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가경동에서 이른바 톱날형 세형동검細形銅劍)이 처음으로 발굴됐다. 이에따라 늦은 청동기~초기 철기시대의 세형동검이 살상용으로 사용됐는지, 아니면 위세품(장식품)인지를 둘러싸고 전문가들 사이에 적지 않는 논쟁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국고고환경연구소(원장 이홍종)는 청주 MBC 신사옥과 인접한 충북 청주 가경동 산 51번지 일대에서 청동기시대 집자리 7기와 함께 초기철기시대 석곽묘 1기를 발굴했다고 31일 말했다. 이와 함께 석곽 내부에서 세형동검 1점과 흑색마연토기(黑色磨硏土器·일명 검은간토기) 1점 등도 수습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는 400여점의 세형동검이 발굴된 바 있다. 그러나 이들 세형동검은 부식된 상태로 발굴된 것이 대부분 이어서, 검날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발굴된 가경동 세형동검은 오돌도톨한 검날이 선명하게 드러나 벌써부터 이의 해석을 둘러싸고 전문가들 사이에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고고환경연구소 측은 이에 대해 "오돌도톨한 검날은 사용에 따른 마모 흔적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형태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고 밝혔다. 이 경우 톱날형 세형동검은 살상(殺傷)의 강도를 높힐 목적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현
5. 일본은 왜 25세 선생-10대 학동 수준을 못 벗어나나 메이지유신은 세계적인 성공 사례이다. 서구 문화를 수용해서 정치와 사회체제를 바꾸고 부국강병을 추구한 이 실험은 동아시아 근대화의 기점이 되었다. 한국과 중국 등의 지사들은 메이지유신의 성과를 바라보면서 근대 변혁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어느 나라도 일본의 선구적인 성과를 고마워하지 않는다. 동아시아를 파탄으로 내몬 침략전쟁이 바로 메이지유신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이론적 지도자인 요시다 쇼인이 그런 제국주의 침략전쟁 구도를 처음 만들었다. ■ 아베 신조 전총리, 애국심 교육강화 공약 일본 극우정치인 아베 전총리가 다시 자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 다음 총선에서 자민당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데 아베 총재는 이미 "애국심 교육의 강화"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역사교육에서 침략과 수탈의 실상을 왜곡 은폐하고 더 나아가 합리화하려는 시도가 뻔히 보인다. 앞으로 한중일 역사분쟁이 격화될 것 같다.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와 나가토시가 지역구인 아베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쇼인은 누구인가. 그는 야마구치현 하기 출신으로 도쿠가와
조선전기 '고을 州' 자가 들어가 있지 않은 행정지명으로는 보은 외에 영동, 음성, 단양 등도 있다. 3개 지명은 '州' 자가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 태종의 행정지역 개혁 대상에서 제외됐다. 먼저 행정지명 영동(永同)이 만들어진 과정이 흥미롭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영동군은 본시 길동군(吉同郡)인데 경덕왕이 영동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 이때가 신라 경덕왕 16년(757)이다. 따라서 영동군이라는 행정지명이 생긴 지는 올해로 1255년이 된다. 꽤나 오래 된 편이다. 이와 관련, 어떤 어문학자는 인용문에 등장한 '길동군'과 지금의 '영동군'은 그 뿌리가 같은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영동군 할 때의 '길영' 자를 이두식으로 훈차(뜻만 빌림)하면 '길'이 되기 때문이다. 행정지명 음성(陰城)이 태어난 과정도 앞서 언급한 영동군과 역사적인 분위기가 거의 비슷한 면이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음성현은 원래 고구려의 잉홀현(仍忽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바로 음성이라는 행정지명도 영동군과 같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태어난 지명이다. 이를테면 '지명 동기'
