고, 또 묘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문제를 신하들과 논의했다. 먼저 연산군이 말문을 연다. '전교하기를, "성인(聖人)의 칠거(七去)의 법이 있으니, 만일 그런 죄라면 버리고 말 것이지 하필 죽여야 하는가.(…) 성종(成宗)께서 명철한 임금이시지만, 어찌 잘못한 일이 없겠는가· 그때의 재상들이 극력 간하였다면 반드시 위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형은 다르지만 대부분의 신하들은 반대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정과 예를
조선시대 때 당인(黨人)은 같은 당파, 당여(黨與)는 같은 편에 속하는 사람을 의미했다. 거의 비슷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이원(?~1504) 은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의 당인으로 분류됐다. 먼저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신문에 답하는 내용이다. '윤필상 등이 물으니, 일손이 대답하기를, "신종호는 종직이 서울에 있을 적에 수업하였고, 조위는 종직의 처제로서 젊어서부터 수업하였고, 채수·이계맹·이주·이원은 제술(製述)로 과차(科次)받았고… " 하였다'.- 본문중 이원의 이름이 보이고 있고, '제술로 과차받았고'라는 표현은 지금으로 치면 시문 지도를 받은 것 쯤으로 해석되고 있다. 신문이 시작되자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한 이원은 김종직과의 관계를 가급적 희석시키려 한다. "신은 일찍이 종직에게 수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종직이 동지성균으로 있을 적에 신이 생원으로 성균관에 거접하면서 목은(牧隱)의 관어대부를 차운하여 종직의 과차로 나아가니, 종직이 칭찬을 하였습니다. 일손이 신더러 그 제자라 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오며…'- 결국 이원은 김종직과의 당인 관계가 인정돼 1498년(연산군 4)부터 곽산, 나주 등지를 이배
"지난 정유년에 윤씨가 몰래 독약을 품고 사람을 해치고자 하여, 건시와 비상을 주머니에 같이 넣어 두었으니, 이것이 나에게 먹이고자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지 않는가'.- 본문중 건시는 홍시, 비상은 극약의 재료를 의미한다. 12명의 부인을 뒀던 성종은 폐비윤씨를 극형에 처하기로 최종적인 결심을 하고 있었다. 살려두려 해도 어머니 인수대비의 태도가 워낙 완고했다. 형식적인 어전회의가 열렸다. 대부분의 대신들이 윤씨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대신 채수(蔡壽·1449~1515)라는 인물은 완곡한 어법으로 반대했다. '채수는 사람됨이 영리하며 글을 널리 보고 기억을 잘하여 젊어서부터 문예(文藝)로 이름을 드러냈고, 성종조에서는 폐비의 과실을 극진히 간하여 간쟁(諫諍)하는 신하의 기풍이 있었다'.- 중 채수 졸기 그는 이때의 간언으로 벼슬에서 물러나야 했다. 정황상 채수는 합리적이면서 온정적인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여겨진다. 해당 사례가 그 유명한 '어을우동'(於于同,·?~1480 사건에서도 읽혀진다. 일반인에게는 '어우동'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실록은 시종 어을우동으로 쓰고 있다. '좌승지 채수와 좌부승지 성현 등은 아뢰기를, "어을우동의 죄는 비록 중하
두시언해(杜詩諺解)는두보(杜甫)의 시를 한글로 처음으로 번역한 작품을 말한다. 이를 번역한 사람은 유윤겸, 유휴복, 조위 등 3인이다. 세종 때 시작해 성종 12년(1481)에 완성됐다. 전회에도 밝혔지만 무오사화는 연산군이 사림파를 손보려고 잔뜩 벼르고 있던 차에 김종직의 '조의제문' 문장이 발단이 돼 일어났다. 서두에 거론한 3명 중 조위(曺偉·1454~1503)는 김종직의 처남이면서 어려서 그에게 배웠다. '전교하기를, "그 사초에 기록된 종직의 제자 신종호 등 약간 명도 과연 모두가 일손처럼 수업을 하였느냐, 그렇지 않는 자도 있느냐" 하였다. 윤필상 등이 물으니, 일손이 대답하기를, "신종호는 종직이 서울에 있을 적에 수업하였고, 조위는 종직의 처제로서 젊어서부터 수업하였고…',- 무오사화(연산군 4)가 일어날 때 조위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다고 돌아오던 중이었다. 