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하위지, 이개 등이 집현전 학자로 선발됐다. 세종은 이들을 국가두뇌로 키우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책이 간행되면 이들에게 먼저 지급하며 '학문만을 오로지 일로 삼아 종신토록 계속하라'(專業學術 期以終身)고 말했다. 신숙주와 성삼문은 집현전 '동기' 중 유난히 친했다. 신숙주가 1417년, 성삼문이 1418년생으로, 나이가 한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신숙주와 성삼문은 계유정난 관련, 각각 2등과 3등 공신에 올랐다. 그러나 이들이 공신에 책록됐다고 해서 정난에 직접 가담한 것 같지는 않다. 사료에는 이들의 활약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모든 대신들은 내칠 수 없는 만큼 무언의 지지자도 공신에 올린 것으로 여겨진다. 신숙주와 성삼문은 여기까지만 같은 길을 걷는다. 이후부터는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사람, 성삼문은 단종의 사람이 돼 각기 다른 길을 걷는다. 수양대군이 명나라 사은사(謝恩使)로 가는 길에 신숙주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한다. 그것은 수양대군이 신숙주에게 명나라 동행을 강력히 청한 결과였다. 사은사는 부정기적으로 보내는 사신을, 서장관은 일행에 포함된 외교 실무자를 일컫는다. 이 부분이 실록에 기록돼 있다. '마침…
함길도 토호 이시애(李施愛·?~1467)가 세조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1467년 난을 일으켰다.이를 평정한 인물이 남이(南怡·1441∼1468)다. 그는 대장 자격으로 토벌군을 진두지휘, 반란군을 진압했다. 그 결과,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됐다. 남이는 귀로에 백두산에 올라 그 유명한 북정가(北征歌)을 짓는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白頭山石磨刀盡) /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어졌네( 豆滿江波飮馬無) /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를 평정 못한다면( 男兒二十未平國) / 훗날 그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요(後世誰稱大丈夫)'. 남이의 할머니는 태종의 4째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1404∼1424)이다. 따라서 세조와 남이는 고종사촌-외사촌 간이 된다. 남이는 이런 종실적 배경에 무인으로서의 실력까지 겸비하면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 서른도 안된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남이를 무척 총애하던 세조가 1468년 사망했다. 한명회, 신숙주, 유자광 등 훈구파들의 견제와 공격이 시작됐다. 신흥무인세력의 선두주자였던 남이는 결국 지금의 국방장관(병조판서)에서 해직되어 청와대 경호실 고위직에 해당하는 '겸사복장(兼司복장)으로 밀려났다. 어느날 궁궐 당직을 서는데 혜성이…
계유정난을 논할 때 한 가운데는 수양대군, 그 우측에는 한명회, 좌측에는 권람(權擥·1416~1465)이 위치한다. 그만큼 세 사람의 의기투합 정도는 강했고, 이는 망설임없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한명회와 권람은 깊은 우정으로도 유명하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일찍이 한명회와 망형교(忘形交)를 하여, 소하(蕭何)와 조참(曹參), 관중과 포숙이라 자처하고, 가인의 산업을 일삼지 아니하며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남아는 창(矛)을 드날리고 말을 달려서 변경 사이에서 공을 세우고 마땅히 만 권(卷)의 서적을 읽어서 불후의 이름을 세워야 한다" 하였다'.(세조실록) 이때의 '망형교'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친밀한 사이, 소하와 조참은 유방의 일급 참모, 관중과 포속은 관포지교라(管鮑之交)는 말을 만들어낼 정도의 깊은 우정을 일컫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에 대한 당시 사관(史官)의 평가는 상당히 엇갈리는 편이다. 먼저 한명회다. '성격이 번잡(煩雜)한 것을 좋아하고 과대하기를 기뻐하며, 재물을 탐하고 색(色)을 즐겨서, 전민(田民)과 보화 등의 뇌물이 잇달았고, 집을 널리 점유하고 희첩(姬妾)을 많이 두어, 그 호부(豪富)함이 일시에 떨쳤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한명회는 35년간 권력의 정점에 머무른다. 이때 항간에 떠돌던 말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었다. 