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벼슬 중에 '사또'(혹은 원님)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사또는 정식 벼슬이름이 아닌 '수령'(守令)을 달리 불렀던 표현이다. 수령은 군수(郡守)와 현령(縣令)을 준말이다. 이중 군수가 다소 높아 종4품, 현령은 종6품의 품관을 갖는 것이 보통이었다. 고을 원님 중 가장 낮은 품계는 현감으로, 보통 종6품의 벼슬을 지녔다. 조선시대 원님은 지금의 시장, 군수와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수령은 왕이 임명하고, 사법·군사·행정권을 행사했다. 이에 비해 지금의 시장과 군수는 국민들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행정권만 행사하는 점이 다르다. 고을 원님들의 임기는 보통 2년으로, 관찰사 1년보다는 다소 길었다. 이때 고을 원님 가족이나 부인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닌, 혼자서 임지에 부임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원님 이야기가 나오면 열에 아홉은 기생 이야기가 뒤따른다. 우리가 춘향전에서 읽었듯이 남원 사또 변학도가 부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이른바 기생 점고였다. '점고'(點考)는 명부에다 일일히 점을 찍어가면서 사람의 수효를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조선시대 관기는 관에 속한 관물(官物)로 여겨졌다. 춘향전으로 널리 알려진 '열녀춘향수절가'는 점고 끝에 수
조선시대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애주가로 단연 송강 정철(鄭澈·1536∼1593)이 있다. 그의 애주가적인 진면목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시조로 일컬어지는 '장진주사'(將進酒辭)에서 잘 드러난다. '한 잔(盞) 먹세그려 또 한잔 먹새그려 / 꽃꺽어 산(算)놓고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세그려 /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덮어 줄이어 매여가나 / 유소보장(流蘇寶帳)의 만인(萬人)이 울며 예나 / 억새풀 속새풀 떡갈나무 버드나무 우거진 숲에 가기 곧 가면 / 누런 해, 흰 달,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자할꼬 /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편의상 고한글체를 현대문으로 고쳐 실었다. 인용문중 '산(算)놓고'는 술잔을 하나하나 세어가며, '유소보장(流蘇寶帳)'는 화려한 상여를 일컫고 있다. 애주가 정철의 진면목은 유물로도 어느정도 입증되고 있다. 선조 임금은 정철이 술을 너무 좋아하자 '하루 석잔만 마시라'는 권고의 의미로 은배(銀盃)를 하사했다. 그 은배가 지금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의 송강정사에 전시돼 있다. 손잡이가 달린 이 은배는 복숭아 모양으로 잔받침도 갖추고 있다. 선조 때는 사림이 동인과
1882년 신식군대(별기군)만 우대하는데 불만을 품은 조선말기의 구식군대 군인들이 집단적으로 봉기한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이때 수도 방위를 담당하고 있는 장어영(壯禦營)의 구식군대 군인들도 대거 가담했다. 그리고 총지휘관인 장어대장(壯禦大將)은 신정희(申正熙·1833∼1895)라는 인물이 맡고 있었다. 결국 책임을 모면할 수 없었던 신정희는 전라도 임자도로 유배됐다. 그러나 그는 채 1년도 안돼 고종의 특명으로 풀려나 포도대장에 임명됐다. 조선시대 포도대장은 사회·경제사범 단속, 궁궐 경비, 임금 호위 등 치안과 경호임무를 동시에 담당 했다. 국왕의 근거리에 위치했던 만큼, 한성부 좌·우윤(종2품·오늘날 서울시 부시장) 출신자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이런 포도대장 자리를 1894년까지 무려 18년 동안 역임한 인물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신정희로, 그는 진천군 이월면 논실마을 출신이다. 그는 다른 직책도 겸하기도 했지만 포도대장직 만큼은 거의 놓지 않았다. 이는 당시 주군인 고종이 그를 그만큼 신뢰했음을 의미한다. 신정희가 포도대장으로서 '암행어사 박문수'와 비견될 만큼 명성을 얻은 것은 공평무사한 법적용에 있었다. 그는 도박이 사회불안 요소로 떠오르자 이를