그는 요동 쯤에 이르러 국내에서 정변이 일어난 소식을 들었다. '동지중추부사 조위를 명나라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게 하였다. 이해 가을에 사옥(史獄)이 일어났는데, 조위 역시 연류되어 일이 망칙하게 되었었다. 조위가 돌아올 때 요동에 당도하니 수행원들은 모두 황공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1482년(성종 13년) 음력 8월 16일. 조정에서는 폐비윤씨(연산군 생모)를 계속 살려둘 것인가, 사약을 내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정창손, 한명회, 심회, 윤필상, 이파 등이 사약이 마땅하다고 발언했다. 사약 집행자는 이극감의 아들인 형방승지 세좌(世佐·1445~1504)였다. '이세좌가 나가서 내의 송흠(宋欽)을 불러서 묻기를, "어떤 약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하니, 송흠이 말하기를, "비상(砒·石+霜)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므로, 주서 권주(權柱)로 하여금 전의감에 달려 가서 비상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저녁이 되자 전교하기를,"이세좌는 오지 말고 그 집에 유숙하라" 하였다'.- '그 집에 유숙하라'는 것은 그날밤 사약을 집행하라는 것을 의미했다. 소수지만 원자(연산군)의 생모인 점을 들어 극형만은 안된다고 말한 인물이 있었다. 손순효(孫舜孝·1427~1497)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이때 임금이 장차 중궁을 폐하려고 위엄이 진동하니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손순효가 소를 올리기를, "비록 자기 허물로 인한 것이지마는 그렇듯 전하께서 박정해서야 되겠습니까. (…) 훗날에 원자가 측은한 마음을 가진다면 전하께서 어찌 후회가…
조선시대 법률 제정은 검상조례사( 檢詳條例司)라는 곳에서 전담했다. 조선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태조 6년)도 검상조례사에서 편찬했다. 그 책임자를 검상(檢詳)이라고 불렀다. 검상은 비록 정5품의 관직이었지만 의정부의 모든 실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상피법이 적용되는 등 이조전랑과 함께 요직 중의 요직으로 인식됐다. 1455년 수양대군이 보위에 오르면서 첫 검상으로 임명한 인물이 이극감(李克堪·1427∼1465)이다. 그는 시와 서에 모두 밝았다. 다음은 세조 등극에 도움을 준 인물들에게 내린 공신 교서의 내용이다. 본문 중의 '경'은 이극감을 말한다. '생각건대, 경은 시·서의 명가(名家)에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후예로서, 강개하여 경국제세하려는 뜻이 있었고 마음이 활달하여 조그만 일에 얽매이지 않는 재주가 있었다'.- 동문선(東文選)은 조선 성종 때 왕명을 받아, 양성지· 서거정 등이 우리나라 역대 명시를 책으로 엮은 시문집을 말한다. 이극감의 한시가 동문선에 비교적 많이 수록돼 있다. '강가에 눈이 녹아 강물이 많아졌는데(江上雪消江水多) / 밤이 되어 들리는 죽지가 소리(夜來聞唱竹枝歌) / 그대와 이별한 뒤 무한한 생각(與君一別思何盡) / 천리
사림파 김종직은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을 중국 초나라왕 의제(?~BC 296)의 죽음에 비유하는 글을 남겼다. 의제는 진나라 군사에 체포돼 3년 동안 유폐생활을 하다 죽음을 당한 인물이다. 이 글을 그의 제자 김일손이 슬그머니 사초에 끼워넣었고 이를 발견해 연산군에게 고자질을 한 인물이 유자광이다. 이는 하나의 구실로 무오사화의 비극은 그 이전부터 잉태되기 시작했다. 연산군은 현실적이고 위민적인 정치를 하려고 했으나 중앙정계에 막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파는 왕도정치를 지향했다. 이는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는 정치를 말한다. 