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대 교수가 쓴 2권의 책이 대한민국 학술원으로부터 '2011 우수학술 도서'로 각각 선정됐다. 대한민국 학술원은 최근 충북대 신영우(사학과·사진) 교수의 '광무양안과 충주의 사회경제구조'와 한주성(지리교육과·사진) 교수의 '교통지리학의 이해' 등을 포함한 4백종을 2011년 우수학술 도서로 선정, 발표했다. 분야별로는 인문학 114종, 사회과학 114종, 한국학 80종, 자연과학 62종 등이 선정됐다. 학술원은 매년 학문적인 객관성이 인정되고 또 사회 기여도가 높을 것으로 평가되는 책을 우수학술 도서로 선정해 왔다. 이와 관련, 문화관광체육부는 선정된 도서를 1천만원 미만의 분량으로 구입, 전국 공공도서관 등에 무상 배포해 왔다. 출판사 혜안 이름으로 출간된 '광무양안과 충주의 사회경제구조'(440쪽)는 신 교수를 대표 저자로 최윤오(연세대), 강은경(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김의환(〃), 서태원(〃), 박경안(〃), 임용한(〃) 씨 등이 공동 저자로 참여하고 있다. 대한제국은 광무2년(1898)부터 충주지역의 토지, 가옥, 인물, 지명, 지리 등에 대한 조사(양전·量田)를 실시했고, 그 결과를 양안(量案)으로 남겼다. 논저자들은 이 양안을 바탕으로 지주
조선시대 충청도에는 충주, 청주, 공주, 홍주(지금의 홍천) 등 4곳의 계수관이 존재했다. 이와 관련, 당시 조정은 역모나 반윤리적(일명 강상죄)인 사건이 일어날 경우 연좌제를 적용해 도(道)의 이름을 아예 바꿨다. 가령 충청도 충주에서 어떤 역모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충' 자를 빼고 '공'이나 '홍' 자를 넣었다. 이 경우 충청도는 공청도나 홍청도가 된다. 명종 때 충주에서 이른바 이홍윤 역모사건이 발생했다. 형 이홍남이 동생 홍윤이 역모를 꾀했다고 거짓 고변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충주지역 유림 40-50명이 처형 당하거나 유배됐고, 충주는 목에서 유신현으로 강등됐으며, 충청도는 청홍도가 됐다. 어떤 사가는 이 사건을 지금도 "충주지역이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저해요인이 됐다"고 평하고 있다. 당시 청홍도관찰사의 한 명으로 심수경(沈守慶·1516∼1599)이라는 인물이 부임했다. 그는 '물'(水)과 악연을 가진 관찰사로 유명하다. 1562년 정릉(靖陵·중종임금의 묘)을 이장할 때의 일이다. 경기도관찰사었던 그는 선창이 있어야 대여(大輿)가 한강을 건널 수 있음에도 불구, 이를 설치하지 않아 파직됐다. 대여는 국상 때 사용하는 큰 상여로, 1줄을 8∼15명
장마가 유난히 활성화된 모습을 보이면서 올 6월은 지역에 따라 예년(30년 평균)보다 3배 넘게 비가 많이 온 것으로 나타났다. 기상학상 6월은 장마가 시작될 수 있는 시기이나 예년 중부지방의 경우 이른바 '마른 장마' 현상을 자주 보여왔다. 장마가 시작됐다고 발표됐지만 되레 비가 적게 오면서 이른바 '장마속 가뭄' 현상도 자주 나타났다. 그러나 금년 6월은 장마전선이 근래들어 가장 활성화된 모습을 보이면서 충북 도내의 경우 지역에 따라 예년보다 3배 넘게 비가 온 것으로 집계됐다. 청주기상대 자료 검색 결과, 청주는 154.2㎜, 추풍령 151.1㎜, 충주 143.7㎜, 제천 151.6㎜, 보은 159.7㎜ 등의 6월 예년평균 강우량값을 갖고 있다. 그러나 금년은 30일 오후 현재 청주 359.2㎜(예년대비 2.3배), 추풍령 183.0㎜(〃1.2배), 충주 452.6㎜(〃3.1배), 제천 459.0㎜(〃3.0배), 보은 409.1㎜(〃2.6배) 등의 강수량을 각각 기록했다. 이와 비례해 올 6월 한달 동안의 강우일수도 예년보다 크게 늘어나 청주 13일, 추풍령·충주 11일, 제천 14일, 보은 11일 등을 각각 기록했다. 이는 예년보다 청주는 3일, 추풍
추풍령(秋風嶺)은 눌의산(743)과 난함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적으로는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관리와 경북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를 남북으로 연결하고 있다. 영동지역 3개 주요 고개 중 가장 낮은 해발고도 221m를 나타내고 있다. 종단 기울기를 나타내는 고개 구배는 지난주 소개한 괘방령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영동사면은 "이곳이 백두대간 고개 근처인가" 할 정도로 경사도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영로 정상을 넘어서면 다른 풍경이 전개된다. 김천쪽 사면은 승용차 가속이 저절로 붙을 정도로 경사도가 심한 편이다. 에서 보듯 4㎞ 남짓 사이에 해발고도가 1백m 넘게 낮아지고 있다. 