사단법인 딩하돌하 문예원(이사장 박영수)이 31일 오후 문의면 문화재단지 내에서 고 신동문(辛東門·1928-1993) 시인의 시비를 건립한다. 이번에 건립되는 시비에는 그의 역작 중의 하나인 '아! 신화같은 다비데군들'이 새겨진다. 이로써 신 시신의 시비는 단양읍 소금정공원('내 노동으로'), 청주 발산공원('풍선기1') 등 세 곳에 위치하게 됐다. 신 시인은 시 뿐만 아니라 산문 쪽에도 작품성이 뛰어난 수필을 많이 남겼다. 이번 세번째 시비 건립을 계기로 그의 산문 세계도 함께 살펴본다. 이날 건립되는 '아! 신화같은 다비데군들'에는 '내 흔드는 / 깃발은 / 쓰러진 전우의 / 피묻은 옷자락'이라는 시문장이 등장다. 이중 맨 마지막 단락은 읽는 순간 4.19 때의 거리 모습이 마치 옆에서 보고 있듯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감각적이면서 군더더기없는 표현이 돋보이고 있다. 신시인은 천진한 성격에 정이 많았지만 심중을 밖으로 드러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같은 심리 작동은 사랑하는 소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먼빛으로 오고 가는 나룻배에 이별의 온갖 곡절을 다 부여해 놓고 그녀에의 상념을 더듬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쓴 시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이런 따위의 시를 무수
미호종개(천연기념물 제 454호)의 서식 범위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미호종개가 처음 발견됐던 미호천 청주수계(청원 경계)에서는 지난 2008년부터 개체수가 관찰되지 않아, 이곳에서는 사실상 자취를 감춘 것으로 나타났다. 순천향대학교 방인철 교수가 최근 지난해 조사했던 내용을 '멸종 위기어류 미오종개 분포양상 및 서식 개체수 추정' 제목의 연구문으로 내놨다. 방 교수는 지난 1년 동안 과거 미호종개가 관찰됐던 청주 미호천, 진천 백곡천, 진천 문백면, 대전 갑천, 공주 유구천, 청양 지천 등 6개 지점에서 개체수 조사 작업을 진행했다. 개체수 채집은 문화재청의 포획 허가를 받아 투망, 족대, 원거리 망원경 관측 등의 방법으로 실시됐다. 그 결과, 과거 미호종개가 관찰됐던 6개 수계중 진천 백곡천, 청양 지천, 공주 유구천 등 3계 수계에서만 미호종개가 채집됐다. 가장 많이 채집된 곳은 청양군 장평면~청남면 일대의 지천으로 1천216 마리, 나머지는 백곡천 125마리, 유구천 37마리 등이 채집됐다. 청양 지천 일대는 유폭 30~40m, 수심 30~100㎝, 유속 0~40㎝/sec 등 물속 환경을 지니고 있다. 또 하천 바닥은 모래 8
카리스마가 강했던 조선 3대 임금 태종은 행정지명 '州' 자 인플레이션 현상에 대해 과감한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그 결과, 큰 고을이 아니면서 '州' 자가 붙은 제주(堤州), 진주(鎭州), 옥주(沃州), 괴주(槐주) 등은 각각 지금의 제천, 진천, 옥천, 괴산 등으로 개명됐다. 그러나 처음부터 '州' 자를 갖고 있지 않은 행정지명은 태종의 개혁 대상에서 제외됐다. 명산 속리산을 끼고 있는 보은군이 이에 해당한다. 행정지명 '보은'에 대한 시원은 고려시대로 거슬로 올가간다. 고려사 지리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보령군은 원래 신라의 삼년산군인데 경덕왕이 삼년군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는 보령군(保齡郡)으로 고쳤다." 이때의 '보령군'이 바로 지금의 보은군이다. 인용문 중 고려 초기는 태조 23년(904)을 일컫고 있다. 이 '보령군'이 지금의 '보은군'으로 개명된데는 약간 해프닝적인 면이 있다. 익히 알다시피 충남에도 발음이 똑같은 '보령군'(保寧郡)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 때문에 당시 '보령군'이 지금의 '보은군'으로 바뀌게 됐다. '군현의 칭호를 고치었다. 이조에서 소리가 서로 비슷한 각 고을의 칭호를 고치도록 청하니, 이에 청주(靑州)를 북청(北靑)이
도내 기초단체 중 내년에 지명이 탄생한지 10갑, 즉 600주년이 되는 곳은 제천시와 괴산군 외에 진천군과 옥천군 등도 있다. 600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태종실록 13년(1413) 10월 15일자 기사에 이런 내용이 보인다. '무릇 군현의 이름 가운데 주(州)자를 띤 것은 모두 산(山)자, 천(川)자로 고쳤으니, 영주(寧州)를 영산(寧山)으로 고친 것이 그 예다.' 도내 4개 기초단체도 이에 해당됐다. 그 해에 '제주'(堤州)가 지금의 제천, 괴주(槐州)는 괴산, 옥주(沃州)는 옥천, 진주(鎭州)는 진천으로 각각 행정지명이 바뀌었다. 4곳 지명에 '내 川'이나 '메 山' 자가 들어간 것은 해당 지역의 지형과 관련이 있다. 의림지라는 큰 저수지가 있는 제천에는 '내천' 자가 들어갔다. 평야가 비교적 발달한 옥천과 진천에도 '川' 자를 붙였다. 반면 백두대간이 지나가 산이 많은 '괴산'에는 '山' 자를 붙였다. 조선 태종 정권이 600백년 전에 이같은 조치를 취한 까닭은 대읍(大邑)에나 붙일 수 있는 '고을 州' 자가 직전(고려말)에 너무 남용됐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州자 인플레이션' 현상이다. 고려 후기에는 권세가나 승려 심지어 원나라에서 귀국