조선시대 국청(鞠廳)은 모반, 대역죄 등 국가 중죄인을 심문·재판하기 위해 왕명에 의해 임시로 설치되는 특별 재판정을 말한다. 이 국청은 죄질에 따라 친국(親鞫)·정국(庭鞫)·추국(推鞫)·삼성추국(三省推鞫)으로 다시 세분됐다. 친국은 국왕이 참석해 친히 심문하는 것으로 위험에 대비해 왕궁을 호위하고 진행했다. 설치 장소는 경희궁, 창덕궁, 금위영이었다. 정국은 친국과 대체로 같으나 왕명에 의해 13~ 23인의 국문관이 동석했다. 설치 장소는 보통 병조나 의금부였다. 추국은 국문관이 10인 내외로 다소 적은 편이다. 필요에 따라 친국 또는 정국을 추국으로 바꾸어 계속하였다. 삼성추국은 모반보다는 강상(윤리죄) 죄인을 심문하는 경우로 의정부·사헌부·사간원의 관원 중에서 왕명으로 지명된 8인의 국문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경우 죄인은 형조에서 이미 심문을 마쳤기 때문에 삼성추국에서는 비교적 간단한 내용만 조사받았다. 전회에 우리고장 인물인 권섭이 송시열의 사사 등 정치환경의 급변으로 인해 우리고장 제천의 청풍으로 낙향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아들 권진성을 정치적 사건으로 잃은 슬픔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경종실록에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경종은 소론의 세를
조선시대 선비들은 정주개념 외에 별장문화 의식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석간수 흐르는 계곡에 아홉구비를 뜻하는 구곡(九曲)을 설정하고 각 구비마다 시를 지었다. 주자가 설정한 중국 복건성 무이산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이 그 기원으로, 이 영향을 받아 퇴계 이황은 도산십이곡, 율곡 이이는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구곡시는 우리고장 괴산에 유난히 많이 남아 있다. 이런 구곡은 좁은 수계가 아닌, 넓은 곳에 설정되기도 한다. 제천~청풍 일대에도 구곡시가 존재하고 있다. 저자는 조선 영조 때 제천 인물인 권섭(權燮·1671∼1759)은 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를 지었다. 그는 1곡부터 9곡까지 지역 순에 따라 각각 한 곡마다 시조 1수씩을 지었다. 각 곡명은 1곡 대암(對岩), 2곡 화암(花岩), 3곡 황강, 4곡 황공탄(皇恐灘), 5곡 권호(權湖), 6곡 금병(錦屛), 7곡 부용벽, 8곡 능강(綾江), 9곡 구담 등이다. 이중 황공탄은 전회에 소개한 바 있다. 지면상 제 8곡가인 능강만을 소개하면 '八曲이 어드메오 綾江洞이 맑고 깊어 / 琴書 사십년의 네어인 손이러니 / 아마도 一室雙亭의 못내들겨 하노라'라고 썼다. 혹자는 8곡에 대해 시각과 청각의 회상적 결합에 있다.
여울은 하천 바닥이 경사를 이뤄 물흐름이 빠른 부분을 말한다. 백과사전은 보다 구체적으로 '일반적으로는 굵은 조약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이 소리내어 흐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여울이 형성되는 하천은 지형의 발달과정에서 볼 때 유년기(幼年期)에 속하며, 대륙의 구조평야를 흐르는 하천에서는 일반적으로 보기 드물다'라고 쓰고 있다. 조선말기 인물로 이유윤( 李裕元·1814~1888)이 있다. 그는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사사건건 대립했던 인물로, 대원군의 등장과 퇴진에 따라 좌천과 복권을 반복했다. 그는 고종초에 좌의정까지 올랐으나 흥선대원군과 반목하여 수원유수로 좌천됐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영의정으로 승진했다. 그는 총재관 자격으로 조선의 마지막 법전인 대전회통 편찬을 주도했고, 대한제국기 전인 1882년 전권대신으로서 일본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기도 했다. 그는 다재다능해 조선의 역사, 지리, 시문, 제도 등을 다룬 '임하필기'(林下筆記)를 쓰기도 했다. 이 문집은 같은 시기 백과사전류인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 종종 비교된다. 그는 이 문집에서 '호서(湖西)의 네 고을'이라는 소제목으로
