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옹서(翁壻), 즉 장인과 사위가 시차를 두고 정승이 된 인물로 권람과 신수근, 이산해와 이덕형, 한백륜과 이준(구성군), 이경억과 최석정 등이 있다고 '임하필기'기(林下筆記)가 밝히고 있다. 임하필기는 문신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지은 조선후기 문집으로, 각종 뒷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다. 이 문집은 남행(南行)으로 정승이 된 인물도 적어 놓았다. 이때의 남행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선대 공덕으로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말하는 음서(음관)제도이다. 고려시대에는 정5품부터 적용됐으나 조선시대는 '정2품 이상자의 자식'으로 그 요건이 보다 강화됐다. 임하필기는 이에 해당하는 인물로 배극렴, 김사형, 이거이, 이무, 조영무, 한확, 한명회, 한백륜, 한치형, 신구근, 김자점, 이시백, 원두표 등 총 20여명을 적고 있다.언급한 두 가지 내용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한백륜(韓伯倫·1427~1474)이다. 조선시대 8대 임금인 예종(재위 1468∼1469)은 두 명의 왕비를 뒀다. 첫번째 왕비는 상당부원군 한명회 딸인 장순왕후다. 그녀는 당대 문벌의 가문에서 태어난데다 용모와 심성이 아름답고 정숙하여 시아버지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한명회(韓明澮·1415~1487)가 죽자 그의 장지가 관향(貫鄕) 청주목(지금의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로 결정됐다. 한양~청주목은 운구 기간이 족히 사나흘은 걸리는 거리다. 거리가 너무 멀자 운구를 맡기로 했던 군인 중 일부가 줄행랑을 쳤던 모양이다. '좌승지 한언(韓偃)이 아뢰기를, "신의 숙부 한명회를 오늘 발인하는데, 영번군(迎番軍)은 성문을 나서자마자 모두 도망하였고, 양주(楊州)의 군인은 겨우 15명이어서 떠날 수가 없어 성문 밖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니…'.- 본문에 한언(1448~1492)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한명회와 삼촌-조카 사이다. 그러나 실록에는 둘 사이(한명회가 큰 아버지뻘)가 그 이상으로 가까웠음을 의미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그 때는 한명회의 세력이 불길 같은 때였는데 봉례(奉禮) 박인경(朴仁敬)은 노비가 많았으며 단지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에 종친과 더불어 혼담이 있다가 끝내는 사인(士人) 손윤복(孫胤僕)을 사위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나자 한명회가 종친을 사주하여 소장을 내서 이혼하게 하고 한언으로 하여금 취처(娶妻)하게 하였다'.- 실록의 기록대로라면 삼촌이 조카 장가드는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줬고,
당나라 3대 서예가의 한 명으로 우세남(虞世南·558~638)이라는 인물이 있다. 특히 그는 해서체를 잘 썼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격과 박식함을 겸비했다. 따라서 당시 당태종은 우세남에 대해 덕행, 충직, 박학, 문사(文詞), 서한 등 5절(五絶)을 갖췄다는 인물평을 했다. 조선시대에도 당태종의 비서 우세남을 닮았다고 해서 '세남비서'(世南秘書)라고 불려진 인물이 있다. 한계희(韓繼禧·1423~1482)다. 이때의 비서는 상사를 모시는 직이 아닌, 국가에서 가장 아끼는 책 정도의 뜻을 지니고 있다. 한계희가 당시 사류(士類) 사이에서 얼마나 박식하게 비춰졌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계희가 졸하자 당시 사관이 이례적으로 장문의 호평을 하고 있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한계희는 천품이 검소하고 간결하며, 분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온 집안이 초라했으며, 좌우에는 도서뿐이었다. 소시(少時)에 집현전에 뽑혀 들어갔을 적에도 동료들이 매우 경외하여, 온 좌중이 웃으며 농지거리를 한창 하다가도 공(公)이 밖에서 들어오는 것을 보면, 곧 조용히 하고 아무 소리도 없었다"'.- 본문 중에 '온 집안이 초라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조선시대는 관직수행 능력, 청렴, 근검, 효, 인의 등의 덕목을 갖춘 선비를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봤다. 이른바 '淸白吏'(청백리)다. 