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인물 이거이(李居易·1348~1412)는 두 아들을 부마(駙馬), 즉 임금의 사위로 만들었다. 맏아들 이저(李佇)는 태조의 맏딸 경신공주에게, 둘째 아들 이백강(李伯剛)은 태종의 맏딸 정순공주에게 장가들었다. 조선 초기의 강력한 외척이 우리고장 진천에서 출현한 셈이다. 인지상정상 이거이는 우쭐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이 우쭐함이 이거이 3부자를 곤경에 빠트린다. 이거이가 사병해체 조치를 바로 이행하지 않자 대신들이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여러 절제사가 명령을 듣고 병권(兵權)을 즉시 삼군부에 바쳤는데, 오직 거이와 저(佇)만이 병권을 그대로 잡고서 즉시 송납(送納)치 아니하였다. 이에 판의흥삼군부사 이무(李茂) 등이 임금께 아뢰기를, "거이 부자가 병권을 내놓기를 아깝게 여기오니,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감히 내가 임금의 사돈인데'라는 마음을 갖고 있던 이거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실록이 이 부분을 매우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의정부에서 상소하였다. "이거이 부자가 원훈대신으로 종실에 연인하여 주상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었으나, 두 마음을 가졌으니, 죄는 참으로 큽니다. 원하건대, 삼성(三省·의정부)의 청한 바에 의거하여
'삽혈동맹'이라는 표현이 있다. 노루 등 산짐승을 잡아 서로 피를 나눠 마시며 변치말자고 굳게 맹약하는 의식을 일컫는다. 청동기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으로, 맹세할 때의 '盟'(맹) 자에 '血'(피) 자가 들어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야사에 의하면 이방원(후에 태종)과 이무(李茂·?~1409)도 삽혈동맹을 맺은 관계다. 태종이 즉위한 그해 두살박이 왕자를 잃었다. 이때 옆에서 태종을 위로한 인물이 하륜과 이무였다. 마침 그날은 상왕 정종의 생일이기도 했다. 본문 중 '하상'은 여덟 살에서 열세 살까지 사이에 요절하는 것을 말한다. '종척 대신을 상왕전에 보내어 헌수(獻壽)하였으니, 상왕의 탄일(誕日)인 때문이었다. 마침 이날에 왕자(王子)가 죽었는데, 나이 두 살이었다. 조회를 2일 동안 정지하고, 백관이 대궐에 나아가 조상하고 위로하였다. 영삼사사 하륜·판삼군부사 이무 등이 성례(盛禮)를 써서 장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하상에도 미치지 못하였는데 무얼 성례를 쓰랴"'- 이무는 1498년(태조 7)에 이방원의 오른팔이 되어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데 성공,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오른다. 또 1400년(정종 2)에는 판삼군부사로서 다시 이방원을 도
이거이(李居易)의 장남이 이저(李佇·1363∼1414)다. 이저는 태조의 맏딸 경신공주의 남편으로, 1, 2차 왕자의 난 후 1등 공신에 올랐다. 이저는 그 이름 때문에 혼선을 많이 야기하는 인물이다. 실록에는 이저 외에 이백경(李伯卿), 이애(李초두 밑에 愛) 등의 이름도 보인다. 모두 동일 인물이다. 당시 사관도 혼란을 느꼈는지 그 이유를 다소 길게 쓰고 있다. '이애는 옛이름이 이백경이 있었는데, 경(卿)자가 상왕의 휘와 소리가 서로 비슷하였기 때문에 이저로 고쳤으나, 저(佇)자가 또 세자의 휘(諱)와 소리가 서로 비슷하였기 때문에 이애로 고쳤다'.- 이저는 아버지 거이 때문에 덩달이 피해를 본 감이 없지 않다. 실록은 이 부분을 '1404년 아버지 거이의 죄로 그도 함주(咸州)로 유배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때의 '죄'는 전회에도 밝힌 바와 같이 사병 해체에 반기를 든 것을 말한다. 정조실록은 이 부분을 '이거이 부자와 병권을 잃은 자들은 모두 앙앙(怏怏)하여, 밤낮으로 같이 모여서 격분하고 원망함이 많았다'고 적고 있다. 대간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권근(權近·1352~1409)이 가장 강하게 추궁했다. '영계림부사 이거이와 영완산부사 이저 등이 총
태조 7년은 1398년에 해당한다. 그해 음력 여름 태조 이성계는 심하게 앓았다. 정황상 급성 편도염으로 추정된다. '임금이 시녀(侍女)로 하여금 부축해 일어나서 압서(押署)하기를 마치자, 돌아와 누웠는데, 병이 심하여 토하고자 하였으나 토하지 못하며 말하였다. "어떤 물건이 목구멍 사이에 있는 듯하면서 내려가지 않는다"'.- 본문 중 '압서'는 도장찍는 일, 즉 지금으로 치면 지명날인에 해당한다. 이방원(1367~1422·후에 태종)이 이때를 노려 정변을 일으켰다. 자신을 반대한 정도전 일파와 배다른 동생인 방석(의안대군·1382~1398), 방번(무안대군·1381~1398) 제거에 나섰다. 먼저 방석이 유배 도중 제거됐다. '방석이 울면서 하직하니, 현빈(賢嬪)이 옷자락을 당기면서 통곡하므로, 방석이 옷을 떨치고서 나왔다. 처음에 방석을 먼 지방에 안치(安置)하기로 의논했는데, 방석이 궁성의 서문을 나가니, 이거이(李居易)·이백경·조박 등이 도당(都堂)에 의논하여 사람을 시켜 도중(道中)에서 죽이게 하였다'.- 내용중 현빈은 심효생의 딸 부유심씨를 가리킨다. 안치는 유배와 같은 말이다. 또 다른 이복동생인 방번도 궁궐에서 쫓겨나 성문을 나선 후 중도에 조
