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지리지의 표현을 빌어 우리고장 단양인물인 황계옥을 소개한 바 있다. '본조 황계옥(黃啓沃) 과거에 올라 벼슬이 홍문관 응교에 이르렀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본문 중 '문명'이 있었다, 즉 문필로 이름을 날렸다는 것은 시를 잘 지은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황계옥은 투철한 관료정신 외에 또 다른 진면목을 지니고 있었다. 실록에 이와 관련된 표현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그는 시짓기 대회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당시 심사관은 서거정, 이승소 같은 당대 문장가들이었다. '문신을 불러서 춘설(春雪)을 제목으로 금체고시(禁體古詩) 20운(韻)을 짓도록 명하고, 서거정·허종·이승소·이파(李坡)·어세겸·노공필로 하여금 등급을 정하게 하였는데, 홍문관 정자(正字) 황계옥이 수석을 차지했으므로 표피좌자(表皮坐子)를 하사하였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금체고시는 금체와 고시가 합쳐진 표현이다. 이중 금체(禁體)는 특정어의 사용을 금하는 시를 말한다. 가령 눈(雪)이 제목으로 들어간 시에는 옥(玉)·은(銀)·여(麗)·서(絮)·노(鷺)·학(鶴)같은 글자를 쓰지 못한다. 고시(古詩)는 말 그대로 옛 형태의 시로, 구수(句數)·자수(字數)에 제한이 없고 압운(押韻)에도
국내 토종벌이 이른바 꿀벌 에이즈로 불리는 '낭충봉아부패병'에 감염된지 불과 1여년 만에 완전 멸종할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를 막지 못할 경우 먹이사슬 관계상 양봉벌, 야생벌(산벌, 말벌)의 멸종으로 이어지면서 국내 과수, 채소, 화훼농업이 심대한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13일 충북도내 전업농 등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토종벌들이 '낭충봉아부패병'이라는 바이러스에 집단적으로 감염되면서 90% 가량 폐사했다. 이런 가운데 금년 봄 들어 남은 10%의 토종벌 중 다시 20~30%의 개체수가 바이러스 감염 현상을 보이기 시작, 이미 남부지방을 시작으로 광범위한 폐사현상이 재연되고 있다. 전업농 김대립(38·청원군) 씨는 "이미 충북에서도 토종벌 폐사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며 "지금으로서는 이를 멈추게 할 묘책이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상황이 악화되자 종자용 토종벌 값이 발병 전에 비해 많게는 10배 가까이 올랐으나, 남은 개체수가 극소수이기 때문에 거래는 사실상 중단되고 있다. 김씨는 "발병 전에는 1군(통)당 5~6만원 했으나 지금은 50만원까지 하고 있다"며 "그러나 입식희망 농가도 추가 감염을 우려해 선뜻 종벌
성안은 인구가 조밀하고 또 목재건물도 적지 않게 존재, 보기와 달리 화재에 취약한 편이다. 1419년(성종 2) 함경북도 회령성 안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다. '영안도 관찰사 성준(成俊)이 치계 하기를, "3월 10일 회령부의 성 안에서 실수로 불이 나 연달아 3백여 집을 태우고 남녀 6명과 소 3두와 말 4필이 타서 죽고, 관중(官中)에 소장된 문서와 군기(軍器)도 타서 훼손된 것이 거의 10분의 8에 이르렀으니…' 당시 조정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경차관(敬差官)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경차관은 조선시대 때 특수임무를 띠고 각 도에 파견되는 관리를 일컫는 말로, 세곡, 군사, 구황, 재민(災民)과 관련된 업무 등을 수행했다. 이때 경차관으로 선발된 인물이 황계옥(黃啓沃·?~1494)이다. 성종이 변방의 화재에 이같이 신속한 결정을 내린 것은 화재의 규모도 그렇거니와 여진족의 침입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황계옥이 성종을 알현하고 회령으로 출발했다. '아마도 야인(野人)이 틈을 타서 소란을 피울 듯합니다. 이 고을은 다른 여러 고을의 예가 아니고 야인이 왕래하면서 살펴보는 경우가 매우 많으니, 관사(館舍)를 영조(營造)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실수로 불을 낸 인민