정부가 지난 1981년부터 운용하고 있는 청백리상 제도도 이를 본뜬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청백리가 맹사성, 황희, 이황, 이항복, 남구만 등 총 217명이 선발된 것으로 사료는 쓰고 있다. 모두 눈에 익은 이름으로 이중에는 맹사성(孟思誠·1360~1438)이라는 인물도 보인다. 맹사성하면 트레이드 마크처럼 떠오르는 것이 소등에 앉아 피리를 부는 모습이다. 조선시대 고위 관료들은 대개 말(馬)을 교통수단으로 삼았다. 맹사성은 이를 사치라고 생각, 말보다는 소를 더 많이 이용했다. '공은 온양에 근친(覲親)하러 오갈 때에 각 고을의 관가에 들리지 않고 늘 간소하게 행차를 차렸으며, 더러는 소를 타기도 하였다.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고을 원이 그가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장호원(長好院)에서 기다렸는데, 수령들이 있는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므로 하인으로 하여금 불러 꾸짖게 하니,공이 하인더러 이르기를 "너는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 하였다'.- 맹고불은 그의 인품이 넉넉한데서 붙여진…
검은 기장으로 기준음을 찾다, 영동 박연 교박충-110 전통음악 전문가들은 우리고장 영동출신 박연(朴堧·1378~1458)을 가리켜 시운(時運)을 잘 타고난 사람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고 있다. 세종이라는 든든한 지원자를 만난 것이 그 첫째가 된다. 전회에 밝힌 경석(옥설)의 발견이 그 두번째가 된다. 세번째는 오늘 다루는 거서(거黍, 거는 禾+巨), 즉 검인 기장과의 만남이다. 조선시대 때 소리의 기준을 정하기 위해 만든 원통형 대나무를 '율관'(律管)이라고 불렀다. 이 경우 율관을 기준음을 정하는 악기로 계속 사용하려면 그 율관의 전체 용적을 알아야 한다. 이때 사용된 것이 바로 검은 기장이다. 이는 검은 기장의 낟알이 매우 균질하고, 또 대나무관에 잘 들어갈 정도로 크기도 알맞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연은 검은 기장을 가지고 1알은 1푼, 10알은 1촌, 100알은 1척 등의 방식으로 도량형을 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황종, 대려, 태주, 협종, 고선, 중려, 유빈, 임종, 이칙, 남려, 무역, 응종 등 12개의 기준음을 얻었다. 이해가 잘 안되면 크기가 다른 12개 퉁소를 제작, 단계별 기준음으로 삼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중 황종은 12개 기준음의 첫 시
조선시대 타악기인 편경은 ㄱ자 모양의 돌 여러개를 매달아 놓은 모습으로, 보기에 따라서는 우스꽝스럽게 생겼다. 전체 16개의 경돌로 구성된 이 편경은 음높이의 순서대로 위·아래 두 단에 8개씩을 매어단다. 이때 ㄱ자 모양으로 긴 쪽을 고(鼓)라 하고, 짧은 쪽을 고(股)라 한다. 음높이는 경의 두께에 따라 결정된다. 두꺼우면 소리가 높고, 얇으면 그 소리가 낮다. 사료를 보면 우리고장 영동 출신 박연(朴堧·1378~1458)은 국산 편경 제작에 매우 집착을 한다. 편경은 본래 중국 타악기로, 고려 때 왕자지라는 사람이 송나라에서 처음으로 가져왔다. 이후 조선 초기에도 명나라로부터 편경을 받으나 당시 조정은 만족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에 이르러 태조 고황제와 태종 문황제가 종과 경을 주었으나 제조가 매우 거칠고 소리도 아름답지 못하여, 귀히 여길 만한 것은 오직 송조(宋朝)에서 내려 준 악기뿐이었다. (…) 매양 제사 때를 당하면 경(磬)은 와경을 쓰고, 종도 어지러이 매어달아 그 수효를 갖추지 못하여, 외설하고 망령되게 만들었으나 습관이 되어 예사로 여겼다'.- 음악에 전문가 수준의 조예가 있었던 세종도 이 부분을 크게 격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악
우리고장 영동 출신인 박연(朴堧·1378~1458)은 진사에 합격한 후 정통 문신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세종이 즉위한 뒤 악학별좌(樂學別坐)라는 자리에 임명되면서 음악 업무를 전담한다. 그가 우연찮게 악학별좌라는 자리로 전보된 것인지, 아니면 세종이 그의 음악적인 재능을 사전에 알고 그 자리로 배치한 것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세종이 그의 출중한 음악 재능을 사전에 인지, 악학별좌에 임명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전회도 밝혔지만 박연의 음악적인 재능은 어릴 때부터 소문나 있었다. '공은 영동(永同)의 유생(儒生)으로 젊었을 때 우연히 피리를 익혔는데, 온 고을 사람들이 그를 선수(善手)라 일컬었다'.- 이 부분에는 또 하나의 궁금증이 자리잡고 있다. 왜 세종은 음악을 그토록 중시했나 하는 점이다. 공자는 이른바 '익자삼락'(益者三樂)을 얘기했다. "유익한 즐거움이 세 종류 있다. 예악(禮)으로 자기를 조절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다른 사람의 좋은 점(善)을 말하기를 즐거워하고, 현명한 벗(賢友)이 많은 것을 즐거워하면 유익하다".(孔子曰: "益者三樂. 樂節禮樂. 樂道人之善. 樂多賢友. 益矣")- 세종과 박연은 그런 점에서 예악의 중요성을 공
