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히로시마의 우지나군항(宇品軍港) ■ 교과서에 실린 항구노래 우지나(宇品)군항을 노래한 창가가 있다. 1896년에 나온 '미나토(港)'란 곡이다. 일본 소학교 교과서에 실린 이 동요는 우리 귀에도 익숙하다. 오래된 초등학교 음악책의 동요가 이런 곡조였기 때문이다. 우지나중앙공원에 이 노래비가 있다. 육군선박사령부 터에 세운 이 비는 군함 연통에서 본 딴 원통 형태이다. 글씨는 우지나의 초등학교 4학년생들이 한자씩 가사를 써서 새겼다. 작곡자는 히로시마고등사범 음악교사인 요시다 신타(吉田信太, 1870~1953)로서 3박자 노래를 처음 작곡한 일본인이라고 한다. 부산항이란 노래도 지었고, 유명한 연작 노래인 철도창가 작곡에도 참여했다. '미나토'는 우지나항의 활기를 노래한 것이다. 이 활기는 1894년 6월 9일 혼성 9여단의 선발대인 11연대 소속 1개대대 1,024명이 우지나항에 도착해서 시작되었다. 오시마 요시마사 여단장과 11연대 주력은 6월 11일 인천으로 출발하였다. 우지나는 핵심 군항으로 부각되었다. 이해 8월 긴급작업으로 히로시마역에서 오는 도로를 놓았고, 군용철도도 완공시켰다. 전쟁터로 보낼 군량과 말먹이 창고는 1897년에 세워졌고, 19
조선 전기를 산 인물로 김한로(金漢老·1367~?)가 있다. 그는 태종과 과거합격 동기생인 동방(同榜)이었다. 이것을 믿었기 때문인지 그의 행동은 항상 좌충우돌이었다. 그는 태상왕(이성계)이 중국사신을 위해 주최한 궁궐 잔치에 지각할 것처럼 보이자 역리(驛吏)의 말을 빼앗아 탓다가 파직을 당했다. '판봉상시사 김한로가 파직되었다. 한로는 이때에 의순고 별좌로 있었는데, 태상왕이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 때에, 사람을 시켜 길에서 역리의 말을 빼앗아 잡으려고 하니…'- 조선 최고의 난봉꾼 중의 한 명은 아무래도 세종대왕의 친형 양녕대군(讓寧大君·1394∼1462)일 것이다. 그의 여러 기행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이른바 기첩 '어리'의 사건으로, 그는 남자가 있던 기첩 어리를 궁궐로 몰래 데려오고 급기야 아기까지 갖게 했다. 이후 성밖에서 아기를 낳게 하고 다시 궁궐로 몰래 들여와 살다 아버지 태종(이방원)에게 발각돼 결국 세자 자리에서 폐위됐다. 이 부분은 좀더 살펴볼 대목이 있다. 일국의 세자는 신분이 노출 때문에 기생이라는 천민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이같은 행동을 할 수 있다. 바로 이때 말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도움을
'신대, 신촌, 신평, 신곡, 신기, 신풍, 신원'. 행정지명에 '신'(新) 자가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 이중 '신대리'라는 지명은 두산백과를 기준으로 할 경우 지금도 전국적으로 25개나 존재하는 등 높은 분포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 지명은 어떤 이유로, 언제 많이 생겨난 것일까. 인하대 임학성 교수가 호서사학회에 발표한 '18세기 후반 洞里의 증가와 新里 생성'(부제 충청도를 기준으로) 논문이 시간이 좀 지났지만 주목을 받고 있다. 임 교수에 따르면 '新'자 지명을 가진 행정마을 이름은 18세기에 집중적으로 등장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그는 新자 마을의 출현 배경과 그후의 변화상을 살피기 위해 18세기에 발간된 여지도서(1759년)와 호구총수(1789년)를 집중 분석했다. 두 사료는 당시 인구 기록을 비교적 상세히 담고 있고, 또 시간차가 30년 정도로 적당하게 차이나고 있다. 분석 결과, 18세기 무렵이 '新' 자 마을이 집중적으로 출현한 것은 △인구증가 △동리(洞里)의 분동 △사회 계층의 변화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전자에 대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양란에 대한 피해상이 어느정도 극복되자 다시 인구가 증가하기 시
속보= '충북 4.19학생혁명 기념탑' 건립추진 위원장을 맡았던 김현수 전 청주시장은 탑 내용에 '충주고' 이름이 빠진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그러니 지금와서 어떻게 하느냐"고 말해, 기념탑 명칭을 바꾸거나 문장을 수정하는 데 소극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본보는 지난 19일 청주 상당공원에서 제 53회 4.19혁명 기념행사가 끝난 후 김위원장과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 청주 상당공원에 있는 '충북 4.18학생혁명 기념탑' 내용과 탑이름에 대해 충주시민들이 매우 서운해 하고 있다. 충북에서 최초로 시위를 한 '충주고'가 기념탑에 명문화되지 않은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기념탑 건립을 논의할 때 추진 회원들의 대부분은 청주사람이었다. 그 때문인지 당시 회의를 할 때 충주고 학생들의 시위 사실을 확인해주는 회원이 한 명도 없었다. 나 자신도 최근까지 충주고 학생들의 시위 사실을 전혀 몰랐다." - 당시 동아일보는 충주고 학생 3백명이 1060년 3월 10일 시내로 진출해 시위를 했다고 기사화했다. 당시 신문을 보지 못했나 "당시 동아일보를 보지 못했다. 신문을 봤다면 당연히 기념탑 내용에 충주고도 집어넣었을 것이다. 충주고가 빠