흔히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를 가리켜 "한국적인 정서를 가장 잘 나타내는 도자기"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같은 분석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충북대 학제간융합연구사업팀이 얼마전 개최한 '예술과 과학의 만남 심포지엄'이 이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이 자리에서 한성대학교 지상현(미디어디자인학과) 교수는 백자 달항아리 △출현한 배경 △조형적인 면 △심리적인 면 등의 방향에서 분석, 나름의 이론을 전개했다. 지 교수에 따르면 양반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집권층은 중국보다도 더 근본주의적인 성리학을 추구했다. 성리학 이론을 자구 하나 고치려 하지 않았고, 대신 양명학과 같은 수정이론은 경시내지 무시했다. 그것이 조형적으로 발현된 것이 백자 달항아리라고 지 교수는 언급하고 있다. 그는 "조선 사대부는 자신이 믿는 질서와 원칙에 강박적으로 집착했다"며 "때문에 그 것이 반영된 달항아리에서는 내적 통제감을 얻으려는 남성적 내향성이 읽혀지고 있다"고 밝혔다. 백자 달항아리는 아무런 장식이나 문양없이 그저 둥근 달덩어리가 턱 하니 놓여 있는 모습이다. 지 교수는 이에 대해 "현대미술의 미니멀(Minimal) 기법이 18세기 백자 달항아리에서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다"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1592년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부산성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토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는 1년 앞서 왜승 겐소(玄蘇)를 조선에 보내 "명나라를 칠려고 하니 조선 땅을 지나가게 해달라"는 협박을 해왔다.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다. 조헌이 이를 알고 겐소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겐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선봉군에 국사(國使)와 역관 자격으로 종군하였다. 또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대치할 때 양측 강화회담에 참여하는 등 일본의 전시외교 활동에 종사했던 인물이다. 정명가도에 관련된 내용이 실록에 실려 있다. ' '이보다 먼저 일본국 사신 현소(玄蘇) 등이 와서 '명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조선에서 길을 인도해 달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상이 조정 신하들과 의논하여 성절사 김응남(金應南)이 갈 적에 왜적이 중국을 침범할 뜻을 갖고 있음을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하였는데…'- 조선 조정은 이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의 정명가도에 대한 내용이 오키나와(琉球) 사람을 통해
전회에 영동 황간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한 때를 제외하고 조선시대 내내 현(縣)의 지위를 유지했다'고 밝혔다. 이는 황간이 현의 지위를 한때 상실한 적도 있었음을 의미한다. 황간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렸다. 이후 1914년 부군면(府郡面) 통폐합 조치에 따라 지금의 면이 됐다. 이 설명에는 빠진 부분이 있다. 황간현은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선조 26년(1593년) 지금의 옥천 청산현에 병합돼 현 자체가 없어진 적이 있다. 이를 둘러싸고 두가지 주장이 존재한다. 임진왜란 때의 황간현감은 박몽열(?~?朴夢說)이라는 인물이다. 그가 당시 충청병사 황진(黃進·1550∼1593)을 따라 진주성 전투에 참가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이 치계하였다. "신들이 진주를 외원(外援)할 목적으로 삼가 고현에서 진군하였는데, (…) 우리의 제장으로는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黃進) 등이 성 안에 유진(留陣)하고 있었는데 이달 20일 오후에 왜적 2백여 명이 동쪽의 성 밑으로 진격해 왔다.'- 선조실록은 전반부에는 병마절도사(병마)를, 뒷 부분에는 현감급 참전인물을 적고 있다. 다음 내용에는 황간현감 박몽
영남에서 추풍령 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만나는 곳이 영동 황간이다.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으로 간주돼 왔다. 황간은 지금은 면(面)이다. 그러나 황간은 한 때를 제외하고 조선시대 내내 줄곧 현(縣)의 지위를 유지했다. 황간은 지금도 인구수가 적은 편이지만 조선시대 때도 궁벽한 곳이었다.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당시 인구가 적었고, 족제비털, 송이같은 토산물이 많이 나왔다. '궁벽'은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나 실록에는 자주 등장한다. 