박연(朴堧·1378~1458)은 문과에 급제한 히후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돼 악기 발명·개선, 악보편찬·수정 등 음악과 관련된 일을 전담적으로 처리했다. 이 때문에 그는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한국의 3대 악성으로 추앙되고 있다. 박연은 음악에 관한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릴 때부터 피리를 잘 불어 '선수' 소리를 들었다. 성현(成俔·1439~1504)이 지은 용재총화에 '공은 영동(永同)의 유생(儒生)으로 젊었을 때 우연히 피리를 익혔는데, 온 고을 사람들이 그를 선수(善手)라 일컬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박연은 음악적 성취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도 치열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뒤 서울에 왔을 때 어떤 광대가 보고서 웃기를, "음절이 야비하여 가락에 맞지 않는데, 이미 습관이 되어 고치기도 어렵겠다" 하니, 공이 굳이 배우기를 청하였다. 며칠만에 광대가 말하기를, "선배님은 가르칠 만합니다" 하였다.또 며칠 지나서 말하기를, "규범(規範)이 이미 이룩되었습니다" 하고, 또 며칠 지나자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면서, "나로서는 미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 다음 급제한 뒤에 또 거문고와 비파 등 모든…
"내가 나이 어린 몸으로서 큰 기업을 이어받으니, 몸둘 바를 알지 못하겠다. 다만 끝까지 잘 다스리기에 힘써야 하지만 처음 정치를 바르게 하여야 하는데, 거의 조종의 훈계를 삼가 따르고 백성들과 더불어 휴식하여 융평한 시대에 이르기를 기약하노라".- 단종이 모화관이라는 곳에서 무과시험을 치룬 후 합격자 40명을 상대로 이른바 '일장 연설'을 하는 모습이다. 이때 40명 중 1등을 한 인물이 권언(언자는 堰의 土대신 身·?~1467)이다. 그는 그러나 자신을 뽑아 준 단종 대신 수양대군의 사람이 된다. 수양대군이 뜻을 품고 은밀히 무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김종서 일파를 제거하기 위한 계유정난 계획이 착착 실천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권언은 정난이 일어나는 날 매복조로 활동한다. '세조가 떠나기 전에 권람과 한명회가 의논하기를, "지금 대군이 몸을 일으켜 홀로 가니 후원(後援)이 없을 수 없다" 하고 권언·권경·한서구·한명진 등으로 하여금 돈의문(敦義門) 안 내성(內城) 위에 잠복하게 하고, 또 양정·홍순손·유서에게 경계하여 미복(微服) 차림으로 따라가게 하였다'.- 문종은 자신이 단명할 것을 알고 황보인, 김종서, 남지 등에게 어린 아들 단종을 잘 보
태종이 상왕이 된 후 임금인 세종, 양녕대군, 그밖의 대신들을 불러 앉혔다. 그리고 양녕대군 폐위에 따른 그 간의 속앓이를 격정적으로 토로한다. 부정(父情)을 거론하는 중에 단호함이 배여 있다. '나는 대비와 더불어 서로 양녕을 안아 주고 업어 주고 하여, 일찍이 무릎 위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이로 말마암아 자애하는 마음이 가장 두터워 다른 자식과 달랐다. (…) 양녕을 의정부에 회부하건 육조에 회부하건 나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 그때 가서 나더러 잔인하다는 말은 말 것이며…',- 전회에 밝힌 기첩 어리(於里)사건 이후 상소와 탄핵주장이 빗발쳤다.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양녕을 왜 국법대로 처리하지 않고 계속 감싸느냐"는 투였다. '"양녕 대군 이제는 군부(君父)께 죄를 얻었으니 전하께서 사사로이 할 바가 아니온데, 전하께서 특별히 우애의 정으로 불러서 접견하시고 인하여 수일씩 머무르게 하시와 태종의 유교(遺敎)를 어기시니, 온 나라 신민이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조선은 왕권과 신권을 조화시키는 권력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의 기구는 왕권 견제용으로 볼 수 있다. 세종이 대소 신료의 상소와 탄핵 주문을 견디지…
