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시문선집의 대표적인 것으로 동문선(東文選)이 있다. 서거정이 대표저자로 시(詩)가 4분의 1이고 나머지는 문장이 차지하고 있다. 이것 외에 이름이 같은 2개의 동문선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다. 1518년(중종 13)에 신용개(申用漑), 김전(金詮), 남곤(南袞) 등이 편찬한 것과 1713년(숙종 39) 송상기(宋相琦) 등이 편찬한 것도 전해져 오고 있다. 따라서 서거정의 것을 '정편 동문선', 신용개의 것을 '속동문선'(續東文選), 송상기의 것을 '신찬 동문선'으로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책이름을 동문선이라고 한 것은 중국의 '문선'(文選)을 따랐다는 뜻으로, 목차도 그것에 준하고 있다. 동문선은 관료·귀족의 미의식에 맞춰, 이른바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의 화려하고 숭엄한 문체로 쓰여진 것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따라서 철저하게 상층 지배층 중심의 시문을 의식적으로 실었다. 교서를 보면 조선시대 역대 왕들도 이 문체를 선호했다. 우리고장 출신으로, 동문선에 시를 남기고 있는 인물로 정수곤(丁壽崑·1452∼1486)이 있다. '찬 하늘의 짧은 해가 가벼운 북을 던지듯(寒天短日擲輕梭) / 나그네는 출새가를 길게 읊조린다(客子長吟出塞歌) /(…)/ 10년의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방대한 규모로 유명하다. 59권 42책으로, 저술 기간만 30년에 이르고 있다. 그는 부친 이광사 유배지인 신지도(薪智島)에서 42세 때부터 저술하기 시작하여 타계할 때까지 이 책에 매달렸다. 특히 그가 추구했던 객관주의 역사 의식은 지금도 사계의 표본이 되고 있다. 그는 역사 저술의 기본 태도로 '술이부작(述而不作)'을 견지했다. 서술은 하되 작문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흔히 연려실기술에는 야사 모음집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이긍익은 수집한 각종 야사를 글로 남기되 반드시 출처를 명기했다. 그러나 자신의 주관은 하나도 첨가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술이부작'이다. '연려실'은 그의 서실(書室)이름으로, 중국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옛 글을 교정할 때 명아주 지팡이에 불을 붙여 방안을 밝게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이긍익은 우리고장 청원 문의의 덕천사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덕천사우(德川祠宇) 숙종 갑술년에 세웠다. 유희령 호는 몽암(夢庵)이며 호조참의를 지냈다. 유흥룡 호는 숙옹(塾翁)이며 감찰을 증직하였다. 우신언 호는 묵재(默齋)이며, 찰방을 지냈다. 정응창 호는 유항(柳
온라인 강의실 성격을 지닌 충북대 'e-캠퍼스'(e-cbnu)가 이번 주부터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특히 e-캠퍼스는 수준높은 교양강좌를 실시간 중계하는 것이 가능, 콘텐츠가 완비될 경우 학내는 물론 지역 평생교육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9일 충북대(총장 김승택)는 2억원의 정부지원 예산으로 e-캠퍼스의 틀이 되는 관련 시스템 구축, 이번주부터 운영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번 e-캠퍼스는 교수가 동영상 등 온라인상의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기반으로 정규강의 및 비정규 강의를 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때 화상, 음성, 채팅 등의 과정을 통해 교수와 학생, 학생과 학생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게 된다. 특히 학생들은 웹 뿐만 아니라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강의를 수강하는 것도 이론상 얼마든지 가능, 사실상 스마트폰으로 강의를 보고 듣는 시대가 열리게 됐다. 충북대는 강의 형식을 정규 강좌와 공개 강좌 등 2종류로 구분하기로 했다. 정규강좌는 재학생들만, 공개강좌는 동료교수는 물론 교직원들도 이용이 가능하다. 이밖에 충북대는 e-캠퍼스 콘텐츠가 보완될 경우 지역사회 평생교육의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그러나 시스템 구축을
