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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09.08.18 18:52:17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생 역정은 한마디로 '인동초'(忍冬草)라는 별명처럼 고난과 인내의 연속이었다.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민주화의 상징'이자, '한민족 최초의 노벨상 수상'으로 세계 평화와 인권의 대명사가 된 '金大中' 석 글자 뒤엔 86년의 '대하 드라마'가 자리잡고 있다.

다도해 외딴섬인 전남 신안 하의도에서 1924년 가난한 소작농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그의 어린 시절 꿈은 '사업가'.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스무살이던 1944년 목포상선회사에 취직했고, 해방 직전이던 이듬해 봄엔 친구 여동생인 첫 아내 차용해를 만나 홍일 홍업 두 아들도 낳았다.

하지만 그는 6·25전쟁 때 서울을 지킨다며 홀로 대전에 피신한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방송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1997년 대통령 당선 직후 부쩍 '바른 정치'를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능력있는 사람, 한마디로 바르게 산 사람이 성공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르게 살지 않은 사람은 실패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그래야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바르게 되고 자식들도 바르게 자랄 수 있다는 것.

그런 그가 55년 정치 역정의 첫 발을 내디딘 건 서른 살이던 1954년 목포 민의원 선거다.

하지만 내리 세 번 실패를 거듭한 7년 뒤인 1961년에야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로 국회에 입성한다.

그마저도 때마침 터진 5·16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돼, 선서조차 하지 못한 채 의원직을 빼앗기고 만다.

첫 아내와 사별했던 그는 1962년 이희호 여사를 만나 결혼했고, 1970년 봄에 정치적 대전환점이 찾아왔다.

당시 '40대 기수론'을 먼저 꺼내든 김영삼(이하 YS) 후보를 결선에서 뒤집고 일약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에 오른 것.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맞붙은 그는 장기독재를 경고하며 분전했지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이듬해인 1972년 실제로 유신 사태를 맞이한 그는 신변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망명한 뒤 유신 반대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973년 결국 그 유명한 '현해탄 납치 사건'을 당했고,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구해 강제 귀국된다.

당시 그는 납치 귀국 기자회견을 통해 "이 사건은 개인의 힘으로는 벌일 수 없는 사건"이라며 정권 차원의 납치 테러 기도임을 지적했다.

이후 가택 연금과 징역살이를 반복하던 그는 1979년 10·26 쿠데타로 7년 만에 복권된다. 하지만 최대 시련은 또다시 닥쳐왔다.

1980년 광주를 피로 진압한 신군부 세력이 '내란 음모'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다.

다행히 전세계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이 전개됐고, 덕분에 그는 형 집행 정지를 받은 뒤 1982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당시 생사의 갈림길을 오갔던 그는 지난 2004년 최종 무죄 판결을 받은 뒤 "국민과 역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걸 거듭 깨달았다"며 남다른 감회를 털어놨다.

1985년 암살 우려를 무릅쓴 채 2·12 총선을 앞두고 귀국한 그는 최초의 '여소야대' 돌풍을 일으킨 뒤, YS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의장을 맡아 1887년 6·10 항쟁을 주도했다.

이로써 대통령 직선제, 그가 그토록 꿈꿔왔던 민주화의 발판이 6·29선언으로 가시화됐다.

그러나 YS와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그는 불과 대선을 한달여 앞두고 평화민주당을 창당, 각자 대권에 도전한다.

결론은 정권 교체 실패. 여기에 '3당 합당'이란 쓴잔까지 받아든 그는 1992년 숙명의 라이벌 YS와 진검 승부를 벌인다.

하지만 민주화세력 첫 대권의 영예를 YS에 넘겨준 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3년 뒤. 그는 정계 복귀를 선언하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1997년 대선에서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손을 잡는다.

이로써 마침내 세 번의 도전 끝에 거머쥔 대권. 우리 역사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였다. 하지만 사상 초유의 'IMF 국가 부도 사태'를 고스란히 떠안으면서 그의 부담감도 컸다.

취임사에서 그는 "지금 우리는 그야말로 고난의 강 이쪽에서 희망의 저쪽을 향해 위기의 강을 건너는 중대시기에 있다"며 "이 위기의 강을 건너는 다리가 되겠다"고 강조했다.

남북 통일에 대한 오랜 염원 역시 재임 시절 그의 최대 과제가 됐다.

그리고 깊은 고민은 결국 '햇볕 정책'이란 대안을 통해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 회담(2000년)을 이끌어냈다.


노벨상 백주년이던 같은 해에 그는 한민족 최초로, 그것도 가장 영예롭다는 노벨평화상을 거머쥐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룬 뒤 정권 재창출도 이뤄냈지만, 퇴임 뒤에도 대북송금 특검과 민주당 분당 등 크고 작은 시련은 잇따랐다.

특히 충격 속에 먼저 보낸 노무현 전 대통령과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안타까움은 노구의 그를 더욱 힘들고도 분노하게 만들었다.

"우리 국민은 독재자가 나왔을 때 반드시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며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발언을 내놨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평생을 옭아맨 지역주의와 색깔론의 굴레. 하지만 그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다시 일어섰던 김대중 전 대통령.

이제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별명 '인동초'는 국민들 마음에 뿌리박고 남았다.

"민주주의는 절대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던 그의 '행동하는 양심'에 우리가 빚진 것이,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너무나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기사제공:노컷뉴스(http://www.cbs.co.kr/no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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