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許筠·1569∼1618)은 역모사건과 연루, 당시 표현대로라면 '역적의 괴수'가 돼 능지처참을 당했다. 따라서 허균의 유작은 공개적으로 간행되지 못하고 몰래 필사돼 전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것중에 '성소부부고'(惺所覆부藁)라는 문집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최원정은 세상을 내리보고서 벼슬하지 아니하고 화나 면하기를 바랐다. 하루는 제현(諸賢)이 정암의 집에 모였는데(…) 원정이 붓을 잡아 벽에다 산수를 그리자 김정(金淨)이 시를 지었는데…' '맑은 새벽 바위 산 봉우리 우뚝한데(淸曉巖峯立) / 흰 구름은 산 기슭에 비꼈네(白雲橫翠微) / 강촌에는 사람 모습 보이지 않고(江村人不見) / 강변 나무 저 멀리 아득하누나(江樹遠依依).' 본문중 최원정은 최수성(崔壽山+成·1487∼1521), 정암은 조광조(趙光祖·1482~1519)를 일컫고 있고, 김정(1486~1520)은 우리고장 보은출신으로 사약을 받고 절명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세 사람이 한 공간에 등장했고, 또 시화까지 나눴다는 것은 이들 세 사람이 친구 사이를 넘어 사상적 동지였음을 의미한다. 조광조와 김정은 본란을 통해 어느정도 소개됐으나 최수성은 처음 접하는 이름이다. 그
고대 백제인들이 일본열도에 대규모로 건너간 것은 삼국시대 전란도 주요 원인의 하나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마한·백제 사람들의 일본열도 이주와 교류'를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가 얼마전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충북대 양기석(역사교육과) 교수는 '백제인들의 일본열도 이주'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먼저 혼용되고 있는 귀화인(歸化人), 도래인(渡來人) 등의 단어를 언급, "이중 도래인이 가장 적확한 표현"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일본인 의식 속에 귀화인은 삼한을 복속시킨 이래 皇化를 사모하여 건너 온 한반도 사람들을 의미하고, 도래인은 우수한 선진 문물·기술을 가지고 일본열도로 들어온 외부 사람을 뜻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양 교수는 고대 백제인들의 일본열도 이주를 본격적으로 거론, "단기간에 일회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닌 3차례에 걸쳐 집단성을 띤 대규모 집단 이주가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서기 등에 근거해 이를 △1기: 4세기말~5세기 중엽 △2기: 5세기 후반~6세기 전후 △3기: 7세기 후반 등으로 구분했다. 양 교수는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 "1기가 속하는 시기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대규모 백제 공격이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 모과나무(사진)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됐다. 29일 문화재청은 "연제리 모과나무와 함께 제주시 도련동 귤나무류를 천연기념물로 제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청원 연제리 모과나무는 키 12.5m, 가슴둘레 3.7m로 국내 모과나무 중 가장 오래 됐고 규모도 가장 크다. 수령은 500년 정도로, 줄기 안쪽은 썩었지만 건강 상태는 비교적 양호간 것으로 관찰되고 있다. 연제리 모과나무는 조선시대 '무동처사'(楙洞處士)와 관련된 이야기도 구전되고 있어, 인문학적 가치도 함께 지녔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충북도지 전설편에 따르면 조선 세조 때 인물인 류윤(柳潤)은 단종이 폐위되자 이곳에 은거했다. 그후 세조의 부름이 있었으나 "자신은 모과나무처럼 쓸모없는 사람"이라며 불응했다. 이에 세조는 모과나무 懋(무) 자를 쓴 '무동처사'(楙洞處士)라는 어서(御書)를 하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과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는 이번이 처음으로, 이곳 마을 이름도 '모과울'이다. 이번 지정 예고는 30일 동안 일반인, 관련학자, 토지소유자, 지방자치단체 등의 의견을 수렴한 후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는 한 국가 천연기념물로 정식 지정을 하게 된다. / 조혁연