그는 이런 환경을 배경으로 자산군(者山君·1457∼1494)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세조비 정희대비는 예종이 죽고 그 아들이 어리자, 대신과 의논해 자산군의 왕위 계승을 결정한다. 바로 성종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월산군(月山君·자산군의 형)의 몸이 너무 허약하다는 것이었다. 이때 정희대비가 의논 상대로 삼은 대신이 한명회다. 그런데 한명회는 이미 자신의 딸을 자산군에게 시집보내 놓은 상태였다. 한명회의 막후 영향력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성종이 즉위하자(1469) 한명회 딸은 왕비에 책봉됐다. 공혜왕후(恭惠王后·1456∼1474)이다. 앞서 한명회는 자신의 또 다른 딸(후에 장순왕후)을 예종에게 시집보냈다.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인성대군을 낳은 후 요절했다. 한명회는 두 임금의 장인이 됐기 때문에 '상당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때의 상당은 청주를 일컫는다. 일세를 풍미한 한명회가 73살(1487)을 일기로 사망했다. 그러자 중종은 관원들이 도문 밖에 나란히 서서 운구를 전송하게 한다. '한명회의 장소(葬所)는
단종 왕위찬탈의 서막인 계유정난은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중도에 비밀이 새나가면서 수양대군이 잠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 한명회와 무인 홍윤성이 다음과 같은 말로, 거사를 행동으로 옮길 것을 재촉한다. '한명회가 말하기를, "길 옆에서 집을 지으면 삼 년이 되어도 집을 못 짓는 법이니, 대군은 스스로 결단을 내리시오"라 하고, 홍윤성은 말하기를, "용병(用兵)하는 데는 주저하는 것을 가장 꺼립니다" 하였다'.(연려실기술) 단종실록은 김종서(金宗瑞·1383~1453)의 마지막 장면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집에 이르러 그에게 편지를 전달했고, 김종서가 이를 달에 비춰 읽어보려는 순간 종 임어을운이 철퇴를 내리쳤다. 그러자 김종서 아들 승규가 놀라서 그 위에 엎드렸고, 이번에는 무인 양정이 칼을 뽑았다. 그러나 김종서는 곧 바로 죽지는 않았다. '김종서는 숨이 거의 끊어졌다가 다시 살아나서 원구를 시켜 성문지기를 큰 소리로 불러 정부에 가서, "정승이 밤새 남에게 맞아서 죽게 되었으니 빨리 임금께 아뢰어 약을 가지고 와서, 구제하도록 고하라"고 하였으나 대꾸하는 이가 없었다. (…) 김종서가 김승규의 방안에 숨었으므로
계유정난(1453)을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은 수양대군(1417~1468),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홍달손(洪達孫) 등 4명이다. 수양대군(세조)은 신권이 왕권보다 커지는 것에 대해 굉장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는 '대군' 자격으로 매월 한번씩 단종을 만날 수 있기를 요청하나 김종서, 황보인 등으로 구성된 의정부로부터 거부를 당한다. '세조가 아뢰기를, "여러 종친을 모실 길이 없으니 매월에 한 번씩 만나 주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여, (…)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주상(단종)께서는 춘추(春秋)가 아직 어리시고, 상제(喪制)를 아직 마치지 못하였으며, 또 접견할 곳이 없으니, 아직 전례에 의하여 영해군(寧海君) 이상과 영자(寧字) 이상의 대군(大君)만 인견(引見)하고, 그 나머지 종친은 뒤에 사현(賜見)함이 적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단종실록) 수양대군은 병서(兵書)를 함께 편찬한 것이 계기가 돼 권람과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불만을 수시로 권람에게 털어놨다. 당시 권람은 과거에 합격했으나 중용되지 못하고 미관말직에 머물고 있었다. 그 역시 현실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다. 둘은 당시 조정에 대해 공동의 불만을 갖고…
