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간신으로 유자광과 임사홍이 꼽힌다. 이중 임사홍(任士洪·?∼1506)은 갑자사화를 주도, 정국을 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임사홍이 본래부터 간신 기질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자신이 효령대군(세종의 형)의 손녀 사위가 되는 등 문벌집안 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세 아들 중 두명이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 임사홍은 이때까지만 해도 관료직을 무난히 수행, 정치적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당시 우승지(정3품)로 있던 임사홍이 성종에게 우리고장 청주와 관련된 계목을 올렸다. 계목은 중앙 관부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문서의 일종을 말한다."청주에 사는 전 훈도 경연(慶延)은 효로써 어버이를 섬겨서 생존했을 때의 봉양과 사망했을 때의 장례에 있어서 각기 성경(誠敬)을 다하였으므로, 향당에서 칭송하며 사모하고 있습니다."-향당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향촌 자치조직으로, 달리 유향소라고 불렀다. 지금으로 치면 지역 유지들의 모임으로 볼 수 있다. 이같은 보고가 있은 후 성종이 직접 경연을 궁궐로 불러 올렸던 모양이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오간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버이를 위하여 물고기를 구하였으니, 너의 효심(孝心)이 실로 지극하다. 그러나, 물에
봉작(封爵)은 왕자·외척·공신에게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등의 명예 칭호를 부여하는 제도를 말한다. 다섯 단계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5등 봉작제'라고도 한다. 동서양은 물론 우리에서도 조선 초기까지 사용했다. 그러나 태종대 이르러 중국의 명호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사대(事大)에 어긋난다고 판단, 봉군제를 채택하게 된다. 봉군제는 '○○君'으로 칭하는 것을 일컫는다. 크게 보면 '봉군'도 봉작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으나 의미는 다소 다르다. 봉작제는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될 때 부활된다. 주체 의식이 복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회에 한상경(韓尙敬·1360~1423)이라는 인물을 소개한 적이 있다. 한명회에게 큰할아버지가 되는 한상경은 일반에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청주한씨 문중으로부터는 높은 추앙을 받고 있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으로부터 옥새를 넘겨받아 이를 태조 이성계에게 건넨 인물이 바로 한상경이다. 그는 효심도 남달랐다. 한상경은 자신의 병이 깊어지자 부모보다 먼저 죽을까봐 노심초사했다. "내가 병이 있은 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다만 먼저 죽어서 늙은 어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자
지리적으로 이름없는 남쪽산(1097m)과 북쪽산(1057m)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고도 810m로, 저수령(850m)에 이어 백두대간 충북 고개중 두번째로 높다. 행정적으로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경북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를 남북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곳도 지난주 소개한 고치령과 마찬가지로 충북과 경북의 도계가 영로 정상에 위치하지 않는다. 경북땅이 고개 정상을 넘어 북쪽으로 약간 더 들어와 있다. 따라서 북쪽사면 고개 밑에는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가 위치하고 있다. 이는 영춘 의풍리 일대가 조선시대 순흥도호부에 속했던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경상도 순흥도호부는 금성대군 역모사건 후 행정구역 자체가 해체돼 지도에서 사라졌다. 이후 1687년(숙종9) 옛 행정지위를 회복했으나 의풍 일대는 영춘현 소속으로 그대로 남았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영춘을 생활권역으로 하고 있다. 경사도는 남쪽사면이 훨씬 가파르고 굽이가 많다. 특히 고갯길 바로 옆에는 낭떠러지가 곳곳에 위치, 운전대를 잡은 초행자는 어깨에 힘이 잔뜻 들어가게 된다. 마구령은 정상 일부를 제외하고 양사면 모두 포장돼 있다. 그러나 위 모습 때문에 산사람들로부터 '백두대간의 차마고
칠거지악(七去之惡)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존재하던 제도로, 조선시대 이혼의 근간이 됐다.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는 것,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 부정한 행위를 하는 것, 질투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밖에 나병·간질 등의 유전병을 가진 경우, 말이 많은 것, 도둑질 행위 등도 포함된다. 대부분의 이유는 봉건적 가족제도의 필연성에서 나왔다.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함은 불효의 표현이고, 아들이 없음은 가계 계승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일이며, 부정한 행위는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세종대에 이맹균(李孟畇·1371∼1440)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을 지내는 등 관료로서는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질투심이 강한 부인이씨 때문에 불행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질투심이 병적으로 강했던 부인 이씨는 집안의 종을 의심, 그녀를 죽였다. 의정부에서 이를 인지, 세종에게 직접 보고를 한다. '의정부에서 사인(舍人) 이인손(李仁孫)을 시켜 아뢰기를, "이맹균의 처 이씨가 죄 없이 집 여종을 죽였으므로, 전하께서 듣고 깜짝 놀래시어 곧 헌부(憲府)로 하여금 논핵하게 하였는데…'- 아내의 질투는 칠거지악의 네번째에 해당한다.