두 권력이 부딪히기 시작한 곳은 왕과 신하가 경서를 함께 공부하거나 정치적인 토론을 하던 경연이라는 공간이었다. '우의정 한치형은 말하기를, "청컨대 전하께서는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도모하되, 공구스럽게 생각하여 몸을 닦고 성찰하시며, 부지런히 경연에 납시어 날마다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시어 재변을 해소시킬 도리를 다하소서" 하고…'- 면전에서 대놓고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하라"고 노골적인 힐문을 하고 있다. 또 경연에 자주 결석을 했는지 "부지런히 경연에 납시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듣기에 거북할 정도의 상소도 올린다. '
의경세자는 세조의 장남이자 월산, 자산군(후에 성종)의 아버지가 된다. 그는 1455년 세자로 책봉됐으나 스무살 나이인 재위 2년만에 요절했다. 일부 야사는 이에 대해 문종비 현덕왕후(단종 어머니)의 원한을 사 의경세자가 요절했고, 그러자 세조가 현덕왕후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는 등 엽기적인 행각을 저질렀다고 쓰고 있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의경세자 사망일은 1457년 9월 2일, 단종은 10월 21일로 의경세자가 먼저 죽었다. 의경세자가 죽자 대쪽에 문장을 적은 책문이 올려졌다. '아아! 약관의 나이에 슬하의 은애를 버리니, 소양(少陽)은 궁중의 문이 잠겨졌구나. 그 이름만 얻고 수명을 얻지 못하였으니, 정령(精靈)이 어디로 돌아갈 것인지 슬퍼하노라'.- 본문 중 '소양'은 의경세자의 어릴적 이름이다. 그는 후에 덕종으로 추존된다. 의경세자의 죽음과 관련해 주상자(主喪者)에 임명된 인물이 정수충(鄭守忠·1401∼1460)이다. 주상자는 말 그대로 상사(喪事)를 주도적으로 처리하는 인물을 말한다. 그는 묘를 관리하는 수묘관으로도 임명됐다. '명하여 염(斂)에는 왕자의 면복을 쓰고, 무덤 속의 모든 일은 일체 임금의 산릉을 본뜨게 하였다. 하원군…
태조 이성계는 6명의 부인을 뒀고, 이들로부터 8남5녀를 얻었다. 원비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서 6남2녀, 계비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서 2남1녀를 얻었다. 언뜻봐서는 8명 아들 모두가 아버지의 창업(조선 건국)을 적극 지원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맏아들 방우(1354~1393, 후에 진안대군) 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5남 방원(태종)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조선 건국을 명분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39살 짧은 생를 살았다. 실록은 이런 진안군의 일생을 폄하내지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진안군 이방우(李芳雨)는 임금의 맏아들인데, 성질이 술을 좋아하여 날마다 많이 마시는 것으로써 일을 삼더니,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졸(卒)하였다.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경효(敬孝)란 시호를 내렸다'.- 상여가 나가는 장면도 딱 1줄만 써놓고 있다. '진안군을 장사하는데 백관들이 문 밖에서 전송하였다'.- 아마도 당시 사관은 조선 창업의 비협조자였던 그를 매우 마뜩찮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안군이 새롭게 재조명된 것은 그의 사후 4백년 가량이 지난 정조대였다. 정조 임금이 재위 13년째 되던 해(1789) 우리고장 충