추풍령 정상에 떨어지는 빗물은 역시 '이산가족'(?)이 된다. 영동사면의 물은 추풍령천-초강천 등을 거쳐 금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반면 김천사면의 물은 직지천-감천을 경유해 낙동강으로 유입된다.◇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조선시대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가깝게는 충북 황간과 경북 금산(지금의 김천)을 연결했다. 이와 관련, 대동여지도를 해설한 대동지지(1861~1866) 금산군 편은 추풍령을 '호서와 경상도의 인후가 되고 영이 높고 험하지 아니하여 봉우리가 고루 평탄하고 계곡
전회에 우리고장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이천이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갑인자 개량을 주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세조 원년(1455)과 성종 15년(1484)에 각각 을해자와 갑진자도 만들어지나 조선시대를 통털어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세종대의 갑인자였다. '이에 이천에게 명하여 그 일(갑인자 개량 지칭)을 감독하게 하고, 집현전 직제학 김돈·직전 김빈·호군 장영실·첨지사역원사 이세형·사인 정척·주부 이순지(李純之) 등에게 일을 주장하게 맡기고…'- 인용문 마지막에 이천과 갑인자를 함께 개량한 인물로 이순지(·∼1465)가 보인다. 주부(主簿)는 종친부, 내의원, 전옥서 등 종6품군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이순지는 일반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료에는 천문에 조예가 깊은 인물로 등장한다. 구한말 간행된 백과사전류로 증보문헌비고(1908)가 있다. 이 사료를 보면 당시 사람들도 북극고도, 즉 위도를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정황상 중국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습득한 것으로 보여진다. '북극고도: 한양의 북극고도는 37도 39분 15초이다. 북극은 하늘의 지도리로서 그 곳에 매여 있어서 옮기지 않는다. 지평으로부터의 고도에 높고 낮음이 생기는 것은
속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장을 지낸 송기인(사진) 신부가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를 창고에 방치하는 것은 인간의 예의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송 신부는 최근 인터넷 매체인 '오마이 뉴스'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이같이 언급했다. 그는 대담자인 김성수 '씨알누리' 편집위원의 "향후 우리나라에 과거사정리 기구가 또 필요하다고 보나"라는 질문에 "과거사정리기본법에는 진실위 활동 종결 후 과거사재단 같은 것을 만들어 후속 작업을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남미의 칠레나 아르헨티나가 그렇다"라고 밝혔다. 이어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 이미 발굴된 피해자분들의 유해 처리 문제도 마찬가지다. 국가에서 세금을 들여 발굴한 유해인데 지금 같이 창고 같은 데 방치해두는 것은 고인들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예의가 아니다"고 말했다. 이밖에 "죄 없는 고인들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적절한 기념사업과 위령사업도 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당연한 의무와 책임이다. 지금 충북대학교의 가건물에 임시로 안치하고 있는 6천여구의 유해부터 당장 제대로 된 영구적인 장소로 모셔야 한다"고 밝혔다. 앞서 본보는 지난 6월 22일자 기사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가 국가 추모시
