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세종대왕과 불교정책을 언급했다. 이때 '태종에 이어 조선 초기의 가장 강력한 억불책의 하나였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태종은 종교정책에도 과단성을 발휘했다. 그는 사원 혁파를 단행해 사찰의 노비와 전답을 국고에 환수했다. 그는 이같은 연장선에서 유교적 사회질서의 정착을 위해 가정에는 가례(家禮), 그리고 향리에는 이사법(里社法)을 보급했다. 가례는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절을 말한다. 그러나 이사법은 자주 접하던 용어는 아니다. 이사법은 조선시대 각 향리에서 토신(土神)을 모시는 것을 말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 자리에서 풍년을 빌었고, 또 마을 인심(人心)을 밝게 하기 위한 의견을 주고 받았다. 넓은 의미의 현대판 반상회로 볼 수 있다. 이를 처음 건의한 인물이 허지(許遲·1372∼1422)다. '무릇 우리 동리(同里)의 사람은 각각 예법(禮法)을 존중하고, 힘을 믿고 남을 능욕(凌辱)하지 않는다. 위반하는 자는 먼저 함께 다스린 뒤에 관(官)에 넘긴다. 혹은 가난하여 도와주는 이가 없으면 그 집을 두루 도와주되, 3년에 자립하지 않으면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한다.'- 손으로 출처를 가리고 보면 "어느 동네 반상회 때 나온 얘기인가" 할 정도로 현실적
조선시대는 유교를 숭상하는 것에 반비례해 불교를 억압했다. 조선 개국의 설계자인 정도전은 그 정도가 더 심해 석가모니를 아예 '불씨'(佛氏)라고 불렀다. 고려말 사대부들이 불교를 줄기차게 공격한데는 이데올로기 외에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고려 후기의 전국 사찰들은 노비 외에 광범한 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사찰들은 여기서 나오는 잉여자본을 고리대금업에 재투자, 막강한 경제력을 확보했다. 고려후기를 '사원경제'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원경제를 공격해야 사대부 자신에게도 재분배된 토지가 돌아올 수 있었다. 세종대왕은 당시 대신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불교 여러 종단을 선·교종 양종만 남기고 산문 폐쇄령을 내렸다. 이때 불교 통폐합을 강력하게 건의한 인물이 당시 대사헌 하연(河演·1376∼1453)이었다. '세종 계묘년에 대사헌 하연(河演)이 동료들과 함께 상소하기를, 부처는 임금을 버리고 작위를 사양하였는데, 역대에서 깊이 믿어서 널리 절을 짓고 전지를 시주하며 노비를 바쳐서, 중외 사찰에서 나누어 부친 밭이 1만 1백여 결이나 됩니다. 동포 백성들이 주려 죽는 판인데, 놀고 있는 중들에게 또 무슨 밭을 주어서, 그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할
◇경부고속도로 총연장 416㎞의 경부고속도로가 지난 1970년 완공됐다. 이와 관련, 경부고속도로 중부권 구간을 살펴보면 청주 쪽으로 유난히 굽으면서 D자 모습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 본래 설계도는 천안-대전 구간을 직선으로 지나는 모습이었다. 이 노선이 가장 경제적인 것으로, 이럴 경우 지금의 오송 쯤을 통과하게 돼 있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고 민기식 장군이 애원조로 호소했다. 그는 "경부선 철도역을 충남 조치원에 빼았겼다. 경부고속도로가 이번에도 조치원으로 가깝게 지나가면 충북의 미래는 없다"며 박 전 대통령에게 노선 변경을 애원했다. 그 결과, 경부고속도로 중부권 노선이 청주 쪽으로 많이 동진(東進)하면서 지금의 D자형 모습이 됐다. 지금의 경부고속도로 청주 톨게이트는 청주에서 10㎞, 조치원에서도 10㎞가 되는 딱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토목업체도 아니면서 큰 돈을 벌은 사업체가 있었다. 청원군 남일면에 위치하던 '한림농원'이었다. 경부고속도로 조경수가 품귀현상을 빚으면서 한태현(한현구 전 충북도의회의장 선친) 씨가 운영하던 한림농원은 나무 대기에 바빴다. 한림농원은 중부고속도로과 청남대 건립 때도 잇따라