조선시대 임금 중 재위 기관이 가장 짧았던 인물은 인종(仁宗·1515∼1545)이다. 임금이 된지 8개월만에 병사했다. 야사에 계모 문정왕후(1501~1565·명종의 생모) 독살설이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다. 어느날 인종이 문정왕후가 거처하고 있는 대비전을 찾았다. 이때 그녀가 그에게 떡을 건냈고, 인종은 이를 받아 먹은 후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못가서 숨을 거뒀다는 것이 독살설의 전모다. 인종은 재위기관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묘사화 때 희생된 조광조, 김정 등을 복원시키는 등 친사림파적인 정책을 많이 펼쳤다. 인종의 친사림파적인 정책에는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도 많이 작용했다. 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여론정치의 일환으로 상소권이 주어져 있었다. 이와 관련, 당시 유생들은 세번의 상소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 격정적인 내용이 자뭇 인상적이다. '아아, 하늘이 장차 사문(斯文)을 망하게 하려고 합니다. 조광조처럼 어진 사람이 있어도 억울하게 죽었고 (…)신들은 땅에 엎드려 마음 아파하면서 천심(天心)이 마침내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도(道)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조광조 한 사람이 죽자 온 세상이 취제하여 곧고 바른 말과 행실
등산이 국민들 사이에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경제 심리효과는 의외로 큰 것으로 조사됐다. 이밖에 등산인구는 중산층이면서 40~50대 그리고 성별로는 여성이 다소 많이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북대 산림학과 신원섭(사진) 교수가 얼마전 '등산활동의 경제적 파급효과' 제목의 논문을 한국산림휴양학회지에 기고했다. 신 교수는 등산이 갖고 있는 경제, 사회적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전국 10개 산의 등산자 1천91명을 대상으로 여러 유형의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전국 10개 산은 서울 청계산, 관악산, 청주 우암산, 강원 태백산, 논산 대둔산, 광주 무등산, 구미 금오산, 전주 기린봉 등이다. 먼저 응답자를 대상으로 등산 참여자의 성비, 연령, 직업 등을 조사했다. 그 결과, 여성 567명, 남성 532명으로, 여성 참여자가 다소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가정주부 등 시간적 여유가 있는 여성 집단이 등산을 자주 하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연령은 19~29세 12.4%, 30~39세 17.4%, 40~49세 24.8%, 50~59세 26.2%, 60~69세 14.6%, 70~79세 4.6% 등을 기록, 40~50대의 등산참여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등산인구의
이준경(李浚慶·1499~1572)의 광주이씨 가문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심한 부침을 겪었다. 이준경의 증조부 이극감은 무오사화와 간접적인 관련이 있다. 간신 유자광이 조의제문을 밀고할 때 그는 그의 직속 상사였다. 이준경의 조부는 세좌(世佐)다. 그는 인수대비가 며느리 폐비윤씨(연산군 생모)에게 사약을 내릴 때 형방승지로서 이를 운반했다. 연산군이 가만둘리 없다. 그는 거제도로 이배되던 중 지금의 경남 사천에 이르러 자살 하명을 받고 스스로 목을 맸다. 이준경의 부친은 수정(守貞)으로, 그를 포함해 4명의 아들이 연좌법에 따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자 당시 사관이 이렇게 적었다. '왕이 이씨종친(광주이씨)이 강성한 것을 근심하여 모두 없애 종자도 남기지 않으려 하였다'- 이수정은 슬하에 윤경(潤慶)과 서두에 언급한 준경 등 두 아들을 뒀다. 이들도 연좌법에 따라 우리고장 괴산으로 유배됐다. 이들의 괴산 유배생활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실각하면서 자유의 몸이 됐고, 이후 충주의 사촌형 이연경(李延慶) 밑에서 수학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벼슬길에 나간 이준경에게도 첫 시련이 찾아왔다. 1549년 그는 충주 이홍윤 역모사건과 관련해 우리고장