전회에 김태희 등 내국인이 주축이 된 '청주 청년회'가 1920년 6월 19일 '앵좌(櫻座)극장'에서 출범식을 가졌다고 밝힌 바 있다. 1920년대면 말 그대로 '문명의 열차'가 막 고동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한 시기다. 그런 문명의 여명기에 청주에 여가문화의 일종인 극장 건물이 존재했다는 것은 다소 놀라운 현상이다. 그러나 '앵좌극장'이 청주의 제 1호는 아니다. 오오꾸마 쇼지(大熊春峰)가 1923년에 발간한 '청주연혁지'를 보면 앵좌극장 직전에 '덕영좌'(德永座)라는 극장이 존재했다. 청주연혁지는 신축 동기부터 밝히고 있다. '청주에 일본인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서 무미건조한 나날을 보내는데 견디기 어려웠었다. 이곳에는 하등이 오락설비가 없는 것은 배속의 기생충도 안다.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德永座라는 극장이 생기게 되어 오래된 일본취미의 흥행이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극장 덕영좌는 그 시설 정도가 형편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오꾸마 쇼지는 '설비는 처음부터 강능하지도 않았었다'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덕영좌는 덕영증병위(德永增兵衛) 개인이 경영하는 이름뿐인 극장이었지만 극장이라고 할 정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자본 관계는 시대의 추이에
4.19 혁명과 관련된 충북 최초의 시위는 청주지역 학생들이 아닌, 충주고 학생들에 의해 충주지역에서 처음 일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따라 충주고 학생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은 청주 상당공원의 '충북 4.19혁명 기념탑'은 자칫 역사를 오도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본보는 제 53주년 4.19혁명 기념일을 앞두고 현존하는 한국기록원 자료와 당시 신문기사 등을 면밀히 살펴봤다. 그 결과, 4.19혁명과 관련된 충북에서의 최초 시위는 청주지역 학생들이 아닌, 충주고 학생들에 의해 1960년 3월 10일 처음으로 일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동아일보는 전국 시위현황을 기사화하면서 1960년 4월 25일자 2면 기사를 '3월 10일 忠州에서 충주고교생 3백명이…'라고 적었고, 4.19관련 다른 단체의 자료에서도 같은 내용이 발견됐다.(그림참조) 충주고 학생들의 이같은 시위는 대구, 서울, 대전 등에 이은 전국 4번째로, 4.19혁명의 기폭제가 됐던 마산지역 시위(3월 15일)보다 닷새 정도 이른 것이다.(표참조) '충고 60년사'와 '충주시지' 등은 3월 10일을 전후한 당시 충주고 학생들의 시위 촉발 원인과 시내진출 과정을 보다 상세히 기록해 놓았
금년은 개화기 때 저온현상이 찾아오면서 청주 무심천 벚꽃이 비교적 오랫동안 만개한 상태를 유지했다. 본보는 4월 8일자 기사에서 무심천 벚꽃의 근현대사를 다룬 적이 있다. '1914년(대정3) 3월에는 청주에서 생겨난 청년회가 기념으로 벚나무를 식재하게 되었다. 회원들은 집집마다 권장하여 많게는 10주, 적게는 2·3주씩 하여 남으로는 무심천 제방일대에 벚꽃을 식재….' 그러나 당시에는 지면 관계상 청주 연혁지 내용을 모두 소개하지 못했다. 나머지는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로는 성서정(城西停)의 제방, 동으로는 성동정(城東停)의 성벽 흔적을 따라 식재하였다. 회원들은 상호 감시하여 한국인 어린아이들이 나뭇가지를 꺾지 못하도록 경계하여 그 공로가 헛되지 않아 벚나무는 잘 자라나서 몇 년이 되지 않아 개화를 보게 되었다.' 인용문에 등장한 '성서정'과 '성동정'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다. 성서정은 개명 전에는 청주군 북주내면 서리(西里)와 원리(院里) 지역으로, 지금의 서문동에 해당한다. 성동정은 개명 전에는 청주군 동주내면으로, 지금의 문화동 일대가 된다. 나머지 내용을 계속 소개하면 '만약 그것이 한 꽃이 피는 시기에 접어들게 되면 긴 제방에 많은
15세기 후반 충주 수안보에 온천 기능이 완전 마비될 정도의 대홍수가 발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15일 충주시는 직영하고 있는 수안보 하이스파 건물 3층에 '수안보온천 홍보관'을 마련키로 하고 이날 설명회와 함께 용역참여 업체의 발표회를 가졌다. 이와 관련, 본보는 수안보 역사를 보다 상세히 살펴보기 위해 현존하는 사료를 인터넷 키워드 방식으로 검색했다. 그 결과, △고려사의 관련 내용 △세종대왕의 친형 양녕대군 일화 △연려실기술, 오주연문장전사고, 용재총화 등의 내용 △수안보온천을 직접 읊은 시 등 다양한 사료를 접했다. 이중 압권은 사림파 거두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지은 '浴安保溫泉'(안보의 온천에서 목욕하다)라는 한시로, 점필재집의 서문에 이 시를 짓게 된 동기가 상세히 적혀 있다. 요약하면 △병신년(1476년 추정)의 여러 달 비로 수안보에 대홍수가 있었고 △이로 인해 '해사'(관공서 건물 지칭)의 우물이 무너졌으며 △이때 온천옆 민가 10여호도 사라졌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종직이 지은 '浴安保溫泉'은 이를 운문으로 적은 것으로, 칠언절구 형식을 하고 있다. 대홍수 후의 수안보 모습이 잘 표현돼 있다. '담장과 집 무너지고 샘은 곧