조선후기 실학자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우리나라 사서(史書)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때문에 그는 "찬탈자와 반역자를 엄하게 평해야 하고 또 시비를 바르게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배경하에 쓰여진 사서가 동사강목(東史綱目)이다. 안정복이 동사강목에서 정몽주가 살해되는 장면을 유리 안을 들여다 보듯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본문에 등장하는 '동개'는 활과 화살을 넣어 등에 지고 다니는 물건을, '녹사'는 7∼8품의 낮은 벼슬을 의미한다. '해주목사 조무(趙茂), 중랑장 고여(高呂), 판사 이부(李敷) 등과 길목에 잠복해 있었다. 정몽주가 돌아오는데 동개를 멘 무부(武夫)가 스치며 지나가자 정몽주가 얼굴빛을 변하며 수행하는 녹사(錄事)에게 말하기를, "너는 뒤에 처지는 것이 좋겠다" 하고, 재삼 꾸짖으며 못 따라오게 하였으나 듣지 않고 말하기를, "소인은 대감을 수행하는 몸인데 어찌 돌아가겠습니까" 하였다. 선죽교에 이르자 조영규가 쳤으나 맞지 않았다. 정몽주가 꾸짖으며 말을 채찍질해 달아나자 조영규가 따라와 말머리를 쳐서 말이 꺼꾸러지고 정몽주가 땅에 떨어지니 고여가 쳐서 죽이므로 녹사도 끌어안고 같이 죽었다. 정몽주 나이 56세이었다'. 안정
이성계가 권력을 잡는 과정은 순탄해 보이나 꼭 그렇지는 않다. 한 차례 위기를 맞게 된다. 권좌에서 밀려나 황려(黃驪)로 유배된 고려 우왕에게 김저(金佇·?~1389)와 정득후(鄭得厚·?~1389)라는 인물이 몰래 찾아간다. 황려는 지금의 경기도 여주를 일컫는다. 김저는 최영의 생질이고, 정득후 역시 최영의 먼 인척이 된다. '우가 울면서 말하기를, "답답하게 이곳에 있으면서 손을 묶고 앉아 죽음을 받을 수는 없다. 역사(力士) 한 사람만 얻어 이시중(李侍中)만 해친다면 내 뜻은 성취할 수 있다. 내가 평소에 예의 판서 곽충보(郭忠輔)를 좋아하였으니 네가 가서 보고 이 일을 도모하라" 하고는 칼 한 자루를 충보에게 전해 주게 하면서, "일이 이루어지면 비(妃)의 동생을 처로 삼고 부귀를 함께 누릴 것이다. 이번 팔관일(八關日)에 일을 일으키라".(연려실기술) 본문 중 '우'는 우왕, '이시중'은 이성계를 일컫는다. 두 사람은 개경으로 돌아와 밀명대로 무신 곽충보를 포섭하여 팔관회(八關會)에 참석하는 이성계를 죽이기로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포섭당한 것처럼 보였던 곽충보에 의해 수포로 돌아간다. 곽충보는 두 사람 앞에서는 거짓 승낙을
이색(李穡·1328~1396)은 고려가 망했음에도 끝까지 지조를 지켜 삼은(三隱)의 한 명으로 불린다. 이색과 이성계는 처음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이성계가 동북면 도지휘사가 되어 여진족을 정벌하러 나가자 이색이 시를 지어 전송한다. '송헌(松軒)의 담기가 무신을 뒤덮으니 / 만리장성이 한몸에 맡겨졌네 / 분주하면서 몇 번이나 다사한 시기를 지냈던고 / 돌아오면 함께 태평한 날을 즐길 것이네(…)'(태조실록) 본문 중의 '송헌'은 이성계를 지칭한다. 위화도 회군후 두 사람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조민수와 이색은 우왕을 옹립, 즉위하게 했다. 이는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의도와 달리 이성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이색은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부터 유배와 복권이 반복된다. 1389년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에 유배, 이듬해 함창으로 이배됐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에 봉하여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금주(衿州)로 추방됐다가 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됐다. 이성계가 이색을 완전히 외면하거나 버린 것은 아니었다. 무신 이성계는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 즉 학구적인 요소를 이색에게 찾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鄭道傳·1342~1398)의 본관은 봉화다. 