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에 이어 이번에도 이른바 '보름 혹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삼한사온 현상이 실종된 대신, 한번 추웠다 하면 보름 정도 춥는 현상을 의미하고 있다. 이에따라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 '보름 혹한' 현상이 한반도 겨울기후 패턴의 하나로 고착화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3일 청주기상대에 따르면 이맘때 청주지역의 아침최저기온 평년값은 -6.5도 안팎이다. 그러나 청주지역의 경우 지난 12월 24일 -10.9도를 기록한 이후 이날(3일)까지 연11일째 한파가 계속되고 있다.중간에 이틀정도 -4도 안팎을 기록한 적은 있으나, '사흘 춥고 나흘 따뜻하다'는 삼한사온 현상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청주기상대는 "당분간 기온이 크게 오르지 않겠다"고 예보, 혹한이 상당기간 계속 될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겨울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 바 있어, 이번 겨울과의 상관성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기상청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 겨울에는 이번보다 열흘정도 늦은 1월 5일부터 '보름 혹한' 현상이 시작됐다. 5일 -9.8도를 시작으로 6일 -12.6도, 7일 -11.0도, 8일 -13.9도, 9일 -10.3도, 10일 -7.9도,
토끼와 관련된 표현 중 비교적 사용 빈도수가 높은 것으로는 '옥토끼'(玉兎), '토사구팽'(兎死狗烹), '교토삼굴'(狡兎三屈), '수주대토'(守株待兎) 등이 있다. 적어도 지금의 40대 중반 이후는 어릴적 달에 옥토끼가 산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물론 그 동화가 산타처럼 사실이 아닌 것을 아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옥토끼'라는 표현은 시선 이태백의 시에서 유래했다. 이태백은 '파주문월'(把酒問月·술잔을 들어 달에게 묻는다)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토끼는 일년 내내 불사약을 찧고(玉兎搗藥秋復春·옥토도약추부춘) / 항아는 외로이 머물며 누구와 이웃하여 사는가.'(姮娥孤棲與誰隣·항아고서여수린) 본문 중 '玉'은 어떤 곳에서는 '白', '姮娥'는 '女+常娥'로 표기되기도 한다. 항아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이다. 그녀는 신이 자신의 남편에게 내린 불사약을 훔쳐 먹었다가 발각됐다. 그러자 달로 도망가 숨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이태백의 '옥토끼' 표현은 사실은 진나라 부천이 지은 의천문의 일부를 차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천문에는 '달 속에는 뭐가 있나, 약방아 찧는 옥토끼'(月中何有 白兎搗藥)라는 표현
나라의 말과 글이 달라지면서 통역과 번역은 늘 필요했다. 조선시대 때도 이를 관장하기 위한 기구로 사역원(司譯院)이 존재했다. 사역원은 일반 생도 외에 강이관(講肄官)과 강예관(講隷官) 등으로 학생을 구성했다. 강이관은 관직이 있으면서 한달에 15일 정도, 강예관은 관리가 됐으면서 꾸준히 중국어 공부를 하는 학생을 일컫는다. 조선시대 외교정책의 기본틀은 사대교린이었다. 사역원에서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꾸준히 인재를 배출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규율이 엄격했다. 사헌부는 학생들의 성적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곤장을 상소하기도 했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사직 이계화·김예몽·예조좌랑 박적선·승문원박사 장계숙·돈녕부부승 홍일동·사정 윤자운이 강례관으로써 여러 해 동안 중국말을 강습했으나, 고의로 마음을 쓰지 않았으므로 조금도 실효가 없사오니, 죄가 장(杖) 80대에 해당하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거명된 인물 중에 김예몽(金禮蒙·1406~1469)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성품이 온화 청렴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한시에도 능했다는 사평을 받은 인물이다. 김예몽의 이름이 의방유취(醫方類聚)와 관련된 기록물에도 보인다. 의방유취는 세종대왕의 명에 의해