조선시대 과학사를 논할 때 좌우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아무래도 장영실(蔣英實·?~?)과 이천(1376∼1451)일 것이다. 일반인들은 두 사람 중 장영실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그 유명한 자격루(1434)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종의 명을 받아 만든 자격루는 일종의 자동 시보장치로, 당시로서는 최첨단 과학을 상징했다. 장영실은 그 공로로 대호군에까지 승진했고, 그 은총에 보답하려고 또 다른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만들기도 했다.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천도 천문기구, 금속활자, 화약무기 등의 분야에서 장영실에 못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사학자들은 이중 금속활자 개량을 이천의 최고 업적으로 치고 있다. 고려시대 금속활자는 조선시대들어 외형상 반쪽만 계승된다. 금속활자를 만드는 것이 워낙 힘들다 보니 사대부 집안과 사찰에서는 목판으로 문집과 경전 등을 간행했다. 목판본이 많이 현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조선 조정은 고려 금속활자를 계승, 성능 개량을 꾸준히 시도했다. 그 결과, 조선초기의 금속활자는 시간적으로 계미자(태종), 경자자(세종), 갑인자(〃) 순으로 개량됐다. 바로 이천이 경자자와 갑인자 개량을 주도했다. 계미자
한반도 구석기인 화석으로 알려졌던 청원군 두루봉 동굴의 '흥수아이'가 때아닌 연대 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이번 논란은 내국인이 아닌, 프랑스 학자가 제기한 것이어서 국제적인 주목도 함께 받고 있다. 27일 국내 선사고고학계에 따르면 프랑스 국립과학원 소속의 앙리 드 룸리 교수가 충북대 박물관에 전시중인 흥수아이의 시료를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다른 AD 17~19세기라는 측정값이 나왔다. 룸리 교수는 이같은 내용을 최근 '층위학적 고환경적 맥락에서 본 남한의 이른 구석기 문화'(번역 문장) 제목의 프랑스어로 된 논저(論著)로 발간하고, 책 후미에 한국어 번역글도 곁들였다. 논저는 '젖니와 영구치의 이가 난 정도, 석회화 정도, 흡수 정도(시멘트질, 상아질 따위의 진행성 소실)를 보면, 흥수아이는 6세에서 7세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적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 연구원들 중 한 명인 아멜리 비알레는 가장 잘 보존된 1호 아이에서 시료를 추출하였으며 그 결과 흥수아이의 연대는 근세인 17세기에서 19세기 사이인 것으로 밝혀졌다.(정확하게 기원후 1630년에서 1893년 사이)'고 쓰고 있다.또 '사람뼈와 함께 유물이 출토
논문에 따르면 청주의 풍수는 장룡(長龍)이 백두대간 지기를 지니고 동쪽으로부터 흘러들어 왔고, 그것이 끝나는 평지에 청주읍성이 세워졌다. 임 전교수는 백두대간-한남금북정맥에서 갈려나온 거질대령(巨叱大嶺·것대산-와우산-당이산 흐름)을 장룡(長龍)의 산세로 파악했다. 그러나 그 뻗어내려온 지세는 풍수상 '맹호하산형'(猛虎下山形)의 모습도 하고 있다고 논문은 밝히고 있다. '古청주 동쪽인 인방(寅方)에 엎드려 있는 호랑이가 탁트인 북서쪽으로부터 불어오는 개소리의 바람(간슬風)을 맞고 좋은 먹이가 온다고 생각해서 벌떡 자리를 박차고 풍수형이니…' 청주읍성은 여느 평지성과 달리 남북 장방형 모습이 두드러지고 있다. 논문은 이에대해 그 원인을 청주 지형의 생김새와 풍수학적인 이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전자에 대해 "와우산 끝자락과 무심천 사이에는 동서간 공간이 넓지 않다"며 "따라서 자연히 남북 방향의 읍성을 쌓게 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후자에 대해서는 "풍수에서는 남북이 길거나, 동이 높고 서쪽이 낮으면 길한 것으로 보고 있다"며 "이 경우도 함께 고려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그의 논문은 청주읍성 4개 문이었던 벽인문(闢寅門·동
제5호 태풍 '메아리'(MEARI)가 당초 예상과 달리 비바람 피해를 많이 주지 않고, 대신 장기간 비를 뿌리던 장마전선을 일본 쪽으로 몰아내는 등 되레 고마운 역할을 했다. 26일 청주기상대는 "제 5호 태풍 메아리는 내일(27일) 오전 북한 내륙인 강계지역까지 진출한 후 열대저압부로 변질되면서 태풍으로서의 일생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앞서 기상청은 메아리를 중급 규모의 태풍으로 판정, 서해를 따라 북상하면서 진행반경 오른쪽에 놓인 한반도에 엄청난 파괴력을 보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위성영상 속의 메아리는 이날(26일) 오전부터 '태풍의 눈'이 관찰되지 않으면서 파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상학 이론상 태풍의 눈은 그것이 선명할수록 강한 파괴력을, 흐릿하거나 관찰되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낮은 파괴력을 보여주게 된다. 실제 이번 메아리는 26일 낮동안 서해를 따라 거의 직선에 가깝게 북상했으나 예상과 달리 '風태풍'(강한 바람)이나 '雨태풍'(많은 비) 중 어느 특징도 보여주지 못했다. 이처럼 메아리 세력이 당초 예상과 달리 성장하지 못한 것은 크게 발달한 고압부(오흐츠크해 고기압)가 동해 동북부 먼 바다에 강하게