조선전기 문신인 남효온(南孝溫·1454~1492)은 추강집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여기서 사육신(死六臣)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세조 집권 후의 당시 조정 분위기는 사육신을 거명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그는 부당한 권력에 항거하다 죽어간 이들을 역사 한 모퉁의 기록으로 남겼다. 지금은 사육신 정원(?)이 한 명 더 늘어났다. 논란 끝에 지난 90년대 우리고장 옥천출신 김문기(金文起·1399~1456)가 추가됐다고 밝힌 바 있다. 따라서 호칭도 '사칠신'이라고 불러야 보다 정확하나, '사육신' 명칭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육신 명단에는 올라있지 않으나 단종복위 운동과 관련해 음독 자살한 인물이 있다. 청재(淸齋)를 호로 갖고 있었던 박심문(朴審問·1408년∼1456)이다. 그는 중앙정치 무대가 아닌, 변방 평안도 의주에서 자살했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잊혀진 인물이었다. 단종복위 운동과 관련해 그의 이름이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고종 때이다. '병자년(1456, 세조2)에 김종서와 황보인 등이 죽게 되자, 원통하고 분하여 조카 중손(仲孫)에게 말하기를, "내가 감히 성군(세조를 가리킴)을 하찮게 대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문종(文宗·1414~1452)은 아버지 세종을 많이 닮았으나 병약했다. 재위 2년 4개월만에 병사하니 그의 나이 38살이었다. 문종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당시 대신이었던 김종서, 황보인 등에게 어린 단종을 잘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한다. 이런 까닭에 수양대군 세조가 왕권 찬탈을 위해 주도적으로 일으킨 계유정난 때 이들이 1차적으로 제거된다. 반면 당시 영의정으로, 문종의 부탁을 함께 받았던 鄭분(?~1454)은 화를 입지 않았다. 정분과 정인지는 처남 매부지간이다. 일설에 의하면 정인지의 구명 노력으로 화를 면했다. 그러나 정국은 계속 심상찮게 돌아갔다. 그는 영의정의 몸으로, 하삼도 체찰사로 보내진다. 체찰사는 왕명에 따라 일정 지역의 민정을 살펴보는 고위 임시직을 일컫는다. 사가들은 이 역시 처남 정인지의 배려로 보고 있다. "간신을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그치지 않고 계속 올라왔다. 그는 하삼도 체찰사 임무를 마치고 상경하는 도중 세조의 유배 전지(傳旨)를 접하게 된다. 하삼도는 충청, 전라, 경상도, 전지는 임금의 뜻이 담긴 공문서를 의미한다. 이 부분에 우리고장 충주가 등장한다. '체찰사로서 영남에서 돌아와 충주에 이르러 황보인ㆍ김종서 등의 머리를…
계유정난은 수양대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김종서 부자, 황보인, 허후 등을 제거한 사건이라고 앞서 밝힌 바 있다. 계유정난과 관련, 1등 공신에 오른 인물 중에 한확(韓確·1403~1456)이 있다. 그가 계유정난 때 어떤 역활을 했는지는 사료 상으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다만 '정난공신 1등'에 오른 것으로 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조 즉위식 때 그의 위치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러 백관을 데리고 세조에게 인사를 올린 인물이 한확이었다. 백관은 조정의 모든 벼슬아치를 일컫는다. 이때 한확은 백관의 대표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사직(社稷)이 안정을 얻으니 조야(朝野)가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신 등은 다 같이 용렬한 자질로 다행하게도 경사로운 때를 맞아, 저 서기(瑞氣) 어린 해와 구름 속에 천명(天命)도 새로운 거룩한 성대(盛大)를 얻어 보고 태산(泰山)과 반석(盤石) 같은 바탕에서 다시 무강(無彊)하신 큰 계책을 기대하는 바입니다."(세조실록) 세조와 한확의 이런 교분은 '사돈' 관계로까지 발전한다. 세조 장남 도원군(20세 요절)은 한확의 딸 수빈한씨를 아내로 맞았다. 우리 귀에 익숙한 인수대비, 즉
수양대군 세조는 왕위 찬탈을 위한 첫 작업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1453)을 일으켰다. 김종서 부자,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이 역모죄로 희생됐다. 세조 즉위 10년 후에 작성된 단종실록은 계유정난이 여론의 지지를 받은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김종서의 부자·황보인·이양·조극관 등을 모두 저자에 효수(梟首)하니, 길 가는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어 그 죄를 헤아려서 기왓돌로 때리는 자까지 있었고, 여러 사(司)의 비복(婢僕)들이 또한 김종서의 머리를 향해 욕하고, 환시(宦寺)들은 김연(金衍)을 발로 차고 그 머리를 짓이겼다'. 이 시기 대신으로 허후(許 言+羽·?~1453)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살생부에 들지 않아 화를 면했다. 그러나 그는 희생된 계유정난 대신들이 죄가 없음을 자주 거론했다. 특히 그는 황보인과 막역한 사이였다. 정난이 성공으로 끝나자 궁궐에서는 한 바탕 '파티'가 벌어진다. 남효온이 지은 추강집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술을 돌리고 풍악이 울리자 재상 정인지(鄭麟趾), 한확(韓確) 등이 손뼉을 치고 기뻐하며 웃었으나, 허후는 홀로 어두운 표정으로 고기를 먹지 않았다. 세조가 그 까닭을 묻자 재일(齋日)이라고 핑계하였으나 세조는