청주는 창조적 도시 재생의 길로 들어섰고, 또 그것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관련 발표회가 학·행정계 전문가와 지역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주 충북대 개신문화관에서 열렸다. '살고 싶은 청주시만들기 협의회' 등이 주최하고 충북대 산학협력단 등이 후원한 이날 세미나는 나기정 주민참여센터 이사장의 사회 속에 4시간 넘게 진행됐다. 발표자로는 최효승 청주대 명예교수, 김동호 충북대 초빙교수, 이중훈 청주시 공원녹지과장, 권순택 중앙동 상권활성화 추진위원장, 이종현 사직2동 예술상회 대표, 이용상 청주시의원, 최종숙 사창동장 등이 참여했다. 이중 김 초빙교수의 청주 근대유산 재창조, 이 공원 녹지과장의 손바닥공원, 이용상 시의원의 개신동 마실커뮤니티, 최 동장의 사창동 중문지구 환경정비 등이 쉬우면서 생활과 직접 연결되는 주제여서 더욱 관심을 끌었다. 먼저 김 초빙교수는 청주에 존재하는 대형 근대산업유산을 언급, 구청주연초제조청 부지는 세계적 미술장 유치 등 예능산업 메카로, 구 청주KBS 부지는 창작 스튜디오 등 멀티미디어센터로 활용하는 것이 좋다고 밝혔다. 이밖에 구 복대교회에는 시민단체가 컨소시엄 형태로 운영하는 시민문화컨벤션센터, 구 국정원 부지에
이성계가 '칼'로 조선을 건국했다면, 정도전은 그 '머리'에 해당한다. 정도전을 조선 건국의 총설계사로 부르는데는 나름의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는 먼저 '조선경국전'(1394·태조3)을 지어 이성계에게 바쳤다. 조선왕조의 헌법으로 불리는 조선경국전은 국호(國號)부터 관리선발까지 국가 운영에 대한 내용을 망라적으로 담았다. 그는 또 한양 천도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등 수도 경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숭례문 등 한양 4대문 이름도 그가 지었다. 그러나 그는 의원내각제와 성격이 비슷한 신권(臣權)정치를 추구했다. 일종의 권력분점인 셈이다. 여기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수복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 과정에서 사병혁파가 거론됐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방원(후에 태종) 입장에서 볼 때 이는 국정을 쥐락펴락 하는 것이자, 2인자 위치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정도전은 이방원의 기습을 받고 희생됐다. 정도전은 아들을 많이 뒀다. 이들도 유탄을 피할 수 없었다. 세 아들이 살해되거나 자살했다. '도전이 아들 4인이 있었는데, 정유(鄭游)와 정영(鄭泳)은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 급함을 구원하러 가다가 유병(遊兵)에게 살해되고, 정담(鄭湛)은 집에서 자기의 목을 찔
임금의 행차 때 어가(御駕) 주위에서 왕을 모시는 사람 또는 그런 행위를 호종(扈從)이라고 한다. 이때의 '扈'는 '따르다', 從은 쫓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호종이라는 표현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나타난다. '용례감찰사에서 방을 붙여 이르기를, "호종하는 신하들이 서로 돌아보고 웃고 이야기하거나 조복(조회 때 입는 옷)을 입고 걸어 다니는 것을 금지한다.…" 하였다.'- 융복은 철릭과 주립으로 된 옛 군복으로 평시에는 무신만 입었다. 철릭은 허리에 주름이 잡히고 큰 소매가 달렸다. 당상관(정3품 이상)은 남색이고 당하관은 분홍색이다. 주립은 한자로 '朱笠'이라고 쓴다. 말 그대로 무인들이 쓰던 붉은 갓을 말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중국 국경인 의주까지 피난갔다. 여차하면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선조가 내세운 논리는 '나라를 빼앗기면 나중에 도로 찾을 수 있지만 임금이 죽으면 나라도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종전이 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86명의 신하를 1~3등급으로 나눠 공신으로 녹훈했다. 이른바 호성공신(扈聖功臣)이다. 얼마전에 성달생(成達生·1376∼1444)이라는 인물을 가볍게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조선 무과 수석 합격생 1