정도전은 삼봉이라는 호와 도담삼봉에 얽힌 전설에서 보듯 일정기간 단양에 거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첫 벼슬길에 나선 곳도 단양서 가까운 충주다. 우현보(禹玄寶·1333~1400)의 본관도 단양이다. 게다가 그는 말년에 고향행을 원했다. '조선이 개국된 뒤에 태조가 공신의 작호(爵號)를 주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태조는 특별히 공에게 후사하고 옛친구의 예로 대접하였는데,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므로 단양백(丹陽伯)에 특진시켰다. 그해에 공이 죽었는데, 영의정을 증직하고 시호는 충정(忠靖)이라 하였다'(연려실기술) 따라서 우현보의 고향이 단양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동시대를 산 두 사람은 대단한 라이벌 관계였다. 그것도 단순히 경쟁하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까지 넘보는 원수같은 라이벌이었다. 1392년 4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면서 우현보 가족에게 비극이 찾아왔다. 정몽주 사람이었던 우현보는 계림(경주)으로 유배됐고, 아들 5형제도 뿔뿔이 유배를 당했다. 그리고 그해 7월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내쫓기던 날, 장손인 성범은 개성 남문 밖에서 공개 참살되고, 조선 개국이 선포된 뒤
유배에 관련된 형벌 용어는 의외로 많다. '도배'(徒配)는 도형에 처한 뒤 유배(귀양)를 보내는 것을 말한다. 이때의 도형은 징역, 즉 중노동을 의미한다. 장배(杖配)는 매질을 가한 후 귀양 보내는 것을 일컫는다. 이밖에 찬출(竄黜)은 벼슬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찬적(竄謫)도 같은 표현이다. 유배형 중 어느 특정 지역을 정하여 머물게 하는 것을 부처(付處)라고 한다. 정배(定配)도 거의 같은 개념이다. 그러나 도중에 유배지를 환경이 더 안 좋은 곳으로 옮기는 경우가 있다. 이를 이배(移配)라고 한다. 그 반대는 양이(量移)로, 멀리 유배된 사람의 죄를 강등하여 서울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것을 일컫는다. 여말선초에 유배와 복권을 밥먹듯이 한 인물이 있다. 우현보(禹玄寶·1333~1400)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자 우왕은 우현보를 좌시중에 임명하고 반군 세력을 방어토록 명령한다. 좌시중은 종1품에 해당할 정도의 높은 벼슬이다. 이성계의 회군이 성공하면서 우현보는 좌시중에서 파직됐다. 회군에 성공한 후 이성계는 명분을 축척하기 위해 '뜸'을 많이 들인다. 이때 공양왕이 잠깐 등장했고, 우현보도 복권이 돼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고려말 신진 사류의 한 인물로 남은(南誾·1354~1398)이 있다. 정도전 사람인 그는 정몽주가 이끄는 구세력과 대립했다. 신진 사류가 혁명을 추구했다면, 정몽주가 중심이 된 구세력은 고려 왕조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원했다. 따라서 남은은 정벌군에 포함돼 위화도까지 진군했지만 계속 요동 정벌을 반대했다. 급기야 전회에 밝힌 조인옥(趙仁沃·1347~1396)과 함께 우군통제사 이성계에게 회군할 것을 진언한다.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지 4년만에 조선이 개국됐다. 그는 개국공신 1등에 책록돼 전지 2백결과 노비 25구를 받았다. 이는 정도전과 같은 규모다. 천도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됐다. 실록은 정도전과 함께 남은도 한양천도에 적극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이성계는 먼저 계룡산 일대를 둘러본다. '남은이 아뢰기를, "신 등이 외람히 공신에 참여하여 높은 지위에 은혜를 입었사오니, 비록 새 도읍에 옮기더라도 무엇이 부족한 점이 있겠사오며, 송경(松京)의 토지와 집은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이 행차는 이미 계룡산에 가까이 왔사오니,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가서 도읍을 건설할 땅을 보시옵소서" 하였다'.(태조실록) 이성계는 계룡산 다음으로 경기도 광실