황인종을 학술용어로는 몽골로이드(Mongoloid)라고 부른다. 아시아, 태평양제도, 아메리카 대륙 등에 분포하고 있다. 이런 몽골로이드는 대략 북방계와 남방계 등 두 부류로 세분된다. 한국·일본·몽골민족은 북방계, 베트남·태국 민족은 남방계로 분류되고 있다. 북방계 몽골로이드는 납작한 얼굴, 쌍꺼풀이 없는 가늘고 작은 눈, 낮고 작은 코, 칼귀, 얇은 입술, 발달한 턱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반면 남방계 몽골로이드는 작은 키, 단두, 약간 돌출된 입, 다소 두툼한 입술, 넓고 낮은 코 등의 특징을 대략적으로 지니고 있다. 고고인류학자들은 이같은 원인을 기후와 유전학적인 표이가 함께 작용한 결과로 보고 있다.표이는 특별히 나타나는 특징을 말한다. 인류단일지역 기원론(일명 아웃오브 아프리카)을 적용할 경우,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대략 6만년전 아프리카 북동부 지역을 벗어나 히말라야 남쪽의 인도를 거쳐 5만년전 지금의 동남아시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일부는 해안을 따라 중국, 한국, 캄차카반도까지 진출하고, 여기서 파생된 또 다른 일부는 시베리아 내륙으로도 이동한다. 이들이 북방계 몽골로이드로, 마지막 빙하기 끝무렵에는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
충남 서산시 운산면에 수덕사(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의 말사인 개심사(開心寺)라는 고찰이 있다. 사적기에 의하면 651년(의자왕 11) 혜감국사가 창건하여 개원사라 하던 것을 1350년 개심사로 고쳤다. 그 후 1475년(조선 성종 6) 중창했고 1955년 전면 보수하였다. 보물 제143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충남문화재자료인 명부전과 심검당 등이 있다. 그러나 성종 때의 중창은 노후화가 아닌 화재에 의한 것이었다. 실화범은 다름아닌 당시 충청도 절도사였던 김서형(金瑞衡·?-?)이다. 실록에는 그와 사냥에 얽힌 이야기가 이례적으로 자주 등장한다. 무신 출신이었던 그는 사냥을 매우 좋아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민폐를 자주 일으켰다. '사헌부에서 행대 감찰 정찬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충청도절도사 김서형(金瑞衡)이 습진(習陣)을 한 뒤에 인마(人馬)를 많이 거느리고 사냥을 행하여 홍주진(洪州鎭)에 속한 여러 고을로 하여금 날마다 지공(支供)하게 하여 폐단을 일으키고…'- 당시 조선 전기의 충청병영은 해미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해미 주변의 서해안 일대를 벗어나 우리고장 청주까지 진출, 이른바 '원정 사냥'도 했다. 이날은 청주목과 청안현 일대를
호패(號牌)는 조선시대 16세 이상 남성이면 누구나 차고 다녀야 할 물건이었다. 이 호패제도는 호구(戶口) 파악, 유민(流民) 방지, 각종 국역(國役)의 안정적인 조달 등을 위해 도입됐다. 호패에는 착용자의 신분, 지위, 거주지 등 기본적인 인적 사항을 명문으로 새겼다. 따라서 오늘날로 치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일면을 지녔다. 호패는 2품 이상과 삼사(三司)의 관원인 경우에만 관청에서 제작한 것을 지급받았다. 나머지 대부분의 경우는 백성 각자가 성명, 출생신분, 직역, 거주지 등을 패에 새긴 후 관청에 제출하면 관청이 이의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낙인을 찍어 발급하는 형식을 취했다. 현재 문신 김희(金憙, 1729∼1800)의 호패가 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그의 호패 앞면에는 '김희(金憙) 기유생(己酉生) 계사문과(癸巳文科)'라고, 뒷면에 '갑진(甲辰)'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김희라는 인물은 기유년(영조 5, 1729)에 태어나 계사년(영조 49, 1773, 당년 45세)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갑진년(甲辰年, 정조 8, 1784)에 이 호패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패법은 조선 전기인 태종 때 처음 도입됐다. 이의
