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종료 후에도 다시 장마와 거의 같은 강우현상이 찾아오는 것과 관련, 이른바 '저지고기압'(blocking high, 沮止高氣壓)의 실체를 빨리 규명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계절감각 속에는 '장마 종료 후 8월 불볕더위→서늘한 바람 가을 시작'이 등식처럼 인식돼 있다. 그러나 2천년대 이후 장마종료 선언 이후에도 장마와 거의 같은, 지루하면서 강도 높은 강우현상이 자주 찾아오면서 종래 기상패턴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올 도내의 경우(청주 기준) 장마가 실제적으로 시작된 지난 6월 22일부터 7월 31일까지 41일 동안에 무려 33일의 강우현상이 나타났다. 이중 지난 7월 17일은 기상청이 '올 장마가 사실상 끝났다'고 발표한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10일의 강우현상이 더 찾아왔다. 기상청은 이에 대해 △시베리아 동쪽-캄차카반도 상공에 저지고기압이 강력히 버티면서 기압계 흐름이 정체돼 있고 △그런 가운데 고온다습한 남서기류가 한반도로 계속 유입되면서 비구름이 지속적으로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장마 후 다시 장마 같은 현상'을 설명했다. 그러나 기상청은 가장 핵심적인 부분일 수 있는, 왜 사할린 상공에 저지고기압이 발달했고 또 이동을
조선시대 때 양반가 아녀자가 간통을 하면 '자녀안(恣女案)'이나 '유녀적(遊女籍)'이라는 것에 이름이 올랐다. 평생 간음한 여성으로 낙인찍혀 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일부 가문에서는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우려, 자살을 종용하기도 했다. 1530년(중종 25)에 쓰여진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우리고장 황간현을 다소 부정적으로 적었다. "옛날 현(縣)이 승격되기 전에는 거주하는 백성들이 적고, 소나무와 참나무가 하늘을 덮어 가장 그윽하고 깊숙한 데다가, 들짐승이 맘대로 뛰놀고 도둑들이 노략질하기 때문에, 여기를 지나는 자는 여럿이 무리를 지어야만 비로소 다니곤 했다."- 이를 전후해 이은(李山+言)이라는 인물이 황간현감으로 부임했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조선시대 판 새마을운동'을 전개했다. 황간읍성이 이때 축조됐다. '이은이 전 삼사좌윤으로서 비로소 이 고을 감무가 되어 백성들의 고통스러움을 개탄하고 이것을 힘써 없앴기에 호구(戶口)가 날마다 늘고, (…) 이에 나무를 베어내고 돌을 쪼개어 이 성을 쌓아서 며칠 안 되어 공사가 완성되어, 백성들은 성에 보전하게 되고, 성은 덕에 보전하게 되었으니, 이후(李侯)의 공이 더욱 빛남이 있도다.'-
충북지역 대학 출신자들의 속칭 '100대 기업' 취업률은 2.1%밖에 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는 도세가 자주 비교되는 강원·전북보다는 다소 앞서나, 울산·대전 등 광역지자체에는 뒤지는 수치다. 26일 충북대는 대학생들의 취업난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실태와 극복 방안을 담은 '지역인재 채용 확대방안' 자료를 내놨다. 이번 자료는 통계 기술상 2008년 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동안의 진행 상황으로 볼 때 도내 대학생들의 취업률은 호전되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수도권 대학과 비수도권 대학 출신자들의 최근 취업률은 각각 53% 정도로 거의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로 여겨지고 있는 100대 기업 취업률은 수도권 58%, 비수도권 42%로, 16%P의 격차가 나고 있다. 한국신용평가정보는 지난해 시가총액, 매출액 등의 기준으로 1위 삼성전자, 2위 현대자동차, 3위 포스코, 100위 넥센타이어 등의 순으로 국내 100대 기업을 선정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광역단체 기준으로 대학생 취업률을 살펴 본 결과, 서울 38%, 인천 5.1%, 경기 14