박정희 정권은 어떻게 6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화전정리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주는 '한국의 산림녹화 성공요인'(배재수·주린원·이기봉 공저) 연구서가 최근 산림과학연구원에서 나왔다. 특히 이번 연구서에는 충북에 대한 자료도 많이 포함돼 있어, 지역적인 관심도 많이 끌고 있다. 법적으로 화전(火田)은 '합법적인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산림에 불을 놓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이를 개간하여 농경지로 사용 또는 사용하였던 토지'라고 정의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燒田', 미국에서는 'Burning Cultivation Field'라고 부르고 있다. 연구서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1932년 화전이 '민초들의 마지막 생계 수단'이라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폐해상 때문에 전국적인 규모의 정리사업을 처음으로 실시한다. 이때의 '엄청난 폐해상'은 산림 황폐화와 우기 토사 유출의 지원지 등을 의미하고 있다. 일제는 그러나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을 잇따라 치르면서 화전정리사업을 본격적으로 실행하지는 못했다. 8.15 광복 때의 해외동포 귀국과 6.25 한국전쟁에 따른 월남인구는 당시 화전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연구서에 따르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가 / 홍안은 어디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 잔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 하노라'. 임제(林悌·1549∼1587)의 시조다. 그는 서도병마사가 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 위 시조를 짓고 제사지냈다가 부임하기도 전에 파직당했다. 임제는 그후 다시 복직되나 본래의 호방한 성격은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질시하는 벼슬아치 사회에 대해 환멸과 절망을 느낀다. 그는 10년간의 관직생활을 뒤로 하고 전국을 유람하기 시작했다. 이때 만난 여성이 한우(寒雨)라는 평양 기생이다. 둘이 나눈 시조가 '해동가요'(김수장), '청구영언'(김천택)에 각각 전해지고 있다. 먼저 임제가 한 수 읊는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를 / 우장(雨裝) 업시 길을 나니 /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온다.' 한우가 화답한다. '어이 얼어 잘이 므스 일 얼어 잘이 /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듸 두고 얼어 자리 / 오늘은 비 맛자신이 녹아 잘 노라.' 임제가 '한우'라는 기생 이름에 빗대어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자겠다고 한다. 그러자 한우는 자신을 찬비에 빗대어 원앙침 비취금 속에 녹아 자라고 한다. 남녀간 서로의 수작을
"고전은 명현의 정신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삶의 지혜와 세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을 그 속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고전은 고리타분한 것이 아닙니다" 칠순을 넘긴 농부가 10년째 대학 강단에 서고 있다. 충북대 사학과에서 한문 강독을 맡고 있는 이두희(77) 옹. 그는 오전 6시 30분쯤 집이 있는 청주시 강서2동 원평마을에서 자전거로 논 2만㎡(6천여평)를 둘러 본 후 오전 11시쯤 충북대 연구소로 출근, 사학과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주 6시간 한문 고전을 가르치고 있다. 또 충북대 우암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우암학당의 훈장 역할도 맡으면서, 매주 화·수요일 저녁 중부권 직장인들을 상대로 역시 한문 고전을 강의하고 있다. 그의 한문 고전에 대한 넓이와 깊이는 어찰, 노비문서, 전답매매문서, 산송단자, 택리지, 대전회통, 일성록, 양전사목, 전령문 등 우리나라 고문헌·문서의 거의 모든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은 접근이 쉽지 않은 주역, 통감, 사기열전 등 중국 사서류도 원전으로 강의하고 있다. 그의 우암학당 강의가 소문이 나자 오효진 전 청원군수, 박만순 전 도의원 등 퇴임한 지역 저명인사들은 물론 현직 대학강사와 정교수 일부도 수강