중부 혁신도시 건설 현장인 진천 덕산면과 음성 맹동면 일원에서 원삼국시대 대형 옹관묘 4기가 발굴됐다. 29일 한국선사문화연구원(원장 이융조)은 지난 9월부터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 이같은 성과를 거뒀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굴된 대형 옹관묘(독무덤)는 장동옹(배부른 토기)과 단경호(목짧은 토기)를 맞댄 후 토광 내에 가로로 매장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특히 진천 일대에서는 대형 옹관묘가 발굴된 사례가 극히 적어 향후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한편 이번 발굴 조사에서는 철제 화살촉, 철도끼, 구슬 등 당시 문화상을 복원할 수 있는 유물도 다수 수습됐다. / 조혁연 대기자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고려말기 혁명파들은 불교를 비판했다. 특히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지은 정도전이 가장 혹독하게 불교를 비난했다. 이때의 '불씨'는 석가모니를 의미한다. 고려 말기 혁명파들이 불교를 공격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당시 절(寺)은 '사찰경제'라는 용어가 생겨날 정도로 막강한 경제력을 쥐고 있었다. 당시 혁명파는 이 경제력을 빼앗기 위해 사찰을 공격했다. 따라서 조선전기 서원(書院)은 절을 파괴한 후 그 자리에 세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백운동 서원의 후신)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본래 숙영사(宿永寺)라는 절터였다. 소수서원 입구에 서있는 당간지주(보물 제 59호)가 이를 증명한다. 조선의 3대 기인으로는 대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 북창 정렴 등이 꼽히고 있다. 이중 정렴(1506~1549)은 천문·의학·복서·그림 등 모든 방면에 두루 뛰어났다. 이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실록에 남겨져 있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옛날에 정염이란 자가 있어 심통술(心通術)을 얻었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이 사람이 의술을 잘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이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학문의 공도 있었는가"
중종의 정비는 단경왕후(端敬王后·1487~1557)로, 신수근의 딸이다. 1499년(연산군 5) 중종이 진성대군(晋城大君)으로 있을 때 그와 결혼하여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이후 중종반정과 함께 성희안(成希顔) 등 반정 추진파에 의하여 살해당했다. 신수근이 중종반정에 반대한 이유는 연산군이 그에게 매부가 되기 때문이었다. 단경왕후도 단순히 혈연적인 이유로 정비 자리에서 폐위돼 본가로 쫓겨났다. 그녀에게는 자식이 한 명도 없었다. 2백년 가까운 영조 때가 되서야 왕후로 복위됐다. 1515년 담양부사 박상(朴祥·1474∼1530)이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함께 상소문을 올려,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주장했다. 김정은 전회에도 밝힌 적이 있지만 우리고장 보은출신이다. '지금 내정(內政)의 주인이 비었으니, 마땅히 이때를 계기로 쾌히 결단하셔서 신씨(愼氏)를 곤후(坤后)의 자리에 앉히시면, 천지의 마음이 흠향할 것이요 조종의 신령이 윤허할 것이고, 신민의 희망에 부응할 것입니다'.- 본문 중 '곤후'는 왕후를 말한다. 앞서 조광조를 거론한 이유가 있다. 상소문을 본 조광조가 둘을 적극 두둔하고 나섰다. 이는 세 사람이 사상적 동지였음을 의미하고
사건이 완전 종료되지 않았지만 북한의 이번 연평도 도발에 대한 현정부 대응은 천안함 사건 때와는 사뭇 달랐다는 국가위기관리학 측면의 분석과 평가가 나왔다. 충북대 국가위기관리연구소 이재은(사진·행정학과 교수) 소장은 24일 "국가위기관리학 측면에서 이번 사건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며 "상황이 다소 유동적이지만 23일 정부 대응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대충 나온 상태"라고 말했다. 국가위기관리연구소는 전국 국립대학 중 충북대에만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다. 지난 2009년에 설립돼 각종 재난 매뉴얼 수립과 학술대회 등을 개최하고 있다. 이 교수에 따르면 국가나 자연재해와 관련된 위기는 이른바 '예방', '대비', '대응', '복구' 등 4단계를 통해 대응 매뉴얼을 작성하고 분석·평가를 하는 것이 보편화돼 있다. 이중 예방과 대비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단계, 대응과 복구는 막 사건이 발생한 이후의 단계를 의미하고 있다. 이 교수는 예방 단계에 대해 "정부도 북한이 민간인 거주지역까지 무차별 폭격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라며 "그러나 국가위기 대비 측변에서 보면 이것도 예방 매뉴얼에 포함돼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 대비 단계에 대해서는 "북한의 국지도발 가능성에 대비한