4. 욱일기와 구일본군 무기를 전시한 관광지 도고온천한중일의 근대사 서술은 같은 내용을 기록하면서 서로 다르다. 특히 일본사 서술은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메이지정권이 치룬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최대목적은 한국의 식민지 확보. 일본은 이 전쟁을 미화하고 사실을 왜곡해서 군국주의 한길로 나아갔다. 그 결과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했고, 아시아 여러 나라는 식민지 전락과 전쟁참화로 고통을 받았다. 구일본군이 휘날리던 욱일승천기의 부활로 앞날이 어둡다.■ '온천과 성과 문학'의 도시 마쓰야마 에히메현 마쓰야마시는 정감이 가는 도시이다. 시코쿠(四國)를 대표하는 인구 52만 명의 도시이지만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도심이든 주거지든 안온한 느낌이 든다. 마쓰야마시는 자랑거리로 도고온천과 마쓰야마성과 함께 문학을 내세운다. 시내 곳곳에 표어로 붙여놓고 강조를 한다. 정감이 가는 이런 주제를 도시의 정체성으로 밝히는 동시에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역사도시인 마쓰야마의 상징은 마쓰야마성이다. 도시 중심에 솟아있는 가쓰산 위의 천수각은 도시 전체에서 잘 보여 이정표가 된다. 연립식 산성은 문화재로서도 중요하다고 한다. 문학
제천시와 괴산군이 내년 지명 탄생 6백년이 되는 것을 기념,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시와 군의 상위 개념은 '도'(道)이다. 우리나리에 도제(道制)가 처음 도입된 것은 고려 성종 때이다. 이때의 '도'는 특정지역 두 곳을 '길'로 연결했을 때 그 안에 포함되는 공간적인 범위를 의미한다. 경상도는 남쪽 경주목과 북쪽 상주목 사이에 포함되는 공간이다. 마찬가지로 충청도는 북쪽 충주목과 남쪽 청주목 사이의 공간을 의미하고 있다. 혹자는 충주목 북쪽에 단양군이 있었고, 청주목 남쪽에 영동현이 있었지 않았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물론 그렇기는 하나 조선시대 단양군과 영동현은 각가 충주목과 청주목 소속이었다. 따라서 충청도라는 도명의 성립에는 무리가 없다. 지금의 이름인 '충청북도'는 1896년에 13도제를 실시하면서 얻어진 행정지명이다. 이때 충청도에서 충남과 충북이 분리됐다. '충청도'라는 지명은 고려 예종 1년(1106)에 '양광충청주도'라고 한 것에서 그 이름이 처음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지속적으로 불려진 것은 아니었다. '충청도'라는 이름이 고정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태조 3년(1394) 태부터 였다. 태조 이성계는 '양광도'에 예속된
조선 태종 이방원은 천도 과정에서 논란이 일자 이른바 '엽전 던지기'로 한양의 주산을 최종 정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이성계의 경복궁 건립 작업에는 지금의 수도권 주민뿐만 아니라 충청도민 5천여명도 부역에 동원된 것으로 나타났다. 안국준 씨가 최근 '한양 풍수와 경복궁의 모든 것' 제목의 책을 태웅출판사 이름으로 출간했다. 지금까지 조선의 한양천도 과정을 다룬 책은 적지 않게 존재해 왔다. 그러나 이번 책은 주역적인 시각 외에 사료 원문을 풍부하게 인용, 종전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8백쪽 분량의 이번 책은 한양으로의 천도와 그 큰 변화, 한양은 어떤 땅인가, 620년전 한양의 도시계획, 도성과 4대문, 조선왕조의 정궁 경북 등 22장으로 구성돼 있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이 한양을 도읍으로 삼고 천도를 한 것은 태조 이성계 때이나 '한양= 조선의 수도'가 완전하게 정착된 것은 태종 이방원 때이다. 이성계는 신도안, 계룡산 일대 등 중부지방 여러 곳을 도읍지로 물색하다 결국 한양 북악산 아래에 터를 잡고 이곳에 정궁인 경복궁을 건립했다. 이 과정에서 이론을 제공하고 건축 작업을 진두지휘한 인물은 정도전과 권중화였다. 그리고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
22일자 1면 '당이산 집단학살' 기사 내용중 '7월 24일 당이산으로 끌고가'는 '9월 24일'이기에 바로 잡습니다.