매우 후미지고 으슥하다는 뜻이다. '호수가 3백 8호요, 인구가 7백 42명이다. (…) 땅이 메마르며, 기후가 많이 차다.토공(土貢)은 족제비털(黃毛)·지초(芝草)·수달피·삵괭이가죽이요, 토산(土産)은 송이(松茸)이다.'- 인용문 중 토공은 해당지역 토산물로 궁궐에 진상하는 것을, 토산은 해당 지역에서 생산되나 진상 대상은 아닌 품목을 말한다. 황간의 이같은 모습은 중종(16세기) 대에 이르러서도 거의 변하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25년(1530)에 이행(李荇) ·홍언필(洪彦弼) 등이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한 지리서다.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하늘을 덮어 가장 그윽하고 깊숙한 데다가,
우리 선조들은 어머니 뱃속의 아이에게 생명과 혈액을 공급한 태반을 매우 신성하게 여겼다. 때문에 왕실이나 사대부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이 태반을 길지와 길일인 날을 택해 매장했다. 이때 사용된 용기를 태항아리(태반호)라고 불렀다. 태항아리는 땅에 묻히는 용기이기 때문에 조형적인 미감(美感)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조선의 도공들은 태항아리에도 미감을 불어 넣었다. 그것도 단순한 미감이 아니라, 하나하나 뜯어보면 무릎을 탁 칠 정도의 내공을 쏟았다. 한성대 지상현(미디어디자인학과) 교수가 충북대 학제간융합연구사업팀이 주최한 '예술과 과학의 만남 심포지엄'에서 조선 태항아리의 하나인 '붓자욱철사태반호'(사진)의 미감을 전문가적 식견으로 분석했다. 15~16세기 사대부가에서 제작·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태항아리는 높이 48㎝의 크기를 지니고 있다. 조선왕실에서는 백자 태항아리를 주로 사용했다. 그림에서 보듯 붓자욱철사태반호는 땅속에 묻혔던 용기치고는 의외로 고급스런 미감을 풍기고 있다. 지 교수는 그 이유를 품위있는 색조와 현대적인 문양 등 두가지 분석으로 설명했다. 그는 전자에 대해 "진갈색 연꽃 문양과 백토가 덧칠된 태토 사이에는 밝
조선시대 역대 임금 중 약수를 가장 많이 찾은 인물은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은 격무로 얻은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약수가 나는 곳을 즐겨 찾았다. 세계 3대 광천수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우리고장 초정약수도 그중 하나였다. 보통사람의 움직이는 행동은 '거동'(擧動)이라고 한다. 반면 임금의 움직임은 쓰기는 '擧動'으로 쓰지만 읽기는 '거둥'이라고 읽는다. 인용문 중 거둥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등장했다. 익히 알다시피 세종대왕은 초정약수로 거둥을 하고 나서도 훈민정음 창제작업을 골몰하게 된다.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椒水里)에 거동하시는 데도 (…) 계달하는 공무(公務)에 이르러도 또한 의정부(議政府)에 맡기시어,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그 유명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1445) 상소문이다. 요약을 하면, "왜 초정에까지 와서 한글창제 작업에 급급하십니까" 정도가 된다. 현재 초정약수에는 세종대왕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바로 '언문 같은 것은 (…) 어찌 이것
속보= 청주 1천여년 역사정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유구가 도심에서 대량 발견되면서 향후 현장처리 방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재단법인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원장)은 남문로 2가 15번지 일대의 청주 '남궁타워' 신축공사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 활동을 이번주 안으로 마무리 짓고 다음주 중 학술자문회의(구 지도위원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이 신라후대~일제강점기 유물·유구가 대량 발견된 현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후속적인 관심이 쏠리고 있다. 종전까지는 자문위원들이 이를 결정했으나, 개정된 법은 현장에 대한 최종 처리방향을 위원들의 자문을 받은 문화재청이 결정토록 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발굴된 유구를 현장에 원형대로 노출·보존하는 방안 △강화유리로 유구층을 덮고 그 위로 건축물을 시공하는 방안 △발굴된 유물·유구를 다른 곳으로 이전해 별도 보전하는 방안 등이 검토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중 첫번째 안은 청주읍성 성돌들이 일제 강점기 때 하수구 석재로 사용되면서 이미 원래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에 채택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남궁타워'(남궁병원 자리) 신축을 계획 중인 사업자가 이미 5층 규모의 설계까지 마친 것