사건이 완전 종료되지 않았지만 북한의 이번 연평도 도발에 대한 현정부 대응은 천안한 사건 때와는 사뭇 달랐다는 국가위기관리학 측면의 분석과 평가가 나왔다. 충북대 국가위기관리연구소 이재은(사진·행정학과 교수) 소장은 24일 "국가위기관리학 측면에서 이번 사건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며 "상황이 다소 유정적이지만 23일 정부 대응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대충 나온 상태"라고 말했다. 국가위기관리연구소는 전국 국립대학 중 충북대에만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다. 지난 2009년에 설립돼 각종 재난 매뉴얼 수립과 학술대회 등을 개최하고 있다. 이 교수에 따르면 국가나 자연재해와 관련된 위기는 이른바 '예방', '대비', '대응', '복구' 등 4단계를 통해 대응 매뉴얼을 작성하고 분석·평가를 하는 것이 보편화돼 있다. 이중 예방과 대비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단계, 대응과 복구는 막 사건이 발생한 이후의 단계를 의미하고 있다. 이 교수는 예방 단계에 대해 "정부도 북한이 민간인 거주지역까지 무차별 폭격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라며 "그러나 국가위기 대비 측변에서 보면 이것도 예방 매뉴얼에 포함돼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 대비 단계에 대해서는 "북한의 국지도발 가능성에 대비한
통행금지하면 박정희 정권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조선시대에도 통행금지가 존재했다. 당시에는 2경(밤10시)이 되면 일월성신에게 밤새 안녕을 기원한다는 뜻으로 종을 28번 쳤다. 이를 '인경'(쓰기는 人定)이라고 불렀다. 당시 사람들은 일월성신이 밤하늘을 28구역으로 나눠 관장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국의 주요 종(鐘)을 28번 쳤다. 통행금지 해제는 비교적 이른 시간인 5경(새벽 4시)에 33번 타종했다. 파루(罷漏)라고 불렀다. 이는 제석천이 이끄는 33천(天)에 하루의 안녕과 태평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통금을 위반한 자는 다음날 곤장형을 받았다. 그러나 긴급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관에서 발급한 '표신'(標信)을 휴대하면 자유로운 통행이 가능했다. 임시 통행증의 일종인 표신은 네모진 나무패 모양으로, 그 전면에는 '開門', '閉門' 글자를, 뒷면에는 어압(御押·임금의 수결)을 새겼다. 사림파가 무더기로 축출되는 기묘사화 때도 표신과 관련된 내용이 등장한다. '윤자임이 크게 외쳐 말하기를, "공(公)들은 어찌하여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니, 이장곤 등이 답하기를, "대내(大內)에서 표신(標信)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왔소" 하였다. 윤자임이 말하기를, "
흔히 면지(面誌)하면 깨알같은 글씨와 한문투 문장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면지가 등장, 지역 역사계와 출판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청원군 부용면(면장 이규상)이 얼마전 (재)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원장 장호수)과 공동으로 면지 '부용 이야기'를 출간했다. 240여쪽 분량의 부용면지는 '삶의 터전 이야기', '삶의 흔적 이야기', '부용 사람 이야기', '삶의 틀 이야기', '기억의 조각들' 등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제목에 이야기라는 말이 들어간 것에서 보듯 부용면의 역사를 사진과 글을 통해 스토리 식으로 편집, 종래 면지와 확연히 다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삶의 이야기' 편은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과거 사진을 통해 일제 강점기부터 새마을운동 시절까지의 관내 6개 리 역사를 복원하고 있다. 빛바랜 사진은 1934년 달산(문곡3리) 공회당 낙성식이 있었고, 그때 그 공회당은 초가지붕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32~33쪽·이하 쪽 생략) '삶의 흔적 이야기' 편은 부용과 물에 관련된 내용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지금은 폐쇠된 부강 약수터(63), 금강변 미루나무숲(69) 등과 관련된 사진과 추억담을 만날 수 있다. '부용 사람 이야기'
조선시대 사극을 보면 개나리 봇짐을 진 선비가 어디론가 부지런히 걷는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이와 관련, 적지 않은 사람들이 봇짐 안에 옷가지가 들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당연히 옷이라야 맞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개나리 봇짐 안에는 열에 아홉은 면포(木綿)가 들어 있었다. 조선 조정은 지폐인 저화(楮貨)를 대중적으로 유통시키려 노력했으나, 뜻대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유는 면포 때문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백성들이 이를 현물화폐 로 사용하면서 저화 유통량은 좀처럼 늘어나지 않았다. 고려말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몰래 반입한 목화는 조선 백성들의 의류생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양민들은 베옷만 입은 채 겨울을 나는 경우가 허다분했다. 그만큼 조선시대 보온환경을 열악했다. 중종 때 이를 다루기 위한 어전회의가 열렸던 모양이다.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자가 곡식 심기를 폐지하고 목면을 심어서 말리(末利)를 좇게 되었으니, 곡식이 귀하고 면포가 천하게 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면포가 천하면 마땅히 백성이 추위에 떨지 않을 것 같지만 그 폐해는 또한 베가 거칠게 되어 추운 자가 옷으로 만들 수 없게 되었으니…'- 본문