관우(關羽,?~219)는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으로 삼국지연의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등장한다. 조조도 일찌기 그의 인간됨을 알아보고 신하가 되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이미 유비를 주군으로 모시고 있었다. 그러자 조조가 "사람마다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중국정부가 관우를 신으로 섬기는 자국내 민간신앙을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관우의 고향 산시성(山西省) 윈청시가 최근 관우 민간신앙인 '관공신속(關公信俗)'을 유네스코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키로 하고 모든 신청 준비를 마쳤다. 우리고장 영동군 영동읍 당곡리에도 관우를 주신(主神)으로 모신 십이장신당(十二將神堂·충북민속자료 제 2호)이 존재하고 있다. 다른 나라의 신, 그것도 실존했던 인물을 신으로 모시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기원후 3세기 때 관우가 손권 군사에 의해 아들과 함께 사로잡혀 처형당하자 중국 민간인 사이에서 그에 대한 신격화 움직임이 일어났다. 후대 쓰여진 서애 유성룡(柳成龍·1542~1607)의 기행문에서 당시 중국인의 관우 숭배 모습을 엿볼 수 있다. '5월 13일 묘에 크게 제사를 드렸는데, 이날이 관왕의
신문 오보는 생각보다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오보의 정의가 아직까지 완벽하게 개념화돼 있지 않다. 어떤 언론학자는 '진실한 보도를 제외한 모든 보도'를 오보라고 봤다. 반면 또 다른 언론학자는 오보를 '객관적인 오보'와 '주관적인 오보'로 분류했다. 객관적인 오보는 날짜, 장소, 시간, 사진, 이름 등 단순한 내용이 사실과 다르게 보도된 경우를 말한다. 주관적인 오보는 뉴스 제작자가 관련 사실을 고의적으로 왜곡해 보도한 경우를 일컫는다. 키워드 방식을 통해 충북일보 홈페이지를 검색한 결과, 올 12월 28일 현재 총 13건의 오보성 사례가 발견됐다. 이는 한달 1건 정도 오보가 발생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오보성 사례에 대한 정정기사 보도 방식을 살펴보면 '바로잡습니다' 7건, '알려드립니다'·'알려왔습니다' 각 2건, '고침' 2건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인 오보성 사례는 공천관련 2건, 인용글 관련 2건, 납품. 숫자, 소유원, 사진, 상호, 노조, 학력, 선거구 관련 각 1건 등인 것으로 조사됐다. 독자가 '해당기사 내용과 무관하다'고 주장해온 사례도 1건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공천관련 2건, 학력·선거구 관련 각 1건 등 총 4건은
조선시대 때 각 도에 파견된 지방 행정의 최고 책임자는 관찰사였다. 달리 감사(監司)·도백(道伯)이라고도 불렀다. 관찰사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다소 변화했다. 조선 초기에는 도관찰출척사(道觀察黜陟使) 또는 안렴사 등으로 불렸다.이것이 관찰사로 굳어진 것은 세조 때이다. 도관찰출척사 시절의 충청도 최고 책임자 한 명으로 함부림(咸傅霖·1360∼1410)이라는 인물이 있다. 조선시대 대 8도 관찰사를 모두 역임한 인물은 반석평(潘碩枰·?~1540)과 함부림 딱 2명이다. 반석평에 대해서는 전회에 소개한 바 있다. 우리고장 음성 원남에 묻힌 인물로, 반기문 현 유엔 사무총장이 그의 16세 후손이 된다. 함부림은 우리고장 인물은 아니다. 강릉 인물로 이성계 사람으로 분류된다. 함부림은 충청도 도관찰출척사로 근무하면서 여기저기 적지 않은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하루는 속리산이 있는 보은현을 방문했던 모양이다. 세속과 떨어져 있는 속리(俗離) 세계를 그리고 있다. '함부림의 시에, "계원(鷄園)의 한가로운 일월(日月)이요, 안탑(雁塔)에 구름과 연기 자욱하네. 우연히 삼청동(三淸洞)에 들렸더니, 세상일 시끄러운 것 모두 잊었네" 하였다.'- 본문에 등장하는 '계원'은 인도