우리나라 상례(喪禮)는 생각보다 복잡한 면이 있다. 문상(問喪)은 타인의 상사(喪事)에 대하여 슬픈 뜻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조문(弔問), 조상(弔喪)도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밖에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상례 중의 하나로 '심상'(心喪)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상복을 입지 않은 채 마음으로 슬퍼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는 스승을 위한 상례였으나 재가한 어머니 또는 계모, 적모(嫡母)를 위해 할 수 있다. 적모는 자신을 낳지 않았으나 법적인 어머니를 말한다. 조선시대 때 '심상' 때문에 목숨을 잃은 고위 관료가 있다. 매우 유능한 관료였으나 연산군이라는 시대성을 잘못 만나면서 뜻을 펴지 못하고 중도에 목숨을 잃어여만 했다. 정성근(鄭誠謹·?∼1504)이라는 인물이 여기에 해당한다. 정성근은 승지에 오르는 등 성종의 은혜를 입었고, 따라서 그가 승하한 이후에도 심상의 자세를 가졌던 모양이다. 조선의 국시가 유교인 만큼 이는 어찌보면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나 연산군에게는 이같은 모습이 달리 보였던 모양이다. 생모 폐비윤씨의 죽음과 관련해 연산군의 가슴 속에는 항상 아버지 성종에 대한 증오의 마음이 쌓여 있었다. 실록 곳곳에서 그런 흔적이 발견된다. 성종
오늘날 간통은 결혼의 파기, 즉 이혼을 전제로 배우자의 고소가 있어야만 성립한다. 조선시대 때는 부부 상호간의 고소 여부와 관계없이 적발 즉시 처벌 대상이 됐다. 이때 부인이 간통을 저질렀다면 그 부인과 간부(姦夫)는 곤장 90에 처했졌고, 또 흥분해서 간통 현장에서 부인과 간부를 죽였다 해도 비난 대상이 되지 않았다. 남녀 차별적 요소도 많아 남편이 다른 여자와 정을 통했다 하더라도 그 여자가 혼인한 여자만 아니라면 첩으로 삼으면 그만이었다. 반면 여성들에게는 평생의 족쇄가 채워졌다. 특히 양반 부녀자들의 경우 '자녀안(恣女案)'이나 '유녀적(遊女籍)'이라는 것에 이름이 올라 평생 간음한 여성으로 낙인 찍히거나 관노비가 돼야 했다. 이처럼 조선 정부는 간통을 개인이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접근했다. 얼마전에 민발(閔發·1419∼1482)이라는 인물을 소개한 적이 있다. 1469년 남이옥사가 일어났다.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 未平國), 바로 그 사건이다. 이때 민서(閔敍)라는 인물이 주살됐고, 그의 아우가 바로 민발이다. 그도 연좌제에 의해 극형에 처해질 위기를 맞았으나 충주로 유배되는 선에서 마무리 됐다. 그는 세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계유정난 때 수
증평군의 행정명은 증평면에서 유래했다. 그렇다면 증평면은 어떻게 생겨난 이름일까. 충북대 김진식(국어교육과·사진) 교수가 이에 대한 답을 주는 '증평군 지명유래' 학술서를 최근 증평문화원 이름으로 출간했다. 350여쪽 분량의 이 책은 증평군 연혁과 산천 그리고 자연부락을 다룬 지명편 순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이번 책은 역사가 짧은 증평군 지명을 사실상 처음으로 다룬 것이어서 군민은 물론 일반의 관심도 끌고 있다. 증평군은 고구려 때는 금물노군(今勿奴郡·지금의 진천군), 고려 때는 도안현(道安懸), 조선시대 때는 청안군(淸安郡), 일제 강점기 때는 괴산군(槐山郡)에 각각 속했다. 그에 따르면 '증평'(曾坪)이라는 행정명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정확히 1914년이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전국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 청안, 괴산, 연풍을 묶어 '괴산군'을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당시 근서면과 남면이 합쳐져 '증평면'이 탄생했다. 이후 증평면은 증평읍 승격(1949), 증평출장소 설치(1990) 등의 과정을 거쳐 지난 2003년부터 지금의 '증평군' 시대가 열리게 된다. 