전회에 칠서(七庶·일명 강변칠우) 사건을 언급한 바 있다. 말 그대로 7명의 서자들이라는 뜻으로, 박응서·김평손·심우영·서양갑·박치의·박치인·이경준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서자차별에 불만을 품고 모반을 기도했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이 사건은 조작 여부를 떠나 광해군이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증살하는 옥사로 이어졌다. 이른바 계축옥사다. 당시 역모를 도모했다고 진술한 인물은 박응서라고 밝힌 바 있다. 그도 서자의 서러움을 갖고 있었다. 그것의 씨앗이 된 친부는 우리고장 충주 인물로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1523∼1589)이다. 함흥차사로 유명한 박순과 한자가 같다. 그러나 함흥차사의 박순은 음성, 오늘 소개하는 박순은 충주 출신이라는 점이 다르다. 영의정 박순은 칠서사건으로 인해 결국 서자 박응서를 잃게 된다. 박응서는 진술의 댓가로 처음에는 잘 나갔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하면서 목숨을 잃었다. 박순이 첩을 얻게 된 사연도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대사헌·대제학·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 등을 두루 거친 다음 1572년(선조 5) 영의정에 올라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말이 15년이지 일국의 재상 자리에 15년간 있었다는 것은 그가 도덕, 행정
본보가 한국전쟁 발발 1년 직후의 충북도 통계자료를 확보·분석한 결과, 극단적인 여초(女超) 현상이 찾아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반영, 남성 전연령층 중 20대 초반의 인구수가 갑자기 줄어들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23일 본보는 충북도가 지난 1954년(단기 4287)에 발행한 '道勢一覽'(도세일람)이라는 통계자료를 확보, 이를 분석했다. 제 5대(1953.12~1955.08) 정낙훈(鄭樂勳) 지사 시절에 작성된 이 통계자료는 물자가 부족했던 당시 사정을 반영한 듯 책자가 아닌, 속칭 갱지묶음을 노끈으로 묶어 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전체 분량은 176쪽으로, 표지 겉면에는 법주사 쌍사자석등 그림이 등장해 있는 가운데 그 옆에는 '部外秘'라는 글자를 써놓았다. 분석 결과, 한국전쟁 발발 1년 직후인 1952년말의 충북도 전체인구는 118만9천6백88명, 가구수는 21만3천6백79호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한국전쟁 직후의 사회상을 반영한 듯, 여성 인구가 월등히 많게 집계되는 등 일시적으로나마 남녀 성별차이가 극단적으로 발생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전체인구 118만9천여명 가운데 여성 61만2천970명, 남성 57만6천718명으로
본보 6월 23일자 14면 '대동여지도와 백두대간 충북의 옛고개' 기사중 말미 '우두령 정상에서는'은 '괘방령 정상에서는'의 착오였기에 바로 잡습니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표현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이는 거꾸로 얘기하면 장인과 사위 관계는 장모와 사위에 이르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시집보낸 딸을 걱정하는 마음이 장모를 그렇게 만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전기는 이같은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당시의 사대부들은 사위도 친아들처럼 여겼다. 따라서 장인은 자신의 집 근처에 서옥(胥屋·사위의 집)을 마련해주고 노비와 토지까지 보태주기도 했다. 조선전기 선비들이 유난히 처가살이를 많이 한데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 존재한다. 흔하지 않지만 사위가 장인에게서 글을 배운 사례도 있다. 