단종(端宗·1441∼1457)의 마지막은 사료마다 표현이 다소 다르다. 세조실록은 단종의 마지막을 매우 짧게 적고 있다. '노산군이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예절을 갖추어 장사지냈다'. 이때의 노산군은 단종의 강등된 이름을, '이 소식'은 삼촌 금성대군이 세조로부터 사약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기록대로라면 단종은 세조로부터 사약을 받지 않았고, 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된다. 사가들은 세조실록에 대해 즉위 후의 일은 대체로 사실대로 기록했으나 왕위찬탈 과정은 왜곡이 심하다고 평하고 있다. 이때 사관으로 참여한 인물은 신숙주, 한명회 등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사약, 교살 등의 표현이 모두 등장한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지다고 발을 굴렀다. (…)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 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문헌대로라면 단종은 사약이 아닌 목졸려 타살당한 것이 된다. '나장'은 병조에 속한 하급직원을, '통인'은 관아에 딸리어
수양대군이 1456년(세조 2) 왕위에 등극하자, 한평생 벼슬하지 않고 단종을 위하여 절의를 지킨 신하들을 생육신(生六臣)이라고 한다. 김시습,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원호 등이 그들로, 사육신과 대칭된다. 생육신은 방랑을 하거나 두문분출하는 방법 또는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 하면서 단종을 추모했다. 이 와중에 우리고장 충북과 인연을 만든 인물로 김시습(金時習·1435~1493)과 원호(元昊·1397∼1463)가 있다. 김시습은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설잠'이라는 중이 되어 전국을 방랑했다. 그는 청주 상당산성도 방문, '遊山城'(유산성)이라는 한시를 남겼다. '꽃다운 풀향기 신발에 스며들고 / 활짝 갠 풍광 싱그럽기도 하여라 / 들꽃마다 벌이 와 꽃술 따물었고 / 살진 고사리 비갠 뒤라 더욱 향긋해 / 웅장도 하여라 아득히 펼쳐진 산하 / 의기도 드높구나 산성마루 높이 오르니 / 날이 저문들 대수랴 보고 또 본다네 / 내일이면 곧 남방의 나그네 일터니'. 원호는 집현전 직제학(종3품)을 역임될 정도의 학구파 관료였다. 그는 왕위를 찬탈당하자 고향으로 낙향했고, 단종이 승하한 뒤에는 영월로 들어가 삼년 동안 묘살이를 했다.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이 국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에서 나온 뒤로 / 외로운 몸 짝 잃은 그림자 푸른 산을 헤매누나 / 밤마다 잠청해도 잠들 길 바이없고 / 해마다 한을 끝내려 애를 써도 끝없는 한이로세 / 울음소리 새벽 산에 끊어지면 그믐달이 비추고 / 봄 골짝에 토한 피가 흘러 꽃 붉게 떨어지는구나 / 하늘은 귀 먹어서 저 하소연 못 듣는데 / 어쩌다 서러운 이 몸의 귀만 홀로 밝았는고'. 단종(端宗·1441~1457)이 유배지 영월 청령포에서 지은 자규시(子規詩)이다. '자규'는 피를 토하며 운다는 두견새를 의미한다. 그 피가 땅에 떨어져 꽃으로 다시 피어나니 두견화다. 진달래를 두견화로도 부르는 것은 핏빛 색깔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종은 17살 꽃다운 나이에 삼촌(세조)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일부 기록은 '자살을 했다', 또 다른 사료는 '교살을 당했다'라고 적고 있으나, 세조에 의해 죽음을 강요당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엄흥도(嚴興道·?~?)의 영월엄씨 문중사와 송자대전은 단종의 마지막을 다소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에 유폐 되었던 단종이 화를 당하자 명에 의하여 시신이 강물에 던져져 옥체(玉體)가 둥둥 떠서 돌아다니다가…