조선시대는 거리측정 단위로 '리'(里)를 사용했고, 그 측정이 비교적 정확했다. 당시 1리는 지금의 4백m 정도로, 10리는 4㎞가 된다. 이처럼 조선시대 사람들이 거리측정을 비교적 정확히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리고'(記里鼓)라는 측정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리고는 수레바퀴와 그것에 연결된 3개 톱니를 이용해 거리를 측정했다. 수레바퀴의 둘레 길이는 10자(尺)로, 이것이 12번 구르면 맨 밑의 톱니바퀴(하륜)는 한번 회전을 한다. 즉 120자마다 한번 회전하는 셈이 된다. 기리고는 이같은 원리를 응용해 0.5리는 북소리 1번, 1리는 북소리 2번이 자동으로 울리도록 했다. 일부 사료는 종소리도 울렸다고 쓰고 있다. 기리고를 실은 마차에는 항상 2명이 승차했다. 1명은 채찍으로 말을 끌었고, 또 다른 1명은 기리고가 울리는 북소리를 적었다. 이를 합친 것이 거리 측정값이 됐다. 그러나 기리고를 처음으로 만든 나라는 중국 동진이었다. 우리나라는 세종 때 처음 선보였다. '왕과 왕비가 온수현(溫水縣)으로 행행하니, 왕세자가 호종하고, 종친과 문무 군신 50여 인이 호가(扈駕)하였다.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한남군(漢南君) 이어로서 수궁(守宮)하게 하고, 이 뒤
조카(단종)의 보위를 유혈 쿠데타로 빼앗은 세조는 역대 왕과는 다소 다른 용인술(用人術)을 지녔다. 그는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반발하는 인물은 단호하면서 매우 가혹하게 다뤘다. 양정(楊汀·?~1466)이라는 인물이 술에 취해 세조에게 "용퇴할 의사가 없는지"를 물었다가 도성문 밖에서 효수 당했다. 반면 계유정난 공신이나 순종하는 신하에 대해서는 왠만큼 큰 잘못이 아니면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눈감아줬다. 대표적인 사례를 봉석주(奉石柱·?~1465)라는 인물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는 수양대군과 한명회 일파가 김종서와 황보인을 죽이는 계유정난 때 '갑주(甲胄)를 갖추고 궁시(弓矢)를 띠고 남문 내정(內庭)에 늘어서서 간적(姦賊)을 방비하여 엿보게 하는'(단종실록) 역할을 맡았다. 봉석주는 그 공으로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면서 송석동(宋石同)의 아내 소사(召史), 유응부(兪應孚)의 첩의 딸, 노비 15구 등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전라도 차치사(處置使)로 임명돼 임지로 떠났다. '처치사'는 후에 '절제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그는 여기서 심하다 할 정도로 탐욕을 부린 것으로 돼 있다. 사헌부가 상소를 올린다. "봉석주가 전라도 처치사가 되어 첩(妾) 2
조선시대 기녀들은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는 뜻에서 '해어화'(解語花)라고도 불렀다. 이런 기녀들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한번 기적(妓籍)에 올려지면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기생과 양반 사이에 태어난 경우라도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아들은 노비, 딸은 기생이 됐다. 이때의 천자는 노비, 수모법은 '어머니 신분을 따른다'는 뜻을 지닌다. 기녀들에게도 병이 찾아왔고, 또 나이가 들면 제구실을 할 수 없었다. 이럴 때 기녀직을 조금이라도 일찍 퇴직하고 싶으면 자신의 딸이나 조카딸을 대신 입적시켜야 했다. 이를 '대비정속'(代婢定屬)이라고 불렀다. 충주목사 전목(全穆)이라는 인물이 금란(金蘭)이라는 기녀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들의 사랑이 길지는 않았다. 전목은 인사로 인해 충주를 떠야야 했다. 다음의 시로 추정컨데 이때 두 사람 사이에 "경솔히 남에게 몸을 허락하지 말라", "월악산이 무너져도 변치 않겠다"와 같은 언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떠난 후 금란이 단월역 역승과 사랑에 빠졌다는 얘기가 전목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전목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보냈다. 용재총화 등 여러 고문헌에 등장하는 것으로 봐 꾸며낸 얘기는 아닌…