'충북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 구입석리에서는 작년부터 시금까지 사입여호 인구 1백60여명이 철가 도주하였다. 대개는 도 기본림을 화전으로 경작하여 오다가 연년히 당국에서 화전을 엄금하고 화전지대 식수를 함으로 생도들 잃은 그들이 살아갈 도리가 없음으로 할 수 없이 그와 같이 정든 고향을 등진 것이다.'- 비슷한 시기로 일제 강점기인 1935년 12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등장한다. '들에서 살어보랴고 애를 써도 살갈이 막연하기 때문에 금칙을 범하여서까지라도 살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산에 들어가서 미림을 소실하야 연맥, 마령서, 속등 등의 잡곡을 가라먹는 무리가 있으니 그것이 화전민이다.' 이상에서 보듯 우리나라 화전의 역사는 질곡 그 자체였다. 이는 그 만큼 산림이 녹화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가 벌거숭이산을 벗어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이었다. 당시 '선조림 후벌채', '1벌2식', '추풍령식 벌채' 등의 구호가 유행했다. '선조림 후벌채'는 먼저 나무를 심고 그후에 벌목을 한다는 것을, '1벌2식'은 나무 1그루를 베면 반드시 2그루를 심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밖에 '추풍령식 벌채'는 산에서 벌
지구 온난화로 식목 적기를 더 앞당겨야 한다는 얘기가 자주 나오고 있다. 의외로 조선시대에는 일년 중 양력 2월 하순~3월을 식목을 적기로 봤다. 조선후기 실학자로 '산림경제'를 지는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있다. 그는 우리고장 충주 연원역 찰방과 단양군수를 역임했다. 농서인 산림경제는 이때의 경험이 바탕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식목의 적기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식목은 정월(正月)이 상시(上時)이고, 2월이 중시(中時)며, 3월이 하시(下時)다'- 쉽게 설명하면, '식목은 음력 정월이 가장 좋은 때이고, 2월이 그 다음이며, 3월이 그 중 처지는 때가 된다' 정도가 된다. 물론 이때의 정월은 음력 한 달을 얘기하는 것으로, 지금의 양력으로 치면 3월 초순 정도가 될 수 있다. 그는 또 나무를 심은 후의 관리 요령에 대해서도 지금과 부합되는 내용을 서술했다. 이런 내용이 나온다. '모든 나무의 뿌리는 편안하게 뻗기를 원하고, 배토(培土)는 평평하기를 바라며, 토양(土壤)은 원래 서 있던 곳과 같기를 원하고, 구덩이는 단단히 메워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을 '모종은 어린 자식 다루듯 하되, 놓아두면 천성대로 저절로 자란다'라고
이승만·박용만과 함께 독립운동계의 '3만'으로 불렸던 독립운동가 정순만(鄭淳萬, 1873~1911)의 생애와 활동에 관한 연구논문과 자료가 처음으로 집대성돼 출간됐다. 충북대학교 사학과 박걸순 교수가 국내외 지역 자료수집과 분석 등 6년여의 노력 끝에 '독립운동계의 '3만' 정순만' 자료집을 최근 경인문화사 이름으로 발간했다. 670여쪽 방대한 분량의 이번 책은 사진·논문·자료편 등 3부로 구성돼 있다. 특히 이중 일제의 비밀문서는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어서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또 선생의 아들 정양필과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독립운동가로 포상된 며느리 이화숙에 대한 자료도 첨부돼 있어, 사료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정순만은 충북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 하동정씨 집성촌에서 출생하여 독립협회, 상동청년회 등에서 간부를 역임하고 을사오적 암살 기도 등 한말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더 이상 국내에서의 민족운동이 불가능하자, 1906년 봄 이상설·이동휘 등 동지들과 함께 망명길에 나서 북간도 용정에 터를 잡았다. 여기에서 그는 이상설 등과 북간도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개설하고 동포 자제들의 교육활동에 온 힘을 쏟았다. 1907