우리나라 최초의 의서는 1236년(고려 고종 23)에 간행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이다. 당시 고려 조정은 약재의 자급자족을 위하여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향약구급방을 간행했다. 그러나 초간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향약구급방은 이후 1417년 7월 의흥현(義興縣)에서 현감 최자하(崔自河)에 의하여 중간(重刊)됐으나 이 역시 국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어찌된 이유인지 일본 궁내청서릉부(宮內廳書陵部)가 소장하고 있다. 향약구급방은 고려 중기의 의약적 지식을 고찰하는 자료가 될 뿐 아니라 본초학, 약용식물, 고려어(高麗語), 이두(吏讀) 표기법 연구 등에 있어서도 귀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향약구급방이 또 한번 중간된 적이 있었다. 바로 조선 태종 때 인물인 황자후(黃子厚·1363~1440)에 의해서 였다. 의학에 대해서도 전문가적 지식을 갖고 있었던 황자후는 나주목사로 있으면서 향약구급방을 증간했다. 그런데 이를 인쇄한 곳이 우리고장 충청도였다. 이때는 충청감영은 충주나 청주목에 위치하고 있던 때였다. '전 판나주목사 황자후(黃子厚)가 계하기를, "향약구급방을 인쇄하여 외방(外方)에 나누어서 생명을 구제하는 길을 넓히게 하소서"하니, 드디어 충청도로 보
440㏄-900㏄-1,400㏄-1,500㏄.오토바이 배기량을 열거한 것이 아니다. 인류의 두뇌 크기를 시간의 흐름대로 나열한 것으로, 후대로 올수록 용량이 커졌음을 알 수 있다. 440㏄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남쪽 원숭이라는 뜻)의 두뇌 크기로, 대략 400만년전 안팎의 원(猿)인류 모습이다. 900㏄는 호모 에렉투스(직립 인간이라는 뜻)의 두뇌 크기로, 대략 1백만년전의 이른 시기 인류 모습니다. 반면 20만년 전에 살았던 호모 사피엔스(슬기사람·네안데르탈인)은 1400㏄,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슬기슬기 사람)는 1,500㏄ 정도의 두뇌 용량을 지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류두뇌는 1차적으로 대략 200만년 전에서 1백만년 전 사이에 2배 가까이 커졌다. 이때 두뇌의 앞머리뼈, 뒷머리뼈, 밑면에 모양의 변화가 찾아왔다. 2차 변화는 대략 50~10만년전 사이에 찾아왔다. 두뇌 용량이 50% 정도 커졌을 뿐만 아니라 모양이 획기적으로 변모했다. 이른바 '높고 반듯한 이마'가 되면서 비로소 '현대인'같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옆머리뼈도 팽창했고, 뒷머리뼈는 둥글게 변했다. 인류의 두뇌는 왜 그 용량이 '큰 쪽'으로 진화한 것
춘향전 진양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술상 차려 향단 들려 앞세우고 오리정 농림숲을 울며 불며 나가는디, 치마자락 끌어다 눈물 흔적을 씻치면서 농림숲을 당도허여…' 그 뒤에는 "이팔청춘 젊은 년이 서방 이별이 웬일이며, 독수공방 어이 살꼬. 내가 이리 사지를 말고 도련님 말굽이에 목을 매여서 죽고지거"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인용문 중에 '오리정'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언뜻보면 어떤 정자의 이름인 듯 하나 그렇지는 않다. 이때의 오리정은 과거 각 지방 고을이 빈객을 영송하기 위하여 군아(郡衙)에서 5리(里) 정도의 거리에 세운 임시 건물을 일컫고 있다. 조선시대 관찰사가 처음 부임해오면, 고을 수령이 관복(官服)을 입고, 오리정에 나가 땅에 엎드려 영접했다. 충청도관찰사가 쓴 순력 일기는 전회에 소개한 '충청감영일기' 외에 '금영일기'(錦營日記)라는 것이 또 하나 전해지고 있다. 표제에 보이는 '금영'은 충청도감영의 별칭으로, 공주목에 있던 영문(營門)을 의미한다. 이 일기의 저자는 영조-순조 연간에 관직생활을 한 심이지(沈臣+頁之)라는 인물이다. 그는 정조 때인 1780년 충청도관찰사에 부임했다. 그가 쓴 금영일기에 '오리정'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순력(巡歷)은 조선시대 관찰사가 도내의 각 고을을 순찰하던 제도를 말한다. 달리 순행이라고도 불렀다. 관찰사의 순력은 왕명을 대신 실행하는 것과 고을의 풍속과 민생을 살피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물론 수령이 행정을 잘 펼치는가 여부를 살피는 것도 주요 임무의 하나였다. 관찰사의 순력 행차는 위용이 대단했다. 행차는 장교·군관·나장·도사·찰방·심약·검률·반당·노자(奴子) 등 많게는 수백인이 수행했다. 다소 어려운 단어들이 많이 등장했다. 나장은 죄인을 다루는 하급직, 심약은 약재 검수관, 율령직, 반당은 호위병 등을 일컫고 있다. 이쯤되면 지금으로 치면 도청직원 전체가 움직이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관찰사 행차가 있을 경우 각 고을 연도에는 구경꾼들로 북적였다. 관찰사는 감사마교(監司馬轎)라고 불리는 말수레를 타고 움직였고,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둑(纛·대형기의 일종), 취라치(吹螺赤)·나팔·대평소 부대를 앞세웠다. 이밖에 사모갑(紗帽匣)·인장, 유서(諭書)·절월(節鉞) 등을 휴대하고 떠났다. 사모갑은 모자, 유서는 임금이 내린 명령서, 절월은 말 그대로 절(節)과 월(鉞)을 일컫는다. '절'은 손에 드는 작은 수기(手旗) 모양으로 관찰사 권위를