전통적 의미의 주막(酒幕)은 지금은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1백여년 전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가 얼마전 '광무양안과 충주의 사회경제구조' 제목의 연구총서를 출판사 '혜안' 이름으로 펴냈다. 제목 중 '광무'(光武)는 대한제국 연호로, 1897년(고종 34)에 제정됐다. 440여쪽 분량의 이번 연구총서에는 충북대 신영우, 연세대 최윤오 교수 외에 강은경, 김의환, 서태원, 박경안, 임용한(이상 중원문화연구소 연구원) 씨 등이 논저자로 참여했다. 이중 대한제국기 충주 지주제, 주거환경 등은 올 상반기에 소개한 바 있다. 광무양안과 관련된 박경안 연구원의 '대한제국기 충주군 금목면의 주막에 관하여' 논문은 이번에 처음 소개됐다. 당시 충주군은 괴산 불정, 음성 금왕 등도 포함하고 있는 상태로, 금목면(金目面)은 지금이 음성 금왕읍을 일컫고 있다. 박 연구원에 따르면 임진왜란 후 원(院) 제도가 폐지되고 개인 상업활동이 발달하면서 주막문화도 선보이기 시작했다.이들 주막은 △간판은 없었으나 이름은 있었고 △따라서 일례로 '오동나무집', '과부집' 등으로 불렸으며 △잠자리는 맨땅에 거적을 까는 정도였기 때문에 숙박비는 받지 않았다. 당시
악성 박연의 스승으로 고려말 문신인 김자수( 金自粹·?~?)라는 인물이다. 그의 본관은 경주, 호는 상촌(桑村)으로, 조선전기 학자인 김세필(金世弼)이 그의 고손(증손자의 아들)이 된다. 그는 시문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릴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엇갈리고 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그를 고려에 절개를 지킨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광주의 추령(秋嶺)에 이르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이 땅은 바로 내가 죽을 곳이다.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오히려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신하가 되어 두 성(姓)의 임금을 섬길 수가 있겠는가.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 너는 반드시 추령 근방에 나를 매장하되, 절대로 비를 세우지 말고 초목과 함께 썩게 하라." 하였다.'… 본문에 등장하는 광주는 전남이 아닌 경기도 광주를 의미한다. 또 연려실기술은 경주김씨보(慶州金氏譜)를 인용, 김자수가 '내 평생토록 충성하고 효도하는 뜻을 오늘날 그 누가 알리오'라는 절명시를 남긴 것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김자수가 태조와 태종 등 두 임금을 섬기며 청주목사와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고 썼다. '청주 목사 김자수가 연사(年事)
충북학연구소는 올 상반기 충북을 빛낸 2010 역사·문화 인물의 한 명으로 신미대사(信眉·?~?)를 선정한 바 있다. 세종대왕을 도와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점이 선정 사유가 됐다. 신미대사의 속가 본관은 충북 영동 지방의 옛이름인 영산(永山)이다. 고려 공민왕 때 김길원(金吉元)이라는 인물은 홍건적을 토벌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출신지는 충북 영동이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영동(永同)에 집성촌을 형성했고, 김종경(金宗敬), 김훈(金訓)과 같은 조선전기 문신들이 배출됐다. 신미대사에 있어 김종경은 친할아버지, 김훈은 친아버지가 된다. 김종경은 악성 박연과 같은 마을에 살았고 또 허조(許稠), 맹사성(孟思誠) 등 유학자와 교유했다. 김훈은 나중에는 병마사(兵馬使)가 되지만 원래는 문과에 급제했다. 바로 신미대사 집안은 유교 명문가였고, 영산김씨의 종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명이 김수성(金守省)인 신미대사는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 평생 승려의 길을 걸었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자식 때문에 골치를 앓는 경우가 많다. 당시 김훈 집안은 그 반대였다. 신미대사 가족들은 아버지의 방탕한