청주 무심천 벚꽃이 절정을 맞고 있다. 지금의 무심천 벚나무는 언제, 누가, 어떤 동기로 심을 것일까. 무심천 벚나무는 처음 심겨진 후 세번의 수종 갱신이 이뤄지는 등 그 자체가 청주 근현대사의 일부가 되고 있다. 청주 무심천에 벚나무가 처음 심겨진 것은 1914년이었다. 일본인 오쿠마온보(大雄春峰)가 1923년에 발간한 '청주연혁지'는 이 부분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했다. '1914년(대정3) 3월에는 청주에서 생겨난 청년회가 기념으로 벚나무를 식재하게 되었다. 회원들은 집집마다 권장하여 많게는 10주, 적게는 2·3주씩 하여 남으로는 무심천 제방일대, (…) 동으로는 성동정의 성벽 흔적을 따라 식재하였다.'(정삼철 역) 청주연혁지는 이어지는 내용을 '회원들은 상호 감시하여 한국인 어린아이들이 나무가지를 꺽지 못하도록 경계하여 그 공로가 헛되지 않아 벚나무는 잘 자라나서 몇년이 되지 않아 개화를 보게 되었다'라고 적었다. 또 '만약 그것이 한번 꽃이 피는 시기에 접어들면 긴 제방에 많은 가지에서 휘늘어진 꽃송이가 흰 구름이 낀 것 같고 어떤 때는 눈같아 보이기도 하였다'라고 썼다. 그러나 당시 벚나무를 심은 주체인 '청주 청년회'가 순수 내국인인지, 아니면
'이는 삼가 경모궁(景慕宮)에 나무를 심은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궁 안 동산으로부터 주변 사방 산들에까지 모두 소나무, 삼나무, 단풍나무, 녹나무, 매화나무,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버드나무 등을 심었는데 궁관(宮官)에게 명하여 심은 나무의 총 숫자와 살아 있고 죽은 나무의 실제 수효를 매 계절 초하루에 수정하여 아뢰도록 하여 아침저녁으로 살펴보는 자료로 삼아 어버이를 공경하는 소자의 뜻을 붙였다.'- 정조가 경모궁에 나무를 친히 심고 이의 소감을 적어놓은 글이다. 홍재전서는 정조의 시문집으로, 그 분량이 184권 100책일 정도로 방대하다. 이처럼 조선시대도 나무심기 행사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임금들은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사찰에서 기념식수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말년을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보낼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 그도 손수 나무를 심으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도 그런 성향을 지녔다. 하나의 사료 안에서 두 사례를 동시에 접할 수 있다. '석왕사(釋王寺)에 있는 어필각(御筆閣)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직접 심은 소나무를 봉심하고, 각 불각(佛閣)과 양어장, 온천 약수 등
지금은 회사를 설립하는 것을 창업(創業)이라고 한다. 그러나 창업은 본래는 건국(建國)을 의미했다. 때문에 나라를 맨 처음 세운 임금을 '창업지주'(創業之主)로 표현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고 이른바 '즉위 교서'라는 것을 발표했다. 지금으로 치면 향후 국정 운영에 대한 마스터 플랜 정도가 된다. 이성계는 오랫동안 야전에 머물렀기 때문에 정치에는 둔감한 편이었다. 때문에 실록을 보면 정도전이 '즉위 교서'를 써서 태조에게 발표하도록 한 것으로 돼 있다. 즉위 교서는 17개 항목으로 되어 있고, 향교와 관련된 내용은 이중 세번째 기술돼 있다. 이는 조선의 창업 주역들이 교육을 '백년지대계'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무 두 과거는 한 가지만 취하고 한 가지는 버릴 수 없으니 중앙에는 국학과 지방에는 향교에 생도를 더 두고 강학을 힘쓰게 하여 인재를 양육하게 할 것이다. 그 과거의 법은 본디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뽑았던 것인데, 그들이 좌주(座主)니 문생이니 일컬으면서 공적인 천거로써 사적인 은혜로 삼으니, 매우 법을 제정한 뜻이 아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좌주'는 과거시험 때 시험감독관을 일컫는 표현이다. 교육의 중요성이 즉
원나라 밀교의 영향을 받은 범자문 와당(瓦當)은 유교 국가인 조선에도 사찰문화의 하나로 여전히 수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와당 암·수막새를 미술사적으로 분류를 하면 시기별로 일정한 특징을 보인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한국기와학회(회장 장준식·충청대 교수) 제 17회 연구발표회가 지난 30일 충청대 도서관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세종대학 이상규 학예사가 '고려-조선시대 범자문 와당 연구'라는 흔치 않은 주제의 발표를 했다. 특히 이날 발표 내용에는 영동 영국사지, 충주 숭선사지, 청룡사지 등에서 출토된 와당도 다수 소개돼 지역적인 관심을 함께 끌었다. 발표문에 따르면 고려 12세기에 처음 등장한 범자문양 와당은 양주 회암사지, 강화 선원사지, 영동 영국사지, 충주 숭선사지·청룡사지, 서사 보원사지, 예산 수덕사, 보령 성주사지 등 전국 14개 유적에서 출토됐다. 이와 관련해 와당 중 수막새의 문양을 분석한 결과, 범자+일휘문(A형), 범자+연와문(B형), 범자 단독문(C형), 범자+기하문(D형), 범자+운학문(F형) 등 6개 유형으로 대별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휘문은 태양이 빛나는 문양을 말한다. 이 학예사는 이에 대해 "A형이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나