근대기 건축물이자 도유형문화재인 청주 양관이 한국기독교사적으로도 지정됐다. 이에따라 국내 개신교 신자들에게 복음순례 코스의 하나가 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최근 청주시 탑동에 위치한 5동의 양관을 각각 한국기독교사적 제 9회, 9-1호, 902호, 9-3호, 9-4호, 9-5호 등으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일신여중고 안과 그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5동의 건물은 각각 포사이드기념관(제 9호), 로위기념관(제 901호), 던컨기념관(제 9-2호), 밀러기념관(제 9-3호), 펄디기념관(제 9-4호) 등의 별칭을 갖고 있다. 본래 양관은 6동의 건물로 구성돼 있으나 개인 소유로 되어있는 한개 동(솔타우기념관)은 이번 지정에서 제외됐다. 탑동양관은 한옥식이 가미된 청주 최초의 양옥 건물로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1906년부터 1932년 사이에 건립했다. 이중 가장 이른 1호 양관은 민노아(閔老雅, F.S. Miller) 목사와 그 부인에 의해 지난 1906년 탑동 195번지에 건립됐다. 특히 양관은 전통에서 근대로 변모해가는 과도기적 건축양식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건축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청주
조선 왕조는 대략 5백년간 존속됐다. 이 기간 동안 몇 명의 충청도관찰사가 파견됐을까. 금영공안, 공주감영읍지, 공산지, 충청도선생안 등의 사료에 관찰사 명단이 존재한다. 현재 금영공안과 공주감영읍지는 장서각, 충청도 선생안은 공주향교에 보관돼 있다. 충주감영 시절의 사료는 거의 존재하지 않고 있으나 이는 조선왕조실록 등을 통해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살펴본 결과, 조선시대에는 정확히 582명이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했다. 성씨와 본관별로 구분하면 전주이씨 30명, 파평윤씨 24명, 암동김씨 19명, 안동권씨 18명, 한산이씨 15명 등의 순으로 많았다. 이중 유명 인물로는 조선 전기의 경우 하륜, 정인지, 맹사성, 남지, 박팽년, 이세좌, 채수, 반석평, 노수신 등이 있다. 조선후기 인물로는 유근, 이안눌, 유백증, 김육, 박세당, 박중양이 등이 있다.충청도관찰사는 재직 기간중 나름의 공과를 남겼다. 재해기간 중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된 안숭효(安崇孝··-1460)는 진휼사업과 함께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과로로 순직했다. 그러자 세조가 이례적으로 부의를 했다.'졸(卒)한 충청도관찰사 안숭효에게 쌀·콩 아울러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은 왜 지금의 청원 문의에 한 동안 모셔져 있었을까. 본보 '교과서 밖의 충북 역사'는 지난해 12월 19일자 기사에서 이같은 내용을 다룬바 있다. 세종실록은 10년 8월 1일자에서 '문의현에 소장한 태조의 진영과 쇠붙이를 부어 만든 동상 그리고 공신의 영정이 있다'(文義縣太祖眞 文義縣太祖眞及鑄像 功臣影子)라고 썼다. 서울대 노병호 교수가 최근 이와 관련이 있는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지식산업사)을 출간했다. 왕건 동상은 1992년 10월 북한 당국이 고려 태조 왕건의 능인 현릉(개성 소재)을 개축하려 봉분 북쪽을 파던 중 굴삭기 삽에 걸려나온 청동상을 말한다. 138㎝ 크기의 청동상은 나상(裸像)에 통천관(通天冠)을 쓴 모습으로, 처음에는 불상으로 여겨졌으나 이후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으로 최종 확인됐다. 이 책에서 노교수는 △동상이 나체상을 하고 있는 이유 △머리에 통천관이라는 관을 쓴 이유 △조선초 땅에 매몰된 이유 등을 해박한 논리로 설명했다. 그는 전자에 대해 고려사 신종 6년 9월조의 '최충헌이 봉은사에 가서 태조 진전에 (모셔진 태조의 주상에) 제사하고 겉옷과 내의를 바쳤다'는 내용을 들어 본래는 나신이 아니라 옷을 입고