남쪽 국망봉(1,421m)과 북쪽 형제봉(1,177m)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고도는 760m다. 청원-보은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피반령이 360m인 점을 감안하면,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있다.행정적으로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를 정남-정북으로 연결하고 있다.(대동여지도 참조) 고치령은 여타 백두대간 고개와 행정적으로 약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백두대간 고갯길 정상을 사이에 두고 충북과 경북의 도계(道界)가 형성돼 있다. 그러나 이곳 만큼은 경북도계가 고개 정상을 넘어 백두대간 북쪽 사면까지 들어와 있다. 따라서 고치령(古峙嶺) 정상과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 사이에는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가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경북의 도계 조형물(사진 참조)도 백두대간 북쪽 사면에 세워져 있다. 충북으로서는 썩 기분좋은 모습은 아니다. 고치령 영로는 남북사면 모두 S자형 굴곡을 많이 지니고 있다. 경사도는 경북 사면이 다소 가파른 모습이어서, 승용차 브레이크를 자주 밟게 된다. 반면 충북 사면은 5월에도 잔설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응달이 짙게 지고 있다. 대간(大幹)인 만큼 마루금(능선)은 분수령 역할을 정확히 하고 있다.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椒水里)에 거동하시는 데도 (…)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그 유명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1445)의 상소문이다. 요약하면, "왜 초정에까지 와서 한글창제 작업에 급급하십니까" 정도가 된다. 현재 초정약수에는 세종대왕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바로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초정약수 지칭)에서 급급하게 하시어'라는 구절이 동상 설립의 근거가 됐다. 그러나 최만리 상소문은 그가 혼자 올린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실록의 서두에는 '최만리 등이 상소하기를'이라는 복수의 표현이 등장한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상소에 동참했던 나머지 이름들이 세종에 의해 하나씩 거명된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김문(金汶)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실록의 행간을 보면 세종은 지극히 논리적인 성격으로 화를 좀처럼
"비록 선조들이 한 잘못이라 해도 알릴 것은 알려야 한다고 봅니다" 일본 에히메(愛媛) 신문사의 슌타로하타(泰俊太郞·40·사진) 기자가 일본 후비보병 제 19대대의 이동 루트를 취재하기 위해 지난 21일 충북을 방문했다. (사)동학민족통일회(회장 박남수) 회원 30여명은 이날 충북대 신영우(사학과·사진) 교수의 현장 설명을 들으며 충주의 일본군 가흥병참부, 수안보 안보병참부, 보은 동학대도소, 옥천 증약전투지 등 도내 동학 유적지를 순례했다. 서울에서 합류한 하타 기자도 이들 동학 회원과 동행, 동학군 진압의 한 부대인 일본 제 19대대의 충북 이동 루트를 취재했다. 일본 제 19대대는 미나미 고시로(南小西郞) 소좌가 지휘하던 군대로, 이 부대가 국내에 투입된 1894년 11월 중순 이후 동학혁명군 희생자가 급증했다. 특히 19대대는 충주-청주-문의-증약-옥천 등의 루트를 따라 도내 동학혁명군을 추격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17일 일부 소대가 동학 최후의 전투로 불리는 보은 북실전투에 참전한 바 있다. '후비보병'(後備步兵)은 한국군에는 존재하지 않는 편제로, 제대 후 다시 소집된 나이많은 예비역 보병을 일컫고 있다. 그는 취재 동기에 대해