조선후기 청주읍성을 마지막으로 수축(보수)한 내용이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사료에 매우 상세하게 기술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따라 청주읍성은 각 문루(門樓)의 칸 수, 여장 높이, 보초소 수 등 기존에 알져지지 않았던 여러 제원을 마치 '설계도'를 보듯 정확히 아는 것이 가능해졌다. 지난주 청주 성안동주민센터에서 열린 청주읍성 복원과 관련된 세미나에는 '일성록'이라는 1쪽도 안 되는 짧은 원문사료가 공개됐으나 별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와 관련 본보가 이를 분석한 결과, 사료 '일성록'에는 청주읍성 마지막 수축에 대한 내용이 매우 상세하면서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동안 청주읍성에 대한 마지막 수축 내용은 '정조실록 10년 6월 3일 5번째 기사'에 등장하면서 지역 학계가 이 부분을 많이 인용해 왔다. 그러나 그 내용이 '청주성을 수축하였다. 전 병사 김영수가 시작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사 구세적이 모두 수축하였다. 둘레가 1천 4백여 보(步)였다'가 전부여서 읍성 어느 부분을, 어떤 방법으로 수축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일성록 상의 청주읍성 마지막 수축 사업은 당시 충청병사를 차례로 역임한 김영수와 구세적의 근무기간을 추적한
전회에 '대뢰'(大牢)를 언급했다. 대뢰는 나라 제사에 소를 통째로 제물로 바치던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때의 소는 보통의 소(牛)가 아닌, 집에서 기르던 소(牢)를 의미했다. 그래서 '牢' 자는 집을 의미하는 '갓머리변'에 '牛' 자의 결합으로 돼 있다. 청주향교에서 대뢰를 둘러싸고 상소문 올리는, 어찌보면 해프닝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세조가 대뢰를 잡아 제를 올린 이후, 청주향교는 이를 그곳만의 전통제사로 삼은 것 같다. 그러나 광해군대 이르러 농우(農牛)가 도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잡는 제사를 제한하게 된다. 그러자 당시 '우방'이라는 청주향교 유생이 이런 상소문을 올린다. '우리 세조 충장대왕께서 본 고을에 어가를 머무시어 몸소 성인의 묘당에 제사를 하심에 대뢰를 쓰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후로는 법제를 이루었으니 해마다 희생에 쓸 소를 사서 먹이어 봄 가을에 배향을 지냈는데 호조가 '사치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희생소를 줄였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옛예법이 바뀌어 버리니 우리세조께서 제수우를 사용하여 남기신 뜻도 오늘부터 없어질 것이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어찌 소를 양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세조대왕의
청주향교의 제기(祭器) 46점이 무더기로 도난당한 사실이 얼마전 본보를 통해 알려졌다. 전통시대 전국의 향교는 공통적으로 두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성현·선현에 대한 제사이고, 또 하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었다. 때문에 조선시대 향교는 그 고을에서 풍수적으로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청주향교도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서원'(書院)도 비슷한 기능을 지녀 혼란을 주고 있으나 향교는 국립 교육기관, 서원은 사립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청주시 상당구 대성동에 위치한 청주향교는 이른바 5성, 송조6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5성은 공자, 맹자, 안자, 증자, 자사자를, 송조 6현은 송나라 주자 등 6명을 말한다. 이밖에 우리나라 18현은 설총,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안유,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김인후, 이황,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이다. 청주향교는 역사적으로 10세기쯤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 성종은 즉위 2년(983)에 청주, 충주 등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이런 말을 한 것으로 고려사는 기록했다. "진실로 백성들의 희망에