'흔한 산 어디엔들 오두막 못 지으랴(有山何處不爲廬) / 청산과 마주앉아 한 숨 길게 뿜어보네(坐對靑山試一噓) / 벼슬살이 10년에 다 늙었으니(簪笏十年成老大) / 백발로 귀거래를 짓게 하지 말라'.(莫敎霜·賦歸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지은 추강냉화(秋江冷話)에 실려 있는 한시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이례적으로 달려 있다. '영천군(永川君) 정(定)이 이 시를 보고 절하고, 또 비평하기를, "이 시는 몹시 핍진(逼眞)하니, 서(徐)가 아니면 이(李)의 솜씨일 것이다"라고 써두었다. 당시 서거정(徐居正)과 이승소(李承召)는 시인으로서 제1인자였기 때문에 정(定)이 탄복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강희안의 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거정이나 이승소를 거론한 것은 두 사람이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음을 의미한다. 문병(文柄)이라는 표현이 있다. 달리 표현하면 '문학적인 권세' 가 된다. 그러나 두 사람 중 이승소는 문명은 떨쳤는지 몰라도 문병은 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문장이 서거정(徐居正)과 더불어 이름이 맞먹었는데 서거정은 홀로 문병(文柄)을 마음대로 하고 이승소는 매양 미루어 사양하며 감히 항거하지 아니하였다'.- 이승소는 한시에만 능한 것이
조선시대는 말(馬)을 귀하게 여겨, 전국 53곳에 국영 목장을 설치하고 말의 수에 따라서 마부를 뒀다. 이처럼 조선시대 때 말이 중요시 된 것은 유사시의 전마, 통신용의 역마, 운반용의 교역마 외에 수공예품 재료인 가죽, 털, 갈기 등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는 병조에 소속된 '사복시'(司僕寺)라는 관청이 전국 말관리를 전담했다. 이밖에 말고기는 식용으로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연산군은 '백마가 양기를 돋운다'는 속설을 믿고 백마육과 백마음경을 즐겨 먹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교하기를, "백마(白馬) 가운데 늙고 병들지 않은 것을 찾아서 내수사(內需司)로 보내라" 하였으니, 흰 말의 고기는 양기(陽氣)를 돕기 때문이었다'.- 내수사는 궁궐 살림을 총괄하던 곳을 말한다. 조선전기 때 마정(馬政)을 잘 이끌어 임금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 있었다. 조순생(趙順生,?~1454)이라는 인물로, 말과 관련해 세종실록에 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좌의정으로 이내 치사(致仕)하게 한 맹사성과, 사복시 제조 정연·병조참판 황보인 등을 불러 의논하기를, "처음 사복시에서 계달하기를, '제주(濟州)에 우마적(牛馬賊)이 성행하여 목장의 말
조선왕조실록은 사관(史官)들에 의해 작성됐다. 예문관 소속의 봉교, 대교 검열 등이 실록을 쓰는 춘추관직을 겸했다. 이들은 관품이 높았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각각 7~9품을 받았다. 조선시대 사관은 조정에서 열리는 모든 회의에 참석,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 이렇게 쓰여진 것이 사초(史草)다. 이 사초는 바로 실록청에 제출되지 않았다. 필화사건을 우려, 집에 보관해 뒀다가 왕이 죽은 후 실록청에 제출돼 왕조실록으로 편찬됐다. 조선 초기를 논할 때 항상 논쟁의 중심에 위치하는 인물이 한명회(韓明澮·1415~1487)다. 그는 계유정난 때 궁궐문 뒤에서 살생부를 휘둘렀고, 단종 폐위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시간이 흐르자 사관들은 이런 한명회를 안 좋게 봤다. '사관은 논한다~'로 시작되는 사론(史論)을 통해 한명회를 직공했다. '성격이 번잡한 것을 좋아하고 과대하기를 기뻐하며, 재물(財物)을 탐하고 색(色)을 즐겨서, 전민(田民)과 보화(寶貨) 등의 뇌물이 잇달았고, 집을 널리 점유하고 희첩(姬妾)을 많이 두어, 그 호부(豪富)함이 일시(一時)에 떨쳤다'.- 본문중 전민은 토지와 노비, 희첩은 첩과 같은 말이다. 한명회는 사료상 1남2녀를…