지금의 문의는 일개 면에 불과하다. 그러나 문의는 고려시대부터 '현'(懸)의 행정적 지위를 가졌다. 그뒤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쳐 1895년(고종 32) '군'으로 승격됐으나 1914년 개편 때 청원군 소속이 되면서 '면'(面)이 됐다. 과거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당시 객사 건물이었던 문산관(文山館·도 유형문화재 제 49호)이다. 문의는 대청호를 끼고 있어 경관이 수려한 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때는 궁벽하게 인식됐던지 유배지로 자주 이용됐다. 이 부분은 대청호가 없었던 것을 감안해 볼 필요가 있다. '첨지돈녕부사 안종렴이 숙직에 들어갈 당번날에 처부의 제삿날이라고 거짓 고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헌부에서 추핵하니, 종렴이 승복하지 않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매 항복하므로, 문의현(文義縣)에 부처(付處)하였다.'- 유인숙(柳仁淑·1485∼1545)은 을사사화 때 윤임의 당여(같은 일파)라는 이유로 사사된 인물이다. 이때 희증, 희맹, 희안 등 그의 세 아들도 연좌제에 의해 유배지에서 처형됐다. 이들의 유배지도 문의였다. 그러나 풍수적 의미의 문의는 달랐다. 조선시대 조정에서는 문의를 풍수상으로 매우 중하게 여겼다. 특히 문의의 진산인 양성산은 명당
청주읍성터 지하에 청주 1천년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신라하대~고려시대 유물층이 또 다시 존재, 각종 유물이 대량 발굴되고 있다. 특히 이들 유물 중에는 '大中', '城' 등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편도 출토, 청주읍성터가 과거 서원경 치소였을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고 있다. 재단법인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원장 장호수)은 지난 28일부터 남문로 2가 15번지 일대의 청주 남궁타워 신축공사 부지에서 발굴조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 결과, 지표층을 걷어낸 청주읍성터 지하에 통일신라~일제강점기의 복합 문화층 일부가 교란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30일 현재 이 문화층에서 △9세기 통일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기와와 수막새 △일제 강점기 이전의 옛우물 △일제가 하수구 석재로 사용한 청주읍성 성돌 등 청주 1천년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매장 유물이 대량으로 쏟아지고 있다. 특히 통일신라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에는 '大中', '城'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일대가 서원경의 치소(治所·행정 중심지)였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685년(신문왕5) 3월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三月 置西原小京 ), 689년 윤(閏) 9월
조선시대 '예무이적'(禮無二嫡)의 논리가 있다. '한 남편에게 두 사람의 정실 아내는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그럴듯 해보이지만 이같은 논리 때문에 첩에게서 난 자식은 모두 천인이 돼야 했다.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의 9번째 여자인 장녹수(張綠水·?~1506)는 천인 출신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첩이었고, 이 때문에 장녹수는 제안대군(齊安大君·성종의 친형)의 가노(家奴)에게 시집을 가야 했다. 장녹수는 의외로 미모는 빼어날 정도로 뛰어나지 않았으나 노래를 무척 잘 했던 것으로 사료는 적고 있다. 그녀는 '노비의 아내'였던 시절에 노래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었다. 그러다가 대군의 가노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연산군과 장록수 사이에 연분이 싹트도록 한 사람은 삼촌 제안대군이었다. 이미 폭정기에 접어든 연산군이 어느날 미복 차림을 하고 한잔 걸칠 요량으로 삼촌집을 찾았다. 게서 만난 것이 장녹수다.