증평군이 지난 2003년 독립된 이후 행정 서비스나 경제적으로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중앙정부 자료가 발표됐다. 인용된 2개 자료는 단편적인 것일 수 있으나, 현재의 실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22일 환경부와 통계청은 각각 '지방상수도 부채액 1조원' 보도자료와 '2010년 기준 지역별고용조사 잠정결과' 통계자료를 발표했다. 환경부 자료에 따르면 증평군의 평균 수도요금은 전국 기초단체중 7번째로 높은 것으로 노타났다. 평균 수도요금이 높은 기초단체 10곳을 살펴보면, 강원도 정선군 1천348원(㎥당), 평창군 1천120원, 경남 통영시 1천89원, 경기도 가평군 1천76원, 영월군 1천64원, 태백시 1천42원, 충북 증평군 1천19원, 인제군 1천9원, 전남 여주시 971원, 양양군 959원 등으로, 증평군은 7위에 올랐다. 증평군의 이같은 평균 수도요금은 전국에서 수도요금 가격이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난 경북 군위군 367원과 비교해 3배 가까이 비싼 수치다. 군위군의 수도요금 현실화율은 31%를 기록했다. 이처럼 증평군의 수도요금 값이 비싼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요금 현실화율이 높기 때문으로 분석되
조선시대에는 과거 외에 유일(遺逸)이라는 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기도 했다. 이는 초야에 묻혀 있는 선비를 시험없이 발탁하는 제도로,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있는 이들이 대상이 됐다.훈구와 사림파의 대결로 사화(士禍)가 자주 일어나면서 난세를 피해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가 크게 늘어났다. 이에 명종은 인물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유일을 통해 관료 일부를 임명했다. 그중에는 성제원(成悌元·1506년∼1559)이라는 인물도 포함돼 있다.'정원에 전교하였다. "지금 청홍도 관찰사의 계본을 보니 공주에 사는 유학 성제원이 조행(操行)이 있다고 하니, 관직을 제수하라."'-본문 중 '정원'은 지금이 청와대 격인 승정원을, '조행'은 태도와 행실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청홍도'(청주와 홍성)는 당시 충주에서 이홍윤 역모사건이 일어나 붙여진 행정명이다. 당시 유일이 조정의 큰 관심사였는지 사관(史官)이 이례적으로 성제원에 대한 인물평을 남겼다. '성제원은 어려서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고, 날마다 스스로를 엄하게 다스렸으며 남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사람이다. 천성이 효우(孝友)스러워 어머니의 삼년상을 한결같이 예제에 따랐고, 최질을 몸에서 벗지 않고 늘 입고
'청원군 강내면 월탄리는 달여울과 관련이 없고, 또 청원군 현도면 노산리 역시 동물 노루(獐)와 무관한 지명이다.' 충북대 국어교육과 김진식(사진) 교수가 얼마전 '고유 지명에 관한 어원 고찰' 논문을 한국중원언어학회지에 기고했다. 김 교수는 고유지명의 어원을 살펴보기 위해 법정마을인 청원군 강내면 '월탄리'(月灘里)와 현도면 '노산리'(魯山里) 등을 표본으로 정했다. 그리고 자연마을로는 현도면 하석1리의 '대원'(竹院으로도 불림), 하석2리 '성마루'(각회 마을로도 불림), 남일면 화당2리 '민득이'(한자표기는 聞道) 마을 등을 선정·고찰했다. 그 결과, 월탄리와 노산리는 각각 달여울과 노루(獐)와 관련이 없고, 또 자연마을 이름은 상당수 과거 생존했던 인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 교수에 따르면 현재 지명 월탄리는 여지도서(영조 36·1760년)에는 '부탄리'(浮灘里)로, 조선지지자료(1914년)에도 '부탄리'(순우리말 지명은 '데례올')로 나타난다. 이후 1987년 1월 민원에 의해 '부탄리'에서 '월탄리'로 개명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교수는 이에대해 "부탄리의 순우리말 지명인 '데례울'을 한자 표현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달여울'을 뜻