충청도 지역 마형대구(馬形帶鉤)는 왜 4세기쯤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진 것일까. 지속적인 발굴사업와 함께 출토유물이 증가하면서 마형대구에 대한 학문적 연구 성과도 누적되고 있다. 지금까지 한반도 마형대구 문화는 △초기철기 시대를 전후해 존재했고 △그 용도는 실용품이기보다는 위세(장식) 성격이 강하며 △밀랍 주조법으로 제작됐다는 견해가 강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성과는 제조법을 제외한 나머지에 성격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영남대 박장호 씨가 논문 '원삼국시대의 동물대구의 전개와 의미'에서 청주 봉명동 유물을 지목, "착장할 때 고리를 묶었던 노끈이 함께 출토됐다"며 "이는 마형대구가 장식품이 아닌 실생활에 사용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밖에 "세종시 용암리 가마골 유적에서 발견된 마형대구 고리부에는 철로 수리한 흔적이 남아 있다"며 "장식품이었다면 굳이 다른 금속재료로 수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궁금증은 과연 무덤에 묻힌 피장자가 마형대구를 허리에 찬 채로 묻혔는가, 아니면 허리에 차지 않고 별도로 부장됐는가 여부이다. 종래에는 허리에 착장했다는 설이 우세했으나 박 씨는 이를 부인했다. 그는 "상당수
청주읍성의 성돌 뿐만 아니라 스토리텔링 요소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세종대왕의 친형 양녕대군(讓寧大君·1394∼1462)과 청주읍성에 얽힌 내용이 최고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본보는 성돌찾기 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 청주읍성에 대한 스토리텔링 요소를 찾기 위해 조선왕조실록 등 1차 문헌사료를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그 결과,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에서 유배를 떠나는 1년 사이에 청주읍성에 대한 스토리텔링 요소가 가장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양녕의 스토리텔링 요소는 크게 △애첩 '어리'(於里)와의 사랑 △세자 폐위 △청주읍성에서의 1년 유배생활 △형을 보살피는 동생 세종대왕의 우애 △법치를 주장하는대신들의 상소 등 5가지로 구분되고 있다. 양녕의 여러 기행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이른바 기첩 '어리'의 사건으로, 그는 남자가 있던 기첩 어리를 빼앗아 궁궐로 몰래 데려오고 급기야 아기까지 갖게 했다. 이후 성밖에서 아기를 낳게 하고 다시 궁궐로 몰래 들여와 살다 아버지 태종(이방원)에게 발각돼 결국 세자 자리에서 폐위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녕은 다른 집에 좋은 개(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를 몰래 가져오
본보는 청주읍성 성돌이 탑동 양관을 짓는데 사용됐다고 밝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관리부재 상태의 청주옥의 석부재도 양관 건축에 사용됐다. '감방(조선시대 전통옥 지칭)은 절반이 거의 무너져가는 온돌로 되어 있어 (…) 이러한 이유로 유치인이나 수인이 집을 부수고 도망이 계속 일어나 도망치면 잡히고 잡혀서는 다시 도망치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이와는 별개로 도문화재연구원은 지난 2011년 청주읍성 발굴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丙辰四月日畢役' 명문이 새겨진 성돌을 수습한 바 있다. 직역하면 '병진년 4월에 공사를 마쳤다'는 뜻이다. 기년상 조선후기 병진년에 해당하는 해는 1736년(영조 12)과 1796년(정조 20)이다. 이와 관련 지역 한 사학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청주읍성이 일부 허물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개·보수가 이뤄져 1736년에 공사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이인좌가 청주읍성을 접수할 때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고는 적지 않았다. 무기를 숨겨 상여에 숨겨 몰래 들어왔고, 또 내응하는 자가 많았다고 적었다. '처음에 적 권서봉 등이 양성에서 군사를 모아 청주의 적괴 이인좌와 더불