장가가서 글을 배웠다는 것은 학문의 시작이 크게 늦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사위에게 글을 가르쳐준 장인은 그 마음씨가 더 아름다워 보인다. 조선전기 경북 김천에 김시창(金始昌·1472∼1558)이라는 인물이 생존했다. 그는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효행이 지극했는지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두번 등장한다.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다음과 같이 천거하였다. 유학 김시창(金始昌)은 금산(金山, 김천 지칭)에 사는 사람으로 효행이 있고 젊어서부터 독실한 뜻으로 힘써 행하며 행동에는 옛사람을 본받았습니다. 여러번 과거에 떨
현대백화점 그룹은 서원학원 인수 노력을 왜 갑가지 철회했을까. 서원대 주변에서는 "시기가 문제였지 철회는 익히 예견됐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결국 지나치게 커져버린 인수자금이 발목을 잡았다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22일 서원학원 주변 인사들에 따르면 현대백화점 그룹은 당초 학원 인수자금으로 최대 150억원 정도를 생각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학원내 조직원 일부가 그것의 2배, 심지어 500억원의 출연금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인수를 포기하게 됐다는 설이 나오고 있다. 서원학원 인수를 진두지휘했던 경청호 현대백화점 부회장의 입지도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다. 학원 주변 한 관계자는 이에대해 "실추된 그룹 이미지 등을 생각할 때 책임론이 불거질 수밖에 없고, 그 경우 경 부회장의 입지가 상당히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며 "최악의 경우 퇴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 한편 현대백화점 그룹내의 신·구 경영진 갈등도 이번 사태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 관계자는 "신·구 경영진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며 "신경영진은 서원학원을 인수할 경우 구경영진을 청주로 내려보내려 했다는 관측
정이품송 장자목(長子木)이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됐다. 22일 국립산림과학원은 조선시대 명품 소나무의 보존 및 육성 프로젝트 일환으로 개발한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 103호)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 분양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정이품송 장자목의 이식 시기는 나무의 활착 등 생리적 현상을 고려해 금년 11월을 최적기로 잡고 있다"며 "이에 맞춰 소나무의 역사와 문화 등 다양한 주제의 세미나도 함께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산림과학원은 지난 2001년 정이품송이 갈수록 수세악화 현상을 보이자 속리산면 상판리에서 채취한 꽃가루를 강원도 삼척의 준경릉(濬慶陵) 소나무와 인공 수정을 시킨 바 있다. 이에따라 이번에 분양이 합의된 장자목은 수령이 10년 정도 되고 있다. 특히 줄기가 곧게 자라고, 뻗어나온 가지는 우산꼴 수형(樹形)을 하고 있는 등 어미목을 많이 닮았다는 소리를 있다. 전통 소나무는 조선시대까지 건축재, 가구, 목기 등에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는 등 한국의 대표 수종이었으나 최근의 기후변화 등으로 인해 그 개체수가 급격히 줄고 있다는 연구 내용이 발표된 바 있다. 이에따라 국립산림과학원은 지난 90년대부터 정이품송