직지의 위상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이제부터라도 직지를 자화자찬식으로 홍보하는 것이 아닌 고인쇄 분야의 전문연구 인력을 집중 육성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또 직지 세계화를 빙자한 문자 사대주의적 태도도 조속히 수정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010 서지학회 추계 학술 발표회가 지난후 청주대학교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경북대 남권희 교수는 '증도가자와 동국이상국집' 제목의 발표문을 통해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과 현존하지 않는 '상정예문(詳定禮文)' 모두 증도가자로 인쇄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근거로 약자와 이체자(異體字)의 쓰임이 같고, 또 같은 줄내에 글자의 겹침이 없는 점 등을 거론했다. 남교수 주장이 맞다면 직지는 지금까지 누려온 위상을 일정 부분 양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 이론상 금속활자는 '母', 그것으로 찍어낸 활자본은' 子'의 관계가 되는 가운데, '앞선 시기 母'의 존재가 계속 거론되기 때문이다. 남교수의 주장은 이른바 현재 진행형으로, 학문 흐름상 그 내용은 언제든지 뒤바뀔 수는 있다. 그러나 그동안 청주시는 직지를 자화자찬 식으로 홍보하는데만 몰두한 결과, 남교수의 주장에 대해 어떤 대응 논리나
중종은 부인과 관련해 줏대가 없는 왕이라는 평가를 받고는 한다. 정비인 단경왕후가 남편 중종에 의해 폐위된 후 제1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파평윤씨가 1515년 원자(후에 인종)를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사망했다. 그녀의 나이 25이었다. 그리 문제될 것 없었던 이 사건이 조선 조정에 피바람을 몰고 왔다. 얽히고 얽힌 인척 관계가 시발점이었다. 장경왕후 파평윤씨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제2 계바가 된 여자는 후궁 출신의 문정왕후 파평윤씨였다. 이로써 서열상으로 전임 왕비였던 장경왕후 일족인 윤임 등은 대윤(大尹), 후임 왕비인 문정왕후 일족인 윤원형 등은 소윤(小尹)으로 부르게 됐다. 대윤과 소윤은 가까운 일가였다. 윤임(대윤의 영수)의 증조부 윤사윤은 윤원형(소윤의 영수)의 고조부인 윤사흔 형이었다.그러나 정치 권력은 이같은 일가촌수를 고려해 주지는 않았다. 윤원형의 소윤이 윤임의 대윤 일파를 축출하기 위해 이른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소윤 일파는 대윤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중종의 8남)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했다고 무고했다. 그리고 궁궐 밖으로는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서 계림군(桂林君·성종의 3남)을
중국 한나라는 이른바 효렴(孝廉)과 현량(賢良)을 천거, 관리로 임용했다. 이때의 효렴은 효성이 깊으면서 청렴한 사람, 현량은 어진 인물을 일컫고 있다, 조선 중종 때 이 제도가 수입됐다. 그 유명한 현량과(賢良科)이다. 누가 이 제도를 주장했는가를 둘러싸고는 다소의 논란이 있다. 어떤 사료는 조광조를, 또 다른 사료는 안당(安·, 1461∼1521)을 지목하고 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안당을 거론하고 있다.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하고, 김굉필, 정여창을 추증하고, 조광조, 김식, 박훈을 뽑아 올리고, 김안국, 김정, 송흠, 반석평을 추천해 썼으며, 천과(薦科)를 설치하는 등 모든 일에 공의 힘이 컸다'.- 본문중 천과는 현량과를 의미한다. 중종도 처음에는 "옛날 어진 재상이 널리 인재를 구하느라고 토포악발(吐哺握髮)까지 한 것은 모두 이를 가장 급무로 여겼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등 처음에는 현량과를 지지한다. '토포악발'은 주공(周公)의 고사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의역하면 인재를 중시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훈구파는 사림파가 자파 사람들을 등용시키기 위해 현량과 제도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들의 줄기찬 상소는 중종의 마음을 움직였다.