구석기인들도 이른바 '주거환경 개선작업'을 한 정황이 발견됐다. 뿐만 아니라 큰 동물인 곰도 사냥 대상으로 삼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재단법인 한국선사연구원(원장 우종윤)이 최근 단양 구낭굴(충북도기념물 제 103호)에 대한 학술발굴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은 올 2월부터 한달여간 단양군 가곡면 여천리의 삼태산 기슭에서 구낭굴에 대한 제 5차 발굴조사를 실시해 왔다. 그 결과,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구낭1굴에서 △당시 구석기인들이 동굴 바닥을 정교하게 다듬었고 △그리고 여기서 나온 격지를 석기 연모로 재가공한 흔적이 발견됐다. 구석기인들이 한데(야외) 외에 동굴, 그중에도 석회암 동굴에서 주거생활을 한 것은 많이 발견돼 왔다. 그러나 동굴 바닥을 정교하게 다듬은 흔적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융조(한국선사문화원 이사장) 충북대 명예교수는 이에 대해 "당시 구석기인들이 울퉁불퉁한 동굴바닥 때문에 불편함을 느꼈고, 그 결과 다른 석기연모로 바닥을 다듬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실제 구낭1굴 일부 동굴 바닥은 의도적인 마모의 흔적이 보이는 등 인공의 힘이 가해진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이번 구낭1굴 발굴에서는 주먹찌르개, 몸
얼마전 청주인물 박훈(朴薰·1484∼1540)을 소개한 적이 있다. 조광조와 절친했으나 기묘사화 때 화를 입어 16년 동안 성주, 의주, 안악 등의 유배지를 전전해야 했다. 그의 부친이 박증영(朴增榮·1464∼1493)이다. 그는 22살 나이에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오를 정도로 매우 총명했다. 사가독서는 조선시대 때 인재육성 차원에서 젊은 문신들에게 특별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말한다. 세종 때 처음 도입됐고 신숙주, 성삼문 등이 모두 사가독서 출신이다. 1456년(세조 2) 집현전의 혁파와 함께 폐지됐다가 성종 때 다시 부활됐으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하면서 그 기능이 흡수됐다. 박증영은 29살 나이로 단명했다. 때문에 그에 대한 사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일부 문헌은 그가 총명함과 더불어 기개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박증영이 아뢰기를, "불교는 청정(淸淨)한 것을 종(宗)으로 삼는데 어찌하여 흥판(興販)을 하여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먹을 것이 넉넉한 연후에야 청정한 교(敎)를 닦을 수 있다.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중은 장차 먹지 아니하고 굶어 죽어야 하겠는가.'- 임금이 말하기를, "승인의 흥판(興販)을 금
기린각(麒麟閣)이라는 중국 음식점 이름을 종종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본래 의미의 기린각은 음식과는 관련이 없다. 중국 전한 때의 황제인 무제(武帝·BC 156~BC 87)가 장안에 기린각이라는 누각을 세웠다. 그후 선제(宣帝·BC 91~BC 49) 황제는 11인의 공신상 그림을 기린각에 걸었다. 이때부터 기린각은 입신양명을 상징하게 됐다. 조선 중종대의 인물로 박영(朴英·1471∼1540)이 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宣傳官)에 오르는 등 전도가 양양했으나 어떤 이유에서 인지 기린각이 되는 것을 꺼렸다. 선전관은 임금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던 직이었다. 그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이를 핑계로 낙향, '송당'(松堂)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유유자적했다. '사신은 논한다. 박영은 선산 사람이다. 소시 적에 무예를 업으로 삼아 무과에 올랐다. 그리고 유학의 서적을 통달하고 낙동강 가에 집을 지어 살며 영화와 복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남쪽 변방에 장수로 나가서 시를 쓰기를, 투구 쓰고 갑옷 입은 왕손 늙어가네 기린각에 이름 오르는 것 마음에 없어…'- 그는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이제)의 외손자이기도 했다. 인용문의 '왕손'이라는 표현은 그래