지난 1970년대 이른바 '사육신 자격' 논란이 일어났다. 조선전기 문신인 김문기(金文起·1399~1456)가 핵심에 위치했다. 당시 사육신은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 유응부, 하위지 등이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유응부(兪應孚·?~1456)를 사육신에서 제외시키고 대신 김문기를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김문기는 집현전 학자 출신이면서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한 반면, 유응부는 非집현전에 무신 출신이면서 역할도 다소 왜곡돼 있다"고 밝혔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논의한 끝에 "유응부는 존속시키돼,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의했다. 따라서 지금의 사육신 정원(?)은 한 명 더 늘어난 7명이다. 호칭도 '사칠신'이라고 불러야 정확하나, '사육신' 명칭을 그대로 사용키로 했다. 논란은 남효온이 지은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서 비롯됐다. 남효온은 앞서 언급한 6명을 거론하면서 김문기는 기술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김문기에 관한 사실을 유응부의 것으로 기술하는 오류를 범했다. 김문기는 단종복위 운동에 있어 성삼문, 박팽년 만큼이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것도 병력 동원과 관련이 있다. 실록에는 다음과…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을 가리켜 이른바 사육신이라고 한다. 대부분 능지처참됐고 일부는 혹독한 고문으로 심문 중 사망했다. 박팽년은 후자에 속하고 있다. 두 경우에 속하지 않는 인물이 있다. 유성원(柳誠源·?~1456)으로, 역모가 탄로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만 그가 자결한 정황은 다소 다르게 기록돼 있다. 남효온(南孝溫·1454~1492)은 그의 저서 '추강집'(秋江集) 육신전 편에서 유성원의 자결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병자년(1456, 세조2)의 모의에 참여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성삼문을 잡아갈 때에 유성원이 마침 성균관에 있었다. 제생(諸生)들이 성삼문의 일을 알리자, 즉시 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더불어 술을 따라 이별주로 마시고, 사당에 올라가서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았다. 가서 보니 관대(冠帶)도 벗지 않은 채 패도(佩刀)를 뽑아 스스로 목을 찔렀거늘 목숨을 구하려 했으나 이미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그 까닭을 알지 못했더니, 조금 뒤에 관리가 와서는 시체를 가져가서 책형을 가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약간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일이 발각되자 성삼문·박팽년 등은 차례로 잡혀와서 모진…
홍재전서(弘齋全書)는 금성대군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패를 모실 자리를 설치하고 서쪽을 향하게 하자, 유(금성대군 지칭)가 "우리 임금님은 영월에 계신다"하고 북쪽을 향해 슬피 운 후 다음, 네 번 절하고 드디어 죽었다." 홍재전서는 정조가 지은 시와 문장을 모아서 편찬한 것을, 전패는 객사에 봉안된 위패로 임금을 상징한다. 함께 거사를 했던 당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1457)도 박천에 유배된 끝에 그해 가을 교살됐다. 이보흠은 매우 유능한 관료였다. 그는 규휼제도의 일종인 사창제(社倉制)를 대구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해 큰 성과를 거뒀다. 때문에 당시 대구 백성들로부터 '순량'(循良)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문종은 이런 이보흠을 정4품 고위직인 사헌부 장령으로 발탁했다. 한 마디로 이보흠은 '문종의 사람'이었다. 형(문종)의 아들(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이런 이보흠을 곱게 봤을 리가 없다. 그는 즉위 후 얼마안가 이보흠을 궁벽한 외직인 순흥부사로 발령냈다. 이때의 외직은 지방직을 말한다. 그런데 이 부분은 잘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 정황상 세조는 금성대군과 이보흠 모두가 자기에게 적대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수양대군이 왕권을 찬탈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자 단종은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린다. 