'스승은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제자인 나를 죽이려 했고, 집단학살이 이뤄진 곳은 명장사 뒷산이 아니라 현 명장사 경내이다.' 지난 1950년에 일어난 청주 당이산(명장사 뒷산·속칭 당산) 우익인사 집단학살 사건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62년만에 80대 한 할머니의 입을 통해 나왔다. 당이산 집단학살 사건은 지난 1950년 청주에 들어온 북한 인민군이 이른바 '청주의 우익 반동분자들'을 색출, 그해 9월 24일 당이산으로 끌고가 집단 총살한 행위를 말한다. 청주 명장사(주지 김용암스님)는 20일 오전 경내에서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는 '당이산하 반공희생 고혼위령 영산재'를 6.25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봉행했다. 특히 이날 행사에는 62년전 총살장에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청주 류난순(柳蘭順·81) 할머니가 등단, △여학생이었던 자신이 끌려가게 된 경위 △그날의 총상현장 모습 등 당시 흐름과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류 할머니는 "나는 그때 청주여중(현 청주여고 전신) 5학년으로 학도호국단장을 맡고 있었다"며 "이때 교사 오모씨가 내친구를 통해 '나를 보자'고 해서 나갔다가 체포돼 청주내무서(현 경찰서) 유치장에 갖히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교
조선의 송이는 중국 황제도 매우 좋아했다. 세종 때 '윤봉'이라는 중국 사신이 조선에 와서 생송이를 받고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실록은 기록했다. "이미 잡은 진응(陳鷹)과 침송이(沈松茸)·연어 알젓 등을 구하여 얻었으니, 천추(千秋)가 가는 편에 보내어 진상해야 되겠다. 연전에 바친 침송이를 황제가 심히 좋아하고 아끼셨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진응은 매, 침송이는 생송이, 천추는 중국으로 향하는 조선 사신을 말한다. 심전고는 순조 때 박사호(朴思浩)라는 신하가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쓴 사행일기로, 그 안에 유서관기(楡西館記)라는 글이 있다. 이 글에서도 조선 송이가 대화 주제로 등장한다. '운객(雲客)이 묻기를, "귀국의 송이(松茸)가 그 이름이 매우 좋은데, 그 맛은 어떠합니까"하기에, "맛이 향기롭고 산뜻하며 연하지요"하고 대답하였다.'- 전회에 전국 팔도 중 충청도에서도 송이버섯을 임금에게 진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를 통해서도 각 임금의 성격이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다. 폭군 연산군에 대한 내용이 다소 재미있다. '승지 김준손이 금표지도를 올리니, 전교하기를, "듣건대 백운산에서 송이버섯이 난다 하니, 모두 금표 안에 들게 하라." 하였다.'-금표(禁
조선후기 문신으로 이명응(李明應·1827∼?)이 있다. 그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사촌동생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충청도경시관으로 임명됐다. 경시관은 지방에서 치루어 지는 향시(鄕試)를 감독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를 말한다. 그는 순조롭게 승진하여 1878년에는 지방장관직인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됐다. 그는 2년반 동안 재임하면서 치적이 있어 한 차례 연임되기도 했다. 그는 이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장계를 올린다. 장계는 지방에 나가 있는 신하가 자기 관하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충청 감사 이명응(李明應)이 장계에, "진상할 이른 홍시(紅枾)와 생송이(生松茸)가 계절이 너무 일러 기한 안에 하여 올릴 수 없습니다. 황공한 마음으로 대죄합니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이유승에게 전교하기를 "대죄하지 말라고 회유(回諭)하라"하였다.'- 조선시대 임금은 매월 초하루에는 팔도에서 올린 산물로 식사를 했고 이를 '삭선'이라고 불렀다. 충청도 음력 8월의 삭선은 바로 '생송이'와 '올홍시'였다. '올홍시'할 때의 '올'은 '이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정조실록에는 호서, 즉 우리고장 충청도에서 임금에게 진상하는 한 해의 음식 규정이 보다 구체
3. 조선주차군사령관 아키야마 요시후루의 마쓰야마 무덤 일본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들 중에는 한국과 관련이 깊은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들 중 한국인과 좋은 인연을 맺은 사람은 많지 않다. 유명한 소설과 드라마인 「언덕 위의 구름」 주인공인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도 그런 인물이다. 시바료타로가 영웅으로 만든 그는 의화단운동을 진압하고 배치했던 일본군 청국주둔군의 사령관을 지냈고, 1916년에는 조선주차군사령관으로 왔다. 무단통치의 가장 악랄한 시기의 군사령관이었던 것이다. ■ 마쓰야마의 도고온천과 「시키기념박물관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에 있는 도고(道後)온천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3대 온천 중 하나라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고대 시가를 모은 『만요슈(萬葉集)』에도 나오는 관광명소이다. 오래된 온천이라 건물도 욕탕 시설도 낡았다. 하지만 도고에서 용출되는 온천물을 쇼토쿠태자(聖德太子)까지 찾았다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 허름한 탕 안에서 일본의 고대사를 음미할 수도 있다. 마쓰야마시에서는 도고온천을 널리 홍보한다. 온천 본관건물은 중요문화재로서 지정되었고, 황실전용 욕실은 입장권을 사면 견학이 가능하다. 옛날식 전차를 도고온천까지 운행하기도 한다.