'전왕이 강화에서 독살되어 훙하였다. 일찍이 왕이 왕위를 빼앗기고 강화에 갈 때, 전교령 신덕린(申德隣), 전교승 안길상(安吉祥) 등 4~5명이 시종하였는데 쫓아가 체포하여 순군옥에 가두고 박사신(朴思愼)만이 따라갔다. 공선은 충분하지 못하였고 왕래도 또한 끊기어 근심에 싸여 울부짖을 뿐이었다'.- 본문 중 전왕은 고려 제 30대 임금인 충정왕(재위 1349~1351)을 말한다. 그는 선왕 충목왕(忠穆王)이 후사가 없이 죽자, 서자된 몸으로 1349년 원나라로부터 왕으로 책봉돼 즉위했다. 그러나 이승로(李承老) 등이 나이가 어린 것을 이유로 다시 원나라에 페위를 요청했고, 그 결과 함께 후계자 물망에 올랐던 강릉대군(江陵大君·후에 공민왕)에게 보위가 넘어갔다. 그후 그는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강화도로 추방됐다가 다음해 독살당했다. 내용중 신덕린(?~?)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의협심이 매우 강한 인물로 비춰지고 있다. 그는 고려말 때도 '두문동 72현'(杜門洞 七十二賢)의 한 사람으로 의협심을 발휘했다. '두문동 72현'은 새 왕조 조선을 섬기는데 부끄러움을 느껴 개풍군 광덕산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킨 고려 신하들을 말한다. '두문동'의 '두문(杜門)'은 '
중국 송나라는 文과 武중 문을 더 높이 샀다. 그러다 보니 국방력이 약한 편이었다. 고려도 송나라를 본받아 숭문언무(崇文堰武)의 문치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강참찬은 실은 문관 출신이다. 고려 문신들은 평소에는 붓을 잡고 있다가 유사시가 되면 전장을 지휘했다. 군료들의 반발이 없을리 없었다. 이것이 곪아 터진 것이 무신들의 난이다.이와 달리 조선은 개국한지 얼마 안되 무과를 실시했다. 태조2년(1393)의 일로, 이때 장원 급제를 한 인물이 성달생(成達生·1376∼1444)이다. 무과 장원 1호인 셈이다. 실록이 이 부분의 활약상을 자세하게 기술해 놓고 있다. '임오년에 나라에서 처음으로 무과를 설치하였는데, 달생이 제1등으로 뽑혀 대호군에 임명되고, 나가서 흥덕진병마사가 되었다. 무자년에 왜구들이 갑자기 근경(近境)에 침범하자 달생이 급히 이를 추격하매 왜구가 곧 달아났다. 태종이 어구마(御廐馬)를 하사하고 잔치를 열어서 위로하였다'.- 본문 중에 어구마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임금을 위해 궁궐 안에서 기르던 말을 일컫는다. 그러나 성달생은 이후부터는 굴곡진 삶을 살게 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귀양을 가고 파직도 당하게 된다. 그 첫번째가…
공신녹권은 말 그대로 공이 있는 신하에게 주어진 증서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공신녹권이 총 28차례에 걸쳐 700여명의 신하에게 수여됐다. 그러나 정권을 잃으면 공신 자제가 취소된 사례도 더러 발생했다. 대표적인 사례중의 하나가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연산군이 실각하자 수여사실 자체가 취소됐다. 이를 폐적(廢籍)이라고 했다. 성종이 보위에 오르는 과정은 곡절이 많았다. 선왕 예종이 재위 1년2개월인 열아홉 나이로 급서했다. 이때 차기 국왕을 결정할 열쇠는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가 쥐고 있었다. 법도대로라는 예종의 장자인 제안대군(당시 3살)이나 세조의 장손인 월산군(당시 15살)이 후사가 돼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는 제외되고 자을산군이 지명됐다. 그가 바로 성종이다. 이같은 흐름에는 이른바 신·구공신의 갈등이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월산군의 장인인 박중선은 적개공신 출신으로 신공신에 속했다. 그러나 한명회가 주축이 된 구공신은 신공신 사위를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 뒤에는 한명회가 있었다. 그는 성종비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친정 아버지였다. 성종은 만들어지다시피 보위에 오른 후 공이 있는 신하에게 공신녹권을 내렸다. 이들이 좌리공신(佐理