청주향교(전교 이종한)가 얼마전 전통 유교식 제사에 사용하는 제기(祭器)를 46점이나 도난당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들 제기류는 비지정문화재이기는 하나 조형성이 우수하고 도지사와 청주시장 등이 초헌관으로 참여하는 석전대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때문에 청주향교측은 곤혹스러워 하는 가운데 조속히 돌려줄 것을 바라고 있다. 문화재청은 도난문화재가 발생할 경우 이를 즉각 공개·수배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목록에 청주향교 석전용 제기류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재청이 쫓고 있는 제기류는 8종 46점으로, 지난해 10월 20~25일 사이에 보관 중이던 대성전 좌측건물에서 도난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난당한 8종의 제기는 '보', '궤', '희준', '상준', '작, '점', '산뢰', '용작', '촉' 등으로, 유기(鍮器)로 유명한 경기도 안성에서 특수 주문·제작했다. 특히 이들 제기류는 청주향교가 조선시대 국조오례의에 기술된 내용대로 형태와 무게 등을 주문한 것이에서 일반집 제기와는 격과 조형성을 달리하고 있다. '보'는 벼(쌀)를 담은 제기로 궤와 합쳐 한 벌이 되며 네모 모양이다. '궤'는 수수·피를 담은 제기로 보와 합쳐 한 벌이되며 둥근모양
청주시와 민간단체 등이 합심이 돼 청주읍성 성돌을 찾는 노력이 집중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현재까지 재작년부터 발굴조사를 하면서 옛 남궁병원에서 40개, 서문자리에서 20개, 남주동 개인주택 디딤돌 60여개 등 총 120여여개를 확보내지 확인했다. 본보의 보도에 의해 청주 탑동의 6개 양관 중 4개 건물에서 주춧돌, 기단석 등으로 대량 사용된 것으로 확인됐으나 양관 자체가 도지정 문화재에서 회수는 사실상 어렵다. 청주성과 관련된 표현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서기 685년 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5년조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5년 3월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元泰)를 사신으로 삼았다.' 역사상 청주시장 제 1호는 '원태'인 셈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문왕 9년조에는 '서원경에 성을 쌓았다'라는 표현이 문헌적으로 분명하게 등장한다. 이때가 서기 689년이다. '9년 가을 윤 9월에 왕이 장산성에 거둥하였다. 서원경(西原京)에 성을 쌓았다. 왕이 달구벌로 도읍을 옮기려 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서원경 성벽을 쌓는 과정에 얽힌 이야기도 자세히 등장한다. 삼국사기 권47 '열기'라는 인물의 열전은 이렇게 쓰여 있다. '구근(仇
"신라금관은 시베리아 북방 이주민이 가져온 것도 아니고, 또 그들의 영향을 받지도 않았다. 신라금관은 신라인이 만들었을 뿐이다." 상명대학 박선희 박사가 지난주 충북대박물관 제 19기 과정에서, ‘한국 금관문화의 창조력과 아름다움’제목의 특강 시간을 가졌다. 박 씨는 이 자리에서 지금까지 심심찮게 제기됐던 ‘신라금관= 북방민족 영향설’에 대해 가장 강력한 반격을 가했다. 신라금관은 △마립간 시기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에서만 출토됐고 △관장식에 사슴뿔 모양이 가지가 들어가 있다. 이 때문에 금속을 잘 다뤘던 시베리아 스키타이나 알타이 종족이 동해안을 타고 내려와 금관을 만들었거나, 그들의 문화가 전파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견해가 존재해 왔다. 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시베리아 지역에는 한반도와 달리 사슴이 많기 때문에 금관에 자연스레 사슴뿔 모양의 조형장식이 들어갔다고 봐왔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신라 마립간 정권= 시베리아 북방민족 이주민’을 인정하는 것으로, 당사자들도 이를 확대하는데 매우 조심스러워 했다. 박씨는 이날 특강에서 다양한 논리를 내세우며 이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먼저 그는 "신라금관은 고조선 것을 계승한 순수 한민족 문화의 산물"이라고
경북 상주시가 추진 중인 문장대 온천개발 사업과 관련해 2백50여년 전에 제작된 김정호(金正浩, ?~?)의 대동여지도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1861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가 최소한 3가지의 인문지리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문장대 온천개발을 계획 중인 상주시 화북면 운흥리와 중벌리 일대의 수계가 경북의 땅이면서 왜 낙동강이 아닌 남한강 수계에 속하는지 궁금해 하고 있다. 현대의 지도로는 이같은 사실이 잘 느껴지지 않으나, 대동여지도를 보면 그 이유를 단숨에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청화산(靑華山)-문장대(文藏臺)로 연결되는 산줄기를 굵은 선으로 묘사했다.(그림 화살표) 바로 그 산줄기가 한반도 백두대간이라는 뜻으로, 남한강과 낙동강 수계(곡선)가 굵은 선을 경계로 분수(分水)되고 있다. 이에 비해 문제가 되고 있는 문장대 온천계획지구는 백두대간 이서(以西, 붉은원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일대는 경북에 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계는 남한강으로 이어지고 있다. 상주시는 이 점을 의식해 제 2안으로 "오염수를 남한강 수계가 아닌, 밤티재를 넘어 낙동강수계로 인위적으로 배출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