이색은 목은집에서 '솔 바람에서 중추가 가까움을 느끼더니 선물을 받고 보니 늙어 병든 몸 입맛을 잃지 않았음을 확인한다'라고 적었다. 전문가들은 송이버섯 채취의 적기를 추석 전후의 보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고장의 10월 중순은 끝물 송이도 거의 자취를 감추는 때가 된다. 송이와 관련해서는 이른바 '저온 자극'이라는 표현이 있다. 국내 산림학자들이 정밀 조사를 한 결과, 송이는 땅속 5cm 정도의 지온이 19도 이하로 떨어지는 '저온 충격'이 있은 후 그로부터 평균 16일 후에 땅위로 돋아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관찰됐다. 물론 송이의 생육에는 수분과 토질도 큰 영향을 미친다. 전문가들은 "토양수분은 15-20%, 토질은 마사토가 많은 곳에서 송이버섯이 잘 자란다"고 밝히고 있다. 산삼은 최초 발견자가 소유권을 갖게 된다. 워낙 희귀하기 때문에 선점자의 노력을 인정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송이는 민법상 토지에서 분리되지 않은 토지의 정착물로 규정된다. 아무리 심산유곡에 자생하는 송이버섯이라고 해도 무주물이 아니다. 때문에 신문에는 가끔 일부 문중의 '송이 채취권 입찰 공고'를 볼 수 있다. '송이 채취 기간은 2012년~2014년까지 3년간의 자
노예를 만들어 생활하는 분개미(slavemaker ant)를 아십니까. 국립산림과학원이 최근 162쪽 분량의 '한국 개미분포 도감'을 발간했다. 산립과학원은 이번 개미도감을 제작하기 위해 전국 344곳에 관찰 지점을 설치하고 함정 트랙을 놓는 방법으로 2011년 5~9월 동안 우리나라의 개미들을 채집했다. 충북과 관련해서는 소백산,민주지산 등 해발 1천1백m가 넘는 곳 등을 포함해 도내 30곳에 개미 유인용 함정트랙을 설치했다. 그 결과, 두마디개미아과 94종, 불개미아과 70종, 침개미과 36종, 시베리아과 1종 등 총 201종의 개미가 채집됐다. 통상 우리나라에는 전세계 10% 정도인 1백여종의 개미가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따라서 이번 조사는 종전의 채집 성과를 다소 상회했다. 이와는 별개로, 이번 조사에서 불개미아과에 속하는 '분개미'(사진)가 충북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 소나무림(해발고도 208m)에서 유일하게 발견돼 생태 전문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개미사회에서 일개미에게는 통상 먹이구하기, 어린벌레 기르기, 집짓기, 집청소, 병정 등의 역할이 주어져 있다. 그러나 분개미는 이같은 역할을 모두 마다하고 다른 종을 노예로 만들어 생존하는 악명
군령(軍令)은 전쟁이 일어나면 그 엄정함이 서슬이 퍼럴 정도가 된다. 장수들은 개전 초기에 군기의 엄정함을 보여주기 위해 이른바 '시범 케이스'를 의도적으로 보여주 경우가 있다. 상주전투에 참전한 이일(李鎰·1538 ~ 1601)이 그랬고, 충주 탄금대 전투에 패한 신립에게도 그런 사례가 발견된다. 이일이 상주에 도착하자 그날 저녁 무렵 개녕(開寧) 사람 하나가 와서 적들이 가까이 왔다고 보고했다. 개녕은 지금의 경북 김천시 개녕면 일대를 말한다. 이일은 이 자가 민심(民心)을 현혹시킨다 해서 죽이려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애걸한 것으로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적었다. "그렇게 내 말을 믿지 못하십니까. 그렇다면 나를 잠시 동안 가두어 두고 기다려 보십시오. 내일 아침이면 적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올 것입니다. 그때 보아서 내 말이 거짓이거든 죽여 주십시오." 이날 밤 적들은 장천(長川)까지 와서 주둔했다. 장천은 상주에서 불과 2리의 거리다. 그러나 이일의 군중에는 척후(斥候)가 없었다. 적이 근접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개녕 사람은 애국심으로 보고했으나 되레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전쟁이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유성룡은 후속 내용을 이렇게 적었다. '