여기까지 진행해도 증평이라는 이름이 어떤 연유로 생겨나게 됐는지 윤곽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독대'(獨對)는 임금과 신하의 은밀한 만남이었기 때문에 자주 문제가 됐다. 문장가로 유명한 변계량(卞季良·1369~1430)이 상소를 올린다. "옛 제도에 따라 4품 이상으로 하여금 날마다 차례를 돌려 대답하게 하시어 더욱 말할 길을 넓히시어, 아랫사람의 심정을 다 아룀으로써 신하의 사특하고 정직함을 살피시면 매우 다행이겠나이다."- 변계량이 건의한 것은 독대의 반대개념인 이른바 '윤대'(輪對)였다. 윤대는 글자 그대로 문관은 6품 이상, 무관은 4품 이상의 관리가 임금 앞에 나아가 직무에 답변하는 것을 말한다. 윤대는 임금의 근무 강도를 고려해 하루 5명을 넘기지는 않았다. 연산군 때 한 신하가 윤대에 나아갔다. 얼마전에 강원도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연산군 시절에도 비슷한 폭설이 내렸던 것 같다. '윤대를 받았다. 내섬시부정 박삼길(朴三吉)이 아뢰기를, "(…) 강원도에 한 길 이상의 많은 눈이 내려서 노루·사슴들이 한 곳에 모여 서서 많이 굶어 죽었고 살아 남은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박삼길의 윤대는 계속 된다. 아래 인용문에 나오는 '여수'는 군대의 우두머리를, '패두'는 인부 열 사람의 우두머리를 일컫는다.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노가다 십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이 마지막으로 체포된 곳은 대만 기륭항이 아닌 기륭 우체국이라는 사실이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됐다. 특히 일본 경찰이 미행을 하고 있는데도 신채호는 이 사실을 모르는 등 피체 당시의 이면적인 모습도 생생히 밝혀졌다. 신채호의 체포 과정에 대해서는 '1928년 대만 기륭항에 상륙하려다가 그 직전에 피체됐다'는 설이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곧 발표된 충북대 박걸순(사학과·사진) 교수의 '신채호의 아나키즘과 동방피압박민족연대론' 논문에 따르면 단재가 체포된 곳은 지금까지 알려진 대만 기륭항이 아니라 기륭(基隆·대만발음 지룽) 우편국(郵便局)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같은 내용은 지난해에도 일부 제기됐으나 논문을 통해 종합적, 구체적으로 규명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박 교수는 이같은 사실을 당시 현지 신문인 '대만일일신보'(臺灣日日申報)를 통해 확인했다고 논문을 통해 밝혔다. 당시 대만일일신보는 △대만 기륭항에 도착한 단재는 1928년 5월 8일 위조 위체 2천원을 찾기위해 기륭우편국에 나타났고 △그러나 당시 대만당국은 위조 위체가 유통되고 있는 사실을 이미 감지, 비밀수사에 돌입한 상태였다고 보도했다. 이와 함께 '위조 위체
조선시대 농서로는 농사직설,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세종 때 정초, 변효문이 공동으로 지은 농사직설은 우리나라 농법을 처음으로 다룬 농서로 유명하다.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농서로, '중요한 것을 새롭게 취한 책'이라는 뜻의 촬요신서(撮要新書)가 있다. 상·하 두 권으로 이뤄진 이 책은 농업과 함께 주역, 세시적인 내용도 함께 다루고 있다. 그러나 농업적인 내용을 훨씬 많이 다루고 있어, 주로 조선 전기의 농서로 분류되고 있다. 이 책은 세종 때 지어졌다. 내용은 '경가'(耕稼·갈고 씨뿌림))와 '잠상'(蠶桑·누에)으로 크게 분류되고 있다. 그리고 사고의 모든 출발점이 주역, 그중에도 음양오행과 직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다수 내용은 웃음이 큭큭! 나올 정도이나 어떤 내용는 지금의 농업 재배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논밭 갈이를 할 때 가을갈이는 깊게 하고 봄갈이나 여름갈이는 얕게 해야 한다.' '보리에는 눈이 좋은 바 겨울에 눈이 많이 안 내리면 여물지를 낳는다'. '나무심는 길일: 갑술, 병자, 정축, 기묘, 계미, 임진일이 길하고 병술, 임술일의 2일은 흉하여 마땅하지 않다.' '잠신(蠶神)에게 제사함: 정월 오(午)일 원유