공민왕은 환관(내시)에 의해 살해됐다. 뒤를 이은 우왕(禑王·1365~1389)은 이를 크게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우왕은 요동정벌 결정이 내려지자, 최영을 원정군으로 보내지 않고 자신과 함께 서경(평양)에 머물도록 한다. 그곳에서 원정군의 진군을 독려했다. 공민왕 살해를 보면서 자신을 지켜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최대의 패착이었다.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렸다는 것은 반란을 의미한다. 생사의 게임이 시작됐다. 이성계가 회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왕과 최영 장군은 서경을 떠나 급히 수도 개경 방어에 나섰다. 실록이 이 부분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 관점이 승자의 시각인 점은 감안해야 할 것 같다. '우왕은 대군이 돌아와 안주(安州)에 이르렀음을 알고 말을 달려 서울로 돌아왔다. 군사를 돌이킨 여러 장수들이 급히 추격하기를 청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속히 행진하면 반드시 싸우게 되므로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될 것이다" 하였다. 매양 군사들을 경계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승여(乘輿)를 범한다면 나는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오이(瓜) 한 개만 빼앗아도 또한 마땅히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겠다". (…)…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을 결정하고 이성계를 우군통제사, 조민수를 좌군통제사에 임명했다. 이에 이성계는 그 유명한 '4불가론'을 내세워 출병을 반대한다. 이때가 1388년(우왕 14)이다. 우왕과 팔도도통사 최영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진군을 명령한다. 이성계가 압록강에 이르러 다시 한번 회군을 요청한다. 이번에는 4불가론에 하나를 더해 '5불가론'을 내세웠다. 5월 13일이다. 당시 고려는 명나라가 철령위 반환과 과도한 조공을 계속 요구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신 박의중(朴宜中·1337~1403)을 파견한 상태였다. 이성계는 '명나라에 보낸 사신 박의중이 아직 귀국하기도 전에 큰 나라를 침범하는 것은 사직과 백성을 보호하는 길이 아니다'라며 5불가론 내용을 개성에 보냈으나 역시 수용되지 않았다. 5월 20일 이성계는 여러 참모들과 논의한 끝에 회군키로 결정,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렸다. 이때의 상황이 실록에 실려 있다. 하늘이 내편임을 의연중에 내비추고 있다. '이때 장마가 수일 동안 계속했는데도 물이 넘치지 않다가, 군사가 다 건너가고 난 후에 큰물이 갑자기 이르러 온 섬이 물에 잠기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이때 동요(童謠)에, "목자(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하자 당시 조정은 새 왕조의 국호로 '조선'(朝鮮)과 '화령'(和寧)을 복수로 정해, 그중 하나를 명나라로부터 낙점 받기로 했다. '화령'은 이성계의 고향명이다. 명나라 사신으로는 자청을 한 한상질(韓尙質·?~1400)로 정해졌다. 이성계는 주문(奏聞)으로 불리는 당시 외교문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는다. '삼가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은 왕씨(王氏)의 후손인 요(瑤)가 혼미하여 도리에 어긋나서 스스로 멸망하는 데 이르게 되니, 온 나라의 신민들이 신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를 보게 하였으므로 놀라고 두려워서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등의 칭호로써 천총(天聰)에 주달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해 주심을 바라옵니다'(태조실록) 본문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성계는 '왕씨들이 혼미해 나라가 스스로 망하는데에 이르러, 백성들의 추대로 자신이 등극하게 됐다'라는 식으로 문장을 쓰고 있다. 내용중 '소방'은 당시 한반도를 지칭한다. 그러자 당시 명나라 황제인 홍무제(주원장)는 자문(咨文)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문은 조선시대 때 중국과 왕복하던 외교문서의 하나를 일컫는다. '그 조칙에, 동이(東夷)