송이는 토지에서 분리되지 않은 토지의 정착물이다. 따라서 아무리 심산유곡에 자생하는 송이버섯이라고 해도 무주물(無主物·주인없음)로 볼 수 없다. '선점=소유권'의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유림에서 송이버섯을 무단 채취할 경우 '산림자원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의해 7년 이하의 징역이나 2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국유림이나 지방자치단체가 소유하고 있는 공유림은 법적 환경이 사유림과는 사믓 다르다. 송이버섯이 나는 국유림이나 공유림에는 민법상 이른바 '준총유적 토지수익권'이 적용된다. 이는 '어느 지역의 주민이 집합체의 관계로 각자가 타인의 토지에 초목, 야생물 및 토사의 채취, 방목(放牧)의 수익을 하는 권리(민법 제302조)로, 달리 '특수 지역권'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난해 단양국유림관리소가 관내 국유림 973㏊에 대한 송이채취권을 국유림 인근 산골 마을 주민에게 양여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제천시도 매년 시유림에 대한 송이 채취권을 '산불 예방과 산림보호활동' 조건을 달아 인근 마을에 제공해 오고 있다. 송이 채취권을 타지인에게 먼저 제공할 경우 인근 산골마을 주민과 사이에 이에 대한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
이일(李鎰·1538∼1601)의 진영은 힘도 못쓰고 크게 무너졌다. 그러자 그는 전회에 밝힌대로 우리고장 충주로 도피했다. 선조실록은 이 부분을 '이일은 단기(單騎)로 달아나 죽음을 면하였다'라고 짧게 기술했으나 징비록에는 매우 상세히 표현돼 있다. '이일은 말을 버리고 의복을 벗어 버린 채 머리털을 풀고 알몸뚱이로 달아났다. 문경에 도착한 그는 종이와 붓을 찾았다. 우선 자기가 패한 내력을 임금께 급히 아뢰고, 물러가서 조령을 지키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신립이 마침 충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충주로 달려갔다.' 충주 탄금대 전투 장면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상주가 무너진 것은 1592년 음력 4월 24일이고 이후 왜군은 3일만에 조령, 즉 문경새재를 돌파했다. 탄금대 전투는 하루 뒤인 4월 28일 벌어졌다. 징비록은 신립이 배수진을 친 곳이 탄금대 산이 아니라 그 앞쪽의 진흙벌판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신입은 탄금대 앞의 두 개천 사이에 진을 쳤다. 이곳은 좌우에 논이 있어 벼가 무성하게 자랐고 또 잡초도 우거져 있어 말과 사람이 달리기에는 몹시 불편한 곳이었다.' 이어 징비록은 '적들은 단월역으로부터 쳐들어왔다. 길을 나누어 진군해 오는데
2. 日 침략전쟁 미화한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 일제 침략은 군사와 정치 침략만이 아니었다. 종교와 학문도 침략의 도구가 되었다. 음악과 미술 등 예술도 그런 도구의 일부였다. 지금도 「언덕 위의 구름」의 주제가는 역사의 진실을 오도하는 무기로 기능하고 있다. 그 아름다운 노래는 전쟁의 참상과 비인도적인 식민지 지배 사실에 눈을 멀게 만든다. ■ 아사다 마오를 응원하는 음악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부문에서 아사다 마오는 뛰어난 선수이다. 어린 나이에 주니어대회에서 보여준 아름다운 연기가 생생한데 국제대회에서도 거침없는 연기로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얼음판 위를 지쳐나가는 아사다 마오의 자태는 매력적이다. 더구나 트리플 악셀 점프를 성공하고 유연하게 회전하는 모습은 최고의 곡예가 갖는 미를 전해준다. 아사다 마오가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회수를 보면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일본 챔피언대회와 각종 국제대회의 우승 기록만 30회나 된다.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는 징표이다. 아사다 마오는 피겨 스케이팅 세계에서 안타까움을 상징하는 선수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했던 벤쿠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지 못했다. 그 이후 여러 대회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더 애처로운 생각이 든다.