조선시대에는 삼금이 존재했다. 송금(松禁), 우금(牛禁), 주금(酒禁)이 그것이다. 이중 금주령은 흉년 때 곡식 절약이 주목적이었으나 적용 범위는 일정하지 않았다. 사신 접대용, 혼례용, 약용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했다. 술을 점잖게 이르는 말인 '약주'는 여기서 유래한 표현이다. 이밖에 겨울 추위가 심할 때는 체온유지 등을 위해 금주령을 일시적으로 완화했다. 관련 내용이 실록에 등장한다. "수원 부사 김사원(金嗣源)은 술을 많이 장만하여, 장례(葬禮)에 모인 재상에게 주었으므로, 본부에서 바야흐로 국문(鞫問)하는데, 이제 관찰사 김양경(金良璥)이 아룀에 따라 국문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사헌부에서 차자(箚子)를 올린 것으로, 뒤에는 "김양경이 금주령에 관한 규정을 어겼으니 파직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뒤따른다. 이에 성종은 "무리를 지어 술을 마셨다면 워낙 죄가 있겠으나, 비바람이 일던 날에 늙은 재상에게 술을 주었는데 무슨 안될 것이 있겠는가. 그것을 말하지 말라"며 감양경을 감싼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차자'는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을 일컫는다. 김양경은 상주 사람이나 우리고장 충청도관찰사를 오래 지냈다. 사료
일본인들이 조선 다완(茶碗)에 열광하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좀 과장됐겠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16세기 전국시대에는 조선 다완과 성(城) 한 개를 바꿨다는 얘기도 전해져오고 있다. 이와 관련, 이른바 '와비'(寂·고요) 이론이 등장해 있다. 다도의 명인 센리큐(千利休)가 주장한 이 이론은 일본 선(禪)에서 추구하는 무심무작(無心無作)의 아름다움이 조선 다완에서 절절하게 느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 다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미에 대한 집착이나 추에 대한 혐오도 없는, 즉 미추(美醜)의 대립을 초월해서 만들어진 것이 조선의 다완"이라고까지 극찬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전 충북대 학제간융합연구사업팀 주최한 '예술과 과학의 만남 심포지엄'에서 한성대 지상현(미디어디자인학과) 교수는 조선 다완을 기학학과 심리학적 측면에서 접근, 일본 다인들 시각과 다소 다른 이론을 발표했다. 그는 '쇄모목완'(刷毛目碗·그림참조)의 예를 들어 "조선 다완에서는 작위대 무작위의 대비가 명확하고, 그것이 심미적 쾌감을 안겨주고 있다"고 밝혔다. 이때의 '작위'는 단장하게 잘 정돈된 다기(茶器)의 윤곽선을 의미하고 있다. 반면 '무작위'는 거칠면서 되는대로 칠한 듯한
부역은 국가나 도로 등 공적인 사업을 위해 보수없이 국민에게 노역을 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부역은 획일성을 지니면서 곧잘 형평성의 문제를 야기했다.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자마자 이 부분의 개선책을 직접 언급한다. '환과고독(鰥寡孤獨)은 왕정(王政)으로서 먼저 할 바이니 마땅히 불쌍히 여겨 구휼해야 될 것이다. 소재 관사에서는 그 굶주리고 곤궁한 사람을 진휼(賑恤)하고 그 부역(賦役)을 면제해 줄 것이다.'- 인용문 중 '환과고독'은 맹자가 처음으로 언급한 표현이다.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왕도정치(王道政治)에 대해 묻자 맹자는 이렇게 답한다. "늙어 아내 없는 이를 홀아비(鰥), 늙어 남편이 없는 이를 과부(寡), 늙어 자식이 없는 이를 외로운 사람(獨), 어리고 아비 없는 이를 고아(孤)라고 합니다.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은 천하에 궁벽한 백성들로서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일반어가 된 고독은 사실은 가족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것이 발전해 '몹시 외롭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실록에 한 신하가 부역과 관련된 상소를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장령 곽은(郭垠)과 헌납 양면(楊沔)이 아뢰기를, "날씨가 추울 때에 수리도감(