태종 이방원(1367~1422)은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1365~1420)와 사이에서 양녕, 효녕, 충녕 등을 포함해 4남 4녀를 얻었다. 이중 장남 양녕을 1404년 왕세자로 책봉했다. 양녕의 나이 10살 때였다. 그러나 그는 궁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핑계로 왕세자 교육을 받지 않았고 궁궐이 금지한 매사냥도 곧잘 나갔다. 태종의 속을 가장 썩인 것은 여자문제였다. 그는 17살부터 기방을 들락거렸다. 그것도 난봉꾼으로 출입했다. 그는 정종의 애첩인 초궁장과 사통하고, 매형의 첩이었던 칠점생이라는 기생과도 상간했다. 양녕에게 있어 정종은 큰 아버지가 되고, 이때의 매형은 진천인물 이거이 아들인 백강이다. 난봉질 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당시 지중추부사 곽선의 첩인 어리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아버지 태종이 어리를 만나지 못하게 하자, 그녀를 장인(김한로) 어머니의 시종으로 변장시켜 궁궐로 데려와 아이를 갖게 했다. 이 사건으로 태종은 양녕을 폐위키로 결심한다. 그리고 왕세자를 잘 교육시키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목메어 울었다. '"경이 가서 나의 말을 세자에게 이야기하라" 하고, 인하여 통곡(痛哭)하면서 목이 메었었다. 이어서 하교하였었다. "너는
회안군 이방간(?~1421)은 야욕을 숨기고 있었다. 이 야욕을 충동질한 인물이 박포(朴苞·?~1400)다. 그는 제 1차 왕자의 난 논공행상에서 자신이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박포가 방간의 집을 찾아갔다. '박포가 말하기를, '정안공(靖安公)이 공을 보는 눈초리가 이상하니, 반드시 장차 변이 날 것이다. 공은 마땅히 선수를 써야 할 것이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공연히 타인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하여, 이에 먼저 군사를 발한 것이다"하였다'.- 본문 중 '정안공'은 태종 이방원, '공'은 회안군 자신을 일컫는다. 이 대화는 제 2차 왕자의 난이 실패한 후, 체포된 방간이 이방원 진영의 이숙번(1373~1440)에게 털어놓는 말들이다. 정안군 이방원이 곡절을 겪은 끝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자의 난 등 자신이 세제(世弟)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을 공신으로 책록했다. 이른바 좌명공신(佐命功臣)이다. 이중에는 연사종(延嗣宗·1360∼1434)이라는 인물도 포함돼 있다. 태종 이방원은 왕위를 넘겨받은 것이 아니라 사실상 쟁취했다. 이는 그 만큼 적이 많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사병도 건재할 시기였다. 신변에…
수양대군 세조가 김종서 등을 살해하기로 최종 결심을 하고 거사일에 맞춰 뜻을 같이 하는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계유정란이 시작됐다. 막상 생사 갈림의 거사가 겁이 났는지 일부는 주춤거렸고, 또 다른 일부는 뒷문을 통해 도망치기도 했다. 이때 수양대군에게 처음의 결심처럼 빨리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 인물이 두 명있었다. 한명회와 홍윤성이다. '의논이 분분하자, 더러는 북문으로 빠져나가므로 한명회가 말하기를, "길 옆에서 집을 지으면 삼 년이 되어도 집을 못 짓는 법이니, 대군은 스스로 결단을 내리시오"라 하고, 홍윤성은 말하기를, "용병(用兵)하는 데는 주저하는 것을 가장 꺼립니다" 하였다'.- 홍윤성(洪允成·1425~1475)은 얼마 안 있어 진행된 궁궐안의 대규모 살육 때 또 한번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쇠몽둥이를 휘두른 사람 중의 한 명이 홍윤성이었다. '군사를 세 겹으로 짜 세워서 세 겹 문을 만들고 한명회는 생살부를 가지고 문의 안쪽에 앉았다. 여러 재신이 부름을 받아 들어오는데 첫째 문에 들어오면 따르는 하인들을 떼고,둘째 문에 들어오면 그 이름이 생살부에 실렸으면 홍윤성·유수·구치관 등이 쇠몽둥이를 들고 때려
우리나라의 3대 악성으로는 고구려 왕산악, 신라 우륵, 조선시대 박연 등이 꼽힌다. 이중 박연(朴堧·1378~1458)은 영동에서 생과 몰을 함께 했다. 세종대에 활약한 박연은 악보 편찬, 악기 제작 등 한국 음악사에서 다방면의 공헌을 남겼다. 그는 대금을 잘 부는 등 그 스스로 빼어난 연주가이기도 했다. 박연은 3남 4녀를 뒀다. 이중 맏아들 맹우(孟愚)는 현령, 둘째아들 중우(仲愚)는 군수를 지냈다. 3남인 계우(季愚)는 문과에 합격하여 한림학사에 역임되는 등 장래가 가장 촉망됐다. 조선시대 과거제도로는 소과와 대과(문과)가 존재했다. 생원과 진사를 뽑는 것이 소과이고, 여기서 합격한 사람에게는만 대과에 응시할 기회가 주어졌다. 박계우는 수양대군 세조가 왕권 찬탈을 도모하는 시기에 순절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종사(宗社)의 대계를 위하여 사(私)를 버리고 마지못해 대신과 대간의 청을 따르니, 부처(付處)한 이용의 아들 이우직과 황보석의 아들 황보가마·황보경근, 김종서의 아들 김목대, 이징옥의 아들 이성동, (...) 그리고 정분·이석정·조완규·조순생·정효강·박계우(朴季愚) 등을 법에 의하여 처치하라. 이제부터 간당의 근본