한때 목욕물에 하반신만을 담그는 반신욕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이와 관련,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신욕을 일본 목욕문화라고 알고 있다. 꼭 그렇지도 않은 면이 있다. 조선시대 임금 중 태조, 태종, 세종, 세조, 숙종 등이 온천을 자주 찾았다. 이중 숙종의 목욕 방법은 좀더 독특했다. 실록을 보면 그는 항상 배꼽 아래만을 목욕물에 담갔다. '오시(午時)에 임금이 온정(溫井)에 나아가 두부(頭部)를 5백 바가지 감고, 배꼽 아래를 각 이각(二角) 동안 담갔다.'- 숙종이 왜 반신욕을 했는지 밝혀진 것은 없다. 정황상 배꼽 윗부분에 피부 질환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이각'(二角)은 30분 정도의 시간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1시간의 1/4을 '일각'이라고 불렀다. 온천은 아니지만 세종대왕은 격무로 얻은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우리고장 청원 초정약수를 찾았다. 1444년(세종 26) 때의 일이다. 이때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최만리·?~1445)가 그 유명한 상소문을 올리게 된다. "왜 여기까지 와서 나라에 급한 것도 아닌 한글창제 작업에 급급하느냐"고 강하게 따진다.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초수리)에 거동하시는 데도 (…) 계달하는 공무에
성종은 보위에 무사히 오르자 그 고마움으로 74명의 공신을 선정했다. 이른바 좌리공신(佐理功臣)이다. 1등은 신숙주·한명회 등 9명, 4등은 황효원·김순온 등 45명이었다. 이중 황효원(黃孝源·1414∼1481)에 대한 인물평이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그는 형조참판을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했다. 성종이 보위에 오르기 전인 1460년의 일이다. 이때 황효원은 우리고장을 매우 잘 다스렸던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 관찰사 황효원에게 유시하기를, "경이 내가 백성을 사랑하는 뜻을 몸받아서 마음을 다하여 어루만지며 사랑하여 선정의 명성이 널리 퍼졌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있다. 이민(吏民)이 상서하여 경을 남겨두기를 청하므로 내가 실로 은혜를 가상히 여겨 민정을 어기지 않고 경을 그곳에 남겨두겠다."'- 임기가 다 되어 이임을 해야 하나 도민들의 간청에 의해 충청감사로 다시 남겨두겠다는 뜻이다. 세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효심'까지도 배려를 한다. 그는 충청도에서 가까운 경상도 상주 인물이었다. '경(卿)은 비록 늙은 어미가 있지마는 길이 멀지 않으므로 경(卿)이 마음대로 내왕하면서 서로 만나도록 할 것이니, 더욱 힘써서 공(功)을 나타내도록 하라"
장마전선(정체전선의 일종·일기도 참고)이 되살아나는 등 올 여름 날씨의 변덕이 극성스러울만치 계속 되고 있다. 9월중 한반도에 '가을장마'(일명 제2 장마)가 종종 찾아오나, 8월 중순의 장마전선 출현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17일 청주기상대에 따르면 지난 7월 1일부터 오늘(17일)까지 강우현상이 나타나지 않은 날은 단 10일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비가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온만큼 적어도 광복절이 지나면 본래 여름 모습을 되찾을 것으로 기대됐었다. 그러나 이같은 기대는 지난 16일부터 장마전선이 되살아나면서 실망으로 바뀌고 있다. 특히 이번 장마전선은 중부지방 상공에 남서-동북 방향으로 걸쳐 있어, 충북지역도 그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상청은 이에 대해 "남부지방은 내일 새벽이나 오전까지 강한 비가 이어지겠다"고 말해, 장마전선이 점차 남진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되살아난 장마전선이 한반도 중부지방을 사이에 두고 남북진동을 할 경우, 지긋지긋한 올 우기현상은 예상보다 더 길어질 것으로 보인다. 기상학상 가을장마 현상은 일본열도에는 뚜렷히 나타난다. 반면 한반도에는 9월중에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그 기간을 길지 않았다. 따라서