1623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倧·후에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인조반정'이다. 그 결과, 광해군은 서인으로 강등돼 강화도로 유배됐다. 그리고 대북파 이이첨 등 수십 명은 참수됐고,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됐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30여명은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호를 받고 권좌의 요직을 나눠가졌다. '이첨은 한찬남·백대형·정조·윤인·이위경 등과 함께 먼저 형을 받았고, 이원엽·이홍엽·이익엽은 먼저 참형되었으며 이대엽은 옥중에서 죽었다. 그리고 정몽필 등 여러 총신들과 유희분·유희발 등은 차례로 참형을 받았고, 정인홍·이강·원종·신광업 등은 추후하여 형을 받았다.'- 인용문 중에 유희분(柳希奮)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위하여 대북에 속한 언관·유생들을 동원했던 인물이다. 그의 조카가 유효립(柳孝立·1579∼1628)이라는 인물이다. 그도 연좌법에 따라 우리고장 제천으로 유배됐다. 유효립은 그러나 순응보다 모반을 결심했다. 대략 두 가지 이유가 작용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의 작은아버지 유희분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가문이 풍비박산됐다. 또 그는 권좌에서 쫓겨난 광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를 고갯길 양사면으로 갖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주흘산(1106m·북)과 조령산(1017m·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난 이는 넓게 본 것으로, 좁게 보면 마패봉(927m·북)과 치마바위봉(835m·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사면은 고갯길 정상까지 거리가 짧고, 동쪽사면은 반원 모양으로 돌아 저능부로 빠진다. 따라서 서쪽사면이 다소 가파르게 느껴지고 있다. 백두대간인 만큼 서쪽과 동쪽 사면의 빗물은 최종 목적지까지 동행하지 않는다. 서쪽사면의 물은 연풍천에 모여 충주 달천으로 흘러든다. 반면 동쪽사면의 물은 조령천에서 만나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충주목과 문경현 사이에 직선이 그어져 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것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 ~ 1866)의 당시 지도제작 기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강이나 하천과 달리 구불구불한 도로는 직선으로 긋고, 그 위에 10리마다 점표시를 했다. 따라서 조령은 문경-연풍-충주를 연결하고 있는 고갯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충주를 연결하는 길로 표시돼 있다. 조령은 예로부터 한반도 최고의 요충지로 꼽혀왔다. 대
우리고장 제천 인물인 김식(金湜·1482~1520)은 조선시대 최장거리 도망자로 유명하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이때 김식은 단지 조광조와 절친하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야 했다. 처음에 외딴섬으로 유배되는 절도안치(絶島安置) 형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의 도움으로 형량이 감경, 경북 선산으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러나 유배기간 중 신사무옥이 일어나면서 그에게 진짜 절도안치 형이 떨어졌다. 그는 형량이 지극히 부당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최운은 거제도로 이배되기 직전 탈출을 감행했다. 고된 행로가 시작됐다. 김식은 경북 선산에서 동쪽으로 지리산 부근까지 이동했다. 그러나 김식은 도망자 생활에서 오는 육체·정신적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유숙할 곳이 없어 산골짜기를 경유하여 지리산에 가려고 거창현 수도산 남쪽에 이르렀는데 밥을 먹지 못한 지가 수일이었다. 하루는 고제원(高梯院) 동북편 산기슭에 머물면서 고사리를 캐어다가 먹으려고 우음산을 시켜 마을 집에서 불을 구해 오라고 보낸 후 드디어 스스로 목을 맸다. 경진년 5월 16일이었다.'- 앞서 김식은 도망자 생활 중에 자기를 숨겨줄 수 있을 정도로 믿음이 가는