서애 유성룡(柳成龍·1542∼1607)은 종전이 되자 고향 안동으로 낙향, 임진왜란 동안 보고 들은 사실을 책으로 기록했다. 징비록(懲毖錄)이다. 징비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을 가장 사실적으로 기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때문에 전적류임에도 불구하고 국보 제 132호로 지정돼 있다. 책제목 '징비'는 중국고전 시경 소비편에서 따온 말로, 징(懲)은 '지나간 일을 경계한다', 비(毖)는 '뒷날 근심이 있을까 삼간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징비록은 훗날 필사본 형태로 일본에도 전해져 열도 서사문학의 주요 소재가 되기도 했다. 유성룡이 임진왜란을 객관적이면서 폭넓게 기록할 수 있었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병조판서(오늘날 국방장관)였다. 이후 선조가 평양에 이를 때는 영의정겸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됐다. 조선시대 도체찰사는 전시에 임명되는 총사령관으로, 군정을 물론 민정도 함께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그런 환경에서 쓰여진 징비록에는 유성룡 자신과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申砬·1546∼1592) 장군의 대화 내용까지 수록돼 있다. 유성룡은 왜군의 조총(鳥銃) 위력을 꽤나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와 그 이후의 진행과 관련해서 충북의 인물과 지명도 자주 거론되고 있다. 세종대왕과 청원 초정약수, 복천암 신미대사의 한글창제 협찬설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고한글 저술과 관련이 있는 최세진, 최석정, 박세무 등은 모두 충북과 인연을 맺고 있는 인물이다. ◇ 세종대왕과 초정약수 조선 전기 초정약수를 찾은 임금은 세종과 세조다. 이중 세종은 행궁을 짓고 눈병 치료를 위해 초정에 100일 넘게 머물렀다. 실록은 재위 26년(1444년) 초수에 행궁을 짓고 같은 해 3월 2일부터 4월 30일까지 58일간, 그리고 같은 7월 15일부터 9월 14일까지 59일 등 총 117일간 머물렀다고 적고 있다. 세종대왕이 초정에까지 와서 한글창제 작업에 몰두했는가를 둘러싸고 다소의 논란이 있지만 실록으로만 보면 사실인 것으로 나타난다. 다음은 당시 부제학 최만리의 상소문이다.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에 거둥하시는 데도(…) 계달하는 공무에 이르서도 또한 의정부에 맡기시어,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치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중국 명나라 원병들은 임진왜란을 종식시키는데 분명히 공헌한 면이 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주둔지 한반도에 적지 않은 폐해를 남기기도 했다. 조선 백성들은 그들의 말발굽 아래 놓이면서 약탈의 대상이 됐다. 오희문(吳希文·1539-1613)은 쇄미록 1593년 음력 5월 8일자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또 들으니 중국군사가 호남으로 내려간 곳은 길가 민가에서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 끝이 없어 마치 적의 변을 당한 것과 같고...' 쇄미록의 또 다른 일기에는 '노비 덕노가 닭을 면포와 바꾸기 위해 서울로 갔다가 중국 군사들이 말을 빼앗아기고 이를 되찾기 위해 항변하다 심하게 얻어맞았다'라는 내용도 등장한다. 선조실록에도 비슷한 내용인 '하물며 이미 철수한 중국 병사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자 수천 리의 지방에 어느 곳이고 그 해독을 받지 않는 곳이 없어서 백성들이 가슴을 치며…'라는 표현이 보인다.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수 중에 팽신고(彭信古)라는 인물이 있다. 특히 그가 이끄는 병사들의 약탈행위가 심했다. 당시 사관이 그에 대해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악평했다. '원래 적을 토벌할 뜻은 없이 공리(功利)만을 위해서 온 자이
전쟁은 참혹한 것으로, 인간심리의 여러 단면들이 노출된다. 임진왜란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른바 가왜(假倭), 부왜(附倭), 항왜(降倭) 현상을 낳았다. 가왜는 내국인 즉 조선인이 왜군을 가장해 노략질했던 사건을 말한다. 우리고장 영동이 외가인 오희문(吳希文·1539-1613)은 '쇄미록'의 1593년 음력 7월 14일자 일기를 이렇게 썼다. '구례를 분탕질한 적은 왜적이 아니고 곧 우리나라 사람이 왜적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왜인의 목소리를 냄으로 목책을 지키던 군사가 모두 흩어지고 거기 사는 백성들도 이 까닭에 놀라 움직여서 역시 모두 도망해 달아나니….' 비슷한 현상으로 숨진 우리나라 사람을 왜군의 시체로 변장시켜 정부 포상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기록정신이 유별났던 오희문은 쇄미록의 1592년 음력 9월 13일자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진 밖의 망대에서 숙직하는 왜병을 쏘아 죽이고 머리를 베어다 바쳤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다시 들으니 사실은 왜병이 아니고 무주 백성이 목화를 따고 있다가 적에게 죽어서 버려두고 거두어 가지 않았던 시체를 그 머리털을 깎아버리고 머리를 베어가지고 왔는데 의병은 그런 줄을 알지 못하고 진짜 왜병이라고 하여 순찰사에게 바쳤다고