보은 삼년산성(사적 제 235호) 주변에서 5-6세기 무렵의 신라 고분이 1천7백여기나 대량 발견됐다. 이는 그간의 '고분이 존재하고 도굴 흔적이 있다'는 소문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로, 한국 고대사에 대한 일부 수정 필요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재단법인 중원문화재연구원(원장 강경숙)은 24일 오후 보은군청과 고분군 현장에서 '보은 삼년산성 고분군 종합학술조사 보고회'를 가졌다. 연구원측은 지난해 5월부터 이달 하순까지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대야리, 풍취리, 길상리, 평각리 등 삼년산성 주변 지역(총면적 678만㎡)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 활동을 벌여왔다. 그 결과, 삼년산성을 중심으로 한 4개 방향의 산림과 구릉 지역에서 봉토분(봉분을 한 무덤) 168기를 포함한 총 1천762기의 크고 작은 고분이 존재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이날 밝혔다. 보고서는 △모든 고분은 석재를 사용하여 석실(石室)이나 석곽(石槨) 형태로 만들었고 △유물로는 고배(高盃·굽이 달린 잔), 장경호(長頸壺·목이 긴 항아리), 파배(把盃·손잡이가 달린 잔) 등이 수습됐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같은 형태와 유물상을 바탕으로 '고분은 삼국시대 신라인에 의해 조성됐고, 그 시기는 5세기 후반~6세기
충청도관찰사는 오늘날로 치면 충북도지사에 해당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충북과 충남이 나눠져 있지 않은 만큼 관할 면적이 훨씬 넓어 54개 고을을 관리 감독했다. 충청도관찰사는 종2품의 외관직으로, 달리 감사·도백·방백·도선생이라고도 불렀다. 관찰사가 일을 보는 관청은 감영·영문·순영이라고 불렀고, 이들에게는 이른바 직계권이 주어졌다. 직계권은 국왕 외에 다른 부서의 통제나 명령을 받지 않고 상당히 독자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권한을 말한다. 따라서 모든 보고는 국왕 앞으로 했고, 임금 외에 누구도 관찰사에게 명령이나 지시를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관찰사도 임금이 보낸 암행어사에게 비리나 안일한 근무태도가 적발되면 파직 등을 당하곤 했다. 관찰사는 지방장관을 임명하는 것인 만큼 그 절차는 다소 복잡했다. 먼저 관료 인사를 담당하고 있는 이조에서 후보자를 3배수 뽑아 올린다. 임금은 이중 한 명을 낙점, 통보하게 된다. 그러면 임면을 받은 인물은 궁궐에 들어가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올리게 된다. 이를 '사조'라고 불렀다. 전현직 관찰사는 도계에 교귀소(交龜所)라는 곳에서 임무 교대식을 가졌다. 조선시대 관찰사 인장은 그 뚜껑이 공통적으로 거북이 모양을 하고
'초록 행복 푸른 꿈'을 슬로건으로 한 옥천 이원묘목축제가 오는 30일부터 4월 1일까지 사흘간 열린다. 전국 과수묘목의 60-70%를 차지하는 옥천이원묘목은 8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략 1930년대부터 묘목을 전문적으로 생산했다. 1930년대는 일제 억압통치가 정점을 향하던 시기로, 묘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다. 나름의 사연이 있다. 당시 이원면에는 안헌귀(1908-1970)라는 분이 생존해 있었다. 이원리 태생인 그는 한 동안 교편생활을 하다 1939년 귀향, 영농에 종사하게 된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30년이 지난 1964년에 충북도에서 발간한 '흙과 땀'(청구출판사)이라는 농촌 계도지에 싣게 된다. 당시 충북도지사는 후에 농협중앙회장도 역임하는 신명순(申明淳) 씨였다. 그러나 이 책은 오랫동안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을 발굴해낸 사람이 현 옥천군 친환경농축산과장으로 있는 이재하 씨다. 그는 옥천이원묘목이 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는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고 안헌귀 선생의 아들이 소장하고 있던 계도지를 찾아냈다. 이 글에 따르면 옥천 이원에서 묘목 생산을 처음으로 한 인물은 내국인이 아닌 일본인이었다. '이원의 묘목생산은 일인(日人)