조선시대 후궁들은 왕의 총애와 왕자 생산 여부에 따라 종4품에서 정1품까지 8등급으로 분류됐다. 가장 높은 등급은 정1품인 빈(嬪)으로 희빈 장씨에게서 그 예를 만날 수 있다. 태종의 정비는 원경왕후 민씨로 4남4녀를 뒀다. 원경왕후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남편(이방원)이 선수를 쳐 정도전을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대륙 중국에는 이른바 '일취구녀제'가 존재했다. 왕비를 포함해 9명을 후궁을 거느닐 수 있다는 뜻이다. 태종도 이 제도를 크게 의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태종의 바람기는 정도 이상으로 심했다. 9명의 후궁을 둔 것으로 전해지나, 일부 사료는 17명까지 언급하고 있다. 태종의 바람기를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일부는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후궁을 계속 늘렸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튼 민씨의 불만은 계속 쌓였고, 결국 친정 남동생인 민무질·민무구 형제가 사사되는 불행을 겪었다. 이같은 흐름 중에 한 신하가 감히 태종의 바람기를 질타하는 상서를 올렸다. 방문중(房文中)이다. "정비(靜妃)와 명빈(明嬪)이 각각 양전을 설치하여, 빈으로서 적비(嫡妃)와 나란하게 함은 신(臣)의 이해할 수 없는 첫째이요,
음식, 그중에도 구이문화에 관련된 논문으로는 이규진(이화여대 대학원·2010)의 '근대 이후 100년간 한국 육류구이 문화의 변화'가 거의 유일하다. 그는 중앙지 기사 내용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한국의 근·현대 구이문화를 추적했다. 중앙지를 대상으로 한 만큼 조사 지역은 '서울'로 한정됐다. 그 결과, 중앙 각 일간지에 '삼겹살'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당시는 삼겹살을 구이가 아닌, 편육과 조림용 돈육으로 소개했다. 중앙일보 1971년 12월 9일자는 '제육 삼겹살 편육'이라고, 또 1976년 1월 28일자 매일경제도 '삼겹살을 이용한 편육 요리'라는 내용을 소개했다. 동아일보는 편육이 아닌, 조림용(1972년 9월 12일자)으로 소개했다. 구이용 삼겹살에 대한 기사가 중앙 일간지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후반이있다. 그러나 비수기가 언급되는 등 삼겹살이 처음부터 정착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축우로 유명하던 우리나라는 고기구이 요리가 발달했다지마는 돼지고기 구이만은 발전을 못한 것 같다.(…) 그간 우후죽순처럼 주점가에 늘어가던 삼겹살집에도 여름이 시작되면서 사람의 발길이 눈에 띄
기축옥사(1589·선조22)는 학문적으로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다만 기존의 주장을 따를 경우 주인공 정여립은 모반준비 단계에서 도참사상을 교묘히 이용했다. '전날에, "목자(木子=李)는 망(亡)하고 전읍(奠邑=鄭)은 흥(興)한다"는 동요가 떠돌아 다녔는데 여립이 이것을 옥판(玉板)에 새겨서 중 의연(義衍)을 시켜 지리산 석굴 속에 감추어 두게 한 후, 뒤에 산 구경 갔다가 우연히 이것을 얻은 것처럼 꾸몄다.'- 그는 계룡산을 구경하고 어느 폐암(廢庵·중없는 절)에서 시 한 수를 지어 벽에 붙여놓기도 했다. 정감록은 '이씨의 한양 도읍 몇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鷄龍山) 도읍 몇백 년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정여립은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도 정씨 성을 가졌다. 다음은 그 문제의 시다. '남쪽 나라 두루 다녔더니( 客行南國遍) / 계룡산에서 눈이 처음 밝도다(鷄岳眼初明) / 뛰는 말이 채찍에 놀란 형세요(躍馬驚鞭勢) / 고개 돌린 용이 조산(祖山)을 돌아보는 형국이니(回龍顧祖形) / 아름다운 기운이 모였고(蔥蔥佳氣合) / 상서로운 구름이 나도다(··瑞雲生) / 무기(戊己) 양년에 좋은 운수가 열릴 것이니(戊己開亨運) / 태평 세월을
지리적으로는 조령산(1,017m)과 갈미봉(783m) 사이에 위치한다. 행정적으로는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각서리를 동서 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해발 548m이다. 백두대간인 만큼 영로 정상을 기준으로 빗물이 동서로 나눠진다. 서쪽 사면의 물은 연풍 이화천, 괴산 괴강, 충주 달천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반면 동쪽 사면의 물은 문경 초천, 곡천 등을 거쳐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해발고도가 비교적 높은 만큼 고개 경사도 다소 가파르게 느껴진다. 