중국 고서 중에 '잠서'(蠶書)가 있다. 북송 때 진관(秦觀·1049~1100)이라는 인물이 지은 책으로, 가장 이른 시기의 잠업책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때 이 잠서를 알기 쉽게 풀이한 인물이 서강(徐岡·?∼1461)이다. 또 그는 최항 등과 함께 손자주해(孫子註解)를 교정할 정도로, 학문에 관한 한 경지에 올랐다.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행동으로도 나타났다. 그의 직언은 유명했다. 단종실록 내용이다. '헌납 서강(徐岡)이 본원의 뜻을 가지고 아뢰기를, "신 등이 듣건대, 내일 장차 동교에 사냥한다고 하는데, 사철 강무같은 것은 인군(人君)의 부득이한 일이지만, 지금 명분도 없는 사냥을 자주 행하시는 것은 불가할 것 같으니, 청컨대 이를 정지하소서…"'- 이 대목의 실록 내용은 훨씬 더 길다. 단종이 '뭐 그런 것을 가지고!'라는 식으로 말을 해도 그는 직언은 계속 된다. 시쳇말로 임금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있다. '서강이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나이가 바야흐로 어리신데, 자주 사냥을 구경하러 다니시고 학문을 폐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주군이 바뀌었지만 그의 직언 태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상대가 단종과 정반
초대 충북도의회(1952.5.25~1956.8.13)는 어떤 인물들로 구성됐고, 또 어떤 활동을 벌였을까. 본보가 이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사료를 입수했다. 충북도의회(9대 의장 김형근)가 지난 1952년 개원한 이래 어느덧 제 300회 회기를 맞았다. 또 금년은 충북도의회가 지난 1991년(제 4대) 부활된지 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에따라 도의회는 자축연과 함께 다양한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내년이 초대 도의회가 개원한지 1갑(60주년)이 되는 해임에도 불구, 당시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료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있다. 11일 충북도의회 자료실 관계자는 "현재 지난 1999년에 기증받은 '忠北地方議會史'(1955년 간행)를 1부 보관하고 있으나 부서짐 정도가 워낙 심해 본문 내용 확인은 물론 복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본보는 수소문 끝에 다른 루트를 통해 '충북지방의회사'를 입수, 초대 충북도의회 의원들은 어떤 인물로 구성됐고,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를 분석했다. 확인 결과, 176쪽 분량의 충북지방의회사는 신익희가 책표지 글씨 및 휘호를 썼고, 이기붕(당시 민의원의장)과 김응학(당시 충북도지사)이 서문을 작성했다. 또 유진
이달들어 궂은 날씨가 계속 되면서 '5월=계절의 여왕'이라는 표현을 무색케 하고 있다. 10일 청주기상대는 "11일 오전까지 전국적으로 최고 60㎜ 가량의 비가 더 오겠다"며 "일부 지역에서는 천둥, 번개를 동반한 강한 비가 오겠다"고 밝혔다. 예년의 5월은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특성 때문에 푄현상이 찾아오는 등 봄가뭄 현상이 약하게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금년 5월 날씨는 흔치않은 '비풍년' 현상을 보이고 있다. 기상청의 예보가 맞다면 11일까지 청주지역을 기준으로, 지난 5일 어린이날을 제외하고 연6일 강우현상이 나타난 셈이 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장마전선의 일종인 정체전선이 때 이르게 한반도 상공에 등장, 동쪽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남북 진동을 계속하기 때문에 비롯되고 있다. 기상학상 한반도 장마전선은 북태평양고기압이 세력을 확장하는 6월말부터 찾아오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금년 5월 초·중순 경우는 북태평양고기압 대신 동중국해로부터 따뜻하고 습한 공기가 지속적으로 유입, 이것이 한반도 상공에서 차고 습한 공기와 충돌하면서 정체전선을 만들어내고 있다. 정체전선은 '걸음걸이'가 빠른 한랭전선과 달리, 특정지역에 오래 머물면서 강우현상을 나타내는