해발 696m로, 북쪽의 소백산 제 2연화봉(1,357m)과 도솔산(1,316m) 사이에 위치한다. 행정적으로는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와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를 서북-동남 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역시 이곳에 떨어진 빗물은 최종 도착지가 다르다. 경북사면의 빗물은 영주 남원천, 내성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반면 충북사면의 빗물은 단양 죽령천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들어 충주호에 합류한다. 고개 경사도는 비슷하면서 다른 느낌을 준다. 충북사면은 고갯마루에서 8부 능선까지는 비교적 완만하나 고개 밑에 이를수록 굴곡이 심한 내리막길이다. 경북사면은 경사가 급하면서 굴곡이 심한 모습이 다소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나타난다. 그 구절양장 모습은 희방사 계곡 입구에 이르서야 끝이 난다. 죽령 경북사면은 옛길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어 지난 2007년 국가명승 제 30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충북사면은 농로로 포장되면서 옛길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같은 죽령 고갯길이면서 충북 사면은 명승에서 제외됐다. ◇지리지 속의 죽령문헌에 등장하는 우리나라 제 2호 고갯길이다. 삼국사기 아달라이사금 5년조는 '춘삼월에 죽령을 열었다'(春三月 開竹嶺)고
청주읍성 복원 작업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는 가운데 조선후기 청주진영(鎭營)은 내륙 최고의 군사 요충지로 인식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당시 소속 군병들은 군사적 업무 외에 호랑이 잡기, 하천둑 쌓기, 임금 온천호위 등에 나서는 등 격무에 시달렸던 것으로 나타났다.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서태원 전임연구위원의 '조선후기 청주진영연구' 논문에 따르면 당시 충청도에는 홍주(지금의 홍천전영), 해미(좌영), 청주(중영), 공주(우영), 충주(후영) 등 5곳에 진영이 설치됐다. 진영은 병마절도사(지방사령관)의 명령을 받는 지역군대로, 지금으로 치면 시방위군 정도에 해당한다. 5개 진영의 전체 규모는 2만1천6백여 명으로, 이 가운데 청주진영이 4천485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와 관련, 서 전임연구위원은 청주진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당시 조정이 내륙 최고의 군사 요충지로 인식했다고 논문에서 밝혔다. 그는 그 이유로 "추풍령을 염두에 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라며 "당시 조정은 임진왜란 때처럼 추풍령이 뚫릴 경우 청주에서 차단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부연 설명으로 "청주진영이 추풍령에서 너무 먼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와 한때(1683년) 옥천으로 이전한다"며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사관(史官)이 됐고, 이때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실었다. 이것이 발단이 돼 일어난 것이 조선시대 첫번째 사화인 무오사화(연산군 4년·1498)다. 김종직은 단종을 죽인 수양대군 세조를, 의제(초나라 회왕)를 죽인 항우(項羽·bc232~202)에 비유해 세조를 은근히 비난했다. 스승 김종직의 시신이 무덤에서 꺼내져 부관참시됐고, 사관 김일손은 "파당을 만들고 세조를 무고했다"는 죄로 연산군에 의해 능지처참됐다. 김일손은 성격이 강한 것으로 구전되나 낭만적인 모습도 많이 발견된다. 그가 우리고장 남한강 물길을 따라 내륙여행에 나섰다. '한 고개를 넘어 단양 지경에 들어서면 장회원이 된다. 그 아래에서 말고삐를 늦추면 점점 아름다운 지경으로 들어가는데, 홀연히 쌓인 돌무더기가 우뚝 솟고 총총한 봉우리가 첩첩이 푸르러 좌우가 아득하고 동서로 현혹되어 아무리 교력(巧歷)이라도 셀 수가 없다.'- 장회원은 지금의 장회루를 말한다. 이곳에 서면 구담봉, 옥순봉, 단구협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구담봉은 기암이 거북을 닮았다고 해서, 옥순봉은 희고 푸른 바위들이 힘차게 솟아올라 마치 죽순과 같다하여 불여진 이름이다. 단구