태조 이성계는 '창업지주'(創業之主) 자격으로 일등 개국공신 17명을 선정했다. 창업지주는 나라를 처음으로 세워 왕조를 연 임금을 일컫는다. 일등 개국공신은 배극렴, 조준, 정도전, 이지란, 정총, 정탁, 이방원, 이방간 등이다. 이들에게는 전지 150결, 노비 15구 이상이 하사됐다. 조선시대 1결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소 다르나, 지금으로 치면 대략 3천평 정도로 환산된다. 따라서 개국공신에게는 대농장이 하사된 셈이다. 당시에는 노비를 인격체가 아닌 재산 일종으로 봤다. 따라서 1명, 2명이 아닌 '口'로 표현로 했다. 일등 개국공신에는 이성계의 아들들을 제외하고 형제간 인물이 있다. 정총과 정탁이다. 정총(鄭摠·1358~1397)에 대해서는 전회에 태조 이성계의 고명 및 인신을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표전문 문제로 트집이 잡혀 이역땅 유배지에서 죽었다고 밝힌 바 있다. '고명'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승인하는 것을, '신인'은 그것을 증명하는 문서 정도를 의미한다. 정탁(鄭琢·1526~1605)은 정총의 친동생이 된다. 그도 일등공신에 책록된 만큼 적지 않은 공헌도를 지니고 있다. 사석에서 "이성계가 새 왕조를 열어야 한다"고, 지극히 예민한…
고려말 유학자인 정몽주, 이색, 길재 등을 가리켜 흔히 '삼은'(三隱)이라고 한다. 세 사람의 호는 각각, 포은(圃隱), 목은(牧隱), 야은(冶隱) 등으로, 모두 '숨을 隱' 자로 끝난다. 여기에 고려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켜, 태조 이성계의 조선개국에 협조하지 않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때 지어진 한시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 /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길재) 정몽주와 길재는 그 출생지가 영남이다. 정몽주는 영천, 길재는 금오산 인근의 선산이다. 따라서 이들은 훗날 조선 영남사림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게 된다. 영남 사림은 그 시작을 '절개'로 했듯이 항상 대의와 명분을 중시했다. 당연히 두 왕조를 섬기는 것을 충이 아닌 변절로 봤다. 권근이 그 중 한 명으로 지목됐다. 권근은 이색을 스승으로 모셨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스승과 제자가 각기 다른 길을 간 셈이 됐다. 이는 세조대의 신숙주와 비슷한 일면이 있다. 때문에 당시 각종 야담집은 권근을 부정일색으로 기술하고 있다. '신광한의 집에 공의 초상이 있었는데, 김안국은 절을 하면서, "이 분이 우리 도(道)에…
권근(權近·1352~1409)은 유배생활의 외로움을 저술로 달랬다. 조선시대 유교 사상사를 논할 때 반드시 거쳐햐 할 저서가 있다. 바로 권근이 지은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이다. 보물 제 1136호인 입학도설은 권근이 익주(지금의 익산)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저술한 책으로, 일종의 성리학 입문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부 내용은 책 제목 그대로 도설(圖說), 즉 그림설명을 달아 이해도를 높였다. '오경천견록'은 유배지 충주 양촌에서 1391년(공양왕 3) 저술작업을 시작한 책으로 14년 만에 완성됐다. 그 사이 왕조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었다. 유교의 근본경전인 5경, 즉 역경, 서경(書經), 시경, 예기, 춘추를 주석한 이 책은 '역(易)'을 본체(體), 춘추를 용(用)으로 인식했다. 서거정과 안정복이 권근의 두 저서를 이례적으로 호평했다. '경은 천품이 순수하고 지식이 깊었다. 학문에 있어서는 육경(六經)을 모조리 꿰뚫어 전성(前聖)의 오묘한 이치를 발명하고 후진의 사표가 되었으며, 오경천견록·입학도설 등의 저술은 학자들의 지남(指南)이 되었다'.(서거정의 동문선) 이때의 '지남'은 이끌어 가르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권
조선 개국공신을 논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정도전, 권근, 배극렴, 조준 등이다. 그러나 권근(權近·1352~1409)은 이들과 달리 조선 개국공신 명단에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고려말은 개인 권근에게 있어 '고난의 시기'였다. 그는 당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이 있다. 이때 외교문서의 일종인 자문(咨文)을 미리 봤고, 이것이 이유가 돼 극형에 처해질 위기에 몰렸다. '"권근(權近)은 성지를 사사로이 열어 보고는 신씨(辛氏 우창)에게 편당·아부하여 이임(李琳)에게 먼저 알렸습니다. 이들은 모두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 없는 바이오며, 조종께서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맡은 관사에 내려 법대로 처형하소서" 하였다'.(고려사절요) 권근은 조금 감형돼 유배지를 전전하게 된다. 이때 이른바 '윤이(尹·), 이초(李初)의 사건'이 발생한다. 고려 공양왕 때 윤이와 이초라는 인물이 명나라 황제에게 가서 당시의 고려 사정을 전하고 명에게 고려 토벌을 요청하는 사건이 발행했다. 이때의 '고려 사정'은 이성계 등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킨 것을 말한다. 이 고변으로 인해 고려말 구세력의 상당수가 청주옥(淸州獄)에 하옥됐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청주