청주야구장 조명탑이 지난 11일 돌풍에 부러진 사건은 기상학적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 면이 있어 이런저런 해석을 낳고 있다. 15일 청주기상대에 따르면 당시 같은 시간대의 청주지역 최대순간풍속은 12.4m/s를 기록했다. 이는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돌풍)의 속력이 초당 12.4m로 기록됐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기록된 12.4m/s는 청주지역의 역대 최대순간풍속 값에 미치지 못하고, 또 우리나라 최대 극값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어서 갖가지 해석을 불러오고 있다. 청주기상대가 최대순간풍속을 기록하기 시작한 해는 1971년으로, 이후 1999년에 기록된 32.0m/s 값이 역대 최고극값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지난 11일 돌풍보다 19.6m/s나 강한 풍속이다. 풍속은 곧 에너지이기 때문에 바람의 강도(풍압)가 그만큼 강한 것을 의미한다. 전국적인 비교를 할 경우 11일 청주지역의 돌풍은 그 모습이 훨씬 더 왜소해 지고 있다. 지난 2000년 8월 31일 태풍 피라피룬이 흑산도에 상륙했을 때 무려 58.3m/s의 최대순간풍속을 기록했다. 이 영향으로 흑산도 송전탑 일부가 부러졌다. 그러나 지난 11일의 돌풍은 위 두 사례보다 훨씬 약함
지난달말 충주시 금가면 장태산 구릉 정상에서 발굴된 나말여초(추정)의 집수정(集水井) 유구가 갈수록 지역 고고학계의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함께 발굴된 유물들도 복합성을 띄고 있어, 충주 선사~중세시대 문화상을 복원하는데 적지 않은 정보를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충북도문화재연구원(원장 장호수)은 충주-음성 고속도로 건설현장인 충주시 금가면 장태산 구릉에 대한 발굴조사 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청동기 주거지, 백제초기 옹관묘, 토광묘, 토성 토루, 환호, 집수정, 화덕, 소형금동불상, 마형대구 등 청동기부터 나말여초까지의 유구와 유물들을 무더기로 발굴했다고 지난달말 밝혔다. 이중 집수정은 △인근에 목계나루가 존재하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장미산성이 존재하는 점 등의 입지를 지니고 있어, 지역 고고학계의 호기심을 갈수록 자극하고 있다. 발굴을 맡았던 노병식 책임조사원은 "일대는 육운과 수운이 만나는 교통의 결점점"이라며 "따라서 당시 존재했던 나말여초의 토성은 교통로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집수정 안에서는 통일신라 소형 불상과 함께 도기편이 많이 나왔다"며 "따라서 집수정이 마지막으로 경영된 시기는 통일신
조광조 뒤의 인물로 김안로(金安老)가 있다. 그의 아들은 중종의 딸 효혜공주와 혼인했다. 김안로는 이를 배경으로 권력을 마구 휘둘렀다. 송인수(宋麟壽·1499∼1547)가 부당함을 처음으로 지적했다. 그는 김안로의 미움을 사 1534년 제주목사로 좌천됐다. 이때 송인수는 병을 핑계로 임지에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다시 빌미가 돼 다시 사천으로 유배됐다. '송인수를 경상도 사천에 유배시켰다. 사신은 논한다. (...) 안로가 심히 그를 미워하여 제주 목사로 임명해 쫓아내어 인수가 그 고통을 참을 수 없어 고을을 버리고 올라왔다'.- 1537년 이른바 정유삼흉(丁酉三兇) 사건으로 김안로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처럼 몰락했다. 정유삼흉은 김안로, 허항, 채무택 등으로, 이들은 문정왕후의 폐위를 도모하다 발각돼 유배 후 사사됐다. 김안로가 죽자 바로 송인수가 복권됐다. 그가 여러 중앙직을 거친 끝에 1543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때 정자 기영정(耆英亭)이 전남 장성 삼계면에 세워졌다. 이 정자를 배경으로 유명한 기녀담 하나가 탄생한다. '공은 부안(扶安) 기생을 좋아하면서도 은근한 정은 통하지 않고 다만 데리고 같이 다닐 뿐이었다. (...) 임기를 마