조선시대에는 감옥을 그냥 '옥'(獄)이라고 불렀다. 이 옥은 의금부, 포도청,각 지방의 감영 소재지, 군현에도 각각 존재했다. 특히 지금의 서울구치소에 해당하는 옥은 '전옥서'(典獄署)라고 불렀고 종로에 위치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전옥서가 '감옥서'로 바뀌었고, 이것이 다시 '감옥'(1907년)으로 변경됐다. 이때부터 감옥이라는 말이 대중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감옥은 예나 지금이나 고통스런 곳이다. 더욱이 조선시대 감옥은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세종대왕이 그 개선책을 직접 유시한다. '유시하기를, △매년 4월부터 8월까지는 새로 냉수를 길어다가 자주자주 옥 가운데에 바꾸어 놓을 것. △5월에서 7월 10일까지는 한 차례 자원에 따라 몸을 씻게 할 것 △매월 한 차례 자원에 따라 두발을 감게 할 것 △10월부터 정월까지는 옥 안에 짚을 두텁게 깔 것 △목욕 할 때에는 관리와 옥졸(獄卒)이 친히 스스로 검찰하여 도망하는 것을 막을 것" 이라 하였다.'- 원문은 '한 일'(一) 자로 돼 있으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로 처리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감옥환경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죄수가 사망하는 사건이 속출했다. '의정부에
조선시대 세곡(稅穀) 운송은 사고가 적지 않았다. 특히 바닷길로의 수송은 거친 파도가 항상 문제가 됐다. 태종3년(1403)에 경상도에서 거둔 세곡을 싣고 남해안을 따라 운항하던 34척의 배가 거친 파도에 모두 침몰했다. 이날 사고로 1천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실록은 쓰고 있다. 조선시대 인구수를 감안하면 초대형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경상도의 조운선(漕運船) 34척이 해중(海中)에서 침몰되어, 죽은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만호(萬戶)가 사람을 시켜 수색하니, 섬(島)에 의지하여 살아난 한 사람이 이를 보고 도망하였다. 쫓아가서 붙잡아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이 고생스러운 일에서 떠나려고 한다 " 하였다.'- 태종은 이날 "바람 기운이 대단히 심하여 행선(行船)할 날이 아닌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실로 백성을 몰아서 사지(死地)로 나가게 한 것이다"이라는 말로, 자신을 크게 책망했다. 그리고 해로가 아닌 육로로 운반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우대언(右代言) 이응(李膺)이 말하기를, "육로(陸路)로 운반하면 어려움이 더 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육로로 운반하는 것의 어려움은
만기요람(萬機要覽)이라는 고문헌을 보면 조선시대 환도 1개를 만들려면 환도장 6명 외에 소목(小木), 노야(爐冶), 동(銅), 마조(磨造), 주성(鑄成)장 등이 참여했다. 이 때문에 환도 1개 값은 쌀 2석5두로, 매우 비싼 편이었다. 언급한 6개 분야의 장(匠) 중 '동장'(銅匠)은 구리로 여러 가지 기물을 만드는 일을 본업으로 삼았다. 저잣거리에서는 보통 '퉁장'이라고 불렀고, 이때의 '퉁'은 동기(銅器)를 의미했다. 조선시대에는 구리의 원석을 '동철'(銅鐵)이라고 불렀다. 동철은 조선팔도 각지에서 적지 않게 생산됐다. 충남 공주도 그중 하나였다. '수철(水鐵)·동철(銅鐵) 모두 마현(馬峴)에서 생산된다.'- 본문 중 등장하는 '수철'은 무쇠를, 마현은 공주목에 속한 지형을 의미한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정철학으로 삼으면서 상업과 광업을 천시됐다. 따라서 동철은 나왔지만 그 제련법은 서툴렀다. 그 부족분은 주로 대마도에서 수입해 썼다. 대마도 사람들은 그 대가로 완성된 주조물이나 직물을 역수입해 갔다. 실록에는 이와 관련된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대마도수호 종정무(宗貞茂)가 동철(銅鐵) 5백 근을 보내었으니, 종(鍾)을 본보기로 만들어 주기를 청한 것이