[충북일보] 충북 도내에서 저발전 지역이자 인구가 감소하는 동남 4군을 연결하는 새로운 산업벨트 조성이 추진된다. 충북도는 건설이 가시화되고 있는 영동~진천 고속도로 주변에 이 벨트를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2일 도에 따르면 보은과 영동, 옥천, 괴산 등 4개 군에 '동남권 신산업벨트'를 조성할 계획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이들 지역의 개발을 유도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다. 도는 영동~진천(오창)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신산업벨트를 구축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고속도로가 4개 지역을 모두 지나는 만큼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지역별로 산업단지를 1곳씩 새로 조성해 하나의 벨트로 연결하는 것이다. 먼저 보은군은 충북개발공사가 맡은 제4산업단지 조성이 진행 중이다. 사업 타당성 검토와 함께 관계기관과 협의 중이다. 옥천군은 민선 8기 공약 사업의 하나로 미래성장 산업단지를 조성한다. 현재 타당성 조사에 들어갔다. 영동군은 용산면 일원에 영동2산업단지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기본구상 및 타당성조사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괴산군의 경우 산업단지 조성을 구상 중이며 아직 명칭은 정해지지 않았다. 도는 4개 산업단지 조성이 완료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에서 저발전 지역이자 인구가 감소하는 동남 4군을 연결하는 새로운 산업벨트 조성이 추진된다. 충북도는 건설이 가시화되고 있는 영동~진천 고속도로 주변에 이 벨트를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2일 도에 따르면 보은과 영동, 옥천, 괴산 등 4개 군에 '동남권 신산업벨트'를 조성할 계획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이들 지역의 개발을 유도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다. 도는 영동~진천(오창)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신산업벨트를 구축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고속도로가 4개 지역을 모두 지나는 만큼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지역별로 산업단지를 1곳씩 새로 조성해 하나의 벨트로 연결하는 것이다. 먼저 보은군은 충북개발공사가 맡은 제4산업단지 조성이 진행 중이다. 사업 타당성 검토와 함께 관계기관과 협의 중이다. 옥천군은 민선 8기 공약 사업의 하나로 미래성장 산업단지를 조성한다. 현재 타당성 조사에 들어갔다. 영동군은 용산면 일원에 영동2산업단지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기본구상 및 타당성조사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괴산군의 경우 산업단지 조성을 구상 중이며 아직 명칭은 정해지지 않았다. 도는 4개 산업단지 조성이 완료
◇취임 2주년 소회와 주요 성과는 그동안 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지속가능한 공감·동행 교육'을 펼쳐왔다. 학교는 교육의 본질에 충실하고, 학생은 스스로의 삶과 학습을 주도할 수 있도록 탄탄한 토대를 만들고 다졌다. 취임 후 2년은 충북교육의 '새로운 도전과 성장의 시기'였다.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었던, 공약은 도민과의 약속이다. 지난해 전국교육감 공약 실천 계획 평가 최우수에 이어 올해 공약 이행평가도 최고등급을 받았다. 2023년 교육부 17개 시도교육청 평가에서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됐다. 교육발전특구 공모에 도내 5개 지구가 선정돼 3년간 최소 150억 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학생 성장 기반을 단단히 다졌다. 학생들은 몸활동을 통한 기초체력 단련과 독서교육으로 마음 근육과 기초소양을 쌓고, 이를 바탕으로 기초·기본 학력을 기른다. 올해는 기초학력 진단검사 후 모든 학습지원대상 학생 1대1 개별 맞춤형 지원계획을 수립하고 '다채움' 플랫폼을 통한 촘촘한 지원방안도 살피고 있다. 현장에서 답을 찾아 충북형 정책을 수립했다. 교직원 단체의견 수렴과 전문가 협의회를 통해 '작은학교 활성화 종합계획', '지금은 아이성장 골든타임' 정책이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