우리나라 역대 조정은 고대 이래로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제사를 지냈다. 시대에 따라 다소 다르기는 하나 대체로 '국가의 흥망성쇠는 산천의 음양 조화와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명산대천에 대한 이같은 인식은 조선시대 들어서 다소 변하게 된다. 산천신에 신격(神格)을 부여하는 것은 종전과 같았다. 다만, 산천신을 신하로 의식하는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왕은 이르노라! 그대 백악(白岳)과 목멱산(木覓山)의 신령과 한강과 양진 신령이며 여러 물귀신이여! (…) 그대들 신령이 있거든 나의 지극한 회포를 알아주어, 음양을 탈 없이 하고 (…) 신도 또한 영원히 먹을 것을 가지리라. 그러므로 이에 알리는 바이다."- 태조 이성계가 참찬문하부사 김입견(金立堅)이라는 인물을 보내서 산천의 신에게 고유한 내용의 일부다. 고유문(告由文)은 중대한 일을 치르고자 할 때나 치른 뒤에 그 까닭을 적어서 사당(祠堂)이나 신명에게 고하는 글을 말한다. 인용문을 보면 '왕은 이르노라', '이에 알리는 바이다' 등의 표현에서 보듯 신을 휘하처럼 하대하고 있다. 조선시대 제사에 대한 의식은 국조오례의 길례(吉禮) 편에 적혀 있다. 길례는 조선시대 제사의 종류를 사(祀), 제(祭), 향(享
일제는 한반도를 강점한 후 산림자원도 수탈해 갔했다. 이때 맹수인 호랑이는 방해물이 됐다. 따라서 일제는 호랑이 포획을 장려했고, 그 과정에서 한반도 호랑이가 멸종됐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까지도 상황은 그 반대였다. 호랑이가 자주 출현하면서 전국 곳곳에서 희생자가 속출했다. 따라서 호환(虎患)이라는 단어가 대중어로 사용됐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관련 내용이 64건이나 등장하고 있다. 호랑이가 가장 많이 출몰한 지역은 북한지역이었고, 그 다음은 태백산맥을 끼고 있는 영동이었다. 호랑이는 산간벽지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능과 궁궐에도 출몰했고 심지어 궁안에 새끼까지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비망기로 홍경신(洪慶臣)에게 전교하였다."내가 듣건대, 창덕궁 안에서 어미 호랑이가 새끼를 쳤는데 그 새끼가 한두 마리가 아니라고 한다. 발자국을 찾아 잡도록 이미 전교를 내렸으니 지금처럼 초목이 무성한 때에는 군대를 풀어 잡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발자국을 찾아내어 제거하는 방법이야 어찌 없겠는가.'- 호랑이를 애완동물처럼 대했다면 정상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한 인물이 있었다. 짐작했겠지만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이) 우리(檻)에 큰 호랑이와 큰 멧돼지
내수초등학교 (교장 허광범)는 4일 쉐마 미술관(관장 김재관)에서 다문화 학생과 교사가 함께 하는 예술체험의 시간을 가졌다. 이날 다문화 멘티 어린이들과 멘토 교사 30명은 '나무가 살아난다' 주제의 행사에 참여 하여 또래 친구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의견을 공유했다. 또 나뭇잎 그리기, 나무의 여백 그리기 등 다양한 활동을 직접 해 봄으로써 미술을 좀 더 쉽게 이해하고 놀이를 통해 예술을 체험 하는 기회를 가졌다. 특히 이 과정에서 다문화 어린이와 교사가 협동하여 하나의 작품을 만들고, 서로의 느낌을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가져 예술을 통해 하나가 되는 어울림 시간을 가졌다. 허 교장은" 간단한 나뭇잎 그리기나 나무 그리기 하나에도 각각의 아동의 생각이 담긴다"며 "그런 의미에서 이번 체험은 아동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 김병학 기자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약천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 지은 시조로,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생활의 풍류를 즐기며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주제는 권농(勸農)이지만 농촌의 평화로움도 잘 드러나 있다. 