충북의 인구수가 지난해 4월 이후 10개월째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이는 세종시에 대한 접촉면이 상대적으로 넓은 충남보다도 높은 것이어서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23일 통계청은 2010년 1월~2011년 1월 동안의 국내인구 이동 자료를 발표했다. 자료에 따르면 충북은 지난해 1~3월 동안에는 인구 순이동이 각각 -0.2, 0.0, 0.0(단위 천명)을 기록하는 등 감소내지 정체현상을 보였다. 인구 순이동은 총전입과 총전출을 비교한 값으로 총전입보다 총전출이 많을 경우 '-'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4월 0.2, 5월 0.4, 6월 0.9, 7월 0.4, 8월 0.4, 9월 0.5, 10월 0.7, 11월 1.1, 12월 1.4(단위 천명)를 기록하는 등 지난해 4월 이후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금년 1월에도 이어져 0.6의 인구 순이동을 기록했다. 지난해 하반기보다 추세가 다소 꺾였으나, 이는 다른 지역도 거의 마찬가지로 혹한기라는 계절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따라 충북의 금년 1월 순이동율은 0.04%를 기록, 경기도를 제외한 8개 광역단체 중 가장 높게 나타났다. 특히
조선시대 때 충북에는 보은(후에 군으로 승격), 제천, 회인, 연풍, 음성, 청안. 진천, 영춘, 영동, 황간, 청산 등 11현(縣)이 존재했다. 이들 현에는 종6품 외관직인 현감이 파견됐다. 현감의 임기는 6년으로 관찰사의 3배에 해당했다. 이처럼 현감 임기가 의외적으로 길었던 것은 중앙 관료들의 지방근무 기피현상과 관련이 있다. 자원자가 많지 않다보니 임기를 길게 하는 방법이 택해졌다. 조선 세종 때의 우리고장 영동 현감으로 곽순(郭珣)이라는 인물이 부임해 왔다. 이 즈음 영동지역은 계속된 가뭄으로 식량난을 겪고 있었던 모양이다. 곽순의 하직 인사를 자리에 세종이 이와 관련된 내용을 언급한다. '영동 현감 곽순(郭珣)과 신천현감 박기명(朴基命)이 하직을 고하니, 불러들여 보고 곽순에게 이르기를, " 그 도에는 근래에 실농하여 백성의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니, 항상 구휼을 더하여 형벌을 삼가고 농사를 장려하라" 하고…'- 그러나 영동지역의 식량난은 조정에서 보기보다 훨씬 심각했던 것 같다. 곽순은 올린 상언에는 "10명 중 8,9명이 굶고 있다"고 적혀 있다. 상언(上言)은 신하가 사사로운 일로 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을 말한다. 간관(諫官)이 올리는 상소(
조선시대 전기에는 의외로 단양 영춘의 대추(棗)가 전국적으로 가장 유명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따라 보은 대추의 명성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것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각종 사료를 종합하면, 우리 선조들이 여러 과실나무를 지금처럼 의식적으로 심고 관리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무렵인 고려시대 명종 때인 것으로 나타났다. 고려사 지리지 권79 농조(農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한글로 번역한 내용이다. '고려 명종 18년(1178) 3월 제를 내리기를 "… 또한 뽕나무를 철따라 심고 옻나무, 닥나무, 밤나무, 잣나무, 배나무, 대추나무 등 과일나무를 각각 때에 맞추어 심어서 이익을 얻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와 관련해 여러 과일중 충북 대추의 명성을 사료상으로 추적한 결과, 지금까지 피상적으로 생각해오던 것과 다른 모습이 나타났다. 상당수 사람은 보은대추의 명성이 꽤 오래 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조선 전기에는 지금의 단양 영춘 대추가 더 유명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본보가 1454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를 살펴본 결과, 당시 나라에 공물로 바쳐졌던 과실류는 밤, 잣, 대추, 호두, 은행, 배, 능금, 석류, 감 등