'대소 신료 등이 부축하여 호위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함이 더욱 간절하니,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마지못하여 수창궁(壽昌宮)으로 거둥하게 되었다'.(태조실록) 이성계가 드디어 조선국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개국과 동시에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명나라는 이성계의 등극을 왕위 찬탈로 여겼다. 따라서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내려주지 않았다. '고명'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승인하는 것을, '신인'은 그것을 증명하는 문서 정도를 의미한다. 건국 초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표전문(表箋文)을 지니고 명나라 사신으로 간 인물이 정총(鄭摠·1358~1397)이다. '표전문'은 표문과 전문의 합성어로, 명나라 황제와 황세자에게 건네는 일종의 외교문서를 말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명나라는 표전문 내용을 문제삼아 정충 일행을 구금했다. 당시 명나라의 트집 내용이 실록에 실려 있다. 조선 사신을 구금한 이유를 적고 있다. '사람을 보내어 표전(表箋)을 올려 하례하니, 예의가 있는 듯하나, 문사(文辭)에 있어 경박하고 멋대로 능멸히 하여 근일에 인신(印信)과 고명(誥命)을 주청한 장계 안에 주(紂)의 일을 인용했으니 더욱 무례하였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를 때 수양대군처럼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았다. 대신 '아랫사람'을 조종했다. 이때 아랫사람 역할을 한 인물이 배극렴(裵克廉·1325~1392)이다. 그는 고려 왕대비(공양왕 어머니)에게 대놓고 고려 사직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 '시중 배극렴이 왕대비에게 아뢰었다. "지금 왕이 혼암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과 백성의 주재자가 될 수 없으니 이를 폐하기를 청합니다".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이 부복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 하였다'.(태조실록) 이때 공양왕은 재위 3년째로 막 쉰살이 되는 나이였다. 그는 국새를 내놓은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 이내 울어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리었다. 마침내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로 가니, 백관이 국새를 봉전하여 왕대비전에 두고(…) 13일(임진)에 대비가 교지를 선포하여 태조로 하여금 국사를 감록하게 하였다'.(태조실록) 공양왕은 폐위된 뒤 '공양군'으로
어유소(魚有沼·1434~1489)는 여진족을 성공적으로 정벌, '북벌의 명장'으로 불렸다. 또 어유소는 이시애난을 진압한 공로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면서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지기도 했다. 세조는 그만큼 어유소를 신임했다. 적개공신 때의 하교 내용이 실록에 실려 있다. '왕은 이르노라. (…) 경이 곧 분연히 몸을 돌아보지 않고 친히 시석을 무릅썼도다. 정예를 다하여 나아가 치니, 드디어 전도로 하여금 창을 거꾸로 잡게 하여 원흉의 머리를 바치게 하였도다.(…) 영웅의 응양(鷹揚)에 힘입지 않는다면 어찌 신속한 탕평을 이루었겠는가'. (세조실록) 본문 중 '응양'은 매처럼 하늘 높이 난다는 뜻으로, 무용(武勇)을 일컫고 있다. 어유소는 1479년 명나라의 정벌을 도우러 만포진까지 출진했으나 압록강 물이 얼지 않아 도강할 수 없었다. 따라서 동사자가 속출할 것을 염려하여 군사를 되돌렸다. 그는 이것이 문제가 돼 이듬해 경기도 농장 근처에 '중도부처'(中途付處) 됐다. '중도부처'는 유배에 처한 죄인에게 그 정상을 너그럽게 참작하여,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한 곳을 정하여 지내게 하는 것을 말한다. 특혜성 시비를 불거졌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김영정 등이…