암 국제학술지(International Immuno -pharmacology)에서 지난 1년 동안 가장 많은 인용횟수를 기록한 논문은 충북대 의과대학 비뇨기과교실의 김원재(사진) 교수팀과 충주대학교 바이오산업학과 문성권 교수팀이 공동 연구한 '방광암의 전이 작용기작에 관한 연구' 논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13일 충북대에 따르면 방광암의 전이기작은 주로 젤라틴 기질 분해효소인 이른바 'MMP-9'(Matrix metalloproteinase-9)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그 이상은 본격적으로 규명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 두 교수의 논문은 TNF-알파라고 하는 종양괴사인자가 전사인자 NF-kB를 활성화시켰고, 이에 반응하여 젤라틴 기질분해효소 MMP-9의 발현이 유도되어 방광암세포의 전이가 발생한다는사실을 규명했다. 즉 암세포가 자라나서(증식) 주위의 조직으로 이동(전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신작로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이들 신작로의 개설역할을 하는 것이 MMP-9이라는 효소이며, 이들의 작용을 매개하는 물질이 종양괴사인자 TNF-알파라는 것을 확인했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해 "본 연구의 결과로 암전이 작용기작을 상세히 증명하였다는 평가를 받은 것
발해는 고유 문자를 갖고 있었을까. 갖고 있었다면 어떤 모양의 문자일까. 이와 관련된 학술행사가 얼마전 국립청주박물관(관장 김성명)에서 열렸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청주박물관에서 열린 올 하반기 5번째 박물관 과정에서 '발해의 문자 이야기' 제목의 특강 시간을 가졌다. 고위원은 발해문자에 접근하기 전에 발해언어를 먼저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고구려어는 부여어, 말갈어는 퉁구스어, 거란어는 몽고어 계통에 속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언어에 대해서는 한·중 학자들 사이에 견해차가 존재하고 있다. 중국학자들은 발해의 주체민족은 말갈인이었고, 따라서 발해는 말갈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한국학자들은 '속일본기'(續日本記) 권13에 등장하는 내용을 들어, 부여어 계통의 고구려어가 사용됐다고 말하고 있다. 속일본기에는 △740년 발해사신 이진몽(已珍蒙) 일행이 일본을 방문했고 △이때 일본에 머무르고 있는 신라 유학생이 통역을 위해 동석했다는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고위원은 "이는 발해와 신라가 서로 통하는 언어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이 경우 같은 계통의 고구려어가 자연스럽게 중간에 위치하게 된다"고 말했다. 고위원은 이같은 바탕 위에 발해
송자대전 (宋子大典)은 송시열의 시와 각종 글을 모아놓은 시문집으로 1787년에 간행됐다. 송자대전도 사화(士禍)의 피해상을 사례를 들어 언급하고 있다. '사화(士禍)가 너무나 혹독하였습니다. 때문에 성수침은 기묘사화가 있을 줄 알고 성시(城市)에 숨었으며, 성운(成運)은 아우의 상을 당하여 슬픔을 안은 채 보은(報恩)에 숨었으며…'- 본문 중에 성운(1497∼1579)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송자대전은 성운의 은둔 이유를 '아우의 상'을 거론하고 있으나 또 다른 사료는 '형이 을사사화 때 화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공(성운 지칭)은 나면서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일찍이 세속의 그물을 벗어났다. 그 형 우(禹)가 을사사화에 비명으로 죽으니, 이로부터 더욱 세상에 뜻이 없고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시가 그 인품과 같아서 한가롭고 아담하여 서호처사(西胡處士)의 운치가 있으니…'-" 따라서 내용은 다소 엇갈리나 형제 중에 사화 피해자가 나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성운의 보은 은거는 유유자적 그 자체였다. 특히 이동 수단으로 맹사성처럼 소를 즐겨탔던 모양이다. 맹사성은 소를 타고 피리를 즐겨 불었다. 반면 성운은 소를 타고 가서 거문고를 즐겨 뜯었다. '
