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4년, 세종대왕은 청원 초정약수를 찾을 때 혈육으로 세자(후에 문종)와 영흥대군(永膺大君·후에 영응대군) 이염을 대동했다. 문종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영흥대군은 지명도가 낮은 편이다. 때문에 세종대왕이 여러 명의 왕자 중 영흥대군을 왜 대동했는지는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당시 영흥대군은 10살밖에 되지 않았다. 세종대왕의 정비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는 세종과 사이에 40살 늦은 나이에 아들 하나를 얻었다. 그가 바로 영흥대군으로 여덟번째 아들이었다. 과거 다산이 대중화됐던 시절에는 막내 아들이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때문에 막내아들은 늘 '버릇없음'의 대명사가 되고는 했다. 영흥대군도 바로 그런 경우로, 세종의 사랑을 한껏 받았다. 세종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영흥대군을 아홉살때부터 사냥터에 데려가기도 했다. '여러 대군들도 모두 이리저리 달리면서 활을 쏘았다. 이때 영흥 대군 이염이 나이 바야흐로 아홉 살인데, 임금이 그를 대단히 사랑하여 만약 쫓기다 지친 짐승이 엎드려 있으면, 가던 연(輦)을 멈추게 하고서 사람을 시켜 염의 말을 그리로 몰게 하여 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막내아들 영흥대군을 위해 날다람쥐를 가져
충주호 쏘가리는 낮동안에는 수심이 깊은 곳에 머물다가 야간에는 얕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메기는 쏘가리와 반대로 낮동안에 수심이 얕은 호안에 주로 접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강명미 씨 등이 이끄는 부경대학교 지구환경시스템사업단이 얼마전 충주호 쏘가리와 메기의 이동 범위 등을 학문적으로 연구했다. 최근 국내 자연산 담수어들은 하천의 오염과 변형으로 서식지가 파괴되고 수십년간의 남획으로 인하여 서식지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이에 대처하려면 내륙 수생식물에 대한 생태학적 연구가 필수적으로, 이번 연구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실시됐다. 조사방법은 먼저 충주호산 쏘가리와 메기를 포획해 실험어로 선정, 이들 어류에 외과적 수술을 하는 방법으로 음향표지를 복강에 삽입한 후 방류했다. 그리고 이른바 DGPS수신기와 측량용측심기 등으로 구성된 해저지형측정시스템으로 이들 실험어의 이동 행태와 속도 등을 측정했다. 이밖에 청풍대교를 기준으로 '상류'와 '하류'로 구분했다. 그 결과, 실험대상이 된 쏘가리 개체군 모두는 일출후~일몰까지는 하류에 주로 체류하다가 야간에는 수심이 상대적으로 낮은 청풍대교 부근으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때 주간의 평균 유영수심
국보 제 6호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일명 중앙탑)이 최대 2도 정도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탑 손상이 전반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상륜부는 그 정도가 매우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충주시는 최근 장준식, 김경표 충북도문화재위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탑평리 칠층석탑에 대한 3D(입체) 스캔용역과 관련된 자문회의를 가졌다. 시는 본보가 지난 2012년 8월 13일자에서 '충주 중앙탑 원형 실측도 존재한다'는 내용을 보도한 것을 계기로, 이의 해체복원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3D스캔 작업을 지난 7월부터 수행해 왔다. 당시 본보는 '일제가 충주 중앙탑을 지난 1917년 엉터리로 해체·조립했으나 이를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는 실측도가 국가기록원에 존재한다'는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이날 자문회의에서 공개된 용역업체 보고서에 따르면 충주 중앙탑은 단면도상 서쪽으로 2도, 그리고 남쪽으로는 1도 정도 기울어진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그림참조) 그러나 이같은 기울어짐이 지난 1917년 해체·복원을 할 때부터 존재한 것인지, 아니면 그 이후 지각 변동에 의해 발생한 것인지는 여부는 이날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기울기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지 여부도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을 당하자 복주(지금의 경북 안동)로 몽진을 갔다가 귀로에 청주에 비교적 오랫동안 머물게 된다. 이때가 공민왕 재위 11년인 1361년이다. 