간언의 일종인 간쟁은 그 방법과 정도에 따라 풍간(諷諫), 순간(順諫), 직간(直諫), 쟁간(爭諫), 함간(陷諫) 등으로 구분된다. 풍간은 사실을 돌려 비유해 간하는 것, 순간은 말을 온순히 하여 임금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고 간하는 것, 직간은 정면으로 정직하게 간하는 것, 쟁간은 시비를 쟁론해 군주가 행하도록 강제하는 것, 함간은 일신의 목숨까지도 돌보지 아니하고 간하는 것을 말한다. 훈구파와 사림의 대립이 점점 격화되기 시작했다. 이때 이른바 화살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멀지 않아 궁궐에 피비린내가 진동할 것임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사신은 논한다. 어떤 사람이 밤중에 글을 화살에 묶어서 의정부의 문과 사간원의 문에 쏘았었는데 그 글에 '김정, 조광조, 이자, 한충, 이약빙 등 30여 인이 국정을 변경하고 어지럽혀서…' 하였다'.- 전회에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옥에 갖히자 이약수라는 인물이 성균관 유생의 소두가 되어 상소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역시 훈구와 사림이 격돌하는 모습의 하나였다. '성균관의 유생 이약수 등 1백 50여 인이 궐하(闕下)에서 상소하고 궐문을 밀고 난입하여 곧바로 합문 밖에 가서 통곡하니, 곡성이 궐정(闕庭)에 진동하였다'.- 앞
멧돼지는 이동시 6~8부 능선 선호, 교미후 홀애비 생활, 추위를 싫어하는 습성 등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근래들어 왜 청주 도심에 맷돼지가 자주 출몰하고 있는지를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어, 궁금증을 더 키우고 있다. 이와 관련, 생태 전문가들은 △서식지 단편화설 △도토리 해거리설 △초겨울 교미기 설 등을 거론해 왔다. 서식지 단편화설은 개체수가 늘어날 경우 그 우두머리 격인 녀석이 휘하의 식구를 데리고 분가, 새로운 행태의 서식공간을 찾는 동물습관을 말한다. 지역 한 생태 전문가는 "산림 울창으로 개체수가 많아지다 보니 분가를 하는 과정에서 우두머리 멧돼지가 새로난 길로 인해 방향을 잃고 도심으로 흘러들 수 있다"며 "멧돼지가 단수가 아닌 떼거리로 출몰하는 점이 이를 어느정도 설명한다"고 말했다. 해거리설은 열매가 많이 열리는 해(일명 성년)와 다소 적게 열리는 해(일명 휴년)가 교대로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살구나무와 도토리가 열리는 참나무 등에서 비교적 뚜렷히 나타나고 있다. 어느 해에 해거리 모습이 찾아오는가는 분명치 않으나, 금년은 이것과 관계없이 기상이변으로 인해 모든 열매나무가 흉년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 전문가는 "
여러 사람의 의견이나 주장을 표명하기 위하여 연명으로 작성한 문서를 '연판장'이라고 말한다. 조선시대에도 연판장 사건이 종종 일어났다. 이때 연명의 서두에 이름을 올린 사람을 소두(蔬頭)라고 불렀다. 지금도 그렇지만 소두가 되려면 다소의 용기가 필요하다. 민원의 주모자로 낙인 찍히면서, 사건이 어느정도 잠잠해 지면 사건을 추궁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한때 중종의 총애를 받았던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옥에 갖혔다. 