세종의 장남인 문종은 병약했기 때문에 자녀를 많이 얻지 못했다. 3명의 후궁을 둬 정비인 현덕왕후 권씨와 사이에 단종과 경혜공주를 얻었다. 현덕왕후는 경혜공주를 낳다가 난산 끝에 이틀만에 죽고 문종 또한 재위 2년여만에 병사했다. 따라서 단종과 경혜공주는 할아버지(세종대왕) 후궁인 청주 본관의 혜빈양씨에 의해 길러진다고 전회 밝힌 바 있다. 삼촌인 수양대군 세조는 금성대군,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연거푸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나자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킨 끝에 자진케 했다. 실록은 '영월 청령포에 유배된 세종이 스스로 목을 메었다'고 적고 있으나 이를 믿는 전문가나 국민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다른 기록에는 다른 내용이 등장한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이 시각이 늦어지다고 발을 굴렀다. (…)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 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단종의 유일한 혈육인 경혜공주는 천민으로 강등돼 남도천리 순천도호부 관비로 유배됐다. 그의 남편, 즉 문종의
세종대왕은 정비 소헌왕우 심씨 외에 9명의 후궁을 더 뒀다. 이들에게서 19남 4녀를 얻었다. 후궁 중에는 혜빈양씨라는 인물이 있다. 내명부 궁녀 출신인 그녀는 병약한 문종을 보살펴주던 중 세종의 눈에 들어 네번째 후궁이 됐다. 그녀는 세종과 사이에 한남군(漢南君·본명 이어), 수춘군(壽春君·〃이현), 영풍군(永豊君·〃이전) 등을 얻었다.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이 재위 2년여만에 병사했다. 게다가 아내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도 난산끝에 이틀만에 죽게 된다. 세종은 졸지에 고아가 된 친손자 단종과 그의 누이인 경혜공주를 혜빈양씨에게 부탁했다. 청주가 본관인 그녀는 세 아들의 어머니이면서 단종의 유모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때문에 단종은 8살 때 왕위에 오르고서도 혜빈양씨 품에서 잠들기를 원했던 것으로 일부 야사는 쓰고 있다. 여기서 비극이 잉태되기 시작했다. 수양대군 세조가 압박을 가한 끝에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성삼문과 더불어 옥새를 지키려한 인물이 혜빈양씨다. 그녀는 우리고장 청풍으로 유배된 끝에 1455년 교수형을 당했다.영풍군은 어머니보다는 2년 늦게 살해된다. 영풍군은 수양대군의 야심을 알고 그 반대편에 섰다. 그는 사육신의…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갈 때 수행한 여러 명의 인물 중에 민발(閔發·1419~1482)이 있었다. 사은사는 명나라 은혜에 답례한다는 명목하에 부정기적으로 보내던 사신을 말한다. 민발은 이런 인연으로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을 죽이는 계유정난에 참여한다. 이때 수양대군의 옷깃을 잡고 간언한 인물이 민발이다. '세조가 정난(靖難)하던 날, 옷을 붙잡고 굳이 간(諫)하기를, "원컨대 계청(啓請)한 뒤에 행하소서" 하였으므로, 세조가 의롭게 여기었다'.- 본문 중 '계청'은 기분나는대로 행동하지 말고 계책을 먼저 세운 후 움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민발은 세조의 총애를 등에 업고 용양위 상호군(정3품직)에 임명되는 등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민발은 이때부터 우쭐대기 시작했다. 요즘 표현으로 '오버'를 하기 시작한다. ' 민발이 임영대군의 말을 막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 임금이 민발을 불러 제지하였으나 민발이 듣지 않았다. 임금이 굳이 명하여 제지한 뒤에야 곧 그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바야흐로 명을 굳게 거역하였으니 너의 죄가 크다" 하니, 민발이 자기가 옳다고 굳이 고집하며 언사에 불손함이 많았다'.- 세조는 이때 민발