진천군의 지명변화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자세히 실려 있다. '본래 고구려의 금물노군, 만노군이었는데 신라가 흑양군으로 고쳤고, 고려가 진주(鎭州)로 고쳤다. 1259년(고려 고종 46)에 위사공신 임연(林衍)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창의현(彰義縣)으로 승격시켰다.'- 영조 때 쓰여진 여지도서(1757)는 이후에 지명 변화에 대해 '임연이 죽자, 다시 진주현으로 하였고, 태종 때 진천현으로 고쳤다. 연산군대 경기도에 이속되었다가, 중종 초에 다시 충청도로 복원되었다'라고 적었다. 인용문의 내용은 지금의 진천이라는 지명이 고려 때 지명이 진주(鎭州에서 비롯됨 것임을 알게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일부 지역 사학자는 '진천의 호족이 왕건에 대항한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진(鎭)'자가 유래하였다'라고 밝혔다. 이 주장의 대칭점에 위치하는 것이 청주의 '청'(淸) 자이다. 방금 전에 '왕건에 대항한 반란군'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이때의 반란군은 분명히 청주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당시 청주는 왕건이 아닌 궁예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궁예는 '철원에 성을 쌓는데 청주사람 1천여명을 데려갔다'고 사료는 적고 있다. 일설에는 궁예가 유년시절에
공주 석장리 구석기박물관은 '북경원인 한국에 오다' 특별전을 오는 4월 2일부터 일년간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북경 원인(原人)과 이빨이 긴 고대 호랑이인 검치호 화석 등 주구점(周口店) 유적에서 발견된 75점의 구석기 유물이 전시될 예정이다. 인류진화 이야기 안에는 호모 에렉투스(직립인간이라는 쯧)인 북경원인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북경 주구점 근처에서는 과거 '용골(龍骨)'이라 불리는 각종 동물의 뼈가 자주 발견됐고, 이곳 주민들은 이를 만병통치약으로 판매하기도 했다. 1929년 중국 고고학자 裵文中은 이같은 소문을 바탕으로 북경 서남쪽에 위치한 주구점에서 사람 두개골 화석, 사슴, 호랑이, 코뿔소 등의 동물뼈를 다량 발굴했다. 이와 함께 6m 높이의 잿더미(灰) 층과 불탄 뼈도 상당수 발굴했다.이 두개골 화석이 우리가 교과서에서 많이 접해왔던 북경원인(Peking Man)으로 50만년 전의 호모 에렉투스로 판정받았다. 이 발견으로 △호모 에렉투스가 도대체 원숭이인가 아니면 사람인가의 논쟁이 해결됐고 △이로 인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호모 사피엔스 사이에 호모 에렉투스가 존재했으며 △당시 50만년전 사람들은 불을 사용·저
조선시대에는 정식 행정지명 외에 별칭도 많이 사용했다. 경상도는 영남(嶺南), 전라도는 호남(湖南), 충청도는 호서(湖西)라고도 불렀다. 딱딱한 행정 명칭에 비해 한층 시적이고 정감있는 표현이다. 영남할 때의 '영'이 어느 고개를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어문학자들 사이에 견해차가 존재한다. 혹자는 우리고장 단양의 죽령, 또 다른 이는 영동의 추풍령을 일컫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는 죽령설이 다소 우세한 편이다. '죽령 남쪽'이면 경상도를 모두 아우를 수 있다. 반면 추풍령은 경상도의 허리 쯤에 위치하기 때문에 경상도 지역을 모두 아우를 수 없다. 호남에 대해서는 어문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오랜 역사를 지닌 김제 벽골제로 보고 있다. 이 경우 호남은 '벽골제 남쪽 지방' 정도가 된다. 우리고장 충청도의 별칭인 호서의 '호'에 대해서는 금강, 의림지, 미호천 등 대략 3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다. 금강의 또 다른 명칭이 호강(湖江)이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호서를 금강의 서쪽으로 보면 지금의 충북지역은 호서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제천 의림지 설도 약점을 지니고 있다. 충청도 모두를 아우르기에는 위도가 높고, 또 의림지 서쪽은 경기도