그러자 성균관 유생 150명이 들고 일어났다. 이들이 경복궁 합문을 밀치고 들어와 곡성(哭聲)으로 집단 항의를 했다. 이 부분이 실록에 자세히 적혀 있다. '성균관의 유생 이약수 등 1백 50여 인이 궐하(闕下)에서 상소하고 궐문을 밀고 난입하여 곧바로 합문 밖에 가서 통곡하니, 곡성이 궐정(闕庭)에 진동하였다'.- 본문 중에 이약수(李若水·1486~1531)라는 이름이 보인다. 바로 이날 행동의 소두가 이약수였다. 그러나 유생들의 이날 집단 시위는 관철되지 않았다. 되레 주모자를 의금부에 가두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이는 중종이 조광조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접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임금
행정중심복합도시 예정지인 충남 연기군 남면 나성리 금강변에서 원삼국시대 빙고(얼음창고)와 백제시대 금동신발 한 쌍이 각각 발굴됐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국고고환경연구소(소장 이홍종·조치원읍 소재)는 그 동안 금강변 북쪽 기슭에 위치한 나성리 유적층에 대한 발굴조사 작업을 진행해 왔다. 그 결과, C구역에서 원삼국시대(3~4세기) 얼음창고를 발견했다고 8일 밝혔다. 연구소측은 발견된 터를 빙고로 추정한 이유로 △창고형 구덩이 치고는 지하가 너무 깊고 △구덩이 밑으로 자갈이 깔린 배수로가 발견됐으며 △인근에 금강이 위치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허의행 조사부장은 "겨울철 금강에서 얼음을 잘라다 이곳에 저장, 이듬해 봄까지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며 "일본사료에도 이른 시기 백제인들이 얼음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말했다. 만약 이번 터가 빙고로 최종 확인될 경우 백제 빙고로는 첫 사례일 뿐 아니라, 조선시대 빙고보다 천년 이상 앞선 것이 된다. 이밖에 같은 구역에서 초기 삼국시대~백제시대 주거지 3기와 토광묘 6기, 가마 6기, 수혈유구(구덩이) 67기, 구상유구(도랑) 15기, 굴립주 건물지(기둥을 땅에 박은 건물) 12기 등 총 109기에 이르는
우리나라 주부들의 쌀구입 행동은 생각보다 다소 복합한 대략 9개 정도의 정형화된 패턴을 지닌 것으로 조사됐다. 따라서 이를 쌀마케팅 전략에 응용할 경우 지역 농민과 도내 지자체들이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충북대 이준배(사진·농업경제학과) 교수가 얼마전 한국농업경제학회지인 '농업경제연구'(제 50권 제 4호)에 'SOM 혼성군집 모형을 이용한 쌀시장 세분화' 논문을 발표했다. 일반에 다소 생소한 'SOM'은 이른바 인공 신경망 이론을 이용한 것으로, 소비자들의 주관적인 심리특성이나 내면적인 가치관은 통계학적 수치로 끌어내기 위해 이 교수가 개발했다. 이 교수는 서울에 거주하는 284명의 주부들의 쌀구입 행태를 파악하기 위해 이들을 일대일로 면접한 후 이를 앞서 거론한 'SOM 혼성군집 모형 이론'으로 분석했다. 분석 인자는 연령, 소득, 학력, 가족수, 브랜드 선호여부, 구매 강도, 맞벌이 여부 등 라이프 스타일을 분석할 수 있는 것들이 동원됐다. 그 결과, 284명의 주부들이 보인 쌀구입 행동은 A~I형까지 9개 군집 중의 하나에 속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A군집은 40~50대 중산층으로, △소비행동에 우월감을 가지고 △브랜드 지향적이