권력 앞에는 부모형제도 없었다. 1,2차 왕자의 난을 겪은 태조 이성계는 심신이 극도로 피곤해졌다. 따라서 그는 고여(高呂·?~1402) 등 최측근 심복만을 대동한 채 함경도 동북면으로 낙향한다. 이른바 이성계의 북순(北巡)으로, 함흥차사라는 표현은 여기서 연유한다. 그러나 실록 속의 이성계는 이미 그 이전에 심신이 피곤해 있었다. 정사(政事)를 돌보는 것도 자주 힘겨워 한다. '도승지 한상경에게 분부하여 도평의사사에 전교하였다. "내가 늙고 병들어서 정무를 게을리 하고 단지 경 등만 믿으나, 다스려 보려는 마음을 어찌 잠시인들 잊겠는가? 경 등은 모두 마음을 다해서 나의 부족을 도우라. 관찰사는 반드시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 이에 시중 조준(趙浚)과 김사형(金士衡) 등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였다. "신 등이 모두 어리석고 못난 자들로서 성상(聖上)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심력을 다해서 만분의 일이라도 돕지 않겠습니까? 관찰사를 골라서 보내는 것은 실로 분부하신 바와 같으니,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소서"'.- 본문 내용 중에 김사형(1341∼1407)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그는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이성계와 정몽주가 대결을 할…
집현전(集賢殿)은 세종대왕이 직접 만들지는 않았다. 고려시대에도 존재했다. 고려 인종은 연영전(延英殿)이라는 기구를 집현전이라 개칭, 운용했다. 그러나 집현전은 고려 때와 조선의 건국 초기까지에도 별다른 활동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집현전을 확대·개편, 본격적인 학문연구기관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세종이다. 그는 집현전 학자들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한다. 그중 하나가 집현전 휴가제다. '집현전 부교리 권채(權綵)와 저작랑 신석견(辛石堅)·정자 남수문(南秀文) 등을 불러 명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집현관을 제수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글을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각각 직무로 인하여 아침 저녁으로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본전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고, 글 읽는 규범에 대해서는 변계량(卞季良)의 지도를 받도록 하라" 하였다'.- 이처럼 휴가를 줘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사가독서(賜暇讀書)라고 불렀다. 본문 중에 남수문(1408~1443)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일반에게 다소 생경하지만 남수문은 당대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조선초기 남지(南智·?~1453)라는 인물이 명나라로부터 '음주자치통감'(音註資治通)이라는 역사책을 갖고 왔다. 이 책은 글자 그대로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을 주석(註釋), 즉 낱말이나 문장을 쉽게 풀어 쓴 것을 말한다. 4군6진을 개척할 정도로 역사의식이 남달랐던 세종은 이 책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역사책 한권을 얻고서 사신을 보내어 중국에게 큰 사례를 한다. '중추원 부사 남궁계(南宮啓)를 보내어 호삼성(胡三省)의 음주자치통감을 내려 준 것을 사례하게 하고,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표문(表文)에 배례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그리고 이때 각종 옷감과 인삼 그리고 오미자 등을 준 것으로 실록은 쓰고 있다. 병약한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한다. 이때 당부받은 인물을 이른바 고명대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남지는 병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한다. 따라서 그의 후임인 정분(?~1454)이 고명대신에 대신 들어간다. 남지의 행동은 칭병이 아닌, 진심이었다. 그는 풍질(風疾)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좌의정 남지가