얼마전에 충주 팔봉서원과 음성 지천서원에 제향된 인물로 김세필(金世弼·1473∼1533)을 소개한 적이 있다. 생전의 그는 두번의 사화(史禍)를 겪었다. 그는 폐비윤씨(연산군 생모) 묘의 이장 문제로 연산군에게 밉보이면서 거제도로 유배됐다. 1차 유배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연산군이 종종반정으로 실각하면서 유배지에서 빨리 풀려났다. 그는 기묘사화 때 또 한번의 고초를 당했다. 왕도정치를 지지했던 그는 조광조(趙光祖)가 사사된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고 간언하다 매를 맞고 유춘역(留春驛)이라는 곳으로 유배됐다. 그는 중도에 풀려났으나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고향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서 후진 양성에 몰두했다. 어떤 사학자는 이때를 충주사림의 절정기로 보고 있기도 하다. 이연경, 이자, 노수신 등이 이 언저리에 등장한다. 그 평화는 아들에게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늦게 얻은 자식으로 김저(1512∼1547·3남)가 있었다. 그는 문과에 급제한 후 충청도 어사로 파견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의 소윤이 윤임의 대윤 일파를 공격한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그는 이때 이조좌랑이라는 직책으로 있으면서 "소윤이 너무 많은 사
조선시대 '예무이적'(禮無二嫡)의 논리가 있다. 이는 '한 남편에게 두 사람의 정실 아내는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때문에 첩에게서 난 자식은 모두 서자가 돼야 했다. 이 논리는 이른바 종모법(從母法)을 통해 세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는 부계가 양반이라도 모계가 천인이면 그 자식도 천인으로 취급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그 반대인 종부법(從父法)도 한시적으로 시행됐다. 이는 어머니가 첩이라도 아버지가 양인이면 그 자식도 양인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언뜻보면 좋은 의미로 보일수 있으나, 이 경우 양인이 된 첩의 자식은 부역을 의무적으로 져야했다. 왕족출신 서자인 이몽학(李夢鶴·?∼1596)이 시국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이몽학이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 사료에는 잘 기술돼 있지 않다. 그는 1596년(선조 29) 야음을 틈타 홍산현을 함락하고, 이어 청양 등을 함락한 뒤 그 여세를 몰아 홍주성에 돌입하였다. 그러자 당시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성문을 닫은 채 방어에만 급급했다. 이때 사태를 반전시킨 벼슬아치가 신경행(辛景行·1547∼1623)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우연찮게 난을 진압하는데 일정부분 공을 세우게 된다. '목사 홍가신은
청주의 진산인 우암산(353m은 역사적 근거가 부족한 '우암산'(牛岩山)보다 '와우산'(臥牛山)으로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와우산이라는 이름은 1970년대까지도 대중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나타나 그 타당성이 더욱 인정되고 있다. 국립청주박물관(관장 김성명)과 (재)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원장 장호수)이 15일 오후 박물관내 대강당에서 '청주 와우산 바로 보기' 제목의 학술대회를 공동으로 개최했다.이 자리에서 김관장은 '왜 와우산인가'의 기조 발제를 통해 우암산을 와우산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로 △18세기 이후부터 1933년까지 주로 와우산으로 불렸고 △심지어 1970년대까지도 와우산으로 불려진 흔적이 남아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전자에 대해 "지금의 우암산은 16~17세기 동안에는 '당이산'으로 불려지지만 이후 18세기부터는 와우산으로만 불려진다"며 "심지어 '청주연혁지'를 쓴 일본인 오쿠마순포(大熊春峰)도 와우산으로 표기했다"고 밝혔다. 청주연혁지 외에 우암산을 와우산으로 적은 지리지나 고지도로는 해동지도, 비변사인 호서지도, 조선팔도지도, 여지도서, 충청도읍지, 호서읍지, 청주읍지, 조선지지자료, 조선환여승람 등이 존재하고 있다. 후자