조선시대에는 크게 양안(量案), 공안(貢案), 횡간(橫看), 향안(鄕案), 입안(立案), 선원록(璿源錄), 청금록(靑衿錄) 등의 명부가 존재했다. 이중 공안과 횡간은 공물, 즉 약재, 과일, 광물, 인삼, 말 등 각 지방의 토산물 수취제도와 관련이 있다. 이와 관련, 조선시대 공물은 먼저 지출 내용을 정한 후 그 목록에 맞게 농민들에게 관련 공물을 징수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공안은 재정세입표, 횡간은 재정세출표를 일컫는다. 바로 전자를 횡간, 후자를 공안이라고 불렀다. 횡간의 사전적인 뜻은 가로로 그은 줄 안에 적은 표(表) 정도를 의미하고 있다. 횡간제도는 조선 개국과 함께 동시에 정착되지는 않았다. 이를 뿌리내리게 한 인물이 이극증(李克增·1431∼1494)이다. 그는 물자 절약을 하고, 또 국가 경비지출을 절감하기 위해 세조때 선보인 횡간제도를 철저히 준수했다. 이런 모습이 몸에 익지 않았는지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나온다. '성종조(成宗朝)에 이극증이 오랫동안 호조의 일을 맡아 보면서 경비를 줄이고 비로소 횡간법(橫看法)을 세우니, 사람들이 많이 원망하였다. 윤사흔(尹士昕)이 말하기를, "나는 극증(克增)이 사람의 눈 하나까지 줄일까 두렵다" 하였다'.-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는 4대(고조)까지만 제사를 지냈다. 더 이상 제사를 지내고자 할 때는 국가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이를 불천지위(不遷之位), 또는 '부조묘'라고 한다. 우리고장 증평군 증평읍 원평리에 '부조묘' 지위를 지닌 사당 1개가 존재하고 있다. 군향토유적 제 4호로 지정된 양무공사(襄武公祠)로, 황희석(黃希碩·?~1394)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황희석은 일반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고려사절요와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료를 보면, 그와 이성계는 단순한 신하와 주군 이상의 관계로 비춰지고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가장 큰 힘이 됐던 집단의 하나가 치안을 담당하던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이다. 순군만호부는 당시 그 밑에 도만호, 상만호, 만호, 부만호 등의 고위 관료를 뒀다. 여말선초의 황희석은 상만호로서 예하 군사들을 이끌고 이성계 요동원정군에 참여했다. 당연히 그도 요동으로 진격하는 대신 말머리를 개성으로 돌려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는데 가담했다. 그 결과, 그는 회군공신 2등에 책록됐다. 그 내용이 실록에 실려 있다. "…배극렴 등이 나를 임금으로 추대할 때 마침 아버지 상사(喪事)를 당하여 비록 모의에 참예하지는…
세종~문종 연간의 인물로 양후(楊厚·?~1451)가 있다. 그는 지금의 건설교통부 차관과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하는 공조참판(종2품)과 한성부윤(정2품)을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졸기는 매우 단촐하다. '동지중추원사 양후가 졸(卒)하니, 혜빈(惠嬪)의 숙부였다.양후에게 관곽(棺槨)과 장사에 쓸 여러 물건을 부의하였다'.- 이는 당시 사관이 어떤 이유로 양후를 탐탁히 여기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 징조는 이미 세종대에 나타났다. 그는 충청도관찰사로서 수령들에 대한 인사 평점을 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 인지 50명 중 40여명에게 상등(上等)을 줬다. 상등은 과거 교육식으로 말하면 '수'에 해당한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잇따라 상소를 올렸다. '사헌부에서 또 아뢰기를, "양후가 출척(黜陟)의 소임을 가지고 있는데 충청도 50여 고을에 수령 40여 인을 상등으로 삼았사오니, 포폄(褒貶)이 이미 적중함을 잃었삽고, (…) 비록 죄는 주지 않을지라도, 그 직책을 파면하시와 징계하시기를 청하옵니다"'- 그러나 세종은 "전에도 또한 이러한 감사가 있었어도 모두 파직시키지 않았으니, 이제 한 사람만을 파직시킬 수 없다"라는 말로, 대간 요구를 거부한다. 본문 중…