남구만은 목가적 시조를 남긴 것과 달리 정치적으로는 굴곡이 많았다. 그는 송시열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면서 소론의 영수로 떠올랐다. 그러나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면서 강릉으로 유배됐고, 장희빈에 대한 극형을 반대하다가 완전히 실각·낙향했다. 남구만의 사당과 묘는 경기도 용인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유난히 우리고장 충북에도 많은 족적을 남기고 있다. 그는 현종대에 청주목사를 역임했다. 그가 올린 상소문이 실록에 전해지고 있다. '청주 목사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전세 및 대동미 여분을 받아 본읍에 두었다가 진휼의 자본에 충당하고, 속오군의 복호는 그대로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잃지 말고(…)" 하였는데, 상이 그 소를 비국에 내려 의논하여 아뢰게 하여, 속오군을 급복하는 일 외에는 모두 그 말대로 따랐다.'- 실록 수정본은 고친
충주 도심에서 7~8세기 무렵의 통일신라 때 토루(土壘) 흔적의 일부가 발견됐다. 이에따라 중원경 치소의 본래 위치를 둘러싸고 또 한번의 논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재)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은 지난해 11월부터 충주시 일원에서 충주읍성에 대한 학술조사 작업을 벌여왔다. 그 결과, 통일신라시대 국원성(國原城)의 나성(羅城)으로 보이는 토루 흔적 을 충주시 호암동과 만리산 구간 등 두 곳에서 확인했다고 2일 밝혔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18년(557)에 국원소경을 설치하였으며, 문무왕 13년(673) 9월에 둘레 2천592보의 국원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국원성은 후에 중원경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또 당시에는 성을 이중으로 쌓는 경향이 있었고, 이중 바깥성은 나성(羅城) 또는 나곽(羅郭)이라고 불렀다. 연구원측은 호암동 구간에 대해 "현재 약 380m 정도 잔존하고 있고, 내외협축(일명 양쪽면 쌓기) 구조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만리산 구간에 대해서는 "현재 약 280m 정도 잔존하고 있고, 외축내탁(일명 한쪽면 쌓기) 구조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구원측은 축조 시기가 통일신라 시대임을 입증하는 유물로 함께 수습된 도기와 기와편 등을 제시했다
실록에는 다양한 형태의 기생 이름이 등장한다. 장중경(掌中輕), 세류지(細柳枝), 내한매(耐寒梅), 일타련(一朶蓮), 적선아(謫仙兒), 계궁선(桂宮仙), 승양비(勝楊妃). 장중경은 손바닥 안에서 춤을 출 정도로 가려리다, 세류지는 버들가지처럼 하늘거리는 허리, 내한매는 추운 겨울을 견뎌낸 매화, 일타련은 진흙속의 한 송이 연꽃, 적선아는 죄를 지어 인간세계로 귀양온 선녀, 계궁선은 달나라 궁궐에 사는 선녀를 각각 일컫고 있다. 여러 기생 이름중 압권은 아무래도 승양비(勝楊妃)인 것처럼 보인다. 미모로 양귀비를 뺨친다는 뜻이다. 기생과 관련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만들어낸 왕은 연산군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건 말건 자기 욕심부터 채웠다. 여기에도 승양비, 내한매의 이름이 등장한다. '기녀(妓女) 승양비(勝陽妃)·내한매(耐寒梅)는 자색(姿色)이 있었는데, 계성군(桂成君) 이순(李恂)이 가까이하는 바였으므로, 비록 감히 원(院)에 뽑아 들이지는 못하였으나, 왕이 자주 비밀히 불러다가 간음하였다.'- 조선시대 기생 이름 중 영자, 순희 식으로 흔한 이름은 '홍일점'(紅一點) 또는 '일점홍'(一點紅)이었다. 두 단어는 같은 뜻으로, 글자 그대로 푸른 잎 가운데