교서는 국왕이 발표하는 문서를 말한다. "혹은 이르기를, '수양 대군이 장차 과인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다' 하여, 서로서로 의혹하고 혼란하여 안팎에 만연되니, 이것은 우리 군신을 이간시키고 국가를 동요시키려는 것이다. 만일 뜬말을 퍼뜨리는 자가 있으면 곧 잡아서 고하라. 반드시 중한 상을 주겠다". 소문은 현실화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를 제거하는 등 왕위찬탈 음모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명분은 신권이 왕권을 넘본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선양받았다. 이때 단종이 남긴 교서 내용이다. "종묘와 사직을 수호할 책임이 실상 우리 숙부에게 있는 것이다. 숙부는 선왕의 아우님으로서 일찍부터 덕망이 높았으며 국가에 큰 훈로(勳勞)가 있어 천명과 인심의 귀의하는 바가 되었다. 이에 이 무거운 부하(負荷)를 풀어 우리 숙부에게 부탁하여 넘기는 바이다". 단종복위 운동이 일어났다. 1차는 이른바 사육신이, 2차는 금성대군이 주도했다. 세종은 6명의 부인 사이에 18남 4녀를 두었다. 이중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 태어난 문종이 장남, 수양대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송강 ' 정철(鄭澈, 1536~1593)이 지은 관동별곡으로, 그 도입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정철은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가사도 지었다. 사미인곡은 임금을 사랑하는 연인에 비유한 것을, 속미인곡은 사미인곡의 후속편으로 3.4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밖에 성산별곡이라는 가사작품도 존재한다. 이때의 '성산'은 고향인 담양 지곡리 일대를 말한다. 정철은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고장 진천에 묘, 사당, 신도비 등이 위치하고 있다. 정철은 그의 나이 58살에 강화도에서 병든 몸으로 생의 마지막을 맞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의 부모가 영면해 있는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신원리에 묻히게 된다. 그러다가 40여년 후인 1665년 우암 송시열에 의해 아무런 연고가 없는 지금의 진천군 문백면 환희산 밑으로 묘가 옮겨지고 또 사당도 건립되게 된다. 이 작업은 우암 송시열이 주도했다. 역사가들은 이 부분을 매우 세밀히 들여다보고 있다. 사료에는 '묘에 물이 나기 때문에 후손들이 송시열과 상의해 묘를 이장하게 됐다'고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두 가지의 정치적인 이유가 작동했다. 정여립 모반사건
진천은 땅이 기름지고 서울서 가깝기 때문에 토착 성씨보다는 외래 성씨가 많이 유입, 번성했다. '생거진천'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나왔다. 송강정사를 세운 연일정씨, 금성군사우를 건립한 청주이씨, 신잡과 신립을 배출한 평산신씨 등이 여기에 속하고 있다.진천 이원를 세거지로 갖고 있던 평산신씨는 형 신잡의 선조임금 호종과 동생 신립의 탄금대 전투 전사를 계기로 '원대한 가문'을 형성하게 됐다고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신잡의 아들 신경희(申景禧·?∼1615)도 원대한 가문을 이어갔다. 그는 아버지 신잡의 영향력 때문에 음보로 중앙에 진출했다. 음보(蔭譜)는 공신 또는 현직 당상관의 자제로 과거에 의하지 않고 등용된 벼슬아치를 말한다.신경희는 고산현감, 면천군수, 중화부사 등을 역임하고 행주산성 대첩보(大捷報)를 제일 먼저 국왕에게 보고하는 등 승승장구하게 된다. 다음은 선조실록에 등장하는, 신경희의 행주산성 승리 보고 내용이다.상이 이르기를, "성위에서 무엇으로 방어했는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창이나 칼로 찌르기도 하고 돌을 던지기도 하였으며 혹은 화살을 난사하기도 했는데, 성중에서 와전(訛傳)되기를 '적이 이미 성 위에 올라 왔다'고 하자 성중의 군졸이 장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사망, 왜군을 저지하는데 실패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조선 조정은 파천(播遷)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된다. 파천은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 일을 말한다. 이를 처음 거론한 사람은 선조 자신이었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상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 입대케 하고 비로소 파천에 대한 말을 발의하였다. 