충북대 사학회와 중원문화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한말 충북 전통사회의 복원과 문화 콘텐츠 개발' 학술회의가 지난 17일 학내 개신문화관에서 열렸다. 한말(韓末)은 시간적으로 1백여년전 밖에 안 되지만 국가적 대혼란기였기 때문에 사료가 풍족하게 남아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광무양안(光武量案)을 바탕으로 열린 이날 학술회의는 큰 주목을 받았다. 광무양안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0~1905년 사이에 작성된 토지대장을 일컫는다. 특히 그 주제가 '1차적으로 충북 전통사회 복원하고 그에 따른 지역문화 콘텐츠를 개발하자'는 것 이어서 학계뿐만 아니라 도내 지자체의 관심을 끌었다. 이날 학술회의는 신영우(충북대 사학과) 교수의 기조 발제에 이어 임용한(중원문화연구소) 연구원의 '주거 현황과 건물, 유적의 복원', 김의환(〃) 연구원의 '한말 충북의 가문, 인물의 새로운 조명' 순으로 1부가 진행됐다. 이어 2부에는 강은경(〃) 연구원의 '1백년전 명성황후의 피난처 충주 신흥마을', 남금자(충주박물관) 학예사의 '대한제국기 충주 대지주 김갑규의 가예와 경계기반' 발표가 이어졌다. 토론자로는 이해준(공주대), 김양식(충북학연구소), 길경택(충주박물관), 정기범(음성군청)
대곡 성운(成運·1497~1579)은 본래 한양에 거처하고 있었으나 형 '우'가 을사사화의 참화를 당하자 우리고장 보은을 찾았다. '공(성운 지칭)은 나면서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일찍이 세속의 그물을 벗어났다. 그 형 우(禹)가 을사사화에 비명으로 죽으니, 이로부터 더욱 세상에 뜻이 없고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시가 그 인품과 같아서 한가롭고 아담하여 서호처사(西胡處士)의 운치가 있으니…'- 속리산을 찾은 성운이 마냥 은둔만은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시문집에는 거유 조식(曺植·1501~1572) 등과 교유한 흔적이 많이 나타난다. 다음은 조식에게 보낸 한시 한 수다. '높은 기러기 날개 치며 남쪽 향해 날아가니(冥鴻矯翼向南飛) / 때는 바야흐로 가을 바람 낙엽질 때라(正値秋風木落時) / 땅에 가득한 벼와 기장을 닭과 오리는 쫓아다니지만(滿地稻梁鷄鶩豚) / 푸른 하늘 구름 밖에서 스스로 기심을 잊네(碧天雲外自忘機)'- 익히 알다시피 그의 대표 문집은 대곡집(大谷集)이다. 그러나 이 문집은 성운 자신이 완성한 것은 아니다. 사연이 다소 깊다. 아들이 편집에 나섰으나 완성하지 못했고, 그 손자대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됐다. 성운은 아들이 없었다. 그러자 그는
충북이 환경부의 국토환경성 종합평가에서 대도시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8개 광역지자체 중 2위를 차지했다. 특히 이 부분에는 충북 동쪽 사면을 지나는 백두대간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나타나, 이에 대한 장점을 더욱 살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16일 환경부는 전국 광역, 기초 지자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국토환경 종합평가 결과를 발표했다. 국토 환경성 종합평가는 법적인 보전지역, 멸종위기종 출현여부, 산림식생의 우수성, 생태축 분야 등의 65개 환경생태 지표를 이용하여 환경 건강성 정도를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충북은 행정구역 면적대비 1등급 면적 비율이 46.7%를 기록, 8개 지자체 중 2위를 차지했다. 1위는 강원도로 63.8%를 기록했고, 경남(43.9%), 경북(43.7%), 전북(42.5%), 경기도(37.7%), 전남(35.4%), 충남(29.3%) 등이 충북의 뒤를 이었다. 환경부는 조사 대상의 건강성 정도를 1~5등급으로 분류, 1등급은 녹색, 최하위인 5등급은 빨간색으로 처리했다. 이를 지도로 옮겨 본 결과, 충북에서는 도계이자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동쪽 사면에서 녹색이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또 남한강과 미호천 일대에서도 녹색이 많이