조선시대 사관(史官)은 매일 임금의 거둥이나 관리들의 잘잘못을 기록했다. 바로 사초(史草)다. 사관들은 이 사초를 매달마다 1책 혹은 2책으로 묶었고, 그해 마지막 달에 왕에게 책수만을 보고했다. 이렇게 사초가 책으로 묶어진 것은 시정기(時政記)라고 불렀다. 비밀을 생명으로 하는 사초는 실록을 편찬하는데 기초사료로 사용됐다. 종이는 펄프가 나오기 전까지 귀한 존재였다. 조선시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록이 편찬돼 제구실이 끝난 사초는 세초(洗草)라고 해서 물에 빨아 먹물을 뺀 후 다시 사용됐다. 조선시대 모든 왕들은 사초를 보고 싶어했다. 우리나라 역대왕 중 최고의 성군은 단연 세종대왕이다. 그는 인품이나 능력면에서 나라를 가장 잘 이끌었다. 그러나 세종대왕도 인간인 이상 사초를 무척 보고 싶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자 당시 몇몇 대신들이 "어떠한 경우든 사초만은 안된다"고 버텼고, 세종은 짜증섞인 반응을 보인다. "지금 친히 관람하고자 하는 것은 착하고 악한 행실의 자취를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임신년의 왕위에 오를 때에 임금과 신하 사이의 몰래 서로 이야기한 말을 대부분 사신(史臣)이 알지 못한 것이 많다. (…) 사신이 어찌 능히 임금과
행정적으로 충북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와 경북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를 남북으로 연결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북쪽의 도솔산(해발 1,1314m)과 남쪽의 황정산(1,077m)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850m이다. 산세는 경북 사면이 훨씬 가파르고 굽이가 매우 심하다. 속리산 말티고개 정도는 아니지만, 이른바 구절양장의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반면 충북사면은 영로 아래가 가파른 편이지만, 해발고도가 높아질수록 경사도가 완만하다. 따라서 충북사면서 고갯길 정상에 이르는 길은 마치 고원지대를 지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얼마전까지 이곳에 소백산 관광목장이 운영됐었다. 백두대간인 만큼 마루금(능선) 자체가 분수령 역할을 한다. 북쪽 사면의 물은 남조천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반면 남쪽사면의 물은 한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저수령의 어원은 경상도 사면에서 생겨났다. 저수령 중턱 쯤에는 저수골, 안골 등의 마을이 현존하고 있다. 저수골에서 저수령의 지명이 생겨났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단양과 은풍(지금의 예천군 하리면) 사이에 도로를 의미하는 선이 남북 방향으로 그어져 있다. 그리고 선과 백두대간이 종횡으로 교차되는 지점에 '故峴'이라는 고개 이름이 표
완벽(完璧)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 조나라 혜문왕은 '화씨의 벽'(和氏之璧)이라는 희귀한 구슬을 갖고 있었다. 원래 한 신하의 애장품이었으나 강제로 빼앗았다. 강대국 진나라의 소양왕이 이 소문을 듣고 욕심이 생겼다. 그는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 15성(城)과 구슬을 맞바꾸자고 청했다. 혜문왕은 소양왕의 속내가 뻔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했다. 이때 그 유명한 인상여(印相如)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진나라로 가 화씨지벽을 일단 소양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구슬을 받아 쥔 소양왕은 "과연 훌륭하구나"라고 감탄사를 연발하면서도 15성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를 예상하고 있었던 인상여가 "그 구슬에 한 군데 조그만 흠집이 있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소양왕이 이를 무심코 내주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인상여의 다음 말이 이어진다. "우리는 신의를 지키느라 구슬을 지참했으나 왕은 15성의 약속을 지킬 듯 싶지 않으니 이 구슬은 일단 소생이 지니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생의 머리와 더불어 이 구슬을 부숴 버리겠습니다."- 인상여는 구슬을 무사히 조나라로 도로 가져올 수 있었다. 여기서 '완벽귀조'라는 표현이 생겨났고, 그 준말이 '완벽'이다.