그러나 고개가 말목처럼 서서히 높아지고 있어 유장한 느낌을 갖게 하고 있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조선시대 경상도 사람들은 문경에서 충청도 방면으로 넘을 때 3개의 고갯길을 택할 수 있었다. 이른바 조령삼로이다. 제일 북쪽의 고개는 계립령(일명 하늘재)으로 충주로 연결됐다. 다음은 조령(일명 문경새재)으로 역시 충주로 통했다. 나머지 하나는 이화령이다. 그러나 이화령은 충주가 아닌, 연풍을 거쳐 괴산으로 향하는 고갯길이었다. 대동여지도 역시 충청도 연풍현과 경상도 문경현을 연결하는 선 위에 이화현(伊火峴)이라는 고개이름을 적어놨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화현은 인근 조령에 비해서는 통행량이
- 쉬운 질문부터 해보겠다. 뇌졸중은 뇌의 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생기는 질환으로 알고 있다. 뇌혈관이 왜 그렇게 중요하나. "뇌혈관은 뇌에 산소와 영양을 공급하는 통로이다. 질문한 것가 같이 이 통로에 문제가 생기면 산소와 영양의 공급이 중단되면서 그 부위의 뇌세포가 죽게 된다. 이것으로 인해 반신마비, 혼수, 어지럼증 등의 현상이 찾아오고, 심하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 - 뇌혈관 질환은 크게 뇌출혈과 뇌경색으로 대별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두 질환의 시대별 추이는 어떻게 되나. "10년 전만 해도 뇌출혈대 뇌경색의 발병률이 60%대 40%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뇌경색 80%, 뇌출혈 20% 정도로 그 추이가 역전됐다. 심장질환 증가와 서구화된 식습관 그리고 스트레스 지수 증가 등이 원인이 되고 있다. 이외 건강검진 발달도 뇌경색 조기 발견에 기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혈관 조영술 검사가 최근들어 가장 정확한 치료법으로 부상하고 있다." - 방금 언급한 혈관 조영술은 어떤 치료법을 말하고 장점은 무엇인가. "먼저 인체중 사타구니 부분을 5㎜ 정도 절개, 이곳을 지나는 동맥 안으로 카테터라는 미세 도관을 집어 넣는다. 그리고 이것이 혈관을 타고 올라가
임금의 초상화를 어진(御眞)이라고 부른다. 사용 빈도는 낮지만 신어(神御), 성용(聖容), 왕상(王像), 어영(御影) 등도 같은 표현이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어진은 의외로 많지 않다. 태조, 영조, 철종, 고종 어진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중 태조 어진은 보물 제 931호, 영조 어진은 932호로 각각 지정돼 있다. 철종 어진은 1/3 가량이 소실됐음에도 불구하고 보물 1492호로 지정돼 있다. 어진 중 유일하게 군복(軍服)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화려한 색채와 세련된 선도 돋보이고 있다. 현재 태조 어진은 서울이 아닌 전주 경기전 단 1곳에만 보관돼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태조 어진은 전란 등을 우려해 전국 5곳에 분산·보관했다. 보관하던 전각도 지역에 따라 그 이름이 각각 달랐다. '의정부가 이조의 첩정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의 전직(殿直)은, 청하옵건대, 영흥 선원전(璿源殿) 의 전직의 예에 따라 감사의 천망(薦望)대로 임명해 보내되, 전주와 경주에는 토관(土官)이 없으니…'- '전직'은 전각을 지키는 사람을 말한다. 인용문 중에 집경전이 보인다. 이 전각은 처음에
괴산 대학찰옥수수(공식명칭 연농1호)의 맛의 명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경북대 작물과학원팀이 몇해전 '찰옥수수 교잡종의 식미관련 주요 특성' 연구문을 발표했다. 이 연구문은 괴산 대학찰옥수수만을 다룬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을 읽어보면 '왜 괴산 찰옥수수가 명성을 얻고 있는가'를 객관적으로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연구팀은 찰옥1호, 찰옥2호, 흑점찰, 괴산대학찰옥수수(이하 대학찰옥수수), 찰옥4호, 수원 45호 등 국내 6개 옥수수 품종을 채집, 낟알의 외형적인 특성과 식미(맛) 등을 비교·분석했다. 먼저 낟알의 두께(단위 ㎛)를 조사했다. 그 결과, 찰옥 1호 81, 찰옥2호 64, 흑점찰 47, 대학찰옥수수 34, 찰옥4호 41, 수원45호 40 등을 기록, 대학찰옥수수의 과피가 가장 얇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른바 백립중을 측정한 결과, 찰옥1호 34.1g, 찰옥2호 28.7g, 흑점찰 27.8g, 대학찰옥수수 38.6g, 찰옥4호 40.0g, 수원 45호 41.9g 등을 나타냈다. 차이는 크지 않지만 대학찰옥수수의 낟알도 비교적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백립종은 낟알 1백개를 평균한 무게라는 뜻이다. 낟알 길이와 폭에 대한 조사에