대신 이하 모두 가 눈물을 흘리면서 부당함을 극언하였다. 우승지 신잡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일 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고 끝내 파천하신다면 신의 집엔 80노모가 계시니 신은 종묘의 대문 밖에서 스스로 자결할지언정 감히 전하의 뒤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수찬 박동현(朴東賢)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일단 도성을 나가시면 인심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연(輦·가마)을 멘 인부도 길 모퉁이에 연을 버려둔 채 달아날 것입니다" 하면서, 목놓아 통곡하니 상이 얼굴빛이 변하여 내전으로 들어갔다'. 왜군의 북진 속도는 무척 빨랐다. 자칫 임금까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 실록에 등장해 있는 내용이다. '앞서 적들이 충주에 도착하여 정예병을 아군처럼 꾸며 경성으로 잠입시켰다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삼았다. 따라서 역대 왕들은 미래 예언을 믿는 도참사상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이미 조선초기에 도참서적을 집에 간직하지 말 것을 명령하기도 한다. 세조실록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비사, 동천록, 통천록, 호중록, 도선한도참기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효유는 깨달아 알아듣도록 타이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민초들의 삶이 도탄에 빠질 때는 어김없이 도참사상이 등장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무학이 지은 도참기가 나돌았다. 선조실록에 등장해 있는 내용이다. '국초에 승려 무학이 지은 도참기에 역대 국가의 일을 말했는데, 임진년에는 '악용운근(岳聳雲根) 담공월영(潭空月影) 유무하처거(有無何處去) 무유하처래(無有何處來)'란 말이 있는데, 이것이 무자년(1386)으로부터 세상에 행해지다가 임진년에 이르러서 크게 성행했으나 아무도 그 말을 해석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왜구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조정에서 순변사 신립을 보내어 방어하
실록의 표현을 빌면, 왜군들은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에서 '풀을 쳐내듯 칼을 휘둘렀다'. 그 결과, '흘린 피가 들판에 가득 찼고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다'. 신립과 그의 종사관 김여물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달천강에 뛰어들어 자살했고, 당시 충주목사 이종장은 아들 희립과 함께 최후까지 싸우다 탄금대 앞 개활지에서 전사했다. 그 와중에 사잇길로 도망을 쳐 살아남은 장수가 있었다. 순변사에 임명됐던 이일(李鎰·1538∼1601)이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 제 1군은 파죽지세로 밀양까지 올라왔다. 그러자 조선 조성은 이일을 경상도순변사로 임명, 급히 경북지역으로 파견한다. 순변사는 임금의 명을 받아 임시로 단기간 파견되는 특사를 말한다. 선조실록은 이때의 조정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적에 대한 보고가 이르자 대신과 비변사가 빈청에 모여 청대하였으나 (임금은)비답하지 않았다. 계청하여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중로(中路)에 내려보냈다. (…) 이로부터 함락되고 패배하였다는 보고가 잇따라 이르니 도성의 인심이 크게 흔들렸다'. '청대'는 신하가 급한 일이 있을 때에 임금에게 뵙기를 청하던 일을, '비답'은 임금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인 선조 22년(1589) 비변사의 대신들은 각자 무신들을 추천한다. 능력있는 무신들을 적재적소에 배치, 국방력을 다지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것이 임진왜란에 대한 대비책인지 여부는 분명치 않다. 이때 대신 윤탁연(尹卓然, 1538~1594)은 이종장(李宗張·?~1592)을 추천했다. 이런 흐름 속에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에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 정사와 부사로 보내, 일본을 정탐케 한다. 그러나 둘이 귀국해 올린 보고서 내용은 정반대였다. 서인 황윤길은 "장차 일본이 반드시 침략할 것임으로 대배해야 한다"고 보고를 했다. 