충북대가 개교 60주년을 맞아 앞으로의 인재 육성 방향을 '21세기형 선비'로 정했다. 자칫 고리타분하게도 느껴질 수 있는 우리 조상들의 선비정신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일까. '선비'는 한자에서 온 말이 아닌 순우리말로, 용비어천가에 '션븨'가 보인다. 그러나 그 어원적 의미를 알기는 쉽지 않다. 한자 '선비儒' 자에서 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어문 전문가들에 따르면 '儒'자는 고대 기우제와 관련이 있다.갑골문을 보면 비(雨)가 오라고 턱수염(而)이 많이 난 사람(人)이 제문을 읽는 모습이다. 비를 구한다는 뜻이다. '~구한다'는 훈을 지닌 한자로는 '需'(수) 자가 있다. 역시 본래는 비를 내려달라는 뜻을 지녔다. 지금도 그런 면이 있지만, 공공행사에서 제문을 읽을 정도의 사람이면 상당한 지식인에 속한다. 바로 '儒' 자는 고대 지식인을 상징했고, 그것이 철학·종교적 의미로 확장된 것이 '儒敎'(유교)이다. 이번에 아이디어를 낸 충북대 김귀룡(철학과) 교무처장은 고결, 기개, 원칙, 배려, 신념 등을 선비정신의 핵심으로 봤다. '충청도 양반'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양반도 비슷한 색상의 이미지를 지닐 수 있으나 김 처장은 이는 배제ȣ
전회에 우리고장 충주와 질긴 인연을 가진 인물로 이순몽을 소개했다. 그는 친구 황상(黃象)의 애첩인 월하봉이라는 기생과 사통했다. 그 결과, 자신은 물론 월하봉의 머리가 빡빡 깎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황상이 이를 알고 반인(伴人)과 노복(奴僕)을 거느리고 가서 순몽과 월하봉을 잡고 모두 그 머리를 바싹 깎았으므로, 명하여 의금부에 가두고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유유상종(類類相從) 중에 친구를 만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온 말이 '그 친구의 그 친구'라는 표현이다. 이순몽의 친구 황상에게도 궁금증의 시선이 쏠린다. 황상 역시 무신 출신이다. 그는 세종 연간에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할 때 휘하의 중군장으로서 큰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도 친구 이순몽과 마찬가지로 '육봉'(肉棒)을 잘못 휘둘러 망신을 당하게 된다. 가뭄이 크게 들자 태종이 전국적으로 금주령을 내렸다. 황상이 이를 어겼다. 그것도 기생까지 끼고 술을 마시다 관원에게 적발됐다. '전 소감 황상을 영흥부로 귀양보내었다. 이때에 크게 가물어서 금주령이 엄하였는데, 황상이 의순고별좌로서 주모(酒母)의 집에 들어가 기생을 대하고 술을 마시다가 헌부(憲府)에 적발되었다.'- 유배형이
조선 창업자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은 경주 등 전국 5곳에 보관돼 있었다. 세종 연간에 이를 보수하기 위한 작업이 한양에서 실시됐다. 이때 영남대로를 따라 올라온 경주의 어진이 우리고장 충주에 일정기간 머물게 된다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임금의 초상화는 매우 극진하게 다뤄졌다. 특히 창업자 이성계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때문에 당시 조정은 어진을 안전하게 운송할 중앙 고위관료를 전국에 파견했다. 이때 경주에 파견돼 충주까지 올라온 인물이 판중주원사 이순몽(李順蒙·1386∼1449)이었다. '판중추원사 이순몽(李順蒙)을 경주에, 예조 판서 김종서(金宗瑞)를 전주(全州)에 보내어 태조(太祖)의 쉬용을 봉영(奉迎)하여 오게 하였으니, 이는 장차 고쳐 그리기 위함이었다.'- 판중추원사는 귀에 익숙치 않은 관직명이지만 품계가 꽤나 높았다. 조선전기에는 정이품이었으나, 세조 12년에 판중추부사로 고치고 종일품으로 한 단계 상향 조정했다. 이순몽은 무신 출신으로 남으로는 대마도, 북으로는 여진족을 정벌하는 등 가는 곳마다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따라서 태종과 세종의 총애가 남달랐다. 여기에는 그의 아버지 이응(李膺·1365∼1414)이 좌명공신에 오른 점도 크게