근래들어 가장 강력한 황사가 충북을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 찾아왔다. 1일 청주기상대는 "이날 청주(청원)는 382㎍/㎥, 추풍령은 355㎍/㎥의 최고 농도를 각각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에따라 이날 오전 10시 도내 전역에 황사주의보가 내려지기도 했다. 기상대는 400㎍/㎥ 이상의 황사 먼지 농도가 2시간 이상 지속될 때는 황사주의보, 800㎍/㎥ 이상으로 높아질 때는 황사특보를 발령하고 있다. 이처럼 비교적 강력한 황사가 찾아온 것은 황사 발생과 이동에 따른 한반도 주변의 기상 상태가 3박자 모습을 갖췄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황사는 '중국 내륙 사막지역에 겨우내 눈이 적게 오면 발생하기 쉽다'라고 많이 알려져 있다. 기상학자들은 이에 대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보다는 황사발생 당시의 동북아 기상 상태가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밝히고 있다. 황사 입자가 공중으로 솟아오르면 발생 지역에 강력한 상승기류가 존재해야 한다. 이 역할을 해주는 것이 한랭전선이다. 이틀전 중국 내몽고와 고비사막 지역에 강하게 발달한 한랭전선이 지나갔고 이때 이미 황사 발생이 예측됐다. 이렇게 발생한 중국 내륙의 황사가 남동진을 하려면 한반도 지역에 저기압이 자리
고려 태조 왕건은 지방 호족의 세력을 흡수하는 방편으로 성(姓)을 하사했다. 이른바 사성(賜姓) 정책이다. 이와 관련해 평민들에게도 성(姓)에 앞서 본관이 먼저 주어진 경우도 있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 결과다. 세금과 관련이 있다. 양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려면 거주지가 명확하고 고정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유랑생활을 하면 세금 부과가 쉽지 않다. 지금의 가족관계등록법에 고려 본관제도의 잔상은 남아 있다. 바로 본적란이다. 본적란을 보면 당사자나 그 선대가 어느 곳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려시대 평민들은 역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를 상당 부분 제한받았다는 것이 된다. 성씨·본관 문화와 관련해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는 표현이 종종 사용된다. 이때의 삼한은 원삼국 시대의 마한, 변한, 진한이 아닌 신라, 고려, 조선조를 일컫고 있다. 누대에 걸쳐 문벌이 좋은 가문이라는 뜻으로, 달리 의관갑족(衣冠甲族)이라고도 한다. 어느 성씨·본관이 삼한갑족에 속하는지는 주관적인 면이 있다. 이와 관련, 상당수 문중이 자신들의 선조를 아전인수 격으로 삼한갑족에 포함시키고는 한다. 전주이씨를 제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삼한거족이
고려의 말기의 왕으로 '우'와 '창'이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호가 주어지 않았다. 왕씨가 아닌 신씨의 씨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때의 신씨는 신돈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야 쿠데타 명분이 보다 뚜렷해질 수 있다. '고려사'는 고려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고려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초 정인지 등이 작성했다. 승자의 시각 여부를 떠나 고려사가 없었다면 한국 중세사는 어둠 속에 묻힐 뻔 했다. 고려사가 편찬되기까지는 곡절이 많았다.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도 실록을 작성, 보관해 왔다. 그러나 잦은 외침과 내란 등으로 그 보관이 쉽지 않았다. 고려 고종 때 안전한 장소를 물색하던 끝에 합천 해인사에 실록 보관을 위한 외사고를 설치했다. 당시 중앙에 있는 춘추관사고는 내사고, 이를 분산·배치했던 지방사고는 외사고로 불렀다. 그러나 해인사 외사고도 몽고 침략과 왜구창궐로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다. 1381년(우왕 7)에 충주 개천사로 옮겨져 약 2년간 머물렀다. 이것은 1383년(우왕 9) 죽주 칠장사로 옮겨가고, 약 7년 뒤인 1390년에는 다시 충주 개천사에 옮겨 약 30년간 존치되다가 충주읍성 안으로 옮겨졌다. 충주성