우리나라 안경은 임진왜란 때 유입됐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몇해전 조선시대 김성일이 사용하던 실물 안경이 그의 후손들에 의해 공개됐다. 김성일은 황윤길과 함께 임진왜란 직전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했던 인물이다. 이듬해 귀국한 두 사람은 상반된 보고서를 내놨다. 정사 황윤길은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고, 반면 김성길(金誠一)은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당시는 짧은 기간이나마 동인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두 사람의 보고 내용중 동인인 김성일 것이 채택됐고, 결과는 불문가지였다. 김성일은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에 사망했다. 그렇다면 그는 임진왜란 이전에도 안경을 썼을 확률이 높다. 이와 관련 국내 안경광학과 한 교수는 "일본이 아닌 중국을 거쳐 유입된 것 같다"는 견해를 내놓은 바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안경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정조실록에서 그 내용을 접할 수 있다. 정조는 그러나 안경쓰는 것 자체에 대해 부담스러운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차대(次對)가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시력이 점점 이전보다 못해져서 경전의 문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안경은 2백 년 이후
한반도 자본주의 싹이 막 나던, 17-18세기의 조선후기 사람들은 대체로 40~45살의 평균 수명을 지녔던 것으로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은 구강과 관련한 것중 특히 충치와 관련된 질환을 많이 앓았던 것으로 조사돼됐다.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박선주(체질인류학 전공) 교수가 얼마전 '조선후기 중부지방 주민에 대한 인류학적 분석' 논문을 발표했다. 지난 2004년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발굴조사 현장에서는 각종 유물 외에 조선후기의 인골과 사지뼈가 다량으로 출토, 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박 교수는 이중 상태가 상대적으로 나은 49개의 인골·사지뼈 개체를 대상으로 체질인류학적인 분석을 시도했다. 체질인류학상 죽은 사람의 뼈는 그것이 매장됐다 하더라도 생전에 갖고 있었던 질병, 영양상태 등에 대한 정보는 어느정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조사 결과, 49개 뼈는 남자 비율이 39%(19개체), 여자 비율이 28%(14개체)이고 나머지는 확인불가로 나타났다. 매장자의 평균키는 남자 165.7㎝, 여자 156.9㎝로, 일제강점기 시기와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또 사망 당시의 나이를 조사한 결과, 남자는 40~50대가 가장 높고, 여자는 20~30대 비율이
전회에 구수복이라는 인물을 소개했다. 그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이조좌랑이라는 직책에서 파직되어 우리고장 보은 지역을 일시적으로 찾았다. 지면 관계상 모두 소개하지 못했지만 이 대목에는 곡절이 더 존재한다. 그가 보은 속리산 일대를 찾은 데는 장인의 권유가 먼저 있었다. 문과방목을 보면 그의 장인은 이수(李穗)라는 인물로, 벼슬이 정3품에 이르렀다. 문과방목은 조선시대 문과 합격자들의 신상을 기록한 사료를 말한다. 당시 구수복의 장인은 보은에 별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기묘년에 공이 이조 좌랑으로 파직되자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의 장인이 딱하게 여겨 보은(報恩)에 있는 별장에 살도록 했더니…'-< 연려실기술> 그러나 구수복의 장인 별장 처가살이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요즘 명절 풍속도의 하나로 '장인과 사위가 자주 다툰다'는 내용이 신문 지상에 보도된 적이 있다. 여성들이 경제전선에 뛰어들면서 처가의 발언권이 강해진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같은 현상은 아니지만 둘 사이에도 비슷한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 후에 농장의 종이 싫어해서 장인에게 헐뜯기를, "좌랑이 농막을 차지한 후로 종들을 혹사하여 장차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장인이