행정적으로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남북 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종전까지 백두대간은 충북과 경북을 동-서 방향으로 연결했다. 그러나 남한 백두대간은 계립령(鷄立嶺·하늘재)에 이르러 변곡점을 맞는다. 충북의 지형은 마치 오른쪽(동쪽)으로 고개를 돌린 누에(蠶)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오른쪽으로 꺾어지기 시작하는 지점이 계립령이다. 때문에 이곳부터의 백두대간은 충북과 경북을 남북으로 연결하게 된다. 주변 산세는 북쪽으로는 포함산(962m), 남쪽으로는 탄항산(857m)이 바싹 위치하고 있다. 계립령이 그 사이를 여우목 모습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해발 525m다. 백두대간인 만큼 이곳에 떨어진 빗물은 남북으로 갈리게 된다. 북쪽의 물은 동달천, 송계계곡으로 거쳐 충주호로 흘러든다. 남쪽의 물은 신북천, 조령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경사도는 남쪽은 밋밋하고 북쪽은 다소 가파른 편이다. 그러나 해발고도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어느 표현처럼 '하늘'에 닿을 정도는 아니다. 미륵리사지에서 고개 정상까지는 1.8㎞ 정도로, 1시간 남짓 걸린다. 계립령 옛길은 지난 2008년 국가명승 제 49호로 지정됐다. 공식 명칭은 '충주 계립
제천 청풍면에 한벽루( 寒碧樓)라는 멋진 누각이 있다. 보통의 누각은 조망성이 좋은 곳에 독립적으로 세워진다. 이에 비해 한벽루는 누각의 본채 외에 날개 건물인 '익랑'(翼廊)을 거느리고 있다. 한벽루의 역사는 의외로 깊어 고려시대에 처음 신축됐다. 나름의 사연이 있다. 고려시대 청풍은 '군'(郡)이 아닌 '현'(縣)이었다. 중앙 관료가 직접 파견되지 않고 이웃 수령의 통치를 받았다. 이런 궁벽한 시골에서 청풍현 출신인 '청공'이라는 스님이 왕의 스승, 즉 왕사가 됐다. 제 27대 충숙왕(忠肅王·1294~1339) 때의 일이다. 청풍 한벽루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누각으로, 이때 행정 지위도 '현'에서 '군'으로 승격됐다. 한벽루는 경관이 빼어난 곳에 위치하다 보니 하륜, 정인지, 이황, 우암 송시열,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유명한 묵객들이 자주 찾았다. 이중 하륜은 한벽루 중수기를 남겼다. 조선초기 문신인 하륜(河崙·1347∼1416)은 우리 고장이 아닌, 지금의 경남 진주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벽루 중수기를 쓴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중수기 행간에 그 힌트가 들어 있다. '내가 옛날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정군은 바야흐로
일본 전통의상인 기모노(きもの·着物)가 여전히 서구 디자이너들 사이에 호평을 받고 있는 뭘까. 충북대 생활과학대학 권수애(패션디자인학과) 교수 등에 따르면 기모노는 의상학상 △긴 소매 △허리를 묶은 원피스 스타일 △직선재단 △단추가 없는 점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기모노는 의외로 일본인들의 신체적 약점을 덮는 수단으로부터 출발했다. 일종의 눈가림 미학인 셈이다. '倭' 자에서 보듯 중세까지의 일본인들은 키가 작은 편으로, 이를 덮기 위해 등장한 것이 기모노이다. 기모노가 다른 의상과 달리 허리 부분을 유독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기모노의 이중 깃(칼라)은 일본의 기후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은 여름철에는 고온다습하고 겨울철에는 한랭한 편이다. 따라서 2개 깃의 옷을 입는 것이 매우 실용적이었다고 권교수는 밝히고 있다. 특히 겨울 방한에 도움이 됐다. 이런 의복 기모노가 서구에 선보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쯤으로, 당시 우키요에(浮世繪·일본 풍속화), 만가(まんが·일본 만화) 등과 함께 유럽의 '자포니즘'(japonism) 열풍을 주도했다. 서구 디자이너들은 기모노에서 선의 미학과 간결함 그리고 단조롭지만 여성적인 정숙미를 느꼈다. 그러나 기모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