내년이 임진왜란 발발 7갑주기인 가운데, 전국에 흩어져 있는 9명의 직손들이 회동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여기에는 송상현, 조헌 등 충북과 연고가 있는 인물도 포함돼 있어 지역적인 관심도 끌고 있다. 25일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등에 따르면 내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어느덧 7갑주기가 되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휘하의 15만명의 왜구는 1592년 4월 14일(음력) 부산진성을 공격,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따라서 내년은 임란 발발 4백20주년, 즉 7갑주기(60x7)가 되고 있다. 이와 관련,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는 7갑주기 관련한 기념식과 학술대회 개최 등을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특히 위원회는 '순조실록'에 등장하는 9명의 무·문공 직손을 중심으로 단제사와 사제사를 공동으로 계획하고 있다. 단제사는 국가차원에서 단(壇)을 설치해 큰 제사를 지내는 것을, 사제사는 사당에서 제사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9명의 무·문공에는 충북을 연고로 하는 인물로 천곡 송상현(宋象賢·1551~1592) , 중봉 조헌(趙憲·1544~1592) 등이 포함돼 있어 지역적인 관심도 크게 끌고 있다. 송상현은 청주 수의동, 조헌은 옥천 안남면에 각각 묘와 사당이
전회에 우리고장 인물 남이장군을 소개했다. 유자광의 모함으로 한참 기개가 높던 시기에 극형에 처해졌다고 밝혔다. 이때 며느리와 사이가 안 좋았던 남이의 어미도 극형에 처해진다. 죄목은 국상중에 고기를 먹었다는 것이었다. 정황상 조작의 가능성이 농후하나 문헌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 아뢰기를, "남이의 어미는 국상 성복(成服) 전에 고기를 먹었고 그 아들이 대역(大逆)을 범하였으며, 또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는 죄가 있으니, 청컨대 극형에 처하소서"하니, 명하여 저자에서 환열하게 하고, 3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하였으니.'- 조선시대 때 국상이 발생하면 백성들은 소복(素服)을 입고 백립(白笠)을 썼고, 또 빈소를 차린 후 곡반(哭班)을 편성하여 곡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가무, 도살, 혼인 행위도 엄격히 금지됐다. 나아가 고기도 먹을 수 없었다. 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도살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 엄하게 다스렸다. 국상과 관련해 고기와 생선이 들어가지 않은 투박한 반찬을 '소선'(素膳)이라고 불렀다. '문하 좌시중 성산백 배극렴이 졸하니,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을 하고,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죽거나 살거나 함께 고생하자던(死生契闊) / 당신과는 굳게 언약하였지(與子成說) / 섬섬옥수 고운 손 힘주어 잡고(執子之手) / 단둘이 오순도순 백년해로하자고(與子偕老)'. 중국 시경(詩經)에 등장하는 '격고'(擊鼓)라는 한시다. 춘추전국시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시에는 고향을 등지고 멀리 떨어진 전장에서 아내를 그리워하는 한 병사의 애절함이 배여 있다. 이 표현이 국내에 유입돼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과 함께 결혼식 주례사의 단골 내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비슷한 표현으로는 '살아서는 같은 방을 쓰고(生則同室) / 죽어서는 같은 무덤을 쓰네(死則同穴)'도 있다. 조선시대도 백년해로가 주요 미덕이 됐다. 따라서 평민들의 이혼은 쉽지 않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면도 있었다. 질투 등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범했을 경우 남편은 아내를 내쫓을 수 있었다. 이같은 행위를 아내를 버린다는 뜻에서 기처(棄妻) 또는 휴기(休棄)라고 불렀다. 아내가 무척 싫어졌으나 칠거지악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조선시대 남편들은 이때는 아내를 소박(疏薄)했다. 내쫓지 않으면서 구박하는 것을 말한다. 소박당한 아내는 평생 뒷방차지 신세가 되어 첩 주위를
20일자 종이신문 '교과서 밖의 충북역사' 내용 중 '황간군에 편입됐다'는 '영동군에 편입됐다'가 바른 표현이기에 바로잡습니다.