조선시대 사관은 비밀리 작성된 사초와 공문서를 묶은 시정기(時政記)를 바탕으로 실록을 편찬했다. 1545년 윤원형의 소윤(小尹) 일파가 정순붕, 이기 등을 끌어들여 대윤(大尹)을 공격했다. 이른바 을사사화다. 당시 사관은 안명세(安名世·1518∼1548)였다. 그는 춘추필법에 따라 사화의 자세한 전말을 시정기로 작성했다. 당시 시정기에는 윤임(尹任) 등 3대신을 죽인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라는 지적과 이기 등이 많은 선비들을 무고하게 처형한 사실 그리고 이를 찬반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이것이 씨앗이 돼 3년 만에 필화(筆禍) 사건이 일어났다. 을사사화의 가해자였던 이기는 3년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른바 '무정보감'(武定寶鑑)이라는 책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때 한지원이라는 인물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 정순붕 등에게 밀고했다. 그는 을사년 당시 안명세와 함께 사관으로 있었다. 안명세가 붙들여 왔고 심문이 시작됐다. 안명세는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안명세는 형문 1차에 장삼십(杖三十)을 쳤으나, 지난번 공초와 똑같았다', '추관들이 아뢰기를, "안명세는 형추하여도 자복하지 않으니 내일 다시 형추하소서.'(밤
관찰사는 조선시대 때 지방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말단행정과 거리가 먼 것으로 여길 수 있으나 꼭 그렇지도 않다. 사료는 관찰사로 있으면서 토목공사를 자주 한 인물로 이사균(李思鈞·1471∼1536)을 종종 거론하고 있다. '금상 19년에 사창(社倉)을 창설하였다. 관찰사 이사균(李思鈞)이 군에 마점고개가 있어서 동서로 막히고 돌 길이 험준하여 현민이 미곡을 내고 들이기에 고생하므로 사유를 갖추어 신청해서 설치하였다.'- 본문에 등장하는 마점고개는 전남 영광군에 위치하고 있다. 그가 조선시대식 토목공사를 자주 벌였는지 실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성품이 토목 공사(土木工事)를 좋아해서 관직에 있을 때 늘 건축하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이것이 그의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기묘사화와 관련, 전회에 우리고장 청원옥산 인물인 박훈(朴薰·1484∼1540)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사균도 이 시대 인물로, 박훈과 이런저런 사연을 만들고 있다. 이사균이 기묘사화로 귀양길에 오른 박훈을 중도에 만났던 모양이다. '승지로 임명되어 돌아오다가 박훈과 기준(奇遵)이 남쪽 지방으로 귀양가는 도중 갈원(葛院)에서 서로 만났다. 서로 다정하게 대화를 하다가 시사(時事)에 언급되었을
고려 중기의 개경은 여러가지 이유로 인구 과밀현상이 일어나면서 수질오염 등 적지 않은 도시환경 문제에 직면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이같은 현상은 당시 고위 관료들의 주거 입지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2010 호서사학회 동계학술대회가 지난주 청주대학교(총장 김윤배) 인문대학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역사 속의 대중'을 주제로 한 이날 학술대회에는 청주대 민덕기 교수의 사회속에 이정호(고려대), 배항섭(〃), 임병덕(충북대), 박윤덕(충남대) 교수 등이 발표자로 나섰다. 이중 이정호 교수의 '고려중기 개경 주민의 생활환경' 발표문이 흔치 않은 중세로의 생활 여행이어서 참석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다. 이 교수는 고려사절요 등 사료 문헌에 근거, 고려 중기의 개경 인구를 대략 50만명 정도로 추산했다. 이는 당시 고려 전체인구 250~300만명의 17~20% 규모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구과밀 현상이 비교적 강하게 발생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는 이의 원인으로 △고려 중기에 자연재해가 유독 많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전염병과 유랑민이 많이 생겨난 점 등을 꼽았다. 이 교수는 전자에 대해 "고려를 전~후기로 나눴을 때 중기인 1096년(