조선시대 때도 충북에서는 옥천변성대가 지나는 남부지역에서 지진이 가장 발생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이 대지진의 고통을 겪고 있는 가운데, 윤순옥(경희대 지리학과) 교수가 몇년전 대한지리학회지에 발표한 '조선시대 이래 한반도 지진 발생의 시·공간적 특성' 논문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윤 교수는 조선왕조실록에 실제 지진발생 상황으로 인정할 수 있는 전체 441건의 내용을 정밀 분석했다. 기간은 1392~1863년이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 때는 연평균 0.9건의 지진이 발생했던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지진 활성기와 잠복기가 교차하고 있는 가운데 1531~1535년, 1666~1670년 사이에 지진이 가장 많이 발생했다. 이는 '큰 지진은 100~150년의 주기성을 갖고 있다'는 학설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이어서 주목되고 있다. 지진 발생의 공간적 범위는 '7고을 이상' 41건(9.3%), '4~6고을' 51건(11.6%), '3고을 이하' 349건(79%) 순으로 나타났다. 지진 강도 정도는 '인적·물적 피해' 4건, '문·창문이 심하게 흔들림' 13건, '기타' 424건 순이었다. 이같은 내용을 지금의 광역 지자체별로 재분석을 한 결과, 조선시대 때 충북에
청원상주 고속도로를 상주 방향으로 타고가다 보면 보은 삼승면에 이르러 오른쪽 방향으로 우뚝 솟은 산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바로 속리산과 구병산 사이에 위치하는 금적산(金積山·652)이다. 세간에서는 보은군의 최고봉인 천황봉(1,058m)을 '지아비산', 구병산을 '지어미산', 그리고 금적산을 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들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 정상에는 봉수대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 봉수대는 옥천 청산의 박달라산에서 받은 신호를 북쪽의 용산점 봉수대로 전하는 역할을 했다. 현재 봉수대 흔적은 많이 사라지고 주변에 송신탑이 위치하고 있다. 학문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이른바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해 학문을 하는 것을 일컫는다. 논어 헌문 편은 위기지학이 무너진 풍토를 한탄하고 있다. '옛날의 배움은 자기를 위한 것이었다(古之學者爲己). 요즘의 배움은 남을 위한 것이 되고 있다.(今之學者爲人)' 조선시대 때 위기지학에 충실했던 인물의 한 명으로 명재상 황희(黃喜·1363~1452)가 꼽히고 있다. 그는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주위로부터 두루 존경을 받았다. 실록에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이황은 타고난
우리 선조들의 시각예술은 마냥 고리타분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기하학적인 미가 매우 풍부하다는 이론이 등장했다. 충북대 학제간융압연구사업팀이 얼마전 '예술과 과학의 만남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한성대학교 지상현(미디어디자인학과) 교수는 '예술에서 과학으로-오래된 미술의 현대성'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지 교수가 발표한 내용을 독자들이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저널리즘 시각으로 재구성해 소개한다. 글싣는 순서는 ①신윤복, 그림틀을 이용하다, ②조선다완, 45도 각도의 비밀, ③철사태반호, 그 심리적인 지평선, ④달항아리, 원의 영감을 품다 등이다. 김홍도(金弘道·1745~?)와 신윤복(申潤福·1758~?)은 조선시대 미감을 양분하면서 거의 동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둘의 그림은 묘사, 구도, 색채, 대상 선정 등에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교수는 이중 구도 부분을 집중적으로 관찰했다. 김홍도 대표작의 하나인 '벼타작'(보물 제 527호. 28x24cm)은 전체적인 구도가 '역Z' 자 모습으로, 동적 구도를 연출하고 있다. 상단 우측에 갓을 삐딱하게 쓰고 또 신발을 아무렇게 벗어 놓은 젊은 양반이 배치돼 있다. 왠지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