폭군 연산군(燕山君·1476~1506)이 처음부터 폭정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집권 3년차까지는 조세제도를 정비하는 등 국정을 나름대로 옳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생모 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엄씨의 모함으로 내쫓진 끝에 사사(賜死)당한 것을 알고부터는 희대의 광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광기 중 음탕한 짓에 해당하는 내용을 당시 사관이 사론(史論)으로 적었다. '왕이 음탕이 날로 심하여, 매양 족친 및 선왕의 후궁을 모아 왕이 친히 잔을 들어서 마시게 하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녹수(綠水) 및 괴는 궁인을 시켜 누구의 아내인지를 비밀히 알아보게 하여 외워 두었다가 이어 궁중에 묵게 하여 밤에 강제로 간음하며 낮에도 그랬다'- 이같은 유형의 내용은 연산군일기에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 연산군일기는 "백마(白馬) 가운데 늙고 병들지 않은 것을 찾아서 내수사(內需司)로 보내라"라고 했다고 적었다. 정력과 관련된 내용이다. 연산군의 성격은 음탕함을 넘어 폭력성도 자주 보여주고 있다. 그가 즐겨하던 실록 속의 형벌 내용으로는 포락, 착흉, 촌참, 쇄골표풍(碎骨瓢風) 등이 있다. 포락은 불구덩이에 떨어뜨려 죽이는 것을, 착흉은 가슴을 뽀개는 것을
"오늘은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히 하겠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약속과 같이 하라. 내가 깊이 생각하여 보니 간당(姦黨) 중에서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자로는 김종서(金宗瑞) 같은 자가 없다."- 문종은 자신의 단명을 예견하고 김종서, 황보인 등 원로대신에게 어린 왕자(단종)를 잘 보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기회를 틈타 수양대군은 1453년 한명회 등 권력에서 소외돼 있던 자들을 포섭, 원로대신을 무력으로 공격·살해했다. 바로 계유정란이다. 세조의 역사는 이들을 정난공신이라고 적었다. '정난'(靖難)은 난을 평정했다는 뜻이다. '정난의 공을 논하여 세조(수양대군 지칭)·정인지·한확·박종우·김효성·이사철·이계전·박중손·최항·홍달손·권남·한명회를 1등으로 삼고… 인용문 중 박종우(朴從愚··∼1464)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이후 평안도 도체찰사로 나가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도체찰사는 왕명에 따라 민정을 총괄적으로 살펴보는 직책으로 정1품의 품계를 지녔다. 박종우의 간접적인 유품인 완문, 계하사목,교첩 등이 우리고장 충주의 운봉박씨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완문은 충훈부에서 내린 것으로, 정난공신 박종우의 공적을 인정하고 박흥래가 그 자손임을 확인하
행정적으로 충북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를 동서 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남쪽 대야산(930m)과 장성산(916m)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의 산세가 높은 만큼 불한령(弗寒嶺)의 해발고도는 비교적 높다. 510m이다. 고개 양사면도 비교적 가파른 편이고, 그 길이도 '연료가 많이 소모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 편이다. 특히 청천 관평리에서 올라가는 충북쪽 사면이 더 가파르다. 백두대간인 만큼 마루금(산능선) 자체가 분수령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서쪽 사면의 경우, 이제부터는 금강수계가 아닌 남한강수계가 등장한다. 서쪽의 물은 괴산 선유동-화양동-달천을 거쳐 남한강으로 유입된다. 반면 동쪽의 물은 문경 선유동-영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대동여지도는 백두대간 대야산 위에 '불한령'(不寒嶺)을 표시해 놓았다. 참고로 한자 '不'과 '弗' 자는 같은 뜻으로 '不'이 약자가 된다. 그러나 두 지역을 연결하는 선은 그어져 있지 않다. 이는 조선시대 불한령이 공로(公露)가 아닌 상로(商路)로 주로 이용됐음을 의미하고 있다. 대동지지(1861·철종)는 괴산현의 토산품으로 옻(漆), 지치(