괘방령(掛榜嶺)은 황악산(1,111m)과 가성산(730m)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백두대간 고개로, 행정적으로는 충북 영동 매곡면 어촌리와 경북 김천시 대항면 복전리를 연결하고 있다. 해발고도는 그리 높지 않은 300m 정도로, 현재 제 906호 지방도가 활처럼 휘어진 모습으로 지나가고 있다. 정상을 기준으로 우측이 휘어졌다. 백두대간 영로(嶺露)인 만큼 역시 물을 나누는 분수령 역할을 하고 있다. 북쪽사면의 물은 영동 어촌천→초강천을 거쳐 금강으로 흘러간다. 반면 북쪽사면의 물은 김천 직지천→감천을 경유, 낙동강으로 유입되고 있다. 괘방령은 영동 매곡면에서 남쪽 방향을 향해 달리면 "이곳이 백두대간 고개인가" 할 정도로 경사가 완만하다. 남쪽사면은 다르다. 주행거리 2㎞ 사이에 해발고도가 120m로 낮아질 정도로 경사도가 다소 가파른 편이다. 따라서 고개맛을 느끼려면 남에서 북쪽 방향으로 승용차를 운전하는 것이 좋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대동여지도(철종 12년·1861)는 경상도 金山(지금의 경북 김천)과 전라도 무주를 동서 방향으로 연결하는 선 위에 괘방령 표시를 해 놓았다. 이것이 맞다면 당시 경상도 북부(김천) 사람과 전라도 북부(무주) 사람이 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발굴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가 국가 추모시설이 건립되지 않으면서 벌써 3년 넘게 대학건물 '플라스틱 박스' 안에서 영면하고 있다. 이에따라 외국처럼 국가차원의 추모시설을 조속히 건립, 추념과 화해 그리고 인권 교육의 공간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1일 충북대 유해감식센터(소장 박선주 교수·고고미술사학과)에 따르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충북대 발굴단에 의뢰, 지난 2007~2009년 기간 동안 전국 10곳에서 보도연맹·형무소사건 등과 관련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를 발굴했다. 발굴이 진행된 곳은 충북 청원 분터골(남일면)을 포함한 충남 공주 상황동, 대전 산내 골령골, 전남 구례 봉성산, 전남 함평 광암리, 전남 진도 갈명도,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 경남 산청 원리(외공리 포함), 경남 진주 진성고개, 전남 순천 매곡동 등이다. 그 결과, 이들 지역에서는 1천617구의 유해와 틀니, 고무신, 단추, 버클, 안경 등 4천690점의 유품이 수습됐다. 이들 유해는 충북대 유해감식센터에서 4개월의 감식과정을 거친 뒤 학내 구박물관 건물 3층에 마련된 임시 안치소(공식 명칭은 추모관)로 옮
전회에 칠서(혹은 강변칠우) 사건을 언급한 적이 있다. 칠서사건은 조선 광해군대 여주 한강변에 살던 7명의 패거리가 역모를 도모했다가 적발된 것을 말한다. 박응서·김평손·심우영·서양갑·박치의·박치인·이경준 등 7명은 대부분 명문가 서자 출신이었다. 박응서의 아버지는 영의정, 서양갑은 목사, 심우영은 관찰사, 이준경은 병마절도사였다. 이들은 여주의 강변에 '무륜(無倫)'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벼슬아치가 되지 못하는 불만을 시와 술로 달랬다. 강변칠우에 포함돼 있지 않으면서 훗날 함께 화를 당한 인물이 있다. 유인발(柳寅發)이다. 실록 광해군일기에는 그의 이름이 9번 등장하나 신상 정보가 될만한 표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충주 출신인 것만 확인될뿐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 사료에 의하면 유인발은 무과에 합격했으나 어떤 이유로 유랑생활을 하던 '떠돌이 무사'였다. 이런 그가 왜 칠서와 뜻을 함께 하게 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여려 정황상 칠서 우두머리 격이었던 서양갑(徐羊甲··~1613)에게 포섭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록을 보면 서양갑은 역모를 제일 먼저 제의했고, 또 시국에 대해 나름의 철학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박
국보 제 96호인 청자구용형주자(靑磁龜龍形注子)는 중국에는 전례가 없는 고려만의 독창적인 기형(器形)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이종민 교수가 얼만전 학술지 역사와 담론에 '고려청자 용장식의 문양적 계보와 편년'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에 따르면 중국의 용(龍)은 신석기 시대에 처음 등장했고, 우리나라에는 한사군 시기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용문양 장식은 이후 삼국시대 각종 유물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나, 노출빈도가 압도적으로 많아진 시기는 고려였다. 고려 조정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각종 의장에 용문양을 사용했으나, 일반 백성들의 이용은 법으로 엄격히 금지했다. '정종(靖宗) 9년 4월에 중외(中外)의 남녀가 비단에 금으로 수놓거나 용봉(龍鳳)의 무늬를 새긴 의복을 입는 것을 금하였다.'(靖宗九年四月, 禁中外男女, 錦繡·銷金龍鳳紋·綾羅衣服)- 그러나 고려청자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용문양은 중국 대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고려 도공들이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이 교수는 그 근거로 △청자쌍용필가(고려·사진)와 요삼채쌍용필가(요나라) △청자용장식향로(고려)와 청자용장식향로편(송나라) △청자상감용문매병(고려)과 백자