임금이 궁궐 안에 있으면 먼지를 뒤집어 쓸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피난을 위해 궁궐을 나서면 먼지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다. 바로 '몽진'(蒙塵)은 먼지를 뒤집어 썼다는 뜻으로, 그 자체로 난세를 의미하고 있다. 공민왕은 임시수도인 청주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자 과거시험을 실시, 그 합격자 명단을 취경루(지금의 망선루)에 붙이도록 했다. 그리고 지금의 청주 무심천 변에 있는 '공북루'(拱北樓)라는 큰 누각에 올라 호종한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했다. 이날 시짓기에 참여한 대신은 모두 26명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종 때 사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당시 공북루에는 총 28편의 시편액이 걸려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그날 공북루에서 지은 26편의 시 외에 1편은 그전부터 걸려 있었고, 또 다른 1편은 개성에서 보내온 백문보(白文寶?·∼1374)시였다. 즉 '26+1+1'인 셈이다. 1444년 봄,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찾았을 때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방문중, 신숙주, 박팽년, 류
충주시 신니면 숭선사지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것중 크기가 가장 크고, 또 완형인 형태의 고려시대 금동 풍탁(風鐸)이 발굴됐다. 이와 함께 고려시대 토목 기술력을 규명할 수 있는 대규모 암거형 배수로도 추가로 발견됐다. 충청대학박물관(관장 장준식)은 지난 6월부터 사적 445호인 숭선사지에 대한 발굴조사(제 6차) 작업을 벌여 이같은 발굴성과를 거뒀다고 7일 밝혔다. 금당이 있던 사역(寺域) 중심지 서쪽 배수로 바닥면에서 풍탁설(舌)과 함께 발굴된 이번 금동제 풍탁은 전체 높이 31.9㎝, 너비는 15.4㎝, 두께 1.1㎝, 무게 5,416g 등의 제원을 지니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발굴된 것중 크기가 가장 큰 것으로, 지금까지 발굴됐던 감은사지 신라 청동풍탁 27cm, 거창 천덕사지 고려풍탁 22cm보다 훨씬 크다. 장 관장은 "보존상태까지 양호해 고려시대 주조기술과 금속공예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숭선사지의 지난 1~3차 발굴조사에서는 실외가 아닌, 3㎝ 크기의 실내용 금동풍탁(사진)도 발굴된 바 있다. 또 이번에 지난 발굴과 마찬가지로 금동제 연봉장식 와정(못의 일종)도 또 다시 수습됐다. 따라서 고려 광종이 재위 5년
'진품인가, 위작인가. 진품이라면 저자는 누구인가.' 훈민정음 창제(1443년)보다 8년 앞서, 한글의 제자(製字) 원리를 실험한 "圓覺禪宗釋譜"(원각선종석보)라는 불교 고서가 현존하고 있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됐다. 만약 이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일대 획을 긋는 사건으로,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역사는 새롭게 쓰여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보은군과 보은문화원은 7일 오후 2시 보은문화예술회관에서 조선 세종태학원 총재인 강상원 박사와 정성욱 시인 등을 초정, '신미대사와 훈민정음 창제 학술 강연회'를 가질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본보는 강 박사의 발표문을 미리 입수, 그 내용을 살펴봤다. 불교계를 대변하는 그는 발표문에서 '원각선종석보는 훈민정음보다 8년 앞서 한글의 글자 원리를 실험한 불교 고서'라는 점을 가장 강조했다. 이 설은 강박사가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기는 하나 수년 전부터 국내 불교계 일부가 주장하는 내용이다. 노태조(대전보건대) 교수는 지난 2003년의 '원각선종석보의 찬성 경위'(불교문화연구 제2집) 논문에서 '해인사 지족암의 일타스님(2000년 열반)이 소장해 오던 것을 려증동 교수를 통해 공개하게 됐다'고 서술한 바 있
1444년 2월 28일.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방문하기 위애 한양 도성을 떠날 때 조정 대신중 누구를 대동했는지 당일 기록에는 분명히 나와있지 않다. 세종실록은 그날 기사를 '임금과 왕비가 청주 초수리에 거둥하니, 세자가 임금을 모시고 따라갔다'(上及王妃幸淸州椒水里 世子隨駕)라고만 적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초정약수에 1차(봄철)로 머물 때인 1444년의 3~5월 동안의 세종실록을 살펴보면 우의정 신개(申槪), 예조판서 김종서(金宗瑞), 판중추원사 성달생(成達生), 병조판서 정연(鄭淵), 영흥대군 이염(李琰), 도승지 이승손(李承孫) 등 6명의 대신과 1명의 대군 이름이 등장한다. 이중 영흥대군 이염은 세종의 8번째 아들로, 문종의 동생이 된다. 세종실록에 등장하는 인물 외에 세종을 호종(扈從), 즉 호위하며 뒤따라간 대신들은 더 있었다. 