'상사였던 남곤이 북경에서 병을 얻어 거의 위태하였는데, 공이 애써 약으로 구료(救療)하였다. 서장관 한충이 공에게 귀엣말로, "저놈이 반드시 사류(士流)를 적지(赤地)로 만들 것이오" 하였다. 공은 정색하고 말리면서 오히려 보호하기를 더하였다'.-- 전회에 등장했던 내용으로, 본문 중 '공'은 이자(李 耕의 井대신 子·1480~1533)이다. 정황상 이때 두 가지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남곤이 병을 얻어 위험에 빠지자 이자가 정성어린 간호를 했다. 둘째, 사림파인 한충이 욕설을 써가며 훈구파인 남곤을 비난했다. 북경에서 일어났던 이때의 일은 두 사람 개인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한충은 이때 남곤과 맺은 악연으로 결국 35살 젊은 나이에 석연치 않은 옥사를 당한다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당시 사람들은 석연치 않은 죽음에 남곤이 관여된 것으로 의심했다. '장차 심리하려던 밤에 옥중에서 죽었는데, 음경(陰莖)이 한 자 넘게 빠져나와 있었다. 액살(縊殺·목졸려 죽음)당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는 안로(安王+路)가 편찬한 필사본으로,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반면 또 다른 당사자였던 이자는
기묘사화 직전의 훈구파 대표선수는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남곤과 심정이 신진 사림을 가장 모질게 학대했다. 따라서 후대 사람들은 두 사람을 '곤정(袞貞)'으로 부르며, 소인배의 대표적 인물로 지목했다. 이런 남곤이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서장관(書狀官) 한충, 이자 등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 주청사는 조선시대 때 정치나 외교적으로 청할 일 또는 알려야 할 사항이 있을 때 중국에 임시로 파견된던 사신을 말한다. 서장관은 사신 일행 중 기록 의무를 맡은 관리로, 왕에게 직접 보고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1518년 사신 일행이 명나라 수도 연경(지금의 북경)에 도착했다. 이때 남곤과 한충 사이에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했다. '상사였던 남곤이 북경에서 병을 얻어 거의 위태하였는데, 공이 애써 약으로 구료(救療)하였다. 서장관 한충이 공에게 귀엣말로, "저놈이 반드시 사류(士流)를 적지(赤地)로 만들 것이오" 하였다. 공은 정색하고 말리면서 오히려 보호하기를 더하였다'.-- 본문 중 공은 동행한 이자를 말한다. 정황상 한충(韓忠·1486∼1521)과 남곤 사이는 평소부터 안 좋았고, 그 이면에는 한중이 "士流를 붉게 만들 것"이라고 말한 것에서
[충북일보] 주말 동안 충북지역에 많은 비가 내리면서 도내 하상도로가 통제되고 나무가 쓰러지는 등 각종 피해가 속출했다. 청주기상지청은 지난 6일부터 7일까지 시간당 20~30㎜의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했다. 시간당 30㎜의 비부터는 보통 '폭우'라고 부르는 수준으로 밭이나 하수구가 넘치기 시작하고, 홍수나 침수 같은 비 피해 위험이 매우 높아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단계다. 충북도 등에 따르면 7일 오후 2시 30분 기준 도내에는 평균 62.1㎜의 비가 쏟아졌다. 지역별로는 △증평 121.5㎜ △괴산 116.5㎜ △청주 87㎜ △진천 52㎜ △단양 49㎜ △보은 45.3㎜ △충주 45㎜ △제천 41.7㎜ △영동 7㎜ △음성 4㎜다. 폭우로 인해 도내 하상도로와 둔치주차장은 일부 통제된 상태다. 현재 도는 청주시 무심천 하상도로, 미암교 하상도로, 충주시 달천 하상도로를 통제 중이다. 하상도로에 설치된 둔치주차장은 전체 27곳 중 15곳이 통제된 상황이다. 폭우 여파로 도내 각종 사건·사고도 잇따랐다. 이날 도에 접수된 풍수해 신고 건수는 총 20건이다. 피해 유형은 △수목전도 12건 △배수불량 4건 △낙석 1건 △기타 3건으로 집계됐다.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