조선시대 양반가 남자들은 자신의 혈육임에도 불구하고 서자와 얼자, 즉 서얼(庶孼)을 심하게 차별했다. 서자는 양인(良人) 첩의 자손을, 얼자는 천인(賤人) 첩의 자손을 일컫는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기가 뿌린 '씨앗'이라고 해도 양반의 숫자가 많아지면, 양반 전체의 기득권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이처럼 서얼 차별의 근원에는 조선 양반들의 집단적 이기심이 깔려 있었다. 모든 양반들이 서얼 차별제도를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의식있는 일부 관료는 능력있는 인물은 서얼을 따지지 말고 과감히 발탁할 것을 주장했다. 조선 중종 때 두 명의 관료가 같은 주제를 놓고 서로 다른 내용을 상소한다. '김정국이 아뢰기를, "서얼에 대해서는 나라에 정해진 법이 있으니 고쳐서는 안 됩니다. 전에는 서경(署經)할 적에 그 선조(先祖)가 미천하면 서경하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구수복이 아뢰기를, "서얼은 법이 이미 그러하지만, 어진이가 있다 하더라도 과거에 구애되어 포부를 펴지 못하니, 이것도 사람을 쓰는 길에 방해가 됩니다"'- 인용문 중 서경은 인사 등이 있을 경우 왕의 재가 있은 후 대간도 함께 서명을 하는 제도를 말한다. 일종의 왕권견제 행위로 볼 수 있다. 1519년 중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1906~1967)가 퇴위한 후 가진 직업은 문사관이었다. 문사관(問事官)은 문헌을 관리하거나 죄인의 신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말한다. 지금으로 치면 법원, 검찰청의 서기와 비슷하다. 전회에 이른바 이홍윤 역모사건으로 충주목이 유신현으로 읍호 강등되고, 그에 따른 연좌제로 충청도가 청홍도(淸洪道)로 바뀌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연좌제는 가족에게 보다 혹독하게 적용됐다. '이홍윤과 배광의·최대관·이휘·이무정은 대명률(大明律)에 의거, 수종(首從)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능지 처사(凌遲處死)하고, 아버지와 16세 이상의 아들은 모두 교수(絞首)에 처하고, 15세 이하 아들 및 어머니·딸·아내·첩·할아버지·손자·형제·자매, 그리고 아들의 아내와 첩은 공신의 집에 종으로 주었으며, 재산은 모두 적몰(籍沒)하였다.'- 본문중 대명률은 명나라 형법을 일컫는다. 이홍윤을 심문할 때 문사관으로 배석한 관원이 민기(閔箕·1504∼1568)라는 인물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사료마다 다소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기유년(1549)에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 5월에 충주(忠州)에서 이홍윤(李洪胤)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공이 문사관(問事官)이 되었다.
충북 프로바둑의 계보가 다시 이어질 것인가. 현재 국내 프로 바둑계에는 충북 출신으로 노영하(청원 출신·사진) 9단, 김강근(청주〃·사진) 6단, 권오민(충주 〃·사진) 5단 등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중 노 9단은 바둑해설가로 활동하고 있고, 김 6단과 권 5단은 근래 물가정보배 본선에 진출한 바 있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아직 정상에 오르지 못한 것에서 보듯, 충북 프로바둑은 중앙무대에서 크게 밀리는 편이다. 또 지난 1995년 김·권 두 프로기사를 배출한 이후 계속 공백기를 가져왔다. 이런 흐름속에 낭보가 날아왔다. 프로와 아마추어가 유일하게 모두 참가할 수 있는 제 3회 비씨카드배 세계바둑대회 예선전(64강)이 지난달 하순 서울 모호텔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한국기원 연구생인 김진휘(15·경성중 3·사진) 아마추어 5단이 중국 프로바둑기사 구링이 5단에게 흑으로 229수만에 불계승을 거뒀다. 일반인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얘기가 될 수 있지만, 바둑계에서는 아마추어가 프로를 이기는 것을 "하늘의 별따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특히 구링이 5단은 중국 프로랭킹 5위권(일부 보도는 10위권)을 넘나드는 실력파로, 그의 이름 앞에는 '신예 강자', '차세대 비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