"대개 들으니,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충성하여 부자·군신 사이에는 다른 도가 없는 것이다. (…) 아! 위태하였다. 다행히 숙부 수양 대군이 있어 기미를 알아 계책을 결단하여 대의를 부르짖었다. 네가 장문(將門)의 후예로 익히 병사(兵事)를 알았다. 인하여 전지 1백 50결·노비 15구·말 1필·백은 25냥·표리 1단을 주노니, 이르거든 영수하라".(단종실록) 단종이 계유정난 2등 공신인 곽연성(郭連城,·?~1464)에게 하교하는 내용로, 본문 중 '노비 15구'는 노비 15명, '표리'는 임금이 신하에게 주는 옷감을 일컫고 있다. 문장이 매우 화려함을 알 수 있다. 이를 '사륙변려체'라고 한다. 대구(對句)의 구성을 지니면서 수사적(修辭的) 미감(美感)을 많이 표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인사장의 일종인 교서나 하교할 때 자주 사용된다. 단종은 이때까지만 해도 삼촌 수양대군의 최종 목표가 자기 자신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곽연성은 계유정난에 참가한 무신 중 매우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계유정란 이전에 이미 무과에 급제, 현직에 있었다. 그는 이런 이력 때문에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갈 때 군관 자격으로 수행하게 된다. 그후
세조가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는 계유정난에는 30여명의 무인이 동원된다. 한명회가 이들을 수양대군에게 소개했다. 이중에는 양정(楊汀·?~1466)이라는 인물도 있다. 30여명중 지도자급에 속한다. '한명회가 말하기를, "원컨대 모름지기 조용히 대접해 주시고, 만약 사색(辭色)으로 그들에게 진실하고 정성스러움을 보여 주어서 신의를 굳게 하소서" 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좋다" 하니, 한명회가 틈을 타서 먼저 양정(楊汀)을 데리고 와서 알현하게 하고, 다음은 유하(柳河)를 데리고 와서 알현하니, 세조가 충심을 기리어 후하게 대우하여 모두 환심을 가졌다'.(단종실록) 그러자 양정 등은 곧바로 세조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양정 등이 사례하기를, "무부(武夫)는 비천한 사람이지만 공의 말씀을 듣고 오히려 분격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진퇴에 오직 명을 따르고 두 마음이 없을 것을 맹세합니다" 하였다.(단종실록) 양정은 계유정난 2등 공신에 책록, 병조참의에 임명됐다. 이후 양정은 공조판서, 중추부판사 등을 거쳐 중요 외직(지방직)의 하나인 함길도 도절제사에 오른다. 함길도는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 되던 곳이다. 이 때문인지 세조는
'세조가 일찍이 정인지와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의 시비(是非)를 논란(論難)하다가 세조의 뜻에 거슬러 부여현(扶餘縣)으로 귀양갔었고, 한 달이 넘어 소환(召還)되어 다시 부원군에 봉해졌다'.(세조실록) 정인지가 취중에 세조와 종교적인 얘기를 하다, 그의 미움을 받아 유배된 적이 있다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이 부분을 세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배지가 다름아닌 충남 부여다. 당시 정인지의 부친은 부여에 거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인지의 귀양은 일종의 '특혜성 귀양'이었다. 세조가 정인지를 진심되게 신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이후의 정인지는 적어도 세조 앞에서 만큼은 말을 조심하게 된다. 세조실록에 이 모습이 포착돼 있다. '화위당에 나아가서 하동군 정인지와 영의정 한명회 등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고 임금이 지리설(地理說)을 논하니, 정인지가 아뢰기를, "지리설과 음양설(陰陽說)은 서로 비슷하니, 비슷하고 또한 가까운 이치입니다. 그러나 매우 심오하고 오묘하여서 신은 능히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정인지는 이런 인간적인 약점을 제외하고 여러 분야에 능통했다. 가히 조선초기 최고의 두뇌로, 어문·역사·천문 ·역법·아악·서예 등 여러