올 '강장마'(일명 슈퍼 장마)의 기세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일반화된 표현은 아니지만 기상학상 비를 많이 뿌리는 장마는 '강장마'(多雨장마), 적게 뿌리는 장마는 '약장마'(寡雨장마)로 불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 금년 장마와 역대 최고값을 갖고 있는 지난 2006년 장마가 언론을 통해 자주 비교되고 있다. 종전까지 장마기간중 충북지역의 최대강수량은 지난 2006년(6월 23~7월 23일)에 작성된 충주 717㎜였다. 그러나 이 기록은 충주지역의 올 장마기간 중 누적 강수량이 지난 11일 801㎜를 넘어내면서 간단히 깨졌다. 보은지역도 지난 2006년에 작성된 543㎜가 역대 최고값이었으나 같은 날 720㎜의 강수량을 보이면서 역시 이 기록도 경신됐다. 당분간 올 장마가 종료되지 않을 것으로 보여, 도내 다른 지역도 속속 새 기록이 작성될 것으로 보인다. 금년과 2006년 장마가 크게 닮은꼴 모습을 하고 있다면 하나의 '장마 패턴'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분석 결과, 두 기간의 극성기 때 장마는 '닮은 듯 하면서 닮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장마기간 중 태풍이 올라왔고, 또 고온다습한 남서기류가 지속적으로 유입된 점은 확실히 닮은 모습을
국어사전에서 감옥(監獄)이라는 단어를 찾으면 '죄인을 가두는 곳'이라는 설명구를 만날 수 있다. '대한 제국 때 형벌의 집행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융희 원년(1907)에 감옥서를 고친 것이다'라는 부연 설명이 뒤따른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감옥'이라는 표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옥'(獄)이라고 불렀다. 감옥은 일본식 표현이다. 갑오경장 무렵에 감옥이라는 표현이 들어오면서 토종어 '옥'을 물리치고 대중성을 획득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감옥'이라는 표현이 수입되자 경무청 산하 전옥서(典獄署)를 감옥서(監獄署)로 바꿨다. 이후 '서' 자가 떨어져 나가면서 지금의 '감옥'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그러나 감옥은 문법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표현이다. 감옥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옥을 살핀다'는 뜻이 된다. '죄인을 가두는 곳'이라는 의미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따라서 앞으로 '감옥'이라는 말 대신 '교도소'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청주시가 과거 읍성터를 발굴조사하면서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명문이 새겨진 성돌 외에 우물터, 성벽 기초석 등이 잇따라 출토되고 있다. 이제 시작인 만큼 더 많은 발굴 성과가 기대되고 있다. 청주읍성은
충북은 인체 생리학적 시각으로 볼 때 기후 스트레스를 비교적 많이 받고 있는 지역인 것으로 분석됐다. 그러나 같은 도내이면서 '고지대+저습도' 지대인 영동 추풍령 일대는 기후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적게 측정됐다. 충북대 강철성(지리교육과·사진) 교수에 따르면 온습도지수(일명 불쾌지수)는 바람의 요소는 들어있지 않지만 인간의 기후생리를 잘 파악할 수 있어, 기상청에서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는 남한지역의 온·습도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30년 내외의 평균값을 가지는 29개 지점, 32개 지점의 측후소 등 전국 68개 지점을 선정했다. 그리고 이들 지역의 월평균 기온과 상대습도 등을 이른바 온습도 지수로 산출했다. 나아가 여기서 얻은 값을 서울시내 3백명의 남학생 적용, '극히 무더움', '무더움', '더움', '쾌적함', '서늘함', '쌀쌀함', '추움' 등의 반응값을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남한 지역의 연누적 온열감 지수를 지도로 작성한 결과, 대체적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그리고 해안에서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기후 스트레스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춘천, 홍천, 인제를 중심으로 한 강원 영서지역 △경기도 양평 △경북 내륙