개인문집에 △초수리 △호종 △당시 풍경묘사 등의 내용이 등장하면 세종대왕을 호종한 신하로 봐도 크게 틀리지 않다. 신숙주(申叔舟·1417~1475)가 그런 예에 해당하고 있다. 그가 남긴 문집으로 성종의 특명에 의해 편찬된 '보한재집'(保閑齋集)이 있다. 문집에는 '扈從淸州 次醴泉懸板 三首'(호종청주 차예천현판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개천절 노래의 작사자인 위당 정인보(鄭寅普·1893~1950·사진) 선생의 의관장(衣冠葬·초혼묘의 일종) 충주 가금면에 위치하고 있으나, 이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으면서 교훈의 공간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그나마 남아 있는 묘소안내 표지판도 도로확장 과정에서 사라져, 올 위당의 묘소는 쓸쓸한 개천절을 맞고 있다. 역사학자이자 교육자였던 위당은 6·25동란 중인 1950년 7월 20일 북으로 강제로 끌려가던 중 9월 7일 미군 폭격으로 황해도 서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의 육신은 독립운동가 현상윤, 송호성, 박열 등과 함께 평양 인근의 '재북인사묘'에 안장돼 있다. 이에 남한에 남아 있는 위당의 핏줄들은 그가 생전에 입었던 두루마기를 부인 조씨묘와 합장하는 방법으로 몇해전 충주 가금면 장천리 1081-1 선산에 의관장을 조성했다. 초혼묘 상석에는 음각자로 '담(치자나무 담)園公 太皇帝 三十년 癸巳 五月 六日生 庚寅 六·二五 動亂中 七月 二十日 拉北 號爲堂 延禧專門敎受 國學大學長'이라고 쓰여 있다
조선시대 초수리 약수(초정약수)는 독특한 물맛 때문인지 뭇 문인들이 많이 찾았고, 그 느낌을 시로 남겼다. 사료에 등장하는 인물을 언뜻 적어도 신숙주, 서거정, 이승소, 방문중, 하연, 박팽년, 안평대군 등이 있다. 이들 모두가 초정약수를 직접 방문했는지, 아니면 소문만 듣고 시를 썼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위에 열거한 인물 모두는 세종연간에 생존했다. 따라서 세종과 함께 초정약수를 찾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안평대군 등은 사료를 통해 직접 확인되고 있다. 열거한 인물 중 방문중(房文中)은 좀 특이한 인생 궤적을 지니고 있다. 그는 태종 때 과거에 급제했고 본관이 '남양'(지금의 수원)이라는 점이 알려져 있을뿐 나머지 관직은 거의 기록돼 있지 않았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곧은 성격에 패기가 만만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실록에 나타났다. 고대 중국에는 이른바 '일취구녀제'(一娶九女制)가 존재했다. 황제는 정비인 왕비를 포함해 9명을 후궁을 거느닐 수 있다는 뜻이다.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도 이 제도를 내심 크게 반겼다는 증거가 사료에 속속 존재하고 있다. 태종은 공식적으로 9명의 후궁을 둔 것으로 전해지나, 일부 사료는 17명까지 기록
고 신동문(辛東門·1928~1993·사진) 시인의 절필은 정치적 필화사건과는 무관한, '스노비즘'(snobbism)에 대한 반발 의식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스노비즘은 고상한 체하는 속물근성 또는 출신이나 학식을 공개적으로 자랑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 영국작가 새커리 '스노브 독본'이라는 소설에서 유래했다. 제 1회 신동문 문학제가 사단법인 딩아돌아문예원(이사장 박영수) 주최로 지난 26일 청주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다. 이날 문학제에서는 대상 백민정(전남여상) 등 입상자 시상과 함께 이화여대 유종호 명예교수가 '신동문 시세계'를 주제로 특강을 해 주목을 받았다. 지금까지 고 신 시인의 단양 귀농과 관련해서는 "필화사건으로 인한 후유증이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이 있어왔다. 실제 신 시인은 △경향신문 독자투고건(1964년) △창작과 비평에 리영희의 글 게재건(1975년) △신동엽 유고시집건(〃) 등으로 인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심문을 받은 바 있다.(표 참조) 그러나 유 교수는 "신 시인의 절필에 대해서는 외압설 등 이런저런 얘기가 돌고 있으나 가장 확실한 경위는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며 "주된 이유는 귀농 의지였다"고 밝혔다. 신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道岩面)은 지난 2007년 행정지명을 '대관령면'으로 개명하면서 대관령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일거에 가져간 바 있다. 본래 대관령은 강릉시 위치에서 볼 때 '동해쪽으로 넘어오는 큰 관문'이라는 뜻을 지닌 지명이었으나 도암면이 선수를 치면서 강릉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후 대관령면은 백두대간 대관령이 지니고 있는 설원, 옛길, 고랭지, 목축관광 등의 이미지를 독식하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구 도암면은 전통시대 때는 강릉군에 속했었다. 