전회에 우리고장 영동을 소개할 때 윤상(尹祥·1373∼1455)이라는 인물의 표현을 인용한 바 있다. '산과 물이 맑고 기이하다. 윤상(尹祥)이 금유(琴柔)에게 보낸 글에, "영동은 산수(山水)가 맑고 기이해서 시(詩) 짓는데 도움을 받을 만한 것이 진실로 많다" 했다.'- 윤상은 경상도 예천군의 향리인 윤선(尹善)의 아들로 태어나서 과거를 통해 양반 신분이 된 인물다. 과거 합격자 명단을 적어 놓은 방목(榜目)을 보면 그는 태조 때 진사와 생원시에 합격한 후 문과에 급제했다. 조선시대에는 형식상 서얼을 제외하고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 준비에는 적지 않은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하고 또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평민(양인)이 합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고려 때 향리는 한 지역의 지배계급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향리(아전)는 수령의 보좌역으로 중인에 해당했다. 윤선이 이런 환경에서 오늘날 행정고시에 해당하는 문과에 합격했다는 것은 남다른 노력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사료에 이와 관련된 표현이 적지 않이 등장한다. '공은 자질이 아름답고 총명이 뛰어나게 태어났다. 향리로서 고을 일을 맡아 볼 적에 고된 사무를 보면
1413년(태종 13)은 한국 지명 변천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때 지명에 위계성을 부여하는 계수관 제도가 처음 도입됐다. 그 결과, 충청도 4개 대읍인 청주, 충주, 공주, 홍주 등은 '州'(주) 자를 계속 유지하게 됐다. 반면 소읍이라고 할 수 이는 괴주는 괴산, 옥주는 옥천, 제주는 제천, 진주는 진천으로 각각 지명이 변했다. 이 과정에서 괴산같이 산이 많은 고을에는 '山' 자가, 물이 비교적 풍부한 곳에는 '川' 자가 붙었다. 충북 최남단인 영동(永同)의 지명에는 이같은 사례가 적용되지 않았다. 영동은 신라 경덕왕 때 길동군에서 영동군으로 변한 후 그 지명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본래 신라의 길동군(吉同郡)인데,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 을미에 계주자사(稽州刺史)로 승격하였다가, 목종 8년 을사에 자사를 폐하였고, 현종 9년에 상주(尙州) 임내에 붙였으며, 명종 임진 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인용한 문장은 영동이 한 때는 계주(稽州)라는 지명을 지녔었고, 또 경상도 상주에 속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 현종 9년은 대략 1018년이 된다. 따라서 영동은 비교적 오랜 세월 동안 경상도에
스칸디나비아의 북유럽인들은 일광욕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름이 짧은 탓에 해수욕장이 아닌, 풀밭에서도 신체를 거리낌없이 노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고인류학자들은 해외토픽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이같은 모습에서도 현생인류가 다양한 피부색을 지니게 된 이유를 찾고 있다. 의학적으로 피부는 신체 가장 바깥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0.1㎜ 두께의 표피 색깔을 의미한다. 이 세포에 어떤 멜라닌 색소가 들어있는가에 따라 피부색이 결정된다. 멜라닌은 유멜라닌(고동색 또는 흑색)과 피오멜라닌(적색 또는 황색) 등 두 종류가 있다. 전자는 어두운 색, 후자는 밝은 색을 발현하게 된다. 이때 멜라닌 색소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것이 멜라노코틴이라고 불리는 수용체이다. 이 수용체의 염기서열에는 다양한 변이가 존재, 같은 인종 안에서도 다양한 농도의 피부색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지금의 현상'으로, 인류과 동물이 해당 유전적 인자를 획득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경로를 거쳤다. 고고인류학자들은 인류과 얼굴은 △처음에는 창백했고 △이후 검어졌으며 △다시 아프리카에서 지구 북반구로 향하는 과정에서 밝은 색을 띄게 됐다는데 어느정도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아프리카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