고조선을 논할 때 약방의 감초격으로 등장하는 것이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다. 말 그대로 고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땅의 지배자가 됐다는 설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에 이어 기원전 1100년경 기자에 의해 건국됐고, 기원전 195년 위만(衛滿)에게 멸망될 때까지 900여 년 간 존속했던 것으로 일부 이해돼 왔다. 관련 사료를 보면 기자라는 인물은 중국 선진시대(先秦時代·서기전 221년 이전)의 여러 문헌에 보인다. 상서(尙書)는 '주왕에게 간하다가 감옥에 갇힌 기자가 무왕에 의해 풀려났고, 이후 무왕은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차지한 뒤 기자를 찾아가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인 홍범(洪範)을 배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기자의 존재가 확인되나 한반도로 이동했는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복생(伏生)이라는 인물이 지은 '상서대전(尙書大典·기원전 2세기경)부터 기자의 한반도 동래설이 등장한다. 이에 의하면 기자는 무왕에 의해 감옥에서 석방되었지만, 고국인 은나라가 망했으므로 그곳에 있을 수 없어 조선으로 망명했다. 기자를 모신 사당이 시간과 장소를 훌쩍 뛰어넘어 우리고장 증평군 도안면에 존재하고 있다. '증평
[충북일보] 주말 동안 충북지역에 많은 비가 내리면서 도내 하상도로가 통제되고 나무가 쓰러지는 등 각종 피해가 속출했다. 청주기상지청은 지난 6일부터 7일까지 시간당 20~30㎜의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했다. 시간당 30㎜의 비부터는 보통 '폭우'라고 부르는 수준으로 밭이나 하수구가 넘치기 시작하고, 홍수나 침수 같은 비 피해 위험이 매우 높아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단계다. 충북도 등에 따르면 7일 오후 2시 30분 기준 도내에는 평균 62.1㎜의 비가 쏟아졌다. 지역별로는 △증평 121.5㎜ △괴산 116.5㎜ △청주 87㎜ △진천 52㎜ △단양 49㎜ △보은 45.3㎜ △충주 45㎜ △제천 41.7㎜ △영동 7㎜ △음성 4㎜다. 폭우로 인해 도내 하상도로와 둔치주차장은 일부 통제된 상태다. 현재 도는 청주시 무심천 하상도로, 미암교 하상도로, 충주시 달천 하상도로를 통제 중이다. 하상도로에 설치된 둔치주차장은 전체 27곳 중 15곳이 통제된 상황이다. 폭우 여파로 도내 각종 사건·사고도 잇따랐다. 이날 도에 접수된 풍수해 신고 건수는 총 20건이다. 피해 유형은 △수목전도 12건 △배수불량 4건 △낙석 1건 △기타 3건으로 집계됐다.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도가 친환경 에너지로 각광받고 있는 수소산업 육성을 위해 특화단지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수소특화단지 지정을 통해 산·학·연·관 생태계를 공고히 구축하고, 기업 지원과 기술 개발로 이 분야를 선도한다는 구상이다. 7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가 내년 상반기 공모를 통해 지정할 예정인 수소특화단지를 충주시에 유치할 계획이다. 도는 일찌감치 충주를 신청지로 낙점했다. 이 지역의 수소 인프라를 고려할 때 수소특화단지를 유치하면 관련 산업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충주는 수소 분야 기업 26곳이 둥지를 트고 있다. 국내 유일의 차량용 연료전지 생산 거점인 현대모비스를 비롯한 주요 부품업체들이 협력체계를 갖추고 있다. 청정수소 생산과 저장, 유통, 충전, 활용 등 전주기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는데다 그린수소산업 규제자유특구로 지정 받았다. 바이오가스에 기반한 그린수소는 전국에서 가장 저렴하게 공급하고 있다. 오는 2027년까지 하루 2.5t의 청정수소를 생산할 계획이다. 도와 충주시는 유치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다. 현재 수소특화단지 계획 수립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다. 결과는 올해 말 나올 예정이며 용역 과정에서 도출된 경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