강우현상이 거의 매일 나타나면서 장마와 관련된 각종 기록들이 속속 경신되고 있다. 10일 청주기상대에 따르면 최근 30년 동안의 중부지방 평균 장마기간은 32일로, 이 기간 동안 평균 366㎜의 비가 내렸다. 그러나 금년 경우 지난 6월 22일 장마가 시작된 후, 10일 현재까지 525㎜(청주지방 기준·오후 4시 현재)의 강수량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장마가 아직 종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30년 평균 강수량을 벌써 159㎜나 넘어서고 있다. 이는 또 다른 통계에도 반영돼, 연평균 강수량(청주기준)의 43% 정도가 올 장마기간 중에 쏟아진 셈이 되고 있다. 청주지역의 연평균 강수량은 1천225㎜이다. 이밖에 금년은 지난 6월 22일부터 중부지방에 장마가 시작돼 10일 현재까지 전체 20일중 18일의 강우현상(청주지역 기준)이 나타났다. 6월 31일과 7월 5일 이틀간을 제외하고 많게는 하루 181㎜(보은지역)의 비가 쏟아졌다. 특히 지난 6월 22일부터 30일까지 9일 연속 강우현상이 나타나는 등 금년은 이른바 '강장마'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편 중부지방의 평균 장마 종료일은 7월 25일이었다. 따라서 장마와 관련된 각종 기록들이 더 많
이홍윤 역모사건의 파장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당시 사건으로 인해 충청도와 충주목은 그 행정적 위치가 연좌법에 따라 한 단계씩 강등됐다. 1549년의 일이다. 이때 청홍도 관찰사로 부임한 인물이 이해(李瀣·1496∼1550)다. '충청도(忠淸道)를 고쳐 청홍도(淸洪道)로 만들고, 충주(忠州)를 강등시켜 유신현(維新縣)으로 만들었다. 이기(李초두변+己)를 의정부 영의정으로, 이해(李瀣)를 청홍도관찰사로, 이치(李致)를 유신현감으로 삼았다.'- 전회에 최하손 고변사건을 다루면서 당시 유신현감이었던 이치(李致·1504∼1550)라는 인물을 언급한 바 있다. 이치는 이 사건으로 인해 처참하게 죽어갔다. '고문을 당하여 도중에서 죽었는데 때가 마침 한 여름이어서 시체가 불어터졌다.'- 같은 시기 이치의 직속 상관이었던 이해도 거의 닮은꼴로 희생됐다. 이는 그가 당시 권력자였던 이기, 윤원형 등 소윤 일파와 권력의 대척점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인종 때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를 우의정에 앉히는 것을 반대하고 되레 탄핵했다. 이해는 이 때문에 이기와 그의 심복인 이무강(李無彊·?~?)의 원한을 샀다. 이런 상황에서 이해와 이홍남이 크게 다투는 사건이 벌어
'사신은 논한다. 이 옥사에 연루되어 주륙당하거나 귀양간 자가 무려 40∼50인에 달하여 충주(忠州) 전체가 온통 비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이홍남이 꾸며낸 일이었다. 그런데 이홍남이 자손을 둔 것이 어찌 천도(天道)이겠는가.'- 이홍윤 역모사건은 16세기 중반 우리지역 충주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외형상 이 사건은 곧 종결되는가 싶었으나 또 다른 사건의 발단이 됐다. 그것의 출발점은 역시 이홍윤 사건이었다. 명종은 이홍윤 사건 후 이른바 인사를 단행했다. 이때 유신현 현감으로 부임한 인물이 이치(李致·1504∼1550)다. 그 직전 연좌제에 따라 행정적 강등과 이름이 바뀌는 조치가 단행됐다. '충청도(忠淸道)를 고쳐 청홍도(淸洪道)로 만들고, 충주(忠州)를 강등시켜 유신현(維新縣)으로 만들었다. 이기(李초두변+己 기)를 의정부 영의정으로, 이해(李瀣)를 청홍도 관찰사로, 이치(李致)를 유신 현감으로 삼았다.'- 이와 관련, 당시 사관이 실록 말미에 이례적으로 '사신은 논한다. 다시 이기를 의정부 영의정으로 삼았다. 옥사가 한번씩 이루어질 적마다 이기 등의 직급이 올라가니 아, 슬프도다'라는 내용의 사론(史論)을 적었다. 사관이 영의정 이기만을 특정해