때문에 지난 2007년의 개명은 일종의 지명 쿠데타였다. 강원도 영월군 서면 선암마을에는 한반도 모습을 닮은 지형이 위치하고 있다. 서면을 지난 2009년 지명변경을 통해 이의 홍보를 극대화하기로 하고 면이름을 '한반도면'으로 바꿨다. 이처럼 지명변경을 통해 자기 지역을 홍보하려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급증하고 있다. 도내에서도 지난 2005년 상모면이 '수안보면'으로 개명한 것을 시작으로 △보은 내속리면→속리산면(2000년) △〃 외속리면→장안면(2007년) △〃 회북면→회인면(2007년) △충주 이류면→대소원면(2012년)으로 각각 개명했다.(표 참조) 그 결과, △'온천의 이미지가 살아났다'(수안보면)
장자 추수편에는 상상속의 새인 봉황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워낙 고결한 새이다 보니 함부로 먹지 않고 아무 곳이나 앉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릇 원추라는 봉황새는 남해를 출발하여 북해로 날아갈 적에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약수가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夫원추 發於南海而飛於北海 非梧桐不止 非練實不食 非醴泉不飮)- 인용문중 '예천'(醴泉)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예천은 감천(甘泉), 즉 단맛이 솟는 샘이라는 뜻으로 태평성대에만 상서로운 기운이 솟구친는다는 전설이 있다. 이를 인용한 중국고전 예기는 '하늘에서는 단 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예천이 솟아나는구나'(天降甘露 地出醴泉)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고려의 대문장가인 이규보도 비슷한 분위기를 시를 남겼다. '아들이 부모에게 효도해도 하늘이 모른다면 / 어찌하여 예천이나 지초가 땅에서 나겠는가 / 백가와 천사를 모두 궁구해야 하지만 / 효경을 먼저 읽어 깊은 뜻 터득하여라.'- 효도로 가득한 세상이 되면 현세가 곧 '예천의 땅', 즉 낙원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호학군주로 다방면의 학자적인 경지에 올랐던 세종대왕이 '예천'의 의미를 모를리 없다. 그는 우의
'가금면대 금가면.' 충주지역의 두 면은 이웃하게 위치하면서 면이름이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최근까지 가금면의 우편물이 금가면으로, 금가면의 우편물이 가금면으로 배달되는 해프닝이 종종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금면이 '중앙탑면'으로의 개명이 확실시 되면서 이같은 해프닝은 곧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면 외에도 충주지역에는 '유난히 이상한 면이름'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주위에서는 이같은 유형의 면이름으로 금가면 외에 살미면, 소태면, 동량면, 산척면, 신니면 등을 꼽고 있다.(표 참조) 이들 면이름은 △금가면에서는 집을 잘 지어도 금이 간다(금가면) △'살' 자가 한자 '殺'을 연상시킨다(살미면) △매우 쓰거나 짠 음식을 연상시킨다(소태면)라는 소리와 함께 종종 주위의 놀림 대상이 돼 왔다. 이밖에 △'동냥'으로도 발음되면서 '거지'를 연상시킨다(동량면) △'산적'과 발음이 비슷하다(산척면) △'신니' 혹은 '시니'로 불리는 등 발음이 까다롭다(신니면) 등의 소리를 듣는 면도 있었다. 나아가 이들 6개 면에는 "일제가 작명을 하다보니 그 모양이 됐다"라는 자조섞인 말이 따라 다녔고, 이는 지역의 이미지는 물론 자존심을 건드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세종대왕이 탄 어가는 한양도성을 출발한지 닷새만인 1444년 3월 2일 청주목 초수리(초정약수)에 도착했다. 이때 신하들중 누가 세종대왕의 어가를 호종, 즉 뒤따랐는지 실록에는 명확히 기록돼 있지 않다. 이보다는 박팽년(朴彭年·1417∼1456)의 유고문집인 '박선생유고'에 여럿의 인명이 등장한다. 유고문집은 '世宗幸椒井。時河公演,李公塏,申公叔舟,崔公恒,黃公守身,李公思哲及安平大君等竝扈駕'이라고 기술했다. 해석하면 '세종이 초정에 거둥했다. 이때 하인, 이개, 신숙주, 최항, 황수신, 이사철 및 안평대군 등이 함께 어가를 뒤따랐다' 정도가 된다. 그러나 박선생유고에 빠진 인물이 있다. 바로 당시 우의정 신개(申槪·1374∼1446)이다. 그는 태조 이성계가 실록을 몰래(?) 보자고 할 때 그 부당함을 강력히 주장할 정도로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 시대의 임금과 신하는 그 시대의 역사를 숨겨서 뒷세상에 전하였으므로, 호령(號令)과 언어·행동의 즈음에 이로 인하여 경계로 삼아 감히 그릇된 짓을 하지 못하였으니, 그 사관(史官)을 설치한 뜻이 깊었던 것입니다.'- 이성계는 사관이 자신을 어떻게 평했는지 무척 궁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번 말고 그 이전에