한명회의 할아버지 상질에게는 두 명의 형제가 있었다. 상경이 형이 되고, 상덕이 동생이 된다. 한명회의 부모는 물론 할아버지 상질도 일찍 돌아갔다. 따라서 한명회는 작은할아버지 상덕에 의해 길러졌다. 한상덕은 태종이 눈치를 볼 만큼 매우 깐깐한 관료였다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한명회의 큰할아버지인 상경은 일반에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청주한씨 문중으로부터는 한명회 이상의 추앙을 받고 있다. 명나라로부터 국호 '조선'을 갖고 돌아온 인물은 한상질이다. 그의 친형인 상경도 여말선초에 큰 몫을 했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으로부터 옥새를 넘겨받아 이를 태조 이성계에게 바친 인물이 바로 한상경(韓尙敬·1360~1423)이다. 한상경은 실물경제에도 밝은 면이 있었다. 저화(楮貨)의 지질을 통일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저화는조선초 지폐로, 태종이 즉위한 1401년 사섬서(司贍署)라는 관청에서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역별로 지질이 달라 문제가 됐다. '호조판서 한상경이 저화를 만드는 법을 아뢰었다. 계문(啓文)은 이러하였다. "저화의 종이가 각도에서 오므로 두텁고 얇고 정하고 추한 것이 같지 않은데 시정(市井) 사람들이 다만 두터운 종이를 쓰는 것을 좋
한명회(韓明澮·1415~1487)는 칠삭동이로 태어났고 어려서 부모와 조부(한상질)를 차례로 잃었다. '한기(韓起)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임신한 지 일곱 달 만에 한명회를 낳았는데, 배위(腹上)에 검은 점이 있어, 그 모양이 태성(台星)과 두성(斗星) 같았다.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가난하여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과거에도 여러 번 낙방, 37살이 되서야 음보(蔭補)로 경덕궁직(敬德宮直)에 나갈 수 있었다. 음보는 시쳇말로 뒷구멍으로 벼슬아치가 되는 것을, 경덕궁직은 궁지기의 일종을 말한다. 따라서 당시 한명회 가문이 한미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는 않다. 부모와 할아버지를 차례로 잃은 한명회는 작은 할아버지 한상덕(韓尙德·?~?)에 의해 길러진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는 주로 태종대에 활동했으나 크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실록 행간을 보면 그가 매우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완력으로 권력을 잡은 태종도 그 앞에서 만큼은 여러번 쩔쩔맨다. '한상덕이, "사방에 눈을 밝히고 사방에 귀를 밝히시어,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이를 물리치소서. 평안할 때에 위태로운 것을 잊지 마시고, 다스려질 때
엽전은 나뭇잎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낙엽 葉' 자를 쓴 엽전이라고 불렀다. 이는 엽전을 만드는 주형틀이 나뭇가지처럼 생긴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엽전을 줄로 꿰어가지고 다녔다. 엽전 가운데 사각형 구멍이 나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본관할 때의 '꿸貫' 자도 뿌리 즉 같은 핏줄을 줄로 꿰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본관은 성씨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姓 氏가 같은 뜻의 중복인가, 아닌가는 궁금한 대목이다. 성씨에는 역사의 지문이 새겨져 있다. 역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동북아 가족제도는 난혼(집단혼), 모계, 부계사회 순으로 발달했다. 난혼일 때는 혈육 개념이 성립되지 않았다.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모계사회로 전환되면서 어머니 기준으로 성을 따르는 관습이 생겨났다. 姓자는 '계집女'와 ·날 生'의 결합으로 이뤄져 있다. 의역하면 '어머니가 낳았다' 정도가 된다. 때문에 중국의 초기 성에는 '계집女' 변이 많이 들어가 있다. 부계사회로 전환되면서 아버지 성을 따르는 관습이 생겨났다. 이때부터 여성에게 정절이 강요됐고 성의 불평등이 생겨났다. 갑골문 전문가들에 따르면 성씨 할 때의 '氏자'는 남성의 성기를 상형한다.…
여말선초를 풍운아처럼 산 인물 중에 조박(趙璞·1356~1408)이 있다. 그는 이방원(후에 태종)의 손윗동서였다. 이는 그가 '이성계의 사람'임을 의미한다. 하루는 이성계가 사냥 중에 말이 진창에 넘어지면서 몸을 크게 다쳤다. 정몽주가 이 기회를 노려 이성계 사람을 축출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조박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정몽주는 생각보다 큰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황상 조박을 아예 살해하려 했다. '주상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조박이 동서(同壻)간이므로 가장 친하고 오랜 사이었다. 그러므로 이 때문에 태조에게 따르고 복종하였다. 정몽주가 조박을 청주목사(淸州牧使)로 내보냈다가 조금 뒤에 수원부(水原府)로 잡아 올려 장차 죽이려고 하였는데, 조박이 망명하여 면하였다'.- 잠저는 임금이 되기 전에 머물던 민가를 말한다. 조박은 청주로 유배됐고, 정황상 1년 남짓 유배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됐다. 조박은 이성계 사람의 일원으로서 개국공신 1등이 돼 전 170결과 노비 20구를 받았다. 1차 왕자의 난 때는 이방원을 도와 정사공신 1등에 봉해지기도 했다. 조박은 여기까지만 호가호위했다. 이후부터는 질곡의 삶을 살게 된다