흔히 조광조, 정광필, 안당, 이장곤, 김정, 김식, 기준, 신명인 등을 기묘사화의 희생자들이라고 해서 기묘팔현(己卯八賢)이라고 일컫고 있다. 이중 조광조, 안당, 김정, 김식, 기준 등은 처형이나 자살 등에 의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팔현 중에도 충북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 적지 않다. 김정, 김식 등은 각각 우리고장 보은, 청풍인이고 정광필은 충남 회덕 사람이다. 신명인(申命仁·1492∼?)은 적어도 사료상으로는 충북과 직접적인 인연을 맺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자살한 김식(金湜)의 시신을 맞은 사람이 신명인이라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그는 김식의 수제자였다. '경진년에 김식이 화에 걸려 죽자 그 시체를 영남으로부터 운반하여 올라오는데, 김식의 부인 이씨가 충주(忠州)로 가서 시체를 맞아 염습하고 관에 넣어서 임시로 그곳에 매장하였다.'- '공(신명인)은 멀리서도 시체가 충주에 도착하는 날짜를 헤아리더니 감개하고 애도하여 마침내 송옥(宋玉)을 조상하는 글을 지어 대성(大成·김식 지칭)의 부득이한 뜻을 밝히고…'- 본문 중 '송옥'(宋玉·BC ?~BC ?)은 중국 고대 문장가로, 충성을 의심받아 쫓겨나는 신하의 심정을 가을의 서글픔에 많이 비유했다.
한반도 황사(Asian dust) 현상은 주로 봄철에 많이 찾아왔다. 그러나 근래들어서는 겨울철에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2일 청주기상대는 "이날 밤 강풍과 천둥을 동반한 비가 온 후 다음날은 한반도 서쪽으로부터 황사현상이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고 예보했다. 청주기상대의 발표대로라면 올 11월 이후 벌써 4번째 황사현상이 찾아오는 것이 된다. 종전의 황사 현상은 3~5월 봄철에 많이 찾아왔다. 관련 자료를 보면 봄철 83%, 여름철 4%, 가을철 2%, 겨울철 11% 등의 분포도를 보였다. 그러나 지난 2007년 이후 '12월 황사 현상'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2007~2010년 동안의 기상대 월별관측(청주지역 기준) 기록을 보면 1월 1회, 2월 3회, 3월 14회, 4월 5회, 5월 8회, 6~8월 0회, 9월 1회, 10월 1회, 11월 3회, 12월 7회 등의 분포도를 보이고 있다. 12월 황사는 1967~2006년 38년 동안에는 단 6회밖에 관측되지 않았으나, 2007년 이후에는벌써 7회나 관측되고 있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아직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기상 전문가들 사이에 지구 온난화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추정이 나오고 있다.
현량과(賢良科)는 과거시험이 아닌 천거에 의해 유능한 인재를 선발·임용하던 조선시대 인재선발 제도를 말한다. '안당이 아뢰기를, "이제 성균관이 천거한 것을 살펴보니, 조광조·김식·박훈 등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진실로 경서에 밝고 행실과 수양이 있는 사람으로서 천거되었으니(…) 이 사람들을 등용하는 것은 마땅히 문신을 등용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야 합니다.'- 본분 중에 조광조, 김식, 박훈 등 세 사람의 이름이 동시에 등장한다. 이를테면 조선 현량과 1기 동기생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왠지 '젊은 피' 조광조와 동기생이 됐다는 점이 불안하다. 이들 3인 중 김식(金湜·1482∼1520)은 처음 접하는 인물이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은 임금의 권력이 약해지고 신하의 권력이 강해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몇몇을 제외하고 이 현상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환국(換局)을 세번이라 일으킨 숙종이다. 중종도 버금갔다. 중종은 신진 사림들이 신강(臣强)의 모습을 보이자 기묘사화를 일으켜 이들을 한밤중에 전격 체포했다. 죄목은 '붕당'과 '배척'이었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를 내렸다.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은 서로 붕당을 맺고서 저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