청원군 강내면 지명의 변경을 둘러싸고 벌어진 주민들 사이의 갈등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번 갈등의 발단은 지난 2010년 상반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보는 당시 한국교원대부속고 김순배 교사의 박사학위 논문인 '한국 지명의 문화정치적 변천에 관한 연구'를 인용, "미호천의 어원이 수계 한 지역의 지명인 '미곶'(彌串)에서 유래했다"고 2010년 5월 11일자로 처음 보도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년)에 처음 보이는 '미곶'은 이후 '彌串津'(미곶진·1872년 연기현 지방지도), '美九里'(미구리·1896년 구한말한반도지형도)를 거쳐 1910년대부터 지금의 '美湖'(미호)로 불려지게 됐다고 논문은 밝혔다.(표·대동여지도 참조) 본보가 이를 '교과서 밖의 충북역사'라는 코너를 통해 지난 2012년 7월 4일자와 같은 연월 6일자로 연속 보도하면서 '강내면'을 '미호면'으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현재 강내면민들 사이에는 ①면이름을 '미호면'으로 바꾸자는 그룹 ②지금의 '강내면' 이름을 고수하자는 그룹 ③면이름을 '강내면'도 '미호면'도 아닌 아예 제 3의 이름으로 바꾸자는 그룹 등이 존재하고 있다. ①번 집단(면명칭변경 추진위원회)
지명 변경을 둘러싼 갈등이 도내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대략 지명 변경을 추진하는 쪽은 "지역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반대하는 진영은 "역사성"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도내 지명갈등의 현상황과 그에 따른 득실 등을 사례별로 살펴본다. 글 싣는 순서는 ①가금면 대 중앙탑면, ②강내면 대 미호면, ③충주지역의 이상한 면이름들, ④다른 지역 사례와 득실 등이다. 충주시 가금면 명칭변경추진위원회는 면이름을 '중앙탑면'으로 바꾸기로 하고, 그에 따른 찬반의견 조사를 지난 13일까지 실시했다. 회수된 설문지는 오는 30일 가금면 복지회관에서 개봉돼, 설문 참여자의 2/3가 개명에 찬성을 하면 면이름이 1백년만에 '중앙탑면'으로 변경된다. 가금면사무소 한 공무원은 "충주시 조례는 '주민 50% 이상이 여론조사에 참여하고 그중 2/3가 찬성해야 면이름을 변경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며 "설문지를 회수한 결과 68.5%의 비교적 높은 참여율을 나타냈다"고 밝혔다. 이처럼 가금면 주민들이 수년 전부터 면이름의 변경을 추진하고 나선 것은 △이웃 '금가면'과 너무 혼동되고 △농작물 브랜드에 '중앙탑' 명칭이 많이 사용된 점 등이 크게 작용했다. 도민들 사이에서
◇전화기 처음 본 사람은 유길준 오픈 국어사전에는 이미 '전화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텔레포니쿠스(Homo telephonicus)라는 낱말이 올라와 있다. 사전은 그 설명으로 '휴대전화가 없으면 불안을 느낄 정도로 항상 휴대전화를 지니고 다녀야 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전화에 빗대어 표현한 용어'라고 적었다. 우리나라에서 전화의 존재를 처음 목격한 사람은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다. 그는 서구문물을 견학하고 적은 '서유견문'에서 전화기를 '遠語機'(원어기)라고 표현했다. '먼곳에 있는 사람과 말을 할 수 있는 기계'라는 뜻으로, 이때가 1885년이다. 전화기는 1893년 국내에 전화기가 처음 들어왔으나 실제 통화는 1898년 궁중에서 이뤄진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에는 이를 'telephone'(전화기)의 한자음을 따서 '덕율풍'(德津風) '덕진풍' 또는 '전어기'(傳語機)라고 불렀다. '津'은 '율' 또는 '진'으로도 읽을 수 있다. 황성신문은 '전어기'로 표현했다. . '芙蘭克麟이 風箏 造하야 電氣를 發明한 後에 電氣線과 傳語機가 生하야 萬里信息을 一瞬通達하며…'- 인용문 중 '芙蘭克麟'(부란극린)은 피뢰침을 발명한 미국 프랭크린, '風箏'(풍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의 관찰력은 초수리 약수(초정약수)의 위치성, 우물의 규모, 솟아오르는 모양 등 외형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았다. 조선후기의 호기심 많은 지식인답데 그의 관찰력은 두루 넓었다. 이번에는 그의 오감 기능 중 맛을 보는 혀의 기능이 작동했다. 그는 처음 맛본 초수리 약수의 느낌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試삽(睡에서 目대신 口)之。味微辛而澁。俄而舌尖乍辣。又如點礬。人言如露酒淡者。非誇也。或傳此泉有兩派。其味一淡一辣。同出一井。而味不相和。亦一異云。'- '시험삼아 초정약수를 맛봤다. 맛이 약간 매우면서 떫었는데 혀에서 갑작스런 매운 맛이 솟아올랐다. 동시에 그것은 명반과도 같은 맛이었다. 사람들이 露酒의 맑음같다고 말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혹간에 샘에는 2개의 수맥이 있어 그 맛은 하나는 담백하고 하나는 맵다고 전해지고 있다. (물은) 한 우물에서 동시에 나오나 그 맛은 서로 섞여지지 않아 역시 한결같이 다르다라고 전해진다.'(필자 번역) 초수리 약수의 물맛을 기록한 이규경의 표현을 잘 살펴보면 이중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 '辛'(매운 맛)은 '乍辣'(순간적인 매운 맛)에, 澁(떫은 맛)은 點礬(명반)