'구름도 자고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 추풍령 구비마다 한많은 사연 /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보는 /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 고개'- '기적도 숨이차서 목메어 울고가는 / 추풍령 구비마다 싸늘한 철길 / 떠나간 아쉬움이 뼈에 사무쳐 / 거치른 두뺨위에 눈물이 어려 / 그 모습 어렸구나 추풍령 고개'- 가수 남상규씨가 불러 크게 히트한 대중가요 '추풍령'이다. 가사 내용이 너무 정겨워 1·2절 모두를 소개했다. '추풍령'은 남상규씨 뿐만 아니라 배호, 나훈아, 이미자 씨 등도 불렀다. 그 만큼 추풍령은 지금의 50대 이상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 일이키는 노래다. 추풍령면소재지에서 김천 방향으로 잠깐 달리면 추풍령 노래비를 만날 수 있다. 고풍스런 한자 글자체 때문에 꽤 오래 전에 세워진 노래비처럼 보이나 그렇지는 않다. 지난 88서울올림픽 때 성황 봉송을 기념, 그해 9월 영동군에서 세웠다. 추풍령는 '秋'와 '風' 자가 만나면서 묘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지명어다. 언뜻보면 명시(名詩)에 등장하는 시어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중국 무협영화에 나오는 이름같기도 하다. 지명 추풍령이 어디서 유래했는가를 밝혀 놓은 사료는 존재하
"역사 연구는 오직 진실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군이 조선 동학농민군을 상대로 저지른 행위는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밝혀져야 합니다". 일본 에히메(愛媛) 현에서 동학진압군의 한 부대인 일본 후비보병 제 19대대를 연구해 온 오노우에 마모루(尾上守) 향토사학자가 부인 토시코 여사와 함께 지난주 충북대를 찾았다. 오노우에 씨는 얼마전 '식민지 조선과 에히메 사람들'(그림 참조)이라는 연구 저서를 그가 속한 일본코리아협회 이름으로 발간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충북대 신영우(사학과) 교수가 두 부부를 역으로 초청했다. 오노우에 씨는 신교수 논문이 이번 저서에 꼭 필요하다고 판단, 장문으로 게재한 바 있다. 책 표지는 '잊어서는 안되는 과거가 있다'(아래 큰 활자)는 내용과 함께 '일본의 한국병합 백년을 계기로 에히메 사람들의 족적을 추적한다'(아래 고딕체)는 문장을 싣고 있다. 오노우에 씨가 동학농민군 진압에 투입된 여러 병력 중 유독 후비보병 제 19대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대 구성원의 대부분이 에히메 지역 출신자들로 구성된 것이 이유가 됐다. 후비보병 제 19대대는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소좌가 지휘하던 부대로, 이 부대가 국내에 투입된
고려와 조선 조정은 출장나가는 관원들을 위해 국영 숙박시설인 원(院)을 운영했다. 원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비교적 활발하게 운영됐다. 임진왜란 후 이른바 참(站) 제도가 도입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그 흔적이 지명에 더러 남아 있다. 조치원, 광혜원, 장호원 등이 이에 해당한다. 광혜원은 한때 '양질의 쌀이 만 되(升)나 난다'는 뜻으로 만승면(萬升面)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지난 밀레니엄 때 주민들이 과거 역사를 되찾자는 의미에서 지금의 광혜원으로 개명했다. 광혜원 주민들이 이름을 바꾼 데는 나름의 역사적인 이유와 근거가 있다. 청주에서 서울을 가려면 지금은 고속도로를 주로 이용한다. 고속도로가 없던 시절에는 달랐다. 청주-오창-진천-광혜원-용인 등을 경유했다. 바로 17번 국도다. 조선시대 거유 우암 송시열도 이 코스를 자주 이용했다. 문집 송자대전에 우암의 동선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등장한다. 인용문중 '만의'는 수원을 말한다. '19일에 만의(萬義)에서 출발하여 20일에 죽산 광혜원에 머물렀는데(…) 21일에 국장도감 낭청이 지문의 첨가와 개정에 관한 일로 진천(鎭川)까지 뒤쫓아왔다. 22일에 승지가 또 뒤쫓아와서 서원(청주 옛이름)에서 유지(諭旨)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