태종 이방원은 정인지(鄭麟趾·1396~1478)의 사람됨을 금방 알아봤다. 아들 세종대왕에게 정인지를 소개하는 장면이 실록에 실려 있다. '태종이 명하여 (정인지를)앞에 나오게 하고 말하기를, "내가 그대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였으나, 다만 얼굴을 알지 못하였을 뿐이다" 하고, 머리를 들게 하고서 자세히 본 뒤에 태종이 세종에게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림은 인재를 얻는 것보다 더 먼저해야 할 것은 없는데, 정인지는 크게 등용할 만하다" 하였다'. 정인지는 뒤를 이은 세종에게 대표로 훈민정음 서문을 써서 바친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正音) 28자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어디를 가더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울음소리나 개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세종실록) 82살까지 산 정인지는 7명의 임금을 모셨다. 세조도 포함돼 있다. 계유정난 거사를 앞둔 세조가 정인지 같은 인물을 놓칠리가 없다. '세조가…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영정은 전국적으로 3개 존재하고 있다. 우리고장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 구봉영당(보물 제 613호), 낭성면 관정리 묵정영당(충북도 유형문화재 제 108호), 경기도 평택시 청북면 고잔리(도향토유적 제 6호) 등이다. 3개의 영정은 일종의 母子 관계에 있다. 묵정영당과 평택 고잔리 등 나머지 2개 영정은 구봉영당 것을 모사했다. 따라서 구봉영당 영정이 일종의 '원본'인 셈이다. 신숙주 영정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닌, 시대적 정보를 담고 있다. 우선 조선시대 초상화 가운데 흉배(胸背)가 처음 보이고 있다. 흉배는 조선시대 왕, 왕세자, 문무백관 관복의 가슴과 등에 장식한 표장(表章)을 일컫는다. 이 문양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정해졌다. 대군은 기린, 문신 1품은 공작, 2품은 운학(雲鶴), 3품은 백한(꿩과 비슷한 새)을, 무신 1 ·2품은 호표(虎豹), 3품은 웅표(熊豹)의 표장을 붙이도록 했다. 따라서 3품(당상관) 이상만 가슴(흉)과 등(배)에 표장을 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숙주 영정에 등장하는 흉배의 문양은 구름과 기러기, 즉 운안(雲雁)이다. 이로 미뤄 문관 2품 때의 문양임을 알 수 있다. 신숙주가 문관 2
[충북일보] 주말 동안 충북지역에 많은 비가 내리면서 도내 하상도로가 통제되고 나무가 쓰러지는 등 각종 피해가 속출했다. 청주기상지청은 지난 6일부터 7일까지 시간당 20~30㎜의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했다. 시간당 30㎜의 비부터는 보통 '폭우'라고 부르는 수준으로 밭이나 하수구가 넘치기 시작하고, 홍수나 침수 같은 비 피해 위험이 매우 높아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단계다. 충북도 등에 따르면 7일 오후 2시 30분 기준 도내에는 평균 62.1㎜의 비가 쏟아졌다. 지역별로는 △증평 121.5㎜ △괴산 116.5㎜ △청주 87㎜ △진천 52㎜ △단양 49㎜ △보은 45.3㎜ △충주 45㎜ △제천 41.7㎜ △영동 7㎜ △음성 4㎜다. 폭우로 인해 도내 하상도로와 둔치주차장은 일부 통제된 상태다. 현재 도는 청주시 무심천 하상도로, 미암교 하상도로, 충주시 달천 하상도로를 통제 중이다. 하상도로에 설치된 둔치주차장은 전체 27곳 중 15곳이 통제된 상황이다. 폭우 여파로 도내 각종 사건·사고도 잇따랐다. 이날 도에 접수된 풍수해 신고 건수는 총 20건이다. 피해 유형은 △수목전도 12건 △배수불량 4건 △낙석 1건 △기타 3건으로 집계됐다.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도가 친환경 에너지로 각광받고 있는 수소산업 육성을 위해 특화단지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수소특화단지 지정을 통해 산·학·연·관 생태계를 공고히 구축하고, 기업 지원과 기술 개발로 이 분야를 선도한다는 구상이다. 7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가 내년 상반기 공모를 통해 지정할 예정인 수소특화단지를 충주시에 유치할 계획이다. 도는 일찌감치 충주를 신청지로 낙점했다. 이 지역의 수소 인프라를 고려할 때 수소특화단지를 유치하면 관련 산업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충주는 수소 분야 기업 26곳이 둥지를 트고 있다. 국내 유일의 차량용 연료전지 생산 거점인 현대모비스를 비롯한 주요 부품업체들이 협력체계를 갖추고 있다. 청정수소 생산과 저장, 유통, 충전, 활용 등 전주기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는데다 그린수소산업 규제자유특구로 지정 받았다. 바이오가스에 기반한 그린수소는 전국에서 가장 저렴하게 공급하고 있다. 오는 2027년까지 하루 2.5t의 청정수소를 생산할 계획이다. 도와 충주시는 유치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다. 현재 수소특화단지 계획 수립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다. 결과는 올해 말 나올 예정이며 용역 과정에서 도출된 경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