45.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의 동아시아 침략구상 ■ 시바료타로의 가와카미 찬가 시바료타로는 러일전쟁 승리로 일본이 강대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해서 자부심이 대단하다. 러일전쟁을 이끈 육해군 지휘관과 교묘한 책략을 시도한 외교관을 누구보다 최고로 평가한다. 한갓 기병 여단장과 해군 참모에 지나지 않는 아키야마 형제를 영웅으로 부각시켜 역사를 왜곡시키는 독선도 그런 시각에서 나왔다. 그러나 일본군을 혁신시키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법을 가르친 공로자는 가와카미 소로쿠였다. 시바료타로도 가와카미에 관해서는 찬가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일본은 나라가 너무나 작았지만 그래도 청국과의 전쟁에 이기려고 했다. 이기려면 이기기 위한 조직과 방법이 있어야 했을 것이었다. 프로이센주의였다. 이것은 프로이센의 육군 참모 메켈 소령이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더 많이 알기 위해 많은 수재를 독일에 파견했다. 그 중에서 최대의 인물은 그 당시 육군의 보배로 불리던 가와카미 소로쿠였다." "유럽인들은 '프로이센에서는 국가가 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군대가 국가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냉소했다. 가와카미 소로쿠는 뼛속까지 프로이센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은 오랫동안 저술활동에만 전념하였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는 기록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역저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그의 교유 관계가 일부 나타난다. 그는 '사소절분편변증설'(士小節分編辨證說)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썼다. 그의 저서에 공통적으로 사용된 '변증'이라는 낱말은 '직관 또는 경험에 의하지 않고 개념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대상을 연구한다'는 뜻이다. '나의 조부 형암(炯菴, 이덕무 지칭)선생이 사소절 3권을 지었다. 그러나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로 전해왔는데 도성에 사는 최도사(崔都事) 성환이 편을 갈라 1권으로 하여 주자(鑄字)로 간행했다. (…) 1853년 가을에 서울에 있는 최한기가 내방하여 간행했음을 전하고 1854년 봄에 2질을 보내오니 옛 정분의 두터움을 알겠으며 그 감사함을 형용할 수 없다.' 인용문에 그가 교유한 최한기와 최성환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최한기(崔漢綺, 1803~1877)는 중국과 서양서적을 광범하게 섭렵한 후 개국통상론을 주장할 만큼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최성환(崔·煥, ?~?)은 지도와 지리학에 해박하여 김정호와도 교분을 가졌으며, 이규경 역시 김정호의 뛰어난 능
선사시대 벼가 한반도에서 집약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정치적인 동기'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나아가 청동기시대 지석묘(고인돌)도 논확장에 따른 경관변화의 인식 표현물일 수 있다는 주장도 함께 나왔다.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김범철(사진) 교수에 따르면 우리민족은 신석기시대부터 농경생활을 시작했고, 청동기시대에는 벼, 보리, 콩, 조, 기장 등 이른바 '오곡'을 재배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 오곡 중 벼는 청동기시대부터 유독 집약재배되기 시작했고, 소비량이 다소 줄기는 했지만 그 식재료인 쌀은 현대도 주식(主食)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습지식물인 벼는 안정적인 용수를 위해 관개시설을 갖고 있어야 하고, 또 생육기간이 길어 노동력과 시간이 많이 투자되는 등 성격이 까다로운 작물이다. 김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쌀이 집약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배경으로 '정치적인 이유'를 꼽았다. 청동기시대들어 이른바 '복합사회'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동기 전기의 권력자들은 대중을 능수능란하게 통제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권력자들은 '노동연회(잔치)와 같은 호혜적인 기제가 대중을 통제하고 지지를 받는데 매우 유용하다'라는