상소문(上疏文)은 신하가 국왕에게 올리는 글로, 봉장(封章), 주소(奏疏), 진소(陳疏)라고도 한다. 국가 최고 권력자에게 올리는 글인 만큼 어느 정도 서식을 갖추어야 했다. 겉봉투에는 '上前開折(상전개절)', 또 뒷면은 이어 붙인다는 의미로 '臣署名(신서명)'이라고 표시했다. 조선 명종대 우리고장 단양군수를 지낸 인물로 황준량(黃俊良·1517∼1563)이 있다. 이황의 제자였던 그는 단양군수로 재직하던 1557년 명종 임금에게 '민폐 10조'의 상소문을 올린다. 16세기 후반이면 지금으로부터 대략 5백년전이다. 따라서 상소문의 행간을 들여다보면 당시 단양 사람들의 생활상을 어느정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단양은 궁벽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해 상소문을 읽는 사람의 코끝을 찡하게 한다. 상소문은 '신은 장구(章句)나 아는 보잘것없는 유자(儒者)로서 경세(經世)하는 재주가 없는데 외람되이 군수의 책임을 맡았으니 잔폐된 고을을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책임이 중합니다'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어진다. '우거진 잡초와 험한 바위 사이에 있는 마을 집들은 모두 나무 껍질로 기와를 대신하고 띠풀을 엮어 벽을 삼았으며 전지는 본래 척박해
속보= 본보가 미리 보도(6월 9일자 1면)한대로 증도가자(證道歌字)에 묻은 먹이 고려시대 것이라는 과학적 분석 결과가 또 다시 나왔다.한국지질자원연구원 홍안 책임연구원은 경북대 사회과학연구원과 청주고인쇄박물관이 17일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개최한 증도가자 학술대회에서 "증도가자 중에도 먹이 비교적 많이 묻은 佛(불)ㆍ悲(비)ㆍ大(대)ㆍ人(인)ㆍ源(원)ㆍ醯(혜)ㆍ胱(광) 7개 금속활자를 분석한 결과 이같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홍 연구원은 '증도가자에 잔류 된 먹의 탄소연대 분석'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증도가자는 금속으로 이루어진 활자체이므로 시료 자체에서 탄소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며 "따라서 시료에 부착된 먹을 측정 대상으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悲자에 묻은 먹은 AD 1210~1279년에 속할 확률이 68.2%, AD 1160~1280년에 속할 확률이 95.4%, 佛자의 먹은 AD 1030~1160년(68.2%), AD 1010~1210년(95.4%)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또 大자의 먹은 AD 770~980년(94.0%), 人자 먹은 AD 810~1030년(95.4%)이라는 수치가 나왔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해 KBS 1T
충북의 대표적인 식물종의 하나인 속리산 망개나무와 괴산·진천 미선나무가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에서 곧 해제될 것으로 알려지면서 지역 환경단체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16일 환경부는 멸종위기종 야생 동식물 지정·해제(안)을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2005년에 지정된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 221종 중 38종은 해제되고 59종은 신규로 지정됐다. 이에따라 멸종위기종은 총 21종이 증가한 242종이 지정·관리될 전망이다. 해제종에는 속리산 망개나무를 포함해 △바다사자 등 포유류 3종 △가창오리 등 조류 9종 △가는돌고기 등 어류 3종 △고려집게벌레 등 곤충류 3종 △무척추동물인 긴꼬리투구새우 1종 등 38종이 포함됐다. 이밖에 해제 후보종에는 진천·괴산의 미선나무를 포함해 △하늘다람쥐 등 포유류 4종 △조류 5종 △양서파충류 및 어류 각 1종 곤충류 2종 △고등식물5 종 등이 선정됐다. '해제 후보종'은 이번에 처음 도입한 제도로 1∼2년간의 서식지 및 개체수 등에 대한 모니터링 등의 절차를 거친 후 멸종위기종 지정·해제 여부가 최종 결정하게 된다. 환경부는 망개나무 해제 사유에 대해 "충북과 경북 일대에 20여 자생지가 있으며 개체 수 감소는 일어나지 않고