지리적으로 지장산(772m)와 만경봉(690m)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적으로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와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를 동서로 연결하고 있다. 현재 49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오도치(吾道峙)는 해발고도 350m로 그리 높은 고개는 아니다. 대신 동·서 양쪽 사면이 비슷한 기울기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영동지역 다른 고개에 비해서는 다소 가파르게 느껴진다. 피반령 정도의 경사도를 지니고 있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대동여지도는 충청도 황간현과 경상도 상주목을 연결하는 선(도로) 위에 오도치 표시를 해 놓았다. 대동여지도를 해설한 대동지지(1861·철종)의 황간현 산수조에 '동북 이십리에 있는데 상주로 통하는 간로이다'(東北二十里通尙州間路)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오도치는 세종실록지리지(1425)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중종)에는 그 고개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오도치가 비교적 늦은 시기에 개척됐고, 또 주용도가 상로(商路)였음을 의미하고 있다. 한 마디로 보부상들이 주로 왕래했던 길이었다. 이는 만기요람(1880·순조)이 오도치를 다루지 않은 것에서 역으로 입증되고 있다. 서영보 등이 순조 8년에 왕명을 받아 편찬한 만
보은 수리티재(정상 321m)에서 붕괴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것은 우기 외에 지질구조적인 특징을 무시하고 도로를 개설한 것이 주요 원인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보은 수한면과 회북면 사이에 걸쳐 있는 수리티재에는 총 35개소의 위험 절토사면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근본적인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6일 보은국도유지관리사무소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40분께 수리티재 구간인 동정저수지 부근 절개지에서 50㎥의 돌과 흙더미가 국도 25호선 위로 쏟아져내렸다. 이와 관련,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지반연구부는 '수리티재 일대 절토사면의 항구대책 마련을 위한 절토사면 붕괴특성 연구'라는 연구문을 통해 이미 수년 전 그 위험성을 지적한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문에 따르면 수리티재 남북사면 도로 구간에는 총 35개소의 위험 절토사면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위험 절토 사면에서는 도로 개설 후 조사 시점까지 쐐기파괴 10개소(전체 28%), 평면파괴 16개소(46%), 원호파괴 3개소(8%), 낙석 21개소(60%), 표층유실 8개소(23%) 등 총 58개소의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했다. 열거한 파괴 유형은 글자 그대로 쐐기, 평면, 원(圓)의 형태로 사면이 붕괴되는
1545년(명종 즉위년) 소윤 윤원형이 대윤 윤임 일파를 공격하는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충주인 이약빙도 이 사건에 연루돼 사사됐고, 그의 아들 이홍남(李洪男·1515 ~?)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됐다. 이홍남은 유배지에서 빨리 풀려나기 위해 '이홍윤(동생)이 배광의, 김의순 등과 역모를 꾸몄다'는 내용의 고변 편지를 승정원에 접수했다. 전회에도 언급한 이른바 이홍윤 역모사건이다. 이홍남, 홍윤 형제는 재산다툼으로 사이가 극히 안 좋은 터였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은 역모사건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다. 3일 뒤 풍성부원군 이기, 좌의정 황헌, 좌승지 정언각 등으로 국청(鞫廳)이 구성됐다. 국청은 조선시대에 역적 등 나라의 큰 죄인을 신문하기 위해 왕명으로 설치하는 임시관청을 일컫는다. 다음은 국청에서 작성한 심문 내용이다. "이홍윤을 형신할 때 무송수 이언성과 모산수 이정랑이 그 초사에서 나왔으니 잡아다 추문하게 하소서. 또 모의책(謀議冊)이 충주 본가에 있다고 하여 먼저 간 도사(都事)로 하여금 가지고 오도록 하였으나 틀림없이 가지고 올지는 기필하기 어려우므로 다시 이홍윤으로 하여금 대체적인 것을 적게 하여 입계합니다."- 인용문 중에 모산수 이정랑이라는 이름이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