조선후기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있다. 그는 조선 제 2대 임금인 정종의 직계손이나 서자출신이었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했다. 때문에 그의 가문에는 집 안에서 대대로 전해져오는 학문인 '가학'(家學)이 발달했다. 이런 가풍은 그의 손자인 이규경(李圭景, 1788∼1863)에게로도 이어졌다. 그 역시 '한미한 양반가=가학'의 등식을 뛰어넘지 못하고 비주류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조부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국내는 물론 세계사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 태어난 것이 조선후기 최대 백과사전의 하나로 불리는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이다. 제목중 '오주'(五洲)는 '5대양 6대주' 할 때의 그런 오주로, 그의 관심이 국내는 물론 세계로 뻗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60권 60책의 방대한 이 백과사전은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소장하고 있었으나 6.25 때 소실됐다. 다행히 그 전에 필사해 놓은 것이 있어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이규경은 이 백과사전에서 청주목 초수리(초정)를 방문하는 과정과 그 당시 느낀 소감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해 놨다. 이 책은 워낙 방대하기 때문
중국 송나라는 文과 武중 文을 더 높이 샀다. 그러다 보니 국방력이 약한 편이었다. 고려도 송나라를 본받아 文을 숭상하고 武를 하대하는 이른바 숭문언무(崇文偃武) 정책을 실시했다. 고려 강참찬은 귀주대첩의 총사령관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무관이 아닌 문관 출신이다. 고려 문신들은 평소에는 붓을 잡고 있다가 유사시가 되면 전쟁을 지휘했다. 이는 나중에 무신란의 주요 원인이 됐다. 반면 조선은 개국한지 얼마 안 되 무과를 실시했다. 태조2년(1393)의 일로, 이때 장원 급제를 한 인물이 성달생(成達生, 1376∼1444)이다. 무과 장원 제 1호인 셈이다. 실록이 이 부분을 자세히 기술해 놨다. '임오년에 나라에서 처음으로 무과를 설치하였는데, 달생이 제1등으로 뽑혀 대호군에 임명되고, 나가서 흥덕진병마사가 되었다. 무자년에 왜구들이 갑자기 근경에 침범하자 달생이 급히 이를 추격하매 왜구가 곧 달아났다. 태종이 어구마(御廐馬)를 하사하고 잔치를 열어서 위로하였다.'- 인용문의 '어구마'는 임금을 위해 궁궐 안에서 기르던 말을 일컫는다. 성달생은 그 어구마를 무과 수석의 선물로 받았다. 그는 이후 주로 궁궐의 경호업무를 맡았다. 그러면서 간혹 '경호실수'도
청주대 김태영(건축학과) 교수가 얼마전 발표한 논문이 청주의 도심 생태학을 심도 있으면서 획기적으로 분석한 것이어서, 학계는 물론 일반의 주목을 받고 있다. 김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청주 성안길의 업종변화를 통해 본 도심기능 활성화 모색' 논문을 대한건축학회지 제 33권 논문집(1호)에 발표했다. 쇠퇴기에 접어든 구도심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지속, 소멸, 재탄생하는 업종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김교수는 이같은 흐름을 분석하기 위해 청주의 대표적인 구도심인 성안길(남문로~북문로 6백m 구간)을 연구공간으로 설정하고 성안길 양쪽면에 입지한 업종을 1968년, 1991년, 2013년 등 3개의 시간적인 마디로 나눠 살펴봤다. 조사는 청주시 상공연감을 통해 지번을 확보한 후, 이를 토대로 성안길 터줏대감 인터뷰, 사진 대조, 현장을 방문하는 방법 등이 사용됐다. 그 결과, 1968년 성안길에 면한 건물은 총 83동 이고, 이중 42동 건물의 업종이 파악됐다. 그 42개 건물에는 총 61개의 업종이 분포하고 있어, 한 개 건물당 평균 1.45종이 입주했다. 업종을 분류별로 살펴보면 잡화점 24개, 의료시설 9개, 음식점 7개, 은행 6개, 귀금속점 5
세종대왕 행궁이 국가 숙박시설인 '椒井院'(초정원) 인근에 위치했다는 사실은 궁의 정확한 위치와 관련해 결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이는 세종대왕의 행궁이 좁은 골짜기가 아닌 '넓은 골짜기의 교통로' 주변에 위치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회에 "이 곳은 동학(洞壑)이 널찍하고 행궁 터가 안온하며 군사들의 환위(環衛)와 초소(樵蘇, 나무를 베고 풀을 깎는 것에도 모두 편리하옵니다"라는 문장을 소개한 바 있다. 당시 도승지 이승손(李承孫, 1394∼1463)이 아뢰는 말이었다. 그 뒤에는 "더군다나 초수의 나오는 근원이 멀되 길게 흐르니 이러한 곳은 얻기 쉽지 않습니다"(국사편찬위원회 번역)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 이 문장의 원문은 '況椒水之出 源遠而流長 如此之地 未易得也'로 돼 있다. 해석한 문장 중 '멀되 길게 흐르니'(源遠而流長)는 △행궁이 원탕에서 멀리 떨어져 위치하고 △그런데 그곳까지 '길게 흐른다'는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이 경우 세종대왕 행궁은 원탕 주변이 아닌, 그곳서 먼 곳에 위치한 것이 된다. '源遠而流長'이라는 문장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중 앞 표현 '源遠'은 '根深'과 짝을 이뤄 고문헌에 간간히 등장하는 표현이