고려후기 문신으로 이정(李挺·1297∼1361)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특히 공민왕의 각별한 총애를 입어 내불당 짓는 일을 감독했고, 친제어필 '탄상하교문(嘆賞下敎文)'을 하사받기도 했다. 공민왕은 송설체(일명 조맹부체)를 잘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네명의 아들을 두었다. 1남은 유신(由信), 2남은 거인(居仁·?~1402), 3남은 거의(居義), 4남은 거이(居易·1348~1412)다. 이들 4명의 형제는 여말선초라는 격변기 만큼이나 각기 다른 인생항로를 걷는다. 1남 유신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갔고, 임종을 앞두고 두 아들 덕윤, 부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으로 문중야사는 쓰고 있다. "나라는 망친 것은 그 책임이 누대에 벼슬한 집에 있다. 내가 충성심이 부족하여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 죄를 면할 길이 없다". 2남 거인은 공양왕 때 김저 옥사사건에 연루돼 유배된다. 이 사건은 전회에 소개한 바와 같이 최영의 생질인 김저(金佇·?~1389)가 이성계를 제거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돼 옥사한 사건을 말한다. 거인은 처음에는 지조를 지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배에서 풀려난 뒤로는 이성계에게 적극 협조한다. 3남 거의는 알려진 것이 많지
[충북일보] 주말 동안 충북지역에 많은 비가 내리면서 도내 하상도로가 통제되고 나무가 쓰러지는 등 각종 피해가 속출했다. 청주기상지청은 지난 6일부터 7일까지 시간당 20~30㎜의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했다. 시간당 30㎜의 비부터는 보통 '폭우'라고 부르는 수준으로 밭이나 하수구가 넘치기 시작하고, 홍수나 침수 같은 비 피해 위험이 매우 높아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단계다. 충북도 등에 따르면 7일 오후 2시 30분 기준 도내에는 평균 62.1㎜의 비가 쏟아졌다. 지역별로는 △증평 121.5㎜ △괴산 116.5㎜ △청주 87㎜ △진천 52㎜ △단양 49㎜ △보은 45.3㎜ △충주 45㎜ △제천 41.7㎜ △영동 7㎜ △음성 4㎜다. 폭우로 인해 도내 하상도로와 둔치주차장은 일부 통제된 상태다. 현재 도는 청주시 무심천 하상도로, 미암교 하상도로, 충주시 달천 하상도로를 통제 중이다. 하상도로에 설치된 둔치주차장은 전체 27곳 중 15곳이 통제된 상황이다. 폭우 여파로 도내 각종 사건·사고도 잇따랐다. 이날 도에 접수된 풍수해 신고 건수는 총 20건이다. 피해 유형은 △수목전도 12건 △배수불량 4건 △낙석 1건 △기타 3건으로 집계됐다.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도가 친환경 에너지로 각광받고 있는 수소산업 육성을 위해 특화단지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수소특화단지 지정을 통해 산·학·연·관 생태계를 공고히 구축하고, 기업 지원과 기술 개발로 이 분야를 선도한다는 구상이다. 7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가 내년 상반기 공모를 통해 지정할 예정인 수소특화단지를 충주시에 유치할 계획이다. 도는 일찌감치 충주를 신청지로 낙점했다. 이 지역의 수소 인프라를 고려할 때 수소특화단지를 유치하면 관련 산업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충주는 수소 분야 기업 26곳이 둥지를 트고 있다. 국내 유일의 차량용 연료전지 생산 거점인 현대모비스를 비롯한 주요 부품업체들이 협력체계를 갖추고 있다. 청정수소 생산과 저장, 유통, 충전, 활용 등 전주기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는데다 그린수소산업 규제자유특구로 지정 받았다. 바이오가스에 기반한 그린수소는 전국에서 가장 저렴하게 공급하고 있다. 오는 2027년까지 하루 2.5t의 청정수소를 생산할 계획이다. 도와 충주시는 유치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다. 현재 수소특화단지 계획 수립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다. 결과는 올해 말 나올 예정이며 용역 과정에서 도출된 경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