[충북일보] 충북 도내에서 저발전 지역이자 인구가 감소하는 동남 4군을 연결하는 새로운 산업벨트 조성이 추진된다. 충북도는 건설이 가시화되고 있는 영동~진천 고속도로 주변에 이 벨트를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2일 도에 따르면 보은과 영동, 옥천, 괴산 등 4개 군에 '동남권 신산업벨트'를 조성할 계획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이들 지역의 개발을 유도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다. 도는 영동~진천(오창)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신산업벨트를 구축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고속도로가 4개 지역을 모두 지나는 만큼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지역별로 산업단지를 1곳씩 새로 조성해 하나의 벨트로 연결하는 것이다. 먼저 보은군은 충북개발공사가 맡은 제4산업단지 조성이 진행 중이다. 사업 타당성 검토와 함께 관계기관과 협의 중이다. 옥천군은 민선 8기 공약 사업의 하나로 미래성장 산업단지를 조성한다. 현재 타당성 조사에 들어갔다. 영동군은 용산면 일원에 영동2산업단지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기본구상 및 타당성조사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괴산군의 경우 산업단지 조성을 구상 중이며 아직 명칭은 정해지지 않았다. 도는 4개 산업단지 조성이 완료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에서 저발전 지역이자 인구가 감소하는 동남 4군을 연결하는 새로운 산업벨트 조성이 추진된다. 충북도는 건설이 가시화되고 있는 영동~진천 고속도로 주변에 이 벨트를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2일 도에 따르면 보은과 영동, 옥천, 괴산 등 4개 군에 '동남권 신산업벨트'를 조성할 계획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이들 지역의 개발을 유도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다. 도는 영동~진천(오창)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신산업벨트를 구축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고속도로가 4개 지역을 모두 지나는 만큼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지역별로 산업단지를 1곳씩 새로 조성해 하나의 벨트로 연결하는 것이다. 먼저 보은군은 충북개발공사가 맡은 제4산업단지 조성이 진행 중이다. 사업 타당성 검토와 함께 관계기관과 협의 중이다. 옥천군은 민선 8기 공약 사업의 하나로 미래성장 산업단지를 조성한다. 현재 타당성 조사에 들어갔다. 영동군은 용산면 일원에 영동2산업단지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기본구상 및 타당성조사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괴산군의 경우 산업단지 조성을 구상 중이며 아직 명칭은 정해지지 않았다. 도는 4개 산업단지 조성이 완료
◇취임 2주년 소회와 주요 성과는 그동안 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지속가능한 공감·동행 교육'을 펼쳐왔다. 학교는 교육의 본질에 충실하고, 학생은 스스로의 삶과 학습을 주도할 수 있도록 탄탄한 토대를 만들고 다졌다. 취임 후 2년은 충북교육의 '새로운 도전과 성장의 시기'였다.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었던, 공약은 도민과의 약속이다. 지난해 전국교육감 공약 실천 계획 평가 최우수에 이어 올해 공약 이행평가도 최고등급을 받았다. 2023년 교육부 17개 시도교육청 평가에서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됐다. 교육발전특구 공모에 도내 5개 지구가 선정돼 3년간 최소 150억 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학생 성장 기반을 단단히 다졌다. 학생들은 몸활동을 통한 기초체력 단련과 독서교육으로 마음 근육과 기초소양을 쌓고, 이를 바탕으로 기초·기본 학력을 기른다. 올해는 기초학력 진단검사 후 모든 학습지원대상 학생 1대1 개별 맞춤형 지원계획을 수립하고 '다채움' 플랫폼을 통한 촘촘한 지원방안도 살피고 있다. 현장에서 답을 찾아 충북형 정책을 수립했다. 교직원 단체의견 수렴과 전문가 협의회를 통해 '작은학교 활성화 종합계획', '지금은 아이성장 골든타임' 정책이 시작