[충북일보] 충북 도내에서 저발전 지역이자 인구가 감소하는 동남 4군을 연결하는 새로운 산업벨트 조성이 추진된다. 충북도는 건설이 가시화되고 있는 영동~진천 고속도로 주변에 이 벨트를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2일 도에 따르면 보은과 영동, 옥천, 괴산 등 4개 군에 '동남권 신산업벨트'를 조성할 계획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이들 지역의 개발을 유도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다. 도는 영동~진천(오창)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신산업벨트를 구축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고속도로가 4개 지역을 모두 지나는 만큼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지역별로 산업단지를 1곳씩 새로 조성해 하나의 벨트로 연결하는 것이다. 먼저 보은군은 충북개발공사가 맡은 제4산업단지 조성이 진행 중이다. 사업 타당성 검토와 함께 관계기관과 협의 중이다. 옥천군은 민선 8기 공약 사업의 하나로 미래성장 산업단지를 조성한다. 현재 타당성 조사에 들어갔다. 영동군은 용산면 일원에 영동2산업단지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기본구상 및 타당성조사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괴산군의 경우 산업단지 조성을 구상 중이며 아직 명칭은 정해지지 않았다. 도는 4개 산업단지 조성이 완료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에서 저발전 지역이자 인구가 감소하는 동남 4군을 연결하는 새로운 산업벨트 조성이 추진된다. 충북도는 건설이 가시화되고 있는 영동~진천 고속도로 주변에 이 벨트를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2일 도에 따르면 보은과 영동, 옥천, 괴산 등 4개 군에 '동남권 신산업벨트'를 조성할 계획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이들 지역의 개발을 유도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다. 도는 영동~진천(오창)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신산업벨트를 구축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고속도로가 4개 지역을 모두 지나는 만큼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지역별로 산업단지를 1곳씩 새로 조성해 하나의 벨트로 연결하는 것이다. 먼저 보은군은 충북개발공사가 맡은 제4산업단지 조성이 진행 중이다. 사업 타당성 검토와 함께 관계기관과 협의 중이다. 옥천군은 민선 8기 공약 사업의 하나로 미래성장 산업단지를 조성한다. 현재 타당성 조사에 들어갔다. 영동군은 용산면 일원에 영동2산업단지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기본구상 및 타당성조사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괴산군의 경우 산업단지 조성을 구상 중이며 아직 명칭은 정해지지 않았다. 도는 4개 산업단지 조성이 완료
◇취임 2주년 소회와 주요 성과는 그동안 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지속가능한 공감·동행 교육'을 펼쳐왔다. 학교는 교육의 본질에 충실하고, 학생은 스스로의 삶과 학습을 주도할 수 있도록 탄탄한 토대를 만들고 다졌다. 취임 후 2년은 충북교육의 '새로운 도전과 성장의 시기'였다.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었던, 공약은 도민과의 약속이다. 지난해 전국교육감 공약 실천 계획 평가 최우수에 이어 올해 공약 이행평가도 최고등급을 받았다. 2023년 교육부 17개 시도교육청 평가에서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됐다. 교육발전특구 공모에 도내 5개 지구가 선정돼 3년간 최소 150억 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학생 성장 기반을 단단히 다졌다. 학생들은 몸활동을 통한 기초체력 단련과 독서교육으로 마음 근육과 기초소양을 쌓고, 이를 바탕으로 기초·기본 학력을 기른다. 올해는 기초학력 진단검사 후 모든 학습지원대상 학생 1대1 개별 맞춤형 지원계획을 수립하고 '다채움' 플랫폼을 통한 촘촘한 지원방안도 살피고 있다. 현장에서 답을 찾아 충북형 정책을 수립했다. 교직원 단체의견 수렴과 전문가 협의회를 통해 '작은학교 활성화 종합계획', '지금은 아이성장 골든타임' 정책이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