간신(姦臣)은 공통적으로 공권력을 사유화하고, 또 국법상의 기능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하거나 변형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유자광, 임사홍, 이이첨, 윤원형, 홍국영 등에서 이런 모습이 발견된다. 이이첨(李爾瞻·1560~1623)은 선조~광해군 연간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가 관료시절 초기부터 간신의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다. 그는 효자였고, 그 때문에 현감재직중 관찰사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상인(喪人) 전 평강 현감 이이첨은 천성이 효우(孝友)하고 제행이 고결하여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김에 애경이 지극하였다. 임오·계미년 사이에 그의 아버지와 계조모가 서로 잇달아 죽었는데 여막에 거처하면서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거의 멸성(滅性)할 지경에 이르렀고…"- 왜군이 한반도를 유린하면서 조선 역대 왕의 영정은 모두 불탔다. 그러나 태조와 세조의 영정은 홍여율(洪汝栗)과 이이첨의 결사적인 보존노력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작은 노력이 아닌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이첨은 광릉 참봉으로서 봉선전의 영정을 받든 것으로 조정의 명령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첨이 변란 처음부터 피난할 생각을 하지 않고(…) 또 이번에 적의 불길 속에서 영정을 받들어 내왔
우두령(牛頭嶺)은 삼도봉(1,177m)과 황악산(1,111m) 사이에 위치하는 고개로 720m의 해발고도를 지니고 있다. 영로(嶺路) 상으로는 충북 영동군 상촌면과 경북 김천시 구성면을 연결하면서 도내 최남단 고개가 되고 있다. 대간(大幹)이 지나는 만큼 분수령 역할도 하고 있다. 영동 쪽으로 흐르는 물은 궁촌천, 초강천 등으로 하천폭을 넓히며 금강으로 들어가고, 김천 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에 합류한다. 고개의 경사도는 남쪽사면(김천)보다 북쪽사면(영동)이 훨씬 가파른 모습을 하고 있다. GPS고도표(그림참조)에서 보듯, 북쪽사면은 정상에 다가갈수록 그 경사도가 마치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대동여지도는 정교함과 함께 나름의 규칙성을 지니고 있다. 김정호는 지도를 제작할 때 인(人)과 물(物)의 흐름이 많은 길은 선(線)으로 표시하고 10리마다 점을 찍었다. 반면 인물의 왕래가 적은 고개는 이름만 표기하고 연결선을 그리지 않았다. 우두령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大東地誌·1863)는 이른바 쌍둥이 사료이다. 대동여지도를 글로 풀어 보충 설명을 한 것이 대동지지다. 여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충북일보] 주말 동안 충북지역에 많은 비가 내리면서 도내 하상도로가 통제되고 나무가 쓰러지는 등 각종 피해가 속출했다. 청주기상지청은 지난 6일부터 7일까지 시간당 20~30㎜의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했다. 시간당 30㎜의 비부터는 보통 '폭우'라고 부르는 수준으로 밭이나 하수구가 넘치기 시작하고, 홍수나 침수 같은 비 피해 위험이 매우 높아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단계다. 충북도 등에 따르면 7일 오후 2시 30분 기준 도내에는 평균 62.1㎜의 비가 쏟아졌다. 지역별로는 △증평 121.5㎜ △괴산 116.5㎜ △청주 87㎜ △진천 52㎜ △단양 49㎜ △보은 45.3㎜ △충주 45㎜ △제천 41.7㎜ △영동 7㎜ △음성 4㎜다. 폭우로 인해 도내 하상도로와 둔치주차장은 일부 통제된 상태다. 현재 도는 청주시 무심천 하상도로, 미암교 하상도로, 충주시 달천 하상도로를 통제 중이다. 하상도로에 설치된 둔치주차장은 전체 27곳 중 15곳이 통제된 상황이다. 폭우 여파로 도내 각종 사건·사고도 잇따랐다. 이날 도에 접수된 풍수해 신고 건수는 총 20건이다. 피해 유형은 △수목전도 12건 △배수불량 4건 △낙석 1건 △기타 3건으로 집계됐다.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