반면 동인 김성일은 "일본은 침략할 능력이 없다"는 내용을 올렸다. 당시 조정은 동인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따라서 서인인 황윤길의 의견은 묵살됐다. 당시 서인들은 이른바 '세자건저' 사건으로 정치적 수세에 몰려있었다. 따라서 선조는 서인이 전쟁의 위험성을 과장, 동인의 공격을 막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봤다. '건저'(建儲)는 왕의 자리를 계승할 왕세자를 정하는 일을 말한다. 이때 서인은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했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아 정철 등이 대거 귀양을 가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신립이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에서 패해 달천강에 투신할 때 함께 자살한 인물이 있었다. 신립의 종사관이었던 김여물(金汝山+勿·1548~1592)이다. 종사관은 장수를 보좌하는 장교로, 종6품에 해당한다. 김여물은 임란 직전 의주목사로 있었으나 '정철(鄭澈·1536~1593)의 사람'으로 몰려 파직, 의금부에 투옥돼 있었다. 정철은 이때 동인의 모함을 받고 막 실각된 시기였다. 정철은 동인의 영수인 이산해(당시 영의정)와 함께 광해군 책봉을 건의키로 했다. 이는 이산해의 계략이었다. 이 때 선조는 인빈김씨에게 빠져 있던터라 그녀의 소생인 신성군을 책봉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정철은 선조의 노여움을 샀고 같은 그 파장은 같은 당인 김여물에게도 미쳤다. 옥중의 김여물을 구해준 사람은 서애 유성룡이었다. 유성룡은 그가 무략에 뛰어난 것을 알고 자기 막중(幕中), 즉 참모로 쓰려고 했다. 그러자 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申砬)이 그의 재능과 인간 됨됨이를 알고 자기 종사관으로 임명, 함께 출전하게 된다. '신립이 청하기를, "신이 일찍이 서로(西路)의 진영을 맡았을 적에 여물을 알았는데 재능과 용맹 뿐만이 아니라 충의의 인사였습니다. 신에게 소속시켜 먼저 가게 했으면 합
임진왜란 참패의 원인을 두고 신립(申砬·1546~1592) 장군의 전략부재를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새재에서 지키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신립은 여진족을 물리칠 때 기병을 적극적으로 활용, 성과를 거뒀다. 전문가들은 신립의 이 같은 성향이 협곡보다는 탄금대 앞 개활지에 진을 치게 한 것으로 봐왔다. 또 다른 견해도 있다. 일부 사가는 신립이 조령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것은 4월 26일이다. 같은 날 왜군은 벌써 새재 밑 문경에 도착해 있었다. 충주~새재와 문경~새재는 거리상 비슷하다. 그러나 누가 먼저 새재에 도착할지는 서로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일 수 있다. 그런데 새재는 충주 사면이 더 가파르다. 이 점이 신립의 판단력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일부 사가는 보고 있다. 신립이 탄금대에 진을 친 것은 익히 알려진대로 배수의 진을 염두에 둔 결과였다. 도순변사에 임명된 신립은 처음에 150명의 군사와 함께 서울을 출발한다. 이후 제승방략 체제에 따라 모집병을 끌어들이면서 군사가 8천여명으로 늘어난다. 제승방략은 전쟁이 일어날 경우 군사를 지역단위별로 모집하고, 이를 지휘할 장수는 중앙에서
[충북일보] 주말 동안 충북지역에 많은 비가 내리면서 도내 하상도로가 통제되고 나무가 쓰러지는 등 각종 피해가 속출했다. 청주기상지청은 지난 6일부터 7일까지 시간당 20~30㎜의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했다. 시간당 30㎜의 비부터는 보통 '폭우'라고 부르는 수준으로 밭이나 하수구가 넘치기 시작하고, 홍수나 침수 같은 비 피해 위험이 매우 높아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단계다. 충북도 등에 따르면 7일 오후 2시 30분 기준 도내에는 평균 62.1㎜의 비가 쏟아졌다. 지역별로는 △증평 121.5㎜ △괴산 116.5㎜ △청주 87㎜ △진천 52㎜ △단양 49㎜ △보은 45.3㎜ △충주 45㎜ △제천 41.7㎜ △영동 7㎜ △음성 4㎜다. 폭우로 인해 도내 하상도로와 둔치주차장은 일부 통제된 상태다. 현재 도는 청주시 무심천 하상도로, 미암교 하상도로, 충주시 달천 하상도로를 통제 중이다. 하상도로에 설치된 둔치주차장은 전체 27곳 중 15곳이 통제된 상황이다. 폭우 여파로 도내 각종 사건·사고도 잇따랐다. 이날 도에 접수된 풍수해 신고 건수는 총 20건이다. 피해 유형은 △수목전도 12건 △배수불량